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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공작 그리고 후작이 높게 백작이 높게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4.22|조회수761 목록 댓글 0
 

  대공[大公, grand d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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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형은 grand duchess. 러시아에서는 grand prince, grand princess(여성형)라고도 함.

국왕과 공작 사이의 귀족으로 통치권을 갖는 신분을 일컫는 칭호.


제정 러시아의 황족을 부를 때에도 이 칭호를 썼다.



서유럽에서 처음 나타난 대공령(大公領)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대공령이다. 1569년에 교황 피우스 5세가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대공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1575년에 코시모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승인을 받았다. 대공이라는 칭호는 18세기에 토스카나 공국과 함께 합스부르크-로렌 왕가로 넘어갔다. 나폴레옹 전쟁 때 독일과 동유럽의 판도가 바뀌는 가운데 새로운 대공령이 나타났다. 빈 회의는 나폴레옹이 만든 대공령 가운데 일부(특히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령과 바덴 대공령)를 존중해주었고, 새로이 작센바이마르와 두 메클렌부르크인 룩셈부르크·올덴부르크 대공령을 만들었다.



대공은 보통 러시아의 벨리키 크냐스(veliky knyaz)라는, 글자 그대로 여러 군주를 거느리고 있는 '대군주'(grand prince)를 부를 때도 쓰인다. 이 칭호는 10세기에 류리크 왕가의 키예프 군주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뒤 다른 공국의 군주들도 차츰 대공이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 그후에는 모스크바 공국의 군주들만 이 칭호를 썼고 1547년부터는 통치자를 가리키는 칭호가 '차르'로 바뀌었다. 표트르 대제가 '임페라토르'(황제)라는 칭호를 쓴 뒤 로마노프 왕가의 모든 후손들은 대공(여자들은 '대공비')이라는 칭호를 가졌지만, 1886년부터는 황제의 자녀·형제·자매·친손자·친손녀들만 대공·대공비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grand duke의 각국어별 표기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대공[大公, archd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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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형은 archduchess.

칭호의 일종.


근대에 들어서는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에게 사용된 칭호이다. 팔츠 대공이라는 칭호는 오스트리아의 공작 루돌프 4세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와 동등한 지위가 되도록 하기 위해 대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황제 카를 4세는 이 칭호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1453년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프리드리히 3세가 루돌프의 특권을 추인하고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그 상속자들에게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칭호를 부여함에 따라 이 칭호는 법적으로 유효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남자들과 그 부인, 딸들이 이 칭호를 지녔다. 또한 스페인의 부르봉(보르본) 왕가에서도 이 칭호를 사용했으나 이들이 합스부르크가의 부계혈통을 이은 것은 아니다.


카를 대공[Karl, Erzherz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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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Archduke Charles.

1771. 9. 5 피렌체~1847. 4. 30 빈.


오스트리아의 대공.


육군 원수로서 군대 개혁가이며 군사이론가였던 그는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장군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연합군측의 몇 안 되는 사령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오스트리아군을 현대화하여 1813~15년에 나폴레옹을 패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는 막강한 군대로 만들었다. 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성장했다. 1792년부터 프랑스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 참가하여 1793년 알덴호벤과 네르윈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 되었다. 1796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라인 지구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발령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육군 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1796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인 장 바티스트 주르당과 장 빅토르 마리 모로를 거듭 격파하고 그들을 라인 강 건너편으로 퇴각시켜 유럽에서 가장 우수한 사령관으로 부각되었다. 다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8~1802)에서 라인 강 전선을 지휘하여 주르당과 앙드레 마세나를 격파했지만, 1800년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한 후 모로가빈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1805년 전쟁중에 카를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을 지휘하여 칼디에로에서 마데나를 또다시 무찔렀다. 그러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연패하는 바람에 전세가 나폴레옹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1801년 뤼네빌 조약이 체결된 후 카를은 오스트리아 호프크리크스라트(최고군사회의)의 의장 겸 총독으로서 폭넓은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프랑스군과 싸워 이긴 유일한 장군으로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낡은 군사 제도를 폐기하고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그의 개혁 프로그램에는 '국민 개병' 원칙의 채택, 프랑스군의 편제와 전술의 활용, 사관학교의 설립이 포함되었다.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력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카를의 지휘하에 아스페른에슬링에서 나폴레옹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1809년 바그람에서 벌어진 필사적인 전투에서 또다시 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그 전쟁중에 일선에서 물러난 카를은 더이상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군사문제에 관한 그의 저술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814년에 발간된 〈전략의 제원리, 1796년 독일 전투를 예로 풀어본다 Grundsätze der Strategie erläutert durch die Darstellung des Feldzuges von 1796 in Deutschland〉가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전에서의 공격적이고 과감한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글에서는 신중성과 전략 지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생존시에도 다소 구시대적이었다.


네[Ney, 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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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 군사경력  | 정치적인 변신  | 재판과 죽음  




duc d'Elchingen, Prince de la Moskowa라고도 함.

1769. 1. 10 프랑스 사를루이~1815. 12. 7 파리.


가장 유명했던 나폴레옹의 부하장군 가운데 한 사람.

[개요]


네, Maurin이 그린 초상화를 기초로 Francois Le Villain이 ...

1814년 나폴레옹의 퇴위후 복고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오자 다시 그의 편에 서서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옛 근위대를 지휘해 워털루 전투에 참가했으나 다시 들어선 왕정 때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당했다.


[군사경력]



그의 아버지는 술통 제조업자이자 대장장이였다. 지방 변호사 밑에서 일하다가 1788년 도망쳐 경기병(輕騎兵) 연대에 들어갔고 혁명전쟁이 터지자 기회를 얻었다. 1792년 발미와 제마프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부터 1800년 제1공화국이 마지막으로 치른 호엔린덴 전투에 이르기까지 혁명전쟁에 두루 참가했다(→ 프랑스 혁명전쟁). 네는 초기 전투에서 그의 성격상 상반되는 두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전투에서의 뛰어난 용맹성과 진급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었다. 그는 몸소 시범을 보임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려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꺼이 전투에 몸을 내던지면서도 높은 계급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승진되었을 경우에는 상관이나 정부의 상급관리들에게 항의했지만 이것은 모두 기각되었고, 결국 호엔린덴 전투 때는 라인 강변에 주둔한 빅토르 모로 군대의 사단장으로까지 승진했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1년 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주인이 되었다. 그때까지 네는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적이 없었는데 1801년 5월 튈르리 궁으로 와서 제1통령(統領)을 만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곳에서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궁정의식과 화려한 생활에 묻혀 지내고 있었다. 라인 주둔군은 이미 해체되었고 네는 로렌 지방에 그리 크지 않은 농장을 사놓았다. 나폴레옹을 공식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특별한 일은 없었다. 제1통령 나폴레옹은 모로 장군을 군인으로서는 경쟁상대로, 정치적으로는 적으로 생각하여 모로의 측근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제핀이 네에게 고위 공직자의 딸이자 자신의 시녀인 아글라에 오기에를 아내로 맞게 하면서 네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았다. 이들은 베르사유 근처에 있는 오기에 가문의 성(城)에 있는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네는 영향력있는 처가 덕분에 33세의 나이로 통령정부에 들어가 사교계와 군부의 일원이 되었다.



영국과의 평화가 깨지면서 나폴레옹은 영국 해협 연안에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네는 이곳에 배치되기를 요청해 제6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1804년초 경찰은 망명한 왕당파들이 나폴레옹을 납치하거나 살해하여 부르봉 왕정복고를 꾀하려는 음모를 밝혀냈다. 네의 친구이자 공화주의자인 모로 장군 관련설이 나왔고 모로와 공모자들은 공개재판에 넘겨졌다. 나폴레옹은 2년형을 선고받은 모로를 국외추방으로 감형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국의 세습황제에 오른 다음날인 1804년 5월 19일 옛 군대계급인 '원수직'을 부활시켜 네를 비롯한 14명 장군의 원수 진급을 공표했다. 러시아·오스트리아·영국이 프랑스에 대항하는 제3차 유럽 동맹을 구성하자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재빨리 유럽 대륙 중심부로 진군했다. 네는 1805년 10월 엘힝겐에서 프랑스군에게 첫번째 승리를 안겨주었고, 이 공으로 1808년 엘힝겐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두 달도 안되어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무찔렀다.



네는 1806년 예나에서 프로이센군을, 1807년에는 아일라우와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다. 1808년 스페인 출병 때도 용감한 사람이라는 그의 명성은 변함이 없었으나, 전술을 구상할 때 참모들과 협조하기 힘든 성미 급하고 까다로운 사령관이라는 평도 받았다. 나폴레옹이 직접 내리지 않은 명령에는 거의 불복종으로 여겨질 만큼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작전을 멀리서 지휘했기 때문에 네는 모든 상사와 언쟁을 벌였으며, 1811년초 불명예스럽게도 프랑스로 소환되었으나 1812년의 러시아 작전 때 자신의 지위를 되찾았다. 승패를 가리지 못한 보로디노 전투를 끝낸 다음날 아침, 나폴레옹은 그에게 모스크바 대공의 작위를 내렸다. 모스크바 후퇴 때 네는 후위(後衛) 부대를 지휘했으므로 러시아 포병대의 포화와 수많은 카자크 부대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기적으로 보일 만큼 비상한 용기와 재치, 그리고 뛰어난 임기응변의 재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부대가 몇 주일이나 보이지 않아 전멸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네가 추위에 얼어붙고 움츠러든 대군의 주력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나타나자 그를 가리켜 '용자(勇者) 중의 용자'라고 찬사를 보냈다.



1813년 유럽의 여러 전투에서 네는 옛 친구들과 싸워야 했다. 모로는 망명생활을 했던 미국에서 돌아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군사고문으로 일하고 있었으나 드레스덴 외곽에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편 네는 덴네비츠에서 스웨덴의 왕세자인 카를 14세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카를은 왕세자가 되기 전 '장 베르나도트'라는 이름으로 네처럼 혁명군 하사관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네는 부상을 당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패배한 프랑스군도 독일을 거쳐 어렵게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평화를 바라는 호소를 못 들은 체하고 새로운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프랑스 동부에서 지휘를 맡은 네는 혁명전쟁 때 배운 유격전을 활용했다.


[정치적인 변신]



나폴레옹은 나머지 군대를 모두 퐁텐블로에 모아 파리에서 유럽 동맹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네는 자신을 포함한 장군들의 견해를 대변해 나폴레옹에게 군대는 더이상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군대는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믿었지만 '용자 중의 용자'라는 말대로 군대는 장군들의 명령에 따를 태세였으므로 결국 나폴레옹은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네는 옛 지위와 칭호를 그대로 누리면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서약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에 나타나자 브장송 지역의 지휘를 맡고 있던 네는 국왕에게 "그 사람을 철창살 우리에 가두어 파리로 끌고 와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군사지역 주민들이 부르봉 왕가에 대단히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안 그는 나폴레옹의 전갈을 받은 뒤 나폴레옹 지지를 선언했고 이 말에 그의 병사들과 주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열광했다. 국왕은 파리에서 도망쳤고 나폴레옹은 튈르리 궁으로 다시 들어갔다. 네는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시골집에서 불만스럽게 보냈다. 그는 나폴레옹을 만나지 못하다가 워털루 전투 3일 전에 불려가 전투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에 맞서 오른쪽 진영을 지휘해 리니에서 이들을 무찔렀고, 네는 왼쪽 진영의 지휘를 맡아 카트르브라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보여준 태도는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날이 저물자 프랑스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네는 포연에 그을린 얼굴로 부러진 칼을 손에 들고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제 그들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목매달아 죽일 것이다." 이것은 앞날을 정확히 내다본 말이었다.


[재판과 죽음]



부르봉 왕가가 다시 복귀하자 네는 마지못해 프랑스에서 도망쳤으나 프랑스 남서부의 외딴 곳에서 체포당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자 그는 이 법정의 권한을 인정할 수 없고 귀족으로서 상급법원에서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재판이었으며, 예상대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병사들에게 언제나 불사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그는 1815년 12월 뤽상부르 정원에서 총살형으로 삶을 마쳤다.



네는 군인 중의 군인이었을 뿐 정치적 야심이나 편향은 전혀 없었다. 군인으로서 처음에 그리고 마지막에 참가한 프랑스의 자연지리적 국경(라인 강, 피레네, 알프스)을 확정짓는 전투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으나 유럽을 지배하려는 나폴레옹의 주도면밀한 전략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능력을 넘어선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위엄을 보인 그의 모습은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변신했던 일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했고, 서사시와 같았던 그 시대에서 그를 가장 영웅적인 인물로 새겨지도록 했다.


H. Kurtz 글 | 李圭泰 옮김


공작[公爵, duke]


 본문


목차  

개요  | 독일  | 프랑스  | 이탈리아  | 스페인  | 포르투갈  | 영국  





여성형은 duchess.

유럽 귀족 칭호로서 왕자나 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직위(대공 같은 중간 칭호가 있는 나라에서는 예외였음).

[개요]


'둑스'(dux)라는 칭호는 로마인들이 영토를 관할하던 고위 군지휘관들에게 내린 것으로, 로마 제국에 쳐들어 온 이민족들이 그 칭호를 본따 그들 왕국에서 썼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넓은 영토를 가진 통치자들에게 사용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 지방을 다스린 카롤링거 왕조에서는 일찍부터 공작을 임명했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힘이 약해지자 공작들이 점점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독일]



카롤링거 왕조의 군지휘관으로 임명받은 공작들이 점점 독립함에 따라, 원래 여러 부족들이 모여 살던 프랑켄·슈바벤·바이에른·작센 지방에는 거대한 공작령(領)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2세기에 오스트리아(1156)와 슈타이어마르크(1180)에 새로운 공작령을 만든 호엔슈타우펜조(朝)의 황제들은 공작을 충성스러운 봉신(封臣)의 지위로 낮추는 데 성공했고, 한편 지위가 낮은 귀족 가문들이 그들의 영지와 권력을 다져나가자 공작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했다. 1250년 이후, 호엔슈타우펜조가 단절되자 공작들은 각 공작령에서 독립을 확보했으나 공작위는 왕 밑에서 더이상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다만 백작보다 높은 지위임을 나타내는 데 그쳤다. 또한 1356년 금인칙서(金印勅書)가 나와 선제후(選帝侯)들(그 가운데 1명만 공작이었음)이 많은 특권을 갖게 되자 공작은 명목상으로도 가장 높은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공작들은 선제후들과 똑같은 권리를 주장하여 대공(Erzherzog)이라는 새 작위를 얻었다.


[프랑스]



초기 봉건시대에 노르망디·아키텐·부르고뉴 공작들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해 있었다. 브르타뉴 공작도 처음에는 백작 칭호만을 받았으나 뒤에는 독립했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 봉토(封土)들은 점점 프랑스 왕국으로 재통합되었고, 그후 '귀족 공작령'(duchés-pairies)이라는 이름으로 왕족의 영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왕의 적자(嫡子)인 왕자들만 봉토를 받을 수 있었으나 16세기부터는 서자(庶子)들과 외국 왕자들, 프랑스 왕을 섬기는 다른 봉신들에게도 주어졌다. 귀족 공작령은 영구(永久) 공작령처럼 세습되는 것이었고 귀족이 아닌 사람들이 세습 공작령을 갖고 있기도 했다. 프랑스 왕족인 사람을 빼고도, 프랑스 대혁명 이전부터 내려온 공작칭호 가운데 1980년대까지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30개가 넘으며, 그 가운데 최초의 공작령은 위제(1565, 등록 1572)이다.


[이탈리아]



거대한 공작령들 가운데 근대까지 남아 있던 것은 밀라노·피렌체(토스카나 대공령)·루카·만토바·모데나·파르마피아첸차였다. 그러나 교황, 신성 로마 황제, 나폴리 왕들은 마음대로 공작칭호를 내렸기 때문에 아주 흔했다. 사보이 왕가 출신 왕들은 자손들에게 가끔 두카(duca)라는 칭호를 내렸다.


[스페인]



스페인 서고트족 공작들은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게 되자 없어졌다. 레콩키스타(재정복운동) 때에는 두케(duque)라는 칭호가 존경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주기 위해 1370년에 만든 소리아이몰리나에 있는 카스티야 공작령을 빼고는 원래 공작칭호는 왕자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15세기 중반부터 점점 다른 귀족들도 받게 되었다. 그뒤에 생긴 공작위들 가운데 아직도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메디나시도니아(1445)이다. 또한 스페인 왕들은 그들의 나폴리와 시칠리아 영토에 마음대로 공작령을 만들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코르테스(의회)에서 받은 권리로 1948년에 칼보소텔로·몰라·프리모데리베라 공작령들을 만들었다.


[포르투갈]



포르투갈 왕 주앙 1세는 아들 돔 페드루와 돔 엔리케가 무어족과 싸워 세우타를 빼앗자(1415) 그들을 위해 쿠임브라·비세우 공작령을 세웠고, 1442년에는 서자인 아퐁수를 위해 브라간사 공작령을 만들었다. 스페인에 합병당하기 전까지 왕가 친척들을 위한 공작령 6개가 더 생겨났다. 그후에는 왕실사람이 아니더라도 공작령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숫자는 스페인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영국]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에드워드 흑세자(黑世子)를 위해 콘월 주를 공작령으로 만들기 전에는 공작이란 칭호가 없었다(잉글랜드 왕들이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와 아키텐 공작령은 프랑스 왕의 봉토였음). 그후 왕실남자 혈통의 후손들이 랭커스터(1351)·클래런스(1362)·요크(1385)·글로스터(1385)·베드퍼드(1413)·서머싯(1443) 공작령을 받았다. 그러나 1444년 어머니 쪽으로 왕실 혈통을 이은 험프리 스태퍼드도 버킹엄 공작이 되었다. 노퍽 공작령이 생긴(1483) 다음부터는 흔하지는 않았지만 왕실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정식으로 공작칭호를 내렸다.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3세는 1398년 맏아들 데이비드와 그 동생 로버트에게 최초로 로스시·올버니 공작칭호를 각각 내렸다. 20세기말 왕실 혈통을 이은 공작의 영토를 뺀 나머지 공작령으로는 잉글랜드 계통이 9개, 스코틀랜드 8개, 그레이트브리튼 6개, 아일랜드 2개, 연합왕국(United Kingdom) 6개가 있었다. 공작의 각국어별 표기는 다음과 같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duke의 각국어별 표기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멘[Maine, Louis-Auguste de Bourbon, duc du]


 본문





1670. 3. 31 프랑스 생제르맹(?)~1736. 5. 14 소.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의 서자.


루이 15세의 섭정(1715~23)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루이 오귀스트는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살아 남은 아들 가운데 가장 큰 아들이었으며, 1673년 적출로 인정받아 멘 공작작위를 받았다. 대동맹전쟁(1689~97)에 참가했고, 1714년에는 루이 14세가 그를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자로 지명했다. 왕은 이러한 결정을 유언장의 조항에다 분명히 해두려고 애썼다. 즉 멘은 장차 만들어질 섭정회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어린 루이 15세의 후견인이자 왕실 근위대 사령관이 된다는 것이었다. 멘에게 그처럼 폭넓은 권한을 줌으로써 루이는 자신의 조카이며 법적으로 루이 15세의 섭정이 될 오를레앙의 권력을 제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죽고 난(1715. 9. 1) 직후 오를레앙은 파리 고등법원을 이용해 그 유언장을 무효화했다. 통치권을 장악한 오를레앙은 멘이 근위대 사령관직을 맡지 못하게 했고, 1717년 7월에는 왕자의 지위까지 빼앗았다. 멘의 아내 루이즈 베네딕트 드 부르봉 콩데는 오를레앙의 이러한 행동에 화가나 1718년 스페인의 펠리페 5세(루이 14세의 증손자)를 오를레앙 대신에 섭정으로 추대하려고 스페인 대사이자 셀라마르 공(公)인 안토니오 쥐디스와 함께 음모를 꾸며 멘을 끌어들였다. 그 음모를 미리 알아챈 오를레앙은 그해 12월에 멘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셀라마르를 체포했다. 멘은 1년 남짓 옥에 갇혀 있다가 공적인 생활에서 물러났으나 그의 아내 콩데는 소에 있는 성(城)에서 살롱을 계속 운영했다.




후작[侯爵, marquess]


 본문


목차  

개요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스페인  | 영국  





여성형은 marchioness. marquis라고도 씀.

유럽 귀족의 칭호.

[개요]


공작과 백작 사이의 서열로, 어원적으로는 변경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백작을 지칭하나 이러한 의미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서유럽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후작은 국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지닌 왕실 관리였다. 이들은 백작은 하나 이상의 영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정에서 제외되어 그 지위가 공작에 못지 않았다. '변경공'(Markherzog)이라는 칭호가 '변경백'(Markgraf)을 대신해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의 조건과 국경 자체가 변화함에 따라 옛 경계지역의 중요성이 상당히 감소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MARQUESS의 각국어별 표기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프랑스]



대봉건영주의 권력이 왕권을 침식하면서 후작의 지위는 사실상 대공작령(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후에 소규모 봉토가 병합되면서 영주권을 지닌 소수의 백작들이 후작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작보다 낮은 후작의 지위는 백작과 작위의 구분이 모호해져 때로 백작이 더 높이 평가되거나 백작의 봉토가 후작의 봉토보다 클 때도 있었으나, 왕실의 특권을 받은 후작은 백작보다 우월했다. 이러한 모호함으로 인해 17, 18세기에는 작위를 사칭하는 일이 빈번해져 후작의 지위는 오히려 불명예를 야기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후작위를 폐지했으나 루이 18세가 복위 후에 이를 부활시키고 공작과 백작 사이의 지위를 부여했다.


[독일]



카롤링거 왕조말에 작센의 독일 왕인 오토 1·2·3세는 10세기경 동부 변경을 중시하여 새로운 변경체제를 마련했다. 후작은 국경수비 임무뿐만 아니라 마이센의 후작인 게로와 빌룽 가문, 또는 알브레히트 1세처럼 국경선을 슬라브족이나 이교도의 영토까지 확장할 임무를 지녔다. 일부 후작 영지는 세습 공국으로 발전해 바이에른의 오스트마르크는 오스트리아 공작령으로, 슈타이어마르크는 슈타리아 공작령으로, 작센의 노르트마르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바덴의 후작은 그의 선조가 11세기 이탈리아 베로나의 후작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의 호엔촐레른 후작들도 마찬가지로 선조의 작위를 계승했다.


[이탈리아]



카롤링거 왕조의 국경선이 크게 변경된 뒤에도 이탈리아의 국경지역은 중요한 지역 단위로 잔존했다. 그러나 14세기경 남작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후작 영지로 칭하기 시작한 뒤로 후작위는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지위가 불분명해졌다.


[스페인]



원래의 카롤링거 잔여지는 바르셀로나 공작령에 병합되었다. 최초의 카스티야 후작령은 아라곤의 돈 알론소를 위해 만들어진 발렌시아 경계의 비예나이다. 1445년 왕으로부터 이 후작령을 받은 파체코가(家)의 계승자들은 나중에 에스칼로나 공(公)이 되었다. 비예나의 뒤를 이어 산티야나가 후작령이 되었다.


[영국]



영국에서 후기 라틴어인 'marchiones'는 웨일스 국경의 제후를 지칭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백작보다 높은 지위를 의미하지 않고 단지 국경 근처에 영지가 있다는 의미만을 포함했다. 그러나 1385년 옥스퍼드 백작 9세인 로버트 드 비어는 공작과 백작 사이의 지위인 더블린 후작이 되었다. 이때문에 다른 백작들이 이에 대해 항의를 표시했고, 드 비어가 아일랜드 공작이 된 뒤인 1386년 후작위의 특권이 폐지되었다. 서머싯의 백작인 존 보펏은 1397년 도싯과 서머싯의 후작이 되었으나 1399년 이전의 백작위로 격하되었다. 1402년 평민들이 그의 후작으로의 복귀를 탄원했지만 그는 영국에서 이 말이 갖는 생경함 때문에 사양했다. 1443년 그의 아들 에드먼드 보펏은 후작위가 귀족계급의 지위를 가지게 된 뒤 도싯 후작이 되었다. 초기의 후작령이 소멸되거나 공작령으로 격상됨에 따라 1551년에 설립된 윈체스터 후작령이 현재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후작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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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count]


 본문


목차  

개요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스페인  | 영국  | 러시아와 폴란드  





여성형은 countess. 영국에서는 earl이라고 함.

유럽의 귀족 칭호 가운데 하나.

[개요]


근대에는 후작이나 공작보다 한 등급 낮은 작위이다. 로마 시대의 '코메스'는 원래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가신이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지방사령관 겸 판사였다. 그후 백작은 봉건체제에 서서히 받아들여져 일부는 공작에게 종속되었지만, 플랑드르·툴루즈·바르셀로나 같은 일부 백작령은 공작령만큼 넓었다. 왕이 봉건제후들에 대한 권위를 다시금 주장한 것은 각 나라마다 시대가 달랐으나 중앙집권화한 근대적 유형의 국가 형성으로 이어졌고, 백작의 정치 권력 상실을 의미했다. 그러나 백작이 귀족 계급의 일원으로서 누리던 특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count의 각국어별 표기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프랑스]



프랑스 백작은 늦어도 900년까지는 공작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봉건화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관직의 성격은 사라지고 작은 땅의 세습영주가 되는 경향을 보였다. 프랑스에서는 11세기에 이미 이런 경향이 나타났고 그와 더불어 백작이라는 칭호를 별 제한 없이 사용하는 관례가 생겨났다. 12세기에 이르러 중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영주라면 누구나 플랑드르와 툴루즈처럼 넓은 봉토를 가진 영주와 마찬가지로 백작을 자처할 수 있었고 왕국의 체계가 좀더 안정된 13세기에도 이 칭호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질 수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13세기초부터 왕의 이름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는 대법관 제도가 발달했는데 이것은 백작의 입법권과 사법권 및 사적인 전쟁을 제한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어서 백작은 화폐주조권을 잃었다(16세기). 게다가 넓은 봉토는 차츰 프랑스 왕권 아래로 재통합된 뒤, 왕자령(왕국의 한 행정구역으로 다스려짐)으로만 하사되었기 때문에 백작은 다양한 특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프랑스 제1제정과 그뒤를 이은 군주정 및 제국시대에는 백작의 지위가 영토의 의미를 전혀 갖지 않았고 장자상속에 따라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세습작위가 되었다.


[독일]



독일에서 백작이라는 칭호는 10세기경부터 대부분 세습작위가 되었지만 독일 백작은 프랑스보다 더 오랫동안 관직의 성격을 유지했다. 12세기에 신성 로마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는 백작에게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치안유지권을 부여했는데, 이 권한은 1100년까지 공작에게 속해 있었다. 그후 백작령이라는 용어는 백작이 생사 여탈권을 갖고 있는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다. 12세기초부터 독일 서부에서는 공식 지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단지 그들이 갖고 있는 성에서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백작이 많이 나타났다. 프리드리히 1세 시대에는 '보호관'(Vögte) 같은 상류층의 일부 자유인들이 백작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13, 14세기에는 공작한테서 봉토로 하사받은 새로운 백작령이 생겨났다.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는 일반백작과 제국백작을 차츰 구별하기 시작했다. 제국백작은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한 요소인 백작단(Grafenkollegium)의 일원이 되었다.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뒤 제국백작의 지위도 한 단계 낮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는 황제 한 사람만의 '직속' 신하였던 제국백작이 독일 여러 국가의 군주들에게 종속된 지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연방의회는 1829년 '각하'(Erlaucht)라는 특별존칭을 쓸 수 있는 제국백작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가 쇠퇴하면서 도시에 바탕을 둔 백작령 제도가 생겨났다. 이들 백작은 아무도 공작에게 종속되지 않았던 듯 하다. 어쨌든 공작이라는 칭호는 적어도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드물었다. 자치도시가 성장하자 백작령은 그때까지 갖고 있던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과 이탈리아 반도의 군주들은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백작이라는 칭호를 특권의 표시로 자주 부여했다.


[스페인]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에서는 서고트족의 영향으로, 카탈루냐와 피레네 산맥 바로 남쪽에 있는 지방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영향으로 백작령이 발달했다. 바르셀로나 백작들은 카탈루냐 백작령을 통합해, 적어도 프랑스의 플랑드르나 툴루즈 백작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사실상의 군주가 되었다. 또한 카롤링거 왕조의 아라곤 백작령은 아라곤 왕국의 핵심이었다. 반면에 카스티야 왕국의 모태가 된 카스티야 백작령은 원래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변경 지방이었다.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백작들은 11세기말까지만 해도 왕이 임명한 지방 행정관으로서 관직의 성격을 유지했지만, 그후에는 여러 종류의 세습 영주권을 갖는 것이 오히려 지배적인 원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후의 스페인 군주국에서는 백작이라는 칭호가 좀처럼 내려지지 않았다.


[영국]



영국의 백작(earl) 칭호는 덴마크어 '야를'(jarl)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데인족의 왕 크누드(1016~35년에 재위한 잉글랜드 왕) 치세에 처음 잉글랜드에 도입되었다. 따라서 영국의 백작은 영국 귀족의 칭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영국의 백작은 또한 에드워드 3세가 아들 에드워드 흑세자에게 콘월 공작 작위를 준 1337년까지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초기에 백작은 여러 주에 대해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1066년에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백작의 활동 범위는 1개 주로 제한되었다. 그후 백작의 지위는 더이상 영토와 결부되지 않게 되었고 18세기부터는 작위를 받은 사람의 성(姓)에 백작이라는 칭호만 덧붙이는 관례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레스터 백작은 레스터를 영지로 삼고 있는 백작을 뜻하지만 템플이라는 성에 백작 칭호만 붙인 템플 백작도 있을 수 있다. 원래 백작위를 계승하는 규칙은 봉건적 법률에서는 봉토를 상속하는 규칙이었다. 따라서 백작의 지위는 여자한테도 넘어갈 수 있었고 그 여자 백작의 남편이 아내의 권리인 백작 칭호를 받기도 했다. 중세 후기부터는 남자 상속자에게만 물려줄 수 있도록 상속권을 제한한 백작의 작위가 수여되었다. 1963년의 귀족법에 따르면, 백작은 영국의 다른 귀족작위와 마찬가지로 작위를 물려받은 지 1년 이내에 그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백작의 지위가 정지된다.


[러시아와 폴란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백작 칭호가 도입되었고 대개는 정부에서 일정한 지위에 오른 관리들에게 이 칭호가 주어졌다. 폴란드에는 원래 백작이 없었지만 18세기말 영토가 분할된 뒤 러시아인·오스트리아인·프로이센인 들이 백작 칭호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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