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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오대의 詞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4.09|조회수371 목록 댓글 0
 

제 16장 만당오대의 사


1. 사의 기원과 성장


    시가의 발전은 당대 말년이 되어 고체, 근체, 율시, 절구, 길고 짧음을 막론하고 최고 성숙의 단계에 이르렀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창작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창작의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다. 문학 발전의 일반적인 흐름상 문단이 이런 상황에 이르면 그 자체의 원인과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그 지위를 새로 발생하는 장르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4언에서 고체시로 그리고 근체시를 보면서 이러한 문체의 흥쇠와 전환의 인과성은 더욱 명확해진다.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까지는 중국 시 역사상 전환의 시대이다. 이러한 전환은 바로 詩에서 詞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광의적 의미로 보면 사도 시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그 발생적 성질상 시와 비교해 보면 사와 음악의 발생이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기의 단계에서 사는 독립적인 시의 생명을 갖지 못하였고 다만 음악의 부속품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와 악부시는 비슷하다. 그러나 고대악부는 반주 없는 노래였다. 후에 음을 아는 사람들이 곡을 만들고 사(詞)는 그 노래에 가사를 붙이는 것이 주된 역할이 되는 즉 음악이 먼저 생기고 후에 가사가 붙는 형식이었다. 구양형이 사를 “곡자사” 라 부르고, 왕작이 “금곡자” 라 불렀으며 송상이 말하길 “송과 원, 사와 곡은 하나이다. 문장으로써 쓰면 사가 되고 소리로 만들면 곡이 된다.(《악부여론》)” 이부분에서 사의 진정한 특질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옛날 사람들은 사를 시의 존존물, 악부 혹은 장단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식의《동파악부》, 하주의《동산우성악부》, 진관의 《준해거칠장단구》, 신기질의《가헌장단구》, 요행의《성재시여》, 오즉례의《북호시여》등을 보면 그러하다. 이러한 이름, 형식, 성질, 문체의 변질 모두 그들 자체의 이유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나쁘다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새로 생겨난 사의 체재는 당초의 작자가 시와 대등한 신 장르를 만든 것이 아니라 단지 시의 부속물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에 오대, 송조의 작가들의 대량 창작을 거쳐서 극적이고 뛰어난 아름다움을 일궈내었다. 사는 형식과 풍격을 막론하고 시에 대하여 모두 명확하고 제한적인 독립적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의 장르는 唐詩의 지위를 대체하였고 중국음문사상 오대, 양송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사 라는 장르는 어떻게 탄생되게 되었는가? 언제 싹이 트고 성장하기 시작했을까? 나는 이제부터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답하려 한다.

    사의 기원에 관한이론은 옛날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정리하면 사는 악부에서 나왔다는 설과 당대의 근체시가 변화된 것이라는 두 가지 설이 가장 유력하다. 왕응린의《곤학기문》에서 “고대 악부는 시와 나란히 서있다. 사를 만든 사람은 고대 악부를 만든 사람이다.” 근대 사람인 왕국유씨도 말하길: “시여(사)의 흥함은 제량소악부에 앞선다.(《희곡고원》)” 이런 종류의 이론은 그 기원으로 볼 때 사와 악부의 공통성을 인식하고 있다. 다음으로 사가 唐 대의 근체시로부터 나왔다는 설은 사의 탄생과정은 율시와 절구의 변화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방성배가 말하길: “당대 사람들의 노래는 5언7언 절구, 잡문에서 산문 후에 관현에 이르렀다. 양관삼첩(송별의 노래; 왕유의 시 ‘서출양관무고인’의 구절이 후세에 양관삼첩 곡으로 악부에 보내져 송별의 곡이 됨)에 이르고 후에 음악이 되어 이것이 자연히 이치가 되었다. 후에 그 소리에 맞추어 가사를 짓고 자구가 실현되어 장단구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근체시가 궁극에 이르러 악부로 변화되었다고 하였다.(《향연거사?》)” 송상봉도 말하길: “시여(사)를 이르자면, 사는 이백의《청평조》같은 당대의 절구에서 생겨나 악부에 이른 것이다. 기정화벽제창은 여러 7언 절구가 후에 10국시에 이르러 장단조가 되었다. 한자두자에서 일곱자가 되어,,,,,,인용문.....(《악부여론》)” 시여(시의 잔존물)라는 이름은 듣기에는 좋지 않고 위의 두 가지 설은 비록 다르지만 그 내용은 일치한다. 사에는 두 가지 특질이 있는데 첫째로 사의 본래 성질은 시이며, 둘째는 사의 기능은 음악을 전파시키는데 있다. 이백의《청평조》와 기정화벽제창은 시이며 한대와 위나라의 악부 또한 시가 아닌 적이 있었는가. 명호는 사는 악부시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근체시에서 나온 것일 도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주송》과 《국풍》이 동류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와 시가 이러한 연원이 있지만 형식상으로는 결국 다른 것이다. 사의 형식의 구성은 문체의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만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이기 때문에 더욱 음악의 적합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적합성은 결코 악부와 음악의 대등한 상태가 아니라 음악이 주가 되고 가사는 부속품이 되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는 외견상 마치 정제된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 시보다도 더 정제되고 엄격한 것이 사이다.


(인용문)


    여기서 말한 화성과 범성의 성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지만 노래를 부를 때에는 모두 보족시(음악에 시를 맞추기 위해 몇 자를 덧붙여서 만든 시)의 문구의 결함이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악부시중 노래로 불리워지는 것은 고체시, 근체시를 막론하고 모두 정제된 5언시, 7언시인데 반하여 악보는 그 장단곡절의 변화가 무쌍하기 때문에 율격이 일정한 악부시를 노래로 부를 때는 자연히 소리의 미묘함을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이로 인해 할 수 없이 몇 자가 첨가되게 되어 범성과 화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인용문)


    이 한수의 노래에서 이어 붙여진 “상류전” 은 의미는 없고 노래를 부를 때 첨가하지 않으면 않되는 것이다. 여기서 “상류전”은 화성이다. 고대 악부에서 이러한 화성은 매우 많다. 《동도가》에서 “동도”, 《월절절양류가》중에서 “절양류”는 의미상 쓸모없는 것이지만 음악상으로는 중요한 화성이며 노래로 불리워 질때 필요하다. 양무제의《강남농》7수에 이르면 매수마다 화성이 있고 문구 또한 참신하고 아름다운 시의(뜻)가 있는데 이것은 뜻이 전혀 없었던 화성에서 뜻이 있는 화사로 변한 것이다. (인용문) 인용된 부분을 보면 화사를 쓸 때 한편으로는 소리에 맞추어, 또 한편으로는 사에 맞추어 쓰는데 이는 “동도”, “상류전”과 같은 과거의 전례와 다른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시체는 정제되어 있고 악보는 번잡하여 오로지 화성만 붙여서 노래를 부르고 이로 인해 시구를 겉만 바꾸고 속은 그대로이며 박자를 맞추기 위해 문자를 덧붙여서 문구가 정제되지 못하였고 산만하게 되었다. 이는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는 식으로 불합리한 방법을 억지로 적용한 경우였으며 자연히 악부시는 음악에 속박되게 되었다.


(인용문)


    시의 예술적면에서 보면 악부시는 시보다 못하지만 그 기능면에서는 악부시와 같은 형태가 음악으로 불리워질때 필요하였다. 주이존이 말하길: “고시는《서문행》을 재단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시의 예술성만을 중시하고 악부시의 음악적 기능의 연고를 등한시  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제시한《상류전》,《서문행》의 작품은 사는 아니지만 사와 거의 비슷하다. 사의 구성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성립되었다. 위에서 제시한 음악에 맞추려고 단어를 첨가하거나 길이를 맞춘 예 중《몽계필담》,《주자어류》는 시를 음악에 넣게 위해 화성과 범성이 필요하다는 이론을 잘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런 시속에는 화성이 있어서 사라고는 할 수 없고 심괄이 말한바와 같이  “당대 사람들이 사를 곡에 넣을 때 화성을 이용하지 않을 때”가 비로소 사의 체제가 정식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가 말하길“하나의 실자를 더할수록 장단구가 된다.” 사가 정식으로 성립된 상태는 완전한 음악적 기능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문구 조직상 완전히 정제된 작품이어야 한다. 외견상 글자를 덧붙인 흔적이 발견되면 안된다.


(인용문)


    만약 위에 인용한 당 현종의 사는 당시의 악보와 장단을 따른 의심할 바 없는 성공적인 사이다. 비록 작품 안의 “편”, “연”, “장창”, “개” 이런 글자들이 범성과 화성으로 덧붙여진 글자로 볼 수도 있지만 글 중간에 삽입되기 때문에 티가 나지 않는다. 또한 이런 글자를 쓸 때 오히려 사의 예술성이 증가한다. 결코 옛날 악부의 화성, 화사같이 예술성을 해치지 않는다. 《호시광》의 원작은 5언8구의 시인데 음악에 맞출 때 악공이 몇 개의 덧붙이는 글자를 넣어서 사가 되었다. 《호시광》은 음악적 기능도 있지만 동시에 사의 형태와 격조가 있고 정제된 예술성이 있으며 구절 끝마다 음을 맞추는 단어를 붙인《상류전》,《서문행》과 같이 원래의 형태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와 관계없이 장단체의 《호시광》이 5언8구의 원작시와 비교할 때 음조와 묘사의 예술성을 막론하고 매우 훌륭하다고 인정한다.《호시광》의 예는 우리로 하여금 시와 사의 변화과정과 시와 사의 경계를 명확히 이해하게 해준다. 당대의 근체시는 노래로 부를 수 있었지만 단지 시를 짓기 위해 시를 지은 것이고 결코 음악에 맞추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악조의 변화는 무한하고 장단고저와 강함과 부드러움의 각각의 분별이 있다 그러나 시인의 작품은 5,6,7언을 불문하고 모두 한가지로 정제되고 한 종류로 자수가 맞추어져서 고대문헌 안에  실린 많은 기녀와 악관이 부른 근체시의 고사는 거의 원작과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의 《청평조》, 왕유의《위성곡》, 왕지환의《양주사》는 비록 같은 7언절구 이지만 노래로 부를 때의 형태는 모두 다르다. 당시 악공들은 비록 화성과 범성을 첨가하였지만 이는 결국 불편한 작업이었고 악보와 가사가 분리된 시대의 보완방법이었다. 나중에 음악에 다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악보와 가사가 점점 접근해 연결되면서 음률시인은 순수하게 시를 짓기 위한 시를 짓지 않고 악보에 맞충 곡을 짓게 되었고 이런 작업을 후대사람들은 전사라고 불렀다. 전사작업은 시인에게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교방과 음악아문에서 일찍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조정의 악장 같은 것을 모방하거나 기녀의 천박한 노래들을 모방하여 운문 상의 신 장르를 구성할 수 없었다. 시인들이 이러한 전사작업에 참여하고 나서야 성과를 이룰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음악적 기능도 있고 한편으로는 시의 예술성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사는 하나의 새로운 장르가 되어 점점 문단에서 시와 대등한 지위를 얻게 된다. 《전당서》에서 말하길: “..인용문...” 이 구절은 사의 구성을 가장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곡에 따라 사를 맞추는 작업은 악부교방과 민간에서 일찍이 있었던 작업이지만 유명한 시인들이 이런 작업에 참여해서야 사의 장르가 비로소 문학적 가치를 갖게 되고 중국운문사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사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는 위에서 진술했고 우리는 대략 명료해졌다. 이제 사의 맹아와 정식으로 성립된 시대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 한나라, 위나라 의 악부시는 비록 사와 성질이 비슷하지만 어조와 글자 면에서 완전히 정격과 정수의 형식이 없으며 박자에 맞추어 사를 채운 것이 아니라 단지 시를 음악에 맞춘 것이다.  

  그러나 제량시대의 소악부(小樂府)에 이르러서는 글의 구성방식과 글자의 수가 확실히 일정한 형식을 가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粱武帝의 <<江南弄>>은


(인용문)


  <<古今樂彔>>에 의하면 이 곡은 무제에 의해 <<西曲>>으로 바꾸어 만들어졌는데 총 7편이 있다 : 1은<<江南弄>>, 2<<龙笛>>, 3<<采莲>>, 4<<凤笙>>, 5<<采菱>>, 6<<游女>>, 7<<朝云>>. 동시에 심약에게도 4편이 있었는데, 음조의 격과 문자와 어구는 완전 동일하고 운을 바꾸는 것도 동일하게 있다. <<江南弄>>라는 하나의 음조가 이미 정격이 되어 모든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두 이 곡조에 의해 사자(辞者)가 되었는데 이전의 악부시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만당오대 사의 형태가 고정되기 전의 최초의 형식이다. 량의 계초씨가 詞의 기원중 말하기를 : “이것을 자세히 살피면 모든 것이 <<江南弄>>에 속한다는 것과 모든 것이 7자3구, 3자4구로 조직되어 이룬 문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자3구는 구마다 압운을 하고, 3자4구는 격구로 압운을 한다. 제4구의 “舞春心”은 바로 제3구의 끝 세자를 반복한 것이다. 예를 들어 "忆秦娥"조 제2구의 끝 세자“秦樓月”또한 이와 비슷한 엄격한 자구이며 악보에 의해 만들어진 음조를 만들고 실제로 당말의 사의 격률에 따라 지은 새로운 사와 다르지 않다. 양무제는 또 <<上云樂>> 일곱 곡이 있는데, 이7곡의 자수와 구법도 동일하다. 그 중 두수 첫머리의 4구의 세 자구는 생략하는데 일부러 탈락시킨 것인지 빠뜨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외에도 심약의 “六忆”와 같은 시는 수양제가 모두 이 악보에 근거하여 <<夜饮朝眼曲>>을 이루고, 승려 법운의 <<三洲歌>>, 서면의 <<送客歌>> 모두 일정한 자구가 있다. 이런 종류의 곡조와 작법은 후에 전사의 비조가 된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故朱弁 <<曲洧旧闻>>에서 말하기를 : “사는 당나라 사람에게서 발생하지만 이미 육대에 시작되었다.” 이것으로부터 볼 때, 전사의 싹은 분명 제량시기에 생기고 양무제는 이런 전사 작업의 시도 중 가장 중요한 대표이다. 그러나 우리는 <<江南弄>>7곡의 매수 뒷부분에 두 구가 덧붙여지고, 여전히 악부시의 일부 남은 형태가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한다. 그러므로 아직 엄격한 사라고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이러한 작품들을 시인사의 과도교량으로 보는 것은 매우 적합하다. 동시에 육조는 사의 맹아시대라 말하는 것도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扬慎은 말하기를 : “전사는 반드시 육조로 거슬러 올라가야하고, 또한 강 궁원의 의미를 찾아야한다. 우리는 그의 이 의견에 찬동한다.

  수당 초기는 사가 아직 성장하는 시대이다. 양제의 <<야음조면곡>>는 완전히 사의 형식을 갖추었다. 그와 왕주가 같이 지은 <<纪辽东>>는 바로 그 환운법과 장단구의 조직을 보이는데 이 역시 사의 형체이다.  


(인용문)

  이 기사에서 <<회포악>>은 이미 정격의 곡조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뒤 두수의 운을 사용하는 것과 자구의 장단조직 또한 완전히 동일하다. 이것은 곡에 근거하여 전사를 한 증거이다. 위에서 말한 군신이 사를 짓고 어깨춤을 추는 것에서, 그 당시 전사하는 사람들은 심전기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모두들 할 수 있었고, 문인들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연극배우들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곡에 근거하여 구를 짓는” 이런 일은 유우석, 백거이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다. 수당 초에 이런 현상은 이미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바로 심전기와 같은 사람이 그 당시 시단의 대문필가였고, 그의 시를 이야기하면 분명 전아하고 화려, 부귀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회포악사>>는 왜 이렇게 저속할까? 이것은 바로 그가 단지 음악의 요소와 가창의 효용에 주의하고, 절대로 이런 체제와 사 본래의 예술을 중시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새로운 시체로 간주하여 창작했기 떄문이다. 또한 그는 오직 그것을 악곡의 표현으로 간주하여 궁정연회의 여흥으로 보고, 시 감상으로 작용할 것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극배우들과 지은 것은 동일하게 천속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바로 전사 초기의 필연적인 현상이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의 사라 부를 수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유우석, 백거이의 작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음악적 부분과 시적 부분) 시체는 비로소 정식으로 성립되고 사는 비로소 운문학사상의 지위가 있게 된다.

  중국의 음악은 서진오호가 중화를 혼란하게 하던 시기부터 수당이 통일할 때까지 하나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전통음악은 점점 쇠퇴하고 외국음악은 군사, 통상, 선교의 각종관계로 인해 대량으로 유입된다. 이런 외국음악은 전통음악과 성조가 다를 뿐 아니라 사용한 악기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그런 악조가 번잡하고 곡절이 많으며 변화가 복잡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귀가 즐겁고 새롭다고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오랑캐음악은 조정에서 흥행했으며 점점 민간으로 전파되었다.


(인용문)


  이런 기사에서 삼백년 동안 전통음악이 쇠락하고 외국음악이 유입하는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동시에, 군주와 신하 및 민중에 관계없이 모두 그런 새로운 음악을 좋아했다. 그래서 오랑캐음악은 궁정귀족 사이에서 흥성하고 또 민중에게 보편화되어 안지퇴상서에서 말한 “우아한 음악이 매우 보편화되고, 오랑캐 음악을 같이 사용함”과 “오랑캐 음악이 마을골목에 크게 흥성하는”의 상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소위 전통음악의 초한의 오래된 음악은 이미 오랑캐음악에 의해 완전히 격파되고 점점 쇠망의 추세로 들어선다. 몇 개의 오래된 음악이 남아 거문고 연주자의 절기가 된다. 음악이 이렇게 큼 변화를 일으키고, 음악생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의 사는 이런 환경 속에서 발육, 성장하기 시작한다. <<구당서 음악지>>에서 말하기를 : “개원시대 이래로 노래하는 사람은 후이와 이항의 곡을 섞어 사용했다.” 후이는 위에서 말한 외국음악이고 이항이 가리키는 것은 민간의 노래이다. 음악은 이런 혼잡한 동화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더 복잡하게 변하였다. 예를 들어, 어가체의 <<어가자>>, 선부곡의 <<총내곡>>, 만간정가체의 <<죽지사>>, <<양류지사>>의 모든 조는 모두 이항곡 중 최고로 통용되던 것이다. 유우석이 말하기를 : “... 생략...” 이 몇구의 말은 이항악곡이 비록 귀를 즐겁게 하고, 들을 만하지만 그 사구는 조잡하고 나쁘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문인들은 이 시대에 새로운 사를 개작하거나 모방하는 동기가 생긴다. 오랑캐 음악과 민곡이 섞이어 세상에 유행하던 시기에 노래하는 사람과 사를 짓는 사람은 모두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럼으로 엄밀한 의미의 사 발전을 촉성하는 계기가 된다. 이백의 시대에 비록 사가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자신의 작품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비록 <<존전집>>에 그의 사 12수를 간직하고 있고, <<전당시>>에는 14수가 있지만 <<청평조>>의 세 개의 절구 이외에는 그 자신이 온전히 모은 <<악부시집>>안에는 모두 이런 작품들이 없다. 현종 때의 사람 최령흠의 <<교방기>>부록으로 덧붙인 곡명표 중 비록 [보살만]곡조가 있지만 당말 소악의 <<두양자편>>에서 말하기를 :“... 생략...” [보살만]곡이 대총초년에 창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개원천보시대에 태어난 이백이 [보살만]에 사를 짓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교방기>>중의 곡조에 대하여 또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호적씨의 추단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그가 말하기를 :“<<교방기>>중의 곡명표를 난 원서의 원본이라 생각할 수 없고, 전부 개원교방의 곡목이라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 표가 일찍이 후대 사람이 수시로 신조를 첨가한 것이라 의심한다. 이런 종류의 표는 본래 사람들에게 참고를 제공할 뿐이고, 많음으로써 귀하게 된다. 첨가하는 마음은 완전하기를 추구하는 것에 있고, 의도적으로 위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사의기원>>)” 기타 [청평악], [연리지]의 사에 관하여서, <<고금사화>>, <<어은종화>>, <<필종>>의 책에서 선인은 이미 허위를 분별하는 설명을 했다. 그럼 당연히 더욱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보살만], [억주어] 두 사는 비록 이백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나 그 예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 바로 이능, 소무의 고시와 같이 비록 후대 사람에 의해 위작되었지만 그 문학 예술적 본신은 여전히 가치에 있다. 아래에 초록한다. ...생략....

  호응린는 이 두개가 온정균에 의해 지어졌고 가명은 태백이라 의심한다. 그러나 온정균사의 풍격은 화염하고 완곡하며 함축적이기에 위에 있는 사의 고고하고 처염한 것과 같은 종류가 아니다. 세미한[억주어]사구는 매우 우국포성춘, 고궁화서의 느낌인데, 탕이 망한 이후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대체로 오대시기 당말 이민한 사람의 문장에서 나왔다. 형삭조직 및 예술의 성취상을 막론하고 이러한 성숙된 작품은 절대로 전사의 초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절대로 온정균 이전에서 나오지 못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백의 작품은 비록 신뢰할만하지 못하지만 이백이 생존했던 8세기에 전사는 이미 점점 성장하고 성숙하고 있었다. 문인들, 민간거리의 유행곡에 근거하여 장단구를 지은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예를 들어 장지화, 장송령, 고황, 대숙륜, 이응물과 같은 시인들은 모두 이백과 선후동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품 속에서 분명 곡에 근거하여 지은 장단구의 사가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장지화(張志和)(서역 730~810)의 다섯 수 〔어부사(漁父詞)〕이다. (《존전집(尊前集)》을 보라.)  지금 그 중 작품 한 수를 예로 들어보자.


(인용문)


   장지화(張志和)는 자(字)가 자동(子同)으로, 금화사람이고, 비록 작은 관리직을 지냈지만, 후에는 그러한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세상을 유랑하며, 스스로를 안개 낀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는 무리, 해와 산, 물, 어부와 나무꾼의 벗이라고 불렀다.  그의 자유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이러한 인생관은 문학상에도 반영되어, 바로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 등으로 대표되는 자연시파와 부합되어서, 〔어부사(漁父詞)〕에서는 그의 소쇄하고 속세를 떠한 인격과 명리를 추구하지 않는 담담함과 고상한 작풍이 충분히 표현되었다.  동시에 우리는〔어부사(漁父詞)〕이 곡조가 당시 어부들 사이에 유행한 민간의 노래였을 것이고, 그가 멜로디와 박자에 맞추어 사를 지음으로써 후세에 전해져 가장 일반적인 사조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서오기(西吳紀)》에서는:  (인용문) 이라 말했다.  이 두개의 문장을 통해 장지화(張志和) 시대의 전사(塡詞) 분위기를 알 수 있고, 문인 계급 안에서 이미 그것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형 장송령(張松齡) 또한 〔어부(漁父)〕한 수를 지었는데, 사의 뜻과 풍격은 그의 동생과 아주 비슷하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작품은, 대숙륜(戴叔倫)(서역 732~789)과 위응물(韋應物)(서역 736~830?)의 작품이다.  그들의 사는 믿을 만 하며, 작품으로는 대숙륜의 〔조소령(調笑令)〕한 수와 위응물의 동조(同調) 두 수가 있다.  대숙륜의 사는:


(인용문)


   세상의 방탕한 생활을 쓴 희용(喜用) 〔어부(漁父)〕, 변새지방의 이별을 노래한 구용(俱用)〔조소(調笑)〕에서 문인들이 전사(塡詞) 초기에 사용한 사조가 많이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어부(漁父)〕사조는 민간에서 나온 것이고, 〔조소(調笑)〕는 성율이 빠르고 의기양양한 것과, 그 표현해낸 내용으로 볼 때, 외세음악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성취 면에서 이야기 할 때, 이러한 작품은 모두 아주 성숙한 사로, 시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의 원결(元結)의 《관내곡(款乃曲)》 다섯 수와 같은 것은 비록 뱃노래를 모방한 작품이지만 형식상으로 7언절구를 이루고, 고황(顧況)의 《어부인(漁父引)》은 육언삼구가 되며, 위응물(韋應物)의 《삼대(三臺)》는 육언절구를 이루어, 이러한 것들은 엄격한 사라고 볼 수 없다.   왕건(王建)은 궁사(宮詞)를 지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만당 궁체 문학의 선두자이다.  그의 많은 궁사들 가운데 대부분은 색정을 표현하고, 미인의 자태와 심리를 묘사한다.  그의 현존하는〔조소령(調笑令)〕네 수는, 작풍이 그의 궁체시와 비슷하고 모두 총애를 잃은 미인들의 슬픔과 원망을 쓴 것이다.  그 중 “단선” 한 수가 가장 유명하며, 지금 아래에 그것을 기록하자면:


(인용문)


   사조는 비록 같지만, 표현한 내용과 풍격은 대숙륜(戴叔倫)과  위응물(韋應物)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왕건(王建)의 이 궁체식의 아름다운 시체는 바로 만당 유미문학의 색채로, 이상은(李商隱)과 두목지(杜牧之), 온정균(溫庭筠) 등의 시사의 작품과 완전히 일치하는 동시에 《화간사(花間詞)》파의 서막이다.


  유우석(劉禹錫)(772~842), 백거이(白居易)(772~846)는 사체 형성기의 가장 마지막 대표이다. 사체는 이 시기에 이르러, 많은 선구자들의 노력과 시행을 통해, 점차 문학생명을 지닌 일종의 새로운 시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사를 짓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고, 음악(사패)도 날로 증가했으며, 작품은 나날이 우수하고 아름다워졌다. 백거이는 《억강남(憶江南)》3수, 《화비화(花非花)》1수, 《여몽령(如夢令)》2수, 《장상사(長相思)》2수의 작품이, 유우석은 《억강남(憶江南)》 2수, 《흘나곡(纥那曲)》 2수, 《소상신(潇湘神)》 2수, 《포구악(抛毬樂)》 2수의 작품이 있다 (《전당시(全唐詩)》). 문체발전진화의 일반적 규칙에 따르자면, 사(詞)라는 문학이 유우석과 백거이의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곡조와 작품을 생산해낸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둘의 사가 《억강남(憶江南)》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본집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의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한 태도는 비록 신중한 것이긴 하나, 나는 도리어 그 많은 작품 모두가 후대사람들이 위탁해 지은 것이라는 것이 더 믿기 어렵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유우석이나 백거이보다 단지 20여년 정도 늦게 죽은 온정균의 사가 질적인 면에서 그렇게 좋은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인용문)


  이런 종류의 작품은 한편으로 음악적 효능을 지니면서, 한편으론 시의 미적 생명을 나타낸다. 사는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시와 독립해 운문 신체제의 한 종류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유우석은 작품 《억강남(憶江南)》의 주에서 말한다. “평화롭고 태평한 봄을 서술한 이 사는, 《억강남(憶江南)》의 곡박에 의존해서 구를 지은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곡에 의존해 전사한다는 최초의 진술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전사의 동기는 결코 유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엄숙한 창작의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사가 비로소 성행하고 발전하는 길로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적(胡适)이 말하길: “전사에는 세 가지 동기가 있다. : 첫째, 악곡에 곡조는 있는데 가사가 없어서, 문인들이 가사를 (격률에 맞춰) 메워가며 지은 것으로, 곡조를 쉽게 유행하게 하였다. 둘째, 악곡에 본래 이미 가사가 있는데, 문예를 잘 모르는 광대나 가무희가 지은 것으로, 그 사는 우아하지 않으며 사람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문인들이 그 이외의 새로운 사를 지었고, 아름다운 곡조로 아름다운 사를 얻었으며 굉장히 오랫동안 유행하였다. 셋째, 사가 널리 유행한 후에 장단구의 체재는 점점 문인들이 공인하는 하나의 새로운 시체가 되었고, 새로운 사를 지을 때 장단구의 체재를 즐겨 사용했다. 형식상 사는, 사실상 사조를 빌린 하나의 새로운 체제의 시이다. 이러한 사는 반드시 노래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작가가 노래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사의 기원)” 그의 이러한 추단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다. 당에서 오대에 이르기까지의 전사는 대부분 첫째와 둘째 동기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양송의 사에 이르러는 바로 위에 말한 것과 같아진다. : “꼭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노래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고, 단지 사조를 빌려 짓는 새로운 체제의 시였다.”


2. 만당(晩唐)의 대표사인 온정균(溫庭筠)


  만당에 이르러, 전사의 풍조는 더욱 보편적이 되었다. 군주시인부터 이름 없는 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작품을 썼으며, 예술상 유우석과 백거이 시기와 비교하여 진보했고, 사조도 많아졌다. 사의 체제는 활기찬 발전의 기회를 맞게 된다. 단성식(段成式), 정부(郑符), 장희복(张希复)은〔한중호(闲中好)〕를 지었는데, 이들의 작품은 비교적 평범했다. 그러나 황보송(皇甫松), 사공도(司空圖), 한악(韓握), 당 소종(昭宗) 이엽(李晔)의 작품에 이르러 사는 눈에 띄는 진보를 나타내게 된다.

 황보송(皇甫松)은 황보식의 아들로 생과 죽음이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화간집(花間集)》에 기재된 모든 사인들은 모두 그 관직명으로 불렸는데, 오직 황보송만이 선배로 불렸다. 이는 틀림없이 그가 관직을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주 신안 사람인데, 그 밖의 다른 모든 행적은 조사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은《화간집(花間集)》에 기재된 사 12수와《전당시(全唐詩)》의 18수 이 외에도 오칠언으로 된 〔채연자(采连子)〕, 〔포구악(抛毬樂)〕, 〔낭도사(浪淘沙)〕, 〔양유지(楊柳枝)〕, 장단구로 쓰여진〔천선자(天仙子)〕,〔적득신(摘得新)〕,〔몽강남(夢江南)〕이 전해진다. 그의 이러한 작품 안에서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는〔적득신(摘得新)〕과 〔몽강남(夢江南)〕이 있다.


(인용문)


  가장 청아하고 수려한 자구를 이용하여, 붉은 정과 푸른 뜻의 장면을 서술했으며, 슬픔과 원망의 감개를 깃들였다. 이는 비록 화려하고 부박했으나, 음탕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던, 확실히 성공한 작품이었다.《몽강남(夢江南)》의 의경은 특히 높아서 우수한 단어를 구사하여 경을 배치하는 것이 온정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했다.

  사공도(司空圖)의 자는 표성(表聖)으로(837~ 908) 유명한《시품(詩品)》의 작가이다. 그의 인품은 고매하여 주전충(朱全忠)이 왕위에 올라 그를 관직으로 부르자,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그의《주천자(酒泉子)》라는 사 한 수는 말년 퇴직한 후의 심경을 적은 것이다.


(인용문)


 한악(韓握)의 자는 치광(致光)으로 그는 만당시대의 색정시의 명수였다. 그래서 그의 사 〔생사자(生查子)〕와 〔완계사(浣溪詞)〕는 모두 이러한 종류의 염정 작품이다.


(인용문)


  당 소종(昭宗) 이엽(李晔)은(867~904) 당 말년에 주전충(朱全忠)의 손에 죽임을 당한  가련한 황제였다. 그러나 그는 재주가 많고 예능방면에 뛰어났으며, 문학을 사랑했다.《전당시(全唐詩)》중 말하길 “군주를 비난하는 책은 훌륭한 문학서이다. 헌데 침략과 혼란이후, 당조는 나날이 쇠락해지고 있다. 생전에 쓴 시는 운뿐이고, 이 모든 것이 (임금이 난 피해) 파천한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문예를 애호하는 마음을 볼 수 있으며, 그의 창작환경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현존하는 사는 4수이다.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2수는, 단어의 구사가 조금 화려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경박하지 않은 것을 숭상한다. 예를 들어 “인용문” 등의 구는 의경의 아름다움을 숭상한다. 〔보살만(菩薩蠻)〕2수는, 국사에 대한 감상을 적었는데, 처량하며 슬프고 애처롭다. 만회할 도리 없는 국운에 절망하는 군주의 심경을 잘 반영했다. 여기 한 수를 보자.


(인용문)

온정균(溫庭筠)

  위의 작품들로 보아, 사가 만당에 이르러 분명히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대 사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건 역시 풍류낭만의 재능을 발산하는 온정균(溫庭筠)이다. 온정균의 자는 비경(飛卿)이고, 산서 태원(太原)사람이다(820~870?). 문단에서 이은산(李义山), 단성식(段成式)과 함께 유명했다. 모두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법의 묘사로 한때를 풍미했다. 앞선 장에서 이미 만당의 유미문학에 관해 말한 바 있는데, 만당 유미문학의 작가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생활을 즐겼으며, 유락과 가기에 빠져 돌아가는 걸 잊는 재인들이었다. 두목(杜牧)과 이은산도 그러했고, 특히 온정균이 그랬다. 《구당서(舊唐書). 문원전(文苑傳)》에서 그를 말하길, “선비가 간 종적이 복잡하며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는다. 음 시위를 쫓아 사를 지어 화려하고 부박하다.”라고 했고, 영호도가 또 그에 대해 말하길, “재주는 있으나 품행이 바르지 않다.” 라 하였는데, 이 모든 말들은 믿을 만하다. 왜냐하면 그는 낭만적인 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문장의 필법이 좋았으며, 날마다 연극배우, 가기들이 내왕하는 것은 그가 사를 생산하는데 좋은 환경이 되어 주었다. 동시에 그런 환경에서 창조되는 작품은 여인의 자태와 사랑하는 마음을 묘사한 것이었으므로 기타 인생사회의 사상과 의식의 표현을 기대한다면, 자연히 실망하게 된다. 이러한 사의 작품은 최초단계에서 원래 상류계급의 향락품이었다. 《화간집. 서(序)》에서 예를 들면 “비단 두른 연회에 귀공자가, 수놓인 휘장안에 가기들이 있다. 아름다운 비단에서 뽑아낸 글들을 적은 잎사귀 서신을 건네고, 미인의 옥과 같은 손가락을 들어 박달나무 탁자를 친다. 깨끗하고 색다른 사가 없지 않아 요염한 자태의 묘사를 돕는다.” 사의 창작 동기에서 그 기능까지, 여기 말한 것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귀한 집 자제들은 향락을 위한 도구로, 가기들은 노래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 방탕한 이들과 재주꾼들은 뛰어난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를 지었고, 이 모든 것들이 이러한 종류의 화려하고 색정적인 유미문학의 성립을 조성했다.

  온정균은 용모가 추해서 어떤 사람들은 온종규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특출한 재능과 다정다감하고 낭만적인 천성은 그로 하여금 이러한 사 방면에서 극히 높은 성과를 얻어내게 한다. 만당시대에 이하(李賀),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 단성식(段成式)등의 궁체시와 변문이 그의 염사에 더해지면서 유미문학의 성행이 조성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영향은 오대뿐만 아니라 송초까지 이르러, 반세기의 문단에서 풍기를 계승받게 된다.

  온정균의 작품은 <握兰〉,《金荃》2부 있었지만 대부분이 분산 유실 되었는데 현재 60몇편은 <화간집>에서 보존되어 있다.그래서 보니까 그는 아주 열심히 사의 격률에 따라 사를 지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본존된 시집도 60몇 편이 되는데 분산 유실된 것도 틀림없이 많겠으니 작품의 풍부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옛날 사람들이 온정균의 詞를 보고 항상 여자나 향초에 관한 내용을 하며서 은유로 설명하며 정말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온정균은 원래 재능이 뛰어난 불량소년이라서 오히려 그런 여자나 향초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지으며 진실성을 분명하게 느껴진다. 손광헌이 <北梦琐言〉에서 온정균의 詞<金荃集>는 있는데 전부 여인향초로 소재로 인하여 아주 유연한 느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향기스러우면서 유연한 면은 바로 온정균이 자기의 생활의 있는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서 꼭 그의 어떤 詞는 국가에 위하여 상심하거나 어떤 사는 흥망의 감정이 나타난다고 하는 게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질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60몇 편 작뭄은 주로 <菩萨蛮〉《更漏子》《南歌子》《清平乐》,《诉忠情》그리고 이하 19조 등 있다.당나라 말 시인중에 調를 가장 많이 쓰인 시인은 온정균일 수 밖에 없었다.그의 작품은 <菩萨蛮〉《更漏子》《梦江南》등 詞로 대표하고 그의 유미문학의 필세와 여인의 태도와 심리를 파악하고 묘사하는 재능이 충분히 나타난다.

  상기 詞의 색깔은 비록 지나치게 농염하지만 이런 지나치게 농염한 색과 詞의 내용이 아주 어울리다.그는 詞중 나오는 대부분 이별의 감정이나 서로 사모하는 감정을  바로 기녀창녀의 언어로 직접 말하게 했다.그는 詞를 지은 독창적인 방법은 수많은 색깔이 서로 달라도 조화로울 수 있는 경물을 함께 모아서 이 많은 색깔 다른 경물은 서로 어울리게 결성하며 어떤 의경가 구성되고 어떤 화면이 형성되기 때문에 독자가 혼자 詞를 읽고 그중에 나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이런 방법은 물론 성공적인 면이 있지만 그는 詞의 색깔은 너무 지나치게 그리고 사람을 묘사할 때도 너무 화려하게 했으며 부귀한 느낌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비속한 감각을 느꼈다.그 사는 사람의 용모, 용품과 경치를 묘사할 때마다 빠짐없이 “금” “옥”“그림 ”“비취” “원앙”“봉황”등 낱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대의 유미문학계에 이런 낱말이 원래 많이 나타났는데 예를 들어 李贺,李商隐,杜牧등 유미한 시인의 궁체 시중에서도 많이 사용했지만 온정균의 사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정균의 사를 둘 셋 편만 읽어보면 화려하며서 즐겁지만은 계속 읽어보면 어떤 온몸에 진주를 걸고 지나치게 화장한 창녀와 함께 앉아있는 느낌을 나온다. 이런 점이 분명히 그의 숨을 수 없는 약점이다. 왕국위가 온정균의 사를 읽은 후에 :"画屏金鹧鹘飞卿语也,其词品似之〉”라고 했다.

 평가만 이렇게 했지만 온정균의 사중 나온 많은 예쁜 문장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菩萨蛮〉에 나오는“花落子规啼,绿叶残梦迷”,“人远泪阑干,燕飞春又残” ,<更漏子〉의“一叶叶,一声声,空阶滴到明" 등 문장의 뜻은 대단히 깊고 감정의 표현 얼마나 자세하고 낱말은 아주 예쁘고 묘사도 상당히 깊다..이런 높은 수준이 된 문장은 그 후에 많은 유명한 詞家의 작품에도 찾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온정균의 <맹강남>을 보자


  묘사한 내용은 똑같지만 표현방법은 옛날의 지나친 색갈로 그리는 대신 미묘한 심리를 묘사하며 완곡하고 함축적인 스타일로 감정이 더 깊이 나타나고 색깔도 많이 수박해졌다. .周济은 온정균의 詞를 읽은 후에 그의 사가 화려하게 화장한 미녀이라는 평가는 물론 정당하지만 그의 사는 색깔이 지나치게 묘사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더 예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晩唐의 詞壇도 그렇고 중국 詞역사의 흐름에서도 온정균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그의 중요성은 주로 아래 몇 점이 있다.

1.온정균 전에 詞를 쓴 시인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를 지은 것을 위주로 하고 詞를 지은 것을 시도만 했기 때문에 결국은 작품이 많지 않다. 온정균은 詩도 인해 유명했지만 전문적으로 詞를 쓴 작가로서 詞의 성과가 詩보다 훨씬 뛰어나다.詞도 온정균에 인해 정식적인 문학체제가 형성되고 韻文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詩의 경계를 떠나서 독립적인 생명이 태어났다.

2.온정균 전에 나온 詞의 형식과 스타일은 詩과 비슷했는데 온정균의 시대 와서 修辭와 意境에서 詩와 완전히 다른 스타일 나타나게 되었다.

3.온정균은 시가 사로 변한 과도기에 시와 사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약할을 했다.그의 작품을 인하여 당나라 시의 역사를 끝냈으며 ,五代 宋나라 詞의 역사를 열게 되었다.옛날 사람들이 온정균을 "花间鼻祖”(王士桢《花草蒙拾》)이라고 호칭했지만 글 체재의 역사적 변천에서 이런 평가는 완전히 칭찬하는 뜻이 아닐 수도 있다.



3.  민간의 詞

  필자가 앞에 얘기한 것은 시인들이 정식적으로 詞를 쓰기 전 운문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서 그 들이 사를 쓰게 된 제일 큰 동기는 바로 음악이나 노래를 부른 것이다. 따라서 그 시대에 나온 詞의 修辭와 문구상에 피할 수 없는 비속한 것과 조잡하고 열등한 면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刘禹锡가 얘기한 바와 같이 민가의 <竹枝词〉천박하고 품위가 없다. 또 沈义父《乐府指迷》중에 “秦楼楚馆所歌之词,多是教坊乐工及闹井做赚人所作。只缘音律不差,故多唱之。求其下语用字,全部可读。甚至咏月却说雨,咏春却说凉。如『花心动』一词,人目之为"一年景。또 어떤 詞에 똑같이 나왔다.예를 들어『曲游春 』에서 나온 :"赊薄难藏泪" ,"哭得浑身无气力","满袖啼红,如此甚多,乃大病也" 그가 얘기한 것은 송나라의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흔히 알고 있는 당나라의 유명했던 기루나 교방(당대이후에 궁중에서 음악, 무용 등을 관장하던 곳)에서 나온 작품은 역시도 이러하다. 詞 한 편 중에 수사와 용어 등이 뒤집하고 중복되기도 하고 조잡하고 품위가 없지만 이 게 바로 민간문학의 본색이다.문자 상에 이런 단점이 있기 때문에 시인들이 알게 일어나 부족한 것을 보완한 동시에 자기가 詞를 쓰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따라서 문학의 역사를 보면 이런 어지럽고 품위가 없는 민간 작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敦煌문고가 발견된 것은 중국고대문화의 연구 중에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여긴다, 변문에 관한 내용은 상편에서 이미 간략하게 서술했으므로 여기서 敦煌석굴에서 발견된 민간 詞에 대하여 얘기 하고자 한다.이 작품 중에 우리 잘 알고 있는 <云謠集雜曲>30 편, 뿐만 아니라 罗振玉<敦煌零拾>7 편,劉复<敦煌裰琐>그리고 일본인 교천취한(桥川醉轩) 썼던 4편도 있다. 수량을 따지면 많지 않지만 민간 詞의 연구가치 면을 생각하면 아주 중요한 문헌이라고 부인할 수 없다.바로 이런 귀중한 문헌이 있어서 우리는 당나라의 유명했던 기루나 교방에서 나온 작품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비속한 문구 ,천박한 감정, 혼란한 문체 등을 보면 민간에 나오는 작품이라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이런 민간 작품의 생명은 사회대중과 상당히 가깝지만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불만스럽다. 어느 날 우연히 생각이 나서 찢어진 종이나 <심경> 뒤에서 썼던 글은 후세에 널리 유전한 것이 뿐이고 고급스러운 문인의 윤색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학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시인이 많이 있다.예 <云谣集杂曲子> 이 작품의 글자사용의 예술을 보면 전에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비속한 흔적이 아직도 조금 남아있지만 훨씬 발전한 면도 볼 수 있다.이 작품은 “云谣集”이라는 제목하고 게다가 "三十首" 원주을 봐서 이런 민간 詞는 많은 문인의 편집이나 가공을 거쳐서 나온 작품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그러므로 이 작품의 문자 쪽으로 보면 많이 우아하고 아르다워졌다. 원작 2권은 영국 런던 박물관과 프랑스 파리 국가도서관에서 보존하고 있는데 완전하지 않고 후에 주조 아무개가 중복한 편을 빼버리고 다시 정리해서 딱 원래대로 30편이고 현재 <疆村遗书>에 게재해 있다.



모습은 여전히  민간가요에 속하지만 글자사용은 아주 간결하고 세련되며 상기에 나온 글에서 나타난 저속한 느낌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자연스럽게 문인의 손을 거쳐 나온 글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그리고 詞 중에 장조. [글자 수가 비교적 많은 사. 91자 이상을 장조라 함)를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倾悲乐)글자 수가 111개 되고 (内家娇) 글자 수가 104자 되고 (拜新月)86자 되고 ,(凤归云)84자,반면에 온정균의 작품 중에 이런 장조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보니까 상기에 얘기한 비속한 작품은 당나라 중기에 지은 것이고 <云谣歌>중에 나온 여러 글은 온정균 후에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이런 詞가 北宋 慢詞의 전주곡이라고 여기는 것도 아주 합리적이다. 따라서 小令가 아주 유행한 당나라 말, 五代같은 시기에 이미 수많은 사람은 慢詞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4. 5대사의 발전과 화간시인


  역사상 5대라 일컬어지는 시대는 비록 국호는 5번이나 바뀌었지만, 시기상으로는 단지 반세기 (709~760) 만을 차지할 뿐이다. 이 시기의 정국의 동요와 복잡다망함은 삼국이나 남북조시기와 비슷했다. 5대는 비록 정통으로 일컬어지지만, 당시 먼곳의 변방지대에 있던 변방의 강호들이 중원의 용사들이 황제가 되는것을 보고 자연시 참지 못하고 질투를 하여, 각지에서 모두 국호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주전충, 이존욱, 석경당, 유지원, 곽위의 5명이 주도한 5대 이외에도, 전촉(왕건), 후촉(맹지상), 북한(유숭), 남한(유은), 형남 (고계흥), 초(마은), 오(양행밀), 남장(이변), 오월(전류), 민(왕심지)의 10개 나라가 있다. 5대 중에 국운이 대단히 긴 것이 후당으로 11년이었고, 가장 짧은것은 겨우 4년이었던 후한이다. 10개 나라 모두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겨우 부지할수 있었는데, 일 인해 그 수명을 60~70세 까지 연장시킨 자도 있었다. 이런 네가 망하면 내가 세우는 식의 정치 국면은, 서로 죽이고 죽는 무대와 같았다. 그런 혼란한 국면, 즉, 그런 강도가 남발하는 국면하에, 문화, 학술이 쇠진하고 사상예술이 몰락 하는 것은 자연히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향락의 도구로서 지어진 사가, 여자 가기와 기녀의 방탕스러운 환경의 사에 적응하여 오히려 발전의 기회를 얻은것 뿐 아니라, 대량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험삼아 당대의 군주가 방탕하고 사치하고 유락에 빠진 방탕한 군주가 아니었고, 또 당대의 사인도 어느누고든 기생을 데리고 놀거나 방탕하고 행실이 나쁜 불량한 사람이 아님을 보았다. 마치 후당, 장종이 비록 일개 무인이었지만 정교한 음률, 좋은 노래를 지었고, 한때는 광대와 동료가 되었으나 결과는 광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몸과 악기 조차도 함께 태워진 것과 같다. 그러나 그의 사는 매우 좋다. <생략> 풍류가 우아하고 함축적이고, 갈수록 정이 깊어졌고, 비록 재인이었지만, 그러나 천하의 정무를 보살필만한 재상은 아니었다. <인용생략> 이 6구의 사에서 5대10국 토호들의 방탕에 빠진 모습을 생생하게 한폭의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쪽으로 가든 상관없이 화류계를 출입할 뿐이고, 저쪽으로 가든 관계없이 손에 금잔을 들고 술을 마실 뿐이었다. 화류계를 출입할때, 술잔을 들고 술을 마실때, 자연히 맑은 노랫소리와 춤이 빠져서는 안되었다. 이렇게 쇠퇴하여 나라는 자연히 망하였고, 문화, 학술은 자연히 쇠진하고 가무와 바짝 관련되어 있던 사도 동시에 자연히 기회를 타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의 발달은 마침 이런 방탕한 생활을 기초위에 건립되었고, 마침 그런 귀족의 향락적 예술의 도구를 제공하였다.


(인용문)


  이런 기사에서 당시의 군주와 관리들으 방탕한 생활과, 작가들이 방탕한 생활의 배경을 충분히 폭로해내고 있다. 기녀와 궁녀에 의해 불리워진 사는 바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마침 그들이 여인이 필요했던 것과 같이, 또 한걸음 나아가서, 이런 새로운 시 체제를 얻었고,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 공구가 되었고 그래서 궁중을 모시던 모무석은 자연히 근천은(유함연) 과, 요천순일(감주편) 같은 류의 대작을 지어낼 수 있었다.

  사는 이런 환경하에 발전했고, 그것의 풍격은 자연히 온정균의 염려함을 계승하였으며, 여성의 정욕을 표현하는데 집중하여 색정문학의 극성을 형성하였다. 이런 상황과 양진시대의 궁체시는 서로 통하는데, 육감적 폭로의 농염성에 있어서는 궁체시의 시기를 능가했다. 5대 사단에서 이런 형태를 대표할수 있는것은 <화간집>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전사(사를 쓰는) 기운이 5대에 이르러 매우 보편화되었고, 또한 중원에서 보급화되어 서촉, 강남일대에 이르렀음을 알고있다. 동시에 5대사단의 대표구역은 중원이 아니라 서촉, 남당이 되었다.

중원에서는 전란이 여러번 발생하여 다수가 피난을 떠났다. 이로 사천, 강남은 일시적인 안일의 국면을 형성하였고, 하늘이 주신 시기와 화려함이 더하여 물질은 풍요롭고 시가와 음악은 흥성했다고 일컬어지며, 군주들은 또한 모두 문예를 좋아하여 이로인해 시인, 사인을 모두 이에 모아서 당대 2가지의 문화적 중심을 조성하였다. 후촉의 조숭조가 엮은 화간집은 곧 서촉사의 좋은 대표이다. <화간>은 18작가의 작품을 모두 보존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온정균, 황보숭등 위에 서술한 사람 이외에도 위장, 벽소온, 우교, 우희제, 모문석, 구양형, 고형, 위승반, 록건의, 염선, 윤악, 손광헌, 모희진, 이현, 장필(전당시는 장필을 남당인이라 하고, 호적은 화간집중 장필이 마땅히 촉나라 사람이라 주장하였는데, 이 말이 지극히 합리적이다) 등의 사람들이 촉에서 나거나 촉에서 벼슬하였으나, 사천과는 관계가 없어 다만 화응 한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의 풍격은 <화간>과 알맞고, 그래서 우리가 연구할때 분리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화간집>의 작가와 작품은 비록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한두가지만 제외하면 그들의 작품은 모두 한가지 공통적인 격조와 작법을 갖고 있는데, 대체로 아름다운 구절과 농후한 색을 이용하여, 여인의 미와 장식을 묘사하는데 전력을 다하였고, 사상의 정서 및 육감정 성욕의 강열함을 암시했다. 이런 접에서 한편으로는 당대 궁정과 상류사회의 허망한 생활을 반영하고, 한펴으로는 또, 온정균의 사를 계승하였다. 그런 천편일률적 작품이 주로 말한것이 실증을 느끼게 하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몇수를 골라 아래에 기록하려 한다.


(인용문)


  이런 섬세하고 정교하며 아름다운 구절에서 무엇을 표현하는가? 이리저리 말해보아도 여인 한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여인들은 그들의 외모와 의복이 어떻게 뛰어난지, 감정이 어떻게 사로잡혀 있는지 쓰는것을 막론하고, 모두 하나의 공통적인 병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육체의 기아와 마음의 만족에의 강렬한 요구였다. 이로인해 모든 환경은, 모두 이러한 방면에서 암시를 강조하였고, 차갑고 긴 밤, 화원의 화초, 하늘을 나는 쌍제비와 쌍나비, 물에서 노니는 화목한 원앙, 자수가 놓여진 베개와 이불은 모두 육욕을 흠모함과 여인의 색정광의 농영함일 뿐이다.

  다시 나아가, 심지어 남녀밀회의 모습, 목소리와 동작도 모두 나타내었는데, 구양형의 <완계사>와 같은 작품은 진실로 중국의 음란한 사의 대표라 할 수 있다. 또 장필의 <완계사>, 고형의 <하엽배>와 같은 작품은 대담하게 미행하는 불량한 소년과, 밀통하는 여인의 갖가지 추태를 묘사하였다. 이런 작품속에서 부녀사회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접촉도 없었다. 한권의 <화간집>안에 모두 이런 색정의 기운이 쓰여져 잇는데, 녹건의의 <임각설>의 환난의 슬픔과 이순의 <어가자>에서 자연을 칭송하는 것은 정말로 매우 드물고 진귀한 것이다. 이런 그들 두명의 작품중, 요염한 사는 아직도 그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함축적으로 썼다. 예로 이순의 <완계사> 한수를 부면 세밀하고 청아하게 썼으나 경박하고 음란하게 전락하지 않았고 확실히 <화간집> 사 중 좋은 작품이다.


(인용문)


  앞의 수는 비록 여전히 요염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함축적으로 쓰였고, 뒷 수는 경계가 매우 고원하고 사의 격도 매우 장중하고, 감정도 슬프고 애달파서, 완전히 <화간>의 사풍의 둘레를 벗어났으며, 이 후주 만년의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하다. 록건의, 이순, 두 작가는 서촉의 사단에서 작품은 비록 많지 않으나, 우리는 그들을 마땅히 중시해야한다.

 위장 <화간집>에서, 작품의 내용은 아직 감정을 말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작풍상에 있어서 오히려 온정균의 농염하고 부귀한 색채를 버리고, 소담하고 고상한 필치로써 당대 사단의 중진이 되었으며, 후대의 사풍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진부음>의 수재로 불리는 위장이다. 위장의 자는 ‘단기‘이고, 섬서 두릉의 사람이다(서기 306?~910). 당 건녕 원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어릴 때부터 시를 쓸 수 있었다. 28~9세 때에 장안에 와서 과거를 보고, 공교롭게도 황소의 난을 만났다. 그는 당시에 보고 들은 사회의 난리 상황을, 1600여자의 장유한 <진부음>으로 지어냈다. 이 시는 당시에 매우 유명했지만, <완화집>에는 실려 있지 않아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최근 돈황의 문고를 발견하였고, 오대인의 두 종류의 사본을 얻었는데, 이로 인해서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만당의 유미주의 문학적 조류 속에서 이것은 정말로 보기 힘든, 그리고 실제 사회를 쓴 문학의 걸작이다.

  편폭은 길지만 <공작동남비>와 필적할 만하다. 그는 당시 전쟁 중의 인민의 생활, 부녀자들의 희롱당하고 간음 당함, 난민의 유랑생활, 대화재, 큰 도적, 번화함이 모두 사라짐, 부귀한 자가 가난한 자로 변함, 그리고 뻔뻔한 얼굴로 복수하는(?), 줏대 없이 이쪽저쪽 붙는 신 관리들을 마치 그림처럼 생동적으로 썼다. 도둑의 소굴에서 삼년 만에 도망 나온 진나라의 한 부녀자의 말을 빌려서, 그 참혹한 현상을 한 막 씩 보여줬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사실 영상 같고, 현재의 전쟁 지역 정세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문자의 기교 상에서 두보, 백거이, 장•적의 작품과 비교하면, 조금 약한 것 같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의의에 있어서는 두보사회시파와 같은 유형이다. 그리고 그의 묘사는 약간 사소하지만, 이로 인해서 오히려 그의 작품에 진실성이 더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완화집>을 읽어보면, 대부분이 만당의 유미주의 작풍에 부합한 작품들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폭로해서 사회문제 작품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정말 없다. 이 원인은 그의 성격이다. 원래 그는 “낙양재인”인 낭만자이고, 게다가 그는 후에 촉에 들어가 물질이 풍부한 환경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유미 문학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 성격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해 방면에서 그는 두보, 백거이, 장•적 같은 선배들의 깊이와 확고함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병란의 환경 속에서는, 여러 가지 참혹한 상황을 보고 들어서 <진부음>을 쓴 것이다. 그리고 후에 강남, 서촉에 이르러서는, 꽃의 붉은 소매 폭으로 빠져들었고, 이전에 <진부음>을 쓴 것에 대해 매우 후회했다. 그래서 그의 작풍은 완벽하게 낭만 정조로 변하게 되었다.

  장안의 혼란 후,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강남으로 피신했다. 10년에 가까운 긴 시기 중에 그는 큰 강 남북을 두루 돌아다녔다. 강남 일대의 번화하고 안정됨은 이 재인이 <진부음>의 난리와 고통을 잊도록 했다. 그리고 풍류 낭만적 생활에 빠져들게 했다. 그 <보살만>은 그가 당시 주색에 탐닉한 생활 상태를 반영한다. 그는 그때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진사에 급제했는데 그때 이미 40세 정도였다. 진사에 합격한 후, 교서랑으로 수년 간 임직하다가 수에 촉에 들어가 왕건에게 의지했다. 주전충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립하려함을 틈타서, 그는 왕건에게 즉위하도록 권했고, 자신은 스스로 재상이 되었다. 전촉의 개국 법령제도 일체는 모두 그가 정한 것이다. 성도에서 죽었으며, 60세가 넘었었다.

  위장은 애정사로 유명하지만, 그가 묘사한 배경은, 가희와 기녀, 육감과 성욕에 대해 주로 쓴 자들과는 달랐다. 그의 생활 과정에서, 실제로 애정 갈등을 겪었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감정을 다른 사람들의 표현과 비교하면, 그의 작품이 더 고귀하다. 또, 수사와 표현의 기교 상에서 온정균파의 농염함, 장필, 우희제식의 경박함에서 탈피했다. 맑고 담담한 자구를 이용하여 백묘(윤곽만 그림, 스케치)의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깊은 감정이 굽이 감돌며 완곡하게 나타나서, 그로 하여금 <화간집>중, 탁월하게 온정균파와 대립되는 한파를 이루게 하였다. <고금사화>에서 말하길, “왕건에게 애인을 빼앗긴 이후, 그는 추억하고 근심하고 원망했고, 사를 짓는데 슬프고 애달픈 음색이 많았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고, 그의 이 실연이 그의 작품에 영향이 크다는 것을 느낀다. 그의 몇 수의 대표작은, 완전히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혹은 지난 즐거움을 회상하고, 혹은 현재의 쓸쓸함에 슬퍼하고, 혹은 미래에 부활할 것을 기대했다. 여러 가지 심리들은 모두 실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서, 그의 정감 방면에 있어 표현이 각별히 진지하다. 그리고 수사와 자구도 금은보화의 그런 부귀한 어휘의 장식은 없고, 백묘의 방식만 나타나는데, 오히려 더욱 실제의 감정이 드러난다.


(작품들)


  고관대작의 집은 경비가 삼엄해서 들어갈 수 없고, 애인은 항아로 변했으며, 소식은 듣기 어렵고, 낭군은 길의 객이 되었다. 위의 이러한 사들에서, 혹은 지난 일을 기억하고, 혹은 현재를 슬퍼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복잡하고 곡절한 실연의 깊은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가 사용한 것은 모두 통속적이며 가장 질박한 언어이다. 조금도 농염한 색채가 없고, 조금의 보석 같은 미사여구도 없어서, 백묘의 명수가 되었으며 사의 풍격이 고원했다. 왕국유는 “수놓은 병풍의 금 자고새”라는 이 한 구절이 온정균의 사품을 상징하며, “현 위의 노란 꾀꼬리”라는 이 한 구절이 위장을 상징한다고 말했는데, 진실로 명쾌한 말이다. 하나는 농염하고 부귀하며, 하나는 청초하고 소담하다. 그 둘의 작풍 상에서 이 경계는 매우 명확하다.




5. 남당 사인


  서촉, 남당은 당 시대의 문예 중심이었다. 남당에서 전해 내려오는 작품과 작가는 비록 많지 않지만, 그의 가치는 절대로 서촉보다 낮다고 할 수 없다. 남당에는 조숭조와 같은 수집하고 보존하는 사람이 없어서, 전해 내려오는 자가 매우 적다. 진세수의 <양춘칩>의 서문에서 “금릉이 흥성할 때, 안팎으로 문제가 없었다. 가족, 친구들이 모여서 글의 뛰어난 구상을 운용하여 악부신사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자로 하여금 관현악기에 맞춰 노래하게 했다”라고 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사 작가와 작품의 생산은 짐작컨대 서촉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 중원은 혼란스러웠으나 남당은 중원을 잃고 한 구석에서 안주한지 오래 되었으며, 송이 통일하고 강남에 병화(兵禍)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물질 지리적 환경 역시 그러한 농염한 사의 성장에 알맞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반드시 많은 좋은 작가와 작품들이 있었을 것이며,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졌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남당에서 전해 내려오는 몇 사람, 예를 들어 이경, 이욱, 풍연사등은 모두 사단에서 제일 성공한 일류 작가들이다. 위의 작가들은 만당을 대표할 수 있으며, 5대 전 사단에 있어서 아래 열거할 양송 가사 발전의 동기이다. 중국 사의 역사 상, 그들은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경 (서기 916~961) 자는 백옥이고, 서경 사람이다. 이경은 장남이고 남당 보대 원년에 (선왕이 승극한 후) 즉위해서 중주가(남당의 황제는 세 명이었는데 그 중 가운데 황제라는 뜻) 되었다. 그가 사람을 쓰는 것이나, 행정, 군사 재략 모두 매우 평범했다.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가 은 노력을 들여서 남당의 기초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십여 년이 되지 않아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후주의 군대가 양주에 주둔하게 되어서야 그는 사태의 위급함을 알아서, 강북 일대의 토지를 헌납하고, 수십만의 세공을 바쳤으며, 황제의 호칭을 잃었고, 주나라에 망했다. 강남을 경계로 그어서 후주의 속국이 되었다. 그는 정치, 군사상에서 이렇게 실패하긴 했지만, 문예에 있어서는 고상한 교양과 조예가 있었다. 마령이 <남당서>에서 말하길 :


(인용문)


  이러한 기사는 이경이 천진한 시인이었음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그의 성격, 재질, 기호가 어떠하던 간에 그는 한명의 시인이었다. 솔직하고 천진하고 재미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정치 군사상에서 다소 성과가 있게 하긴 하였으나,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야만족과 싸우고, 땅을 뺏도록 했다면 당연히 실패했을 것이다. 그가 풍연사에게 대답한 것을 보면, 임금과 신하간의 고상한 멋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문예에 대한 애호와 제창을 알 수 있다.


(인용문)


  중주(中主)의 전해 내려오는 작품은 비록 세 수 밖에 없지만, 오히려 여기에서 그의 탁월한 시적 능력을 발견할 수 있고, 그의 그러한 일치되는 완곡한 슬픔의 작풍을 볼 수 있다. 표현은 그토록 세밀하면서, 글자의 사용은 그토록 신선하다. <화간집>의 농염하고 육감적인 강렬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왕국유는 그의 “연꽃의 향기가 흩어지다”, “서풍이 근심을 일으키다”라는 이 두 구절은, 온갖 꽃이 지고 미인이 늙어감을 슬퍼하는 감정이고, 이것은 바로 그의 사 풍격과 그의 작품 중에서 고결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비록 예술을 사랑했지만, 주색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매우 천진했고, 시사에 대해 감개했다(?). <강표기>에서 그는 “북쪽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즐겁지가 않다”,라고 했는데, 이것에서 그의 마음의 슬픔을 알 수 있다. 위의 몇 수의 사에서, 우리는 그의 침통하고 절실한 상실감, 슬픔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남당 사의 풍격이 서촉보다 높았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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