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왕성인 대씨의 유래에 대해서 [펌]
번호 : 2379 글쓴이 : 걸걸중상
조회 : 226 스크랩 : 0 날짜 : 2007.04.1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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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왕조건 간에 그 왕실은 항상 神聖性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성성은 흔히 王姓으로 대표되곤 한다. 김성호님은 이 성씨가 세력명, 민족명과 연결되기 때문에 씨성을 추적하면 역사를 역추적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씨성이라는 것이 굉장히 가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국의 중심을 이루는 왕실의 왕성 역시 가변적인 요소가 굉장히 강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과거 지나갔던 역사속의 왕성을 잘 살펴보면 그 씨성이 단순히 형성된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부여부터 고구려, 온조백제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고대의 성씨인 解氏는 오늘날 하늘, 천손, 태양 등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아울러 고구려의 성씨인 高氏는 시조인 추모왕이 국가를 건설하고 그 국호의 앞글자를 따서 만들었다고 하는 등 왕성이라는 것은 그 의미가 다 부여되기 마련이다. 그럼 과연 발해의 성씨는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일까?
발해의 성씨는 大氏다. 그럼 원래부터 대씨였을까? 추모는 본래 해씨인데 훗날 집권한 고씨에 의해서 고씨 성으로 추존받았다. 이건 온조백제의 온조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마지막으로 집권한 (부)여씨에 의해서 그 왕성을 추존받았다. 그럼 발해의 왕성인 대씨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뭐 대조영이니깐 대씨겠지, 라고 하는 대답은 초등학생에게 듣는 대답일 것이다.
대조영을 두고 우리는 고구려人이다, 속말말갈人이다 말을 한다. 주인장은 말갈이라는 족속 자체가 고구려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굳이 구분을 짓지는 않는다. 우리 학계에서도 대개 말갈은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의 비칭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대씨는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 존속 시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고려시대에 '간간히' 보일 뿐이지, 그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씨는 현재 '대산(김해 지방) 대씨' 와 '밀양 대씨' 이렇게 본관이 2개가 존재하는데 그 존재가 '도곡총설(陶谷叢說)' 의 298개 성씨 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 조사에 비로소 나타났다는 점이나 선조와의 연계성이 분명치 않다는 점으로 미루어 봤을때 대씨의 흔적은 고려 시대 이후 거의 없었다고 보여진다. 즉, 현존하는 대씨는 발해 시대때의 대씨와 연관성이 없다고 주인장은 보고 있다. 참고로 현재 한국에 있는 대씨는 두 본관 합쳐 400여명 정도 밖에 돼지 않는다.
그럼 이 '대씨' 는 말 그대로 발해의 건국과 함께 나타나 발해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성씨인 셈이다. 고구려의 초기 성씨인 解氏와 신라 시대의 昔氏등이 오늘날 보이지 않는 것은 후대에 집권한 집권 세력에 의한 조직적인 말살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흡사 왕씨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은 조직적인 말살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발해 멸망 이후 여진과 거란 등에게 흡수되어 살아가게 되는데 문제는 이 대씨라는 가문이 고구려 멸망과 함께 발해 건국과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다.
대조영이 처음부터 대조영이었을까? 그럼 대씨는 속말말갈의 성일까? 아니면 우리측 기록이 전하는대로 고구려 시대때의 武家 집안의 성이었을까?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사서에 대씨라고 적혀 있으니 대씨일 것이다, 라고 넘어갈 부분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서병국님은 그가 말갈의 땅으로 들어간 뒤에 말갈족에 동화되었고 그 성과 이름이 말갈풍으로 바뀌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전에 대조영과 그의 선조들은 어떤 성씨를 사용했을까? 또 말갈풍의 성과 이름은 그럼 무엇일까? 그럼 한번 사서들을 살펴보자.
'신당서' 는 대조영의 아버지를 두고 '사리걸걸중상' 이라고 적고 있고 '신오대사' 와 '오대회요' 는 '대사리걸걸중상' 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측 기록에 의하면 '발해고' 에 '대걸걸중상' 이라고 적혀 있으며 '환단고기' 에는 '대중상' 이라고만 되어 있다. 신당서를 제외하고 모두 '대' 를 앞에 적어 이것이 성인 것처럼 보인다. '삼국유사' 를 쓴 일연은 그곳에 인용한 '신라고기' 라는 책을 근거로 대조영이 고구려의 舊將으로서 성이 大氏라고 분명히 적고 있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련의 기록들을 가지고 우리는 최소한 대조영의 아버지 대부터는 그들이 대씨라는 성을 사용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조금 특이한 사항이 보인다.
바로 오대회요와 신오대사에 보이는 명칭인데 바로 '사리(舍利)' 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오대회요는 大는 성이고, 舍利는 벼슬 이름이며 乞乞仲象은 이름이라고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大姓 舍利官 乞乞仲象名也).
하지만 '통지(通志)' 라는 책을 보면 代-北 지방에는 원래 '사리씨' 라는 복성(複姓)이 있어서 '대사리' 는 사리부(舍利部)의 大人, 즉 추장을 뜻한다고 전제하고 당나라의 고종 용삭 년간(661~663)에 좌위위 대장군 '사리아박(舍利阿搏)' 이라는 인물을 예를 들면서 대사리걸걸중상의 '사리' 는 벼슬 이름이 아니라 대씨의 본래 성씨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대사리' 라는 것은 성씨인 동시에 벼슬과 추장 이름을 대신할 수도 있으며 또한 대사리의 단성이 대씨라는 추정도 하게끔 해준다. 마치 부여씨의 단성이 여씨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거란국지' 에는 거란의 부호(富豪)로서 소와 낙타 10마리와 말 100필을 바치면 주어지는 벼슬 이름이 '사리' 라고 풀이하기도 한다(契丹富豪民 栗裏頭巾者 納牛駝十頭 馬百疋 給契丹名目 謂之舍利). '요사' 의 국어해(國語解)와 원나라 호삼성이 쓴 '자치통감' 의 주석 역시 '사리' 를 소와 낙타 10마리, 말 100필을 주면 받는 벼슬 이름으로 이는 훗날 거란군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契丹豪民栗裏頭巾者 納牛駝十頭 馬百疋 及給官 名曰 舍利 後遂爲諸帳官 以郞君繫之).
아울러 '송사' 의 송기전에 보면 발해의 수령 '대사리 고모한(高模翰)'은 발해국의 사람으로 나라가 멸망한 뒤에 거란으로 전향하였는데 벼슬이 '대사리' 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담으로 그는 발해 멸망 이후 고려로 망명하였다가 거란으로 다시 망명해 요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데 고려의 대발해유민 정책에 대해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하겠다.
이런 일련의 기록들을 토대로 서병국님은 걸걸중상과 고모한의 벼슬이 대사리였다는 것으로 인해 걸걸중상이 거란에 의존하여 받은 벼슬이 대사리이며 그의 아들 대조영도 결국 대사리의 대자를 취하여 성씨로 삼았으니 본래 대씨가 이들의 성씨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걸걸중상이 거란으로부터 대사리라는 존귀한 명칭을 하사받고 이 벼슬 겸 관등에서부터 대씨라는 성을 취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든다. 당시 거병했을 시의 거란의 상황을 본다면 고구려 유민으로 보이는 걸걸중상과 대조영 일행이 거란의 보호 혹은 지원을 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사리라는 것은 훗날 몽골 지역에서 칸(Khan)이 없이, 각 지역의 세력가들이 바가투르 혹은 바아투르(용사), 노얀(수령), 세첸(몽골어로 현자), 빌게(투르크어로 현자), 타이지 혹은 타이시(太子)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며 할거했던 것처럼 이것들과 비슷한 명칭이 아닐까 보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걸걸중상이 이런 형식적인 관등을 거란에게서 하사받은 다음 여기서 성을 취했다는 것은 조금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대회요' 는 사리가 벼슬 이름인 줄은 알았으나 대사리가 존귀한 의미의 벼슬 이름인 줄은 몰랐으며 대씨가 성씨임은 알고 있었으나 대사리에서 온 것임을 미처 알지 못 하였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오대회요 권 19 발해국지장편을 보면 知舍利爲官 而不知大舍利 亦爲官之尊者 知大爲姓 而不知其得姓 由於大舍利라고 적고 있어 사리가 벼슬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아울러 대사리가 벼슬로서 존자(귀중한 사람)라는 것은 몰랐으며 대씨가 성인 줄은 알았으나 그 성이 대사리에서 말미암아 얻은 것은 몰랐다,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당연이 지은 '발해국지' 는 중상의 일족이 가졌던 본래의 성씨는 사리씨이고 조영이 발해라는 작위를 받고서 성씨를 대씨로 고쳤다고 기록하기도 한다. 그 기록을 잠시 보자면 乞乞仲象 本姓舍利 至祚榮 始稱大氏 舍利 女眞語泉水也 大者 女眞語 尊長之稱...今滿州姓 有赫舍利氏 或爲大氏之族乎 五代會要 以舍利爲官名 誤矣라고 적고 있어 당연은 걸걸중상이 본래 사리씨이며 대조영에 이르러 대씨라고 칭하였고 사리는 여진말로 샘물이라는 뜻이며 대자(대인)는 여진말로 존장을 칭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만주성씨 중에서 혁사리씨가 혹 대씨족에게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오대회요에서 사리가 관명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여기에 의하면 사리를 벼슬이 아닌 완전한 성씨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대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분명 고구려 시대때부터 이런 이름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병국님은 걸걸중상이라는 이름 자체를 말갈풍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그(그의 가족 전부)가 당 영토 중에서도 이민족의 요소가 가장 많은 영주 근방에 살면서 거란족에 의지하여 대사리라는 존귀한 벼슬을 받고 추장이 되어 그 지역에서 지도자급으로 군림하다가 대조영이 이를 계승해 대씨를 성으로 삼으면서 고구려계의 유민과 말갈족을 그의 영도 밑으로 포섭했던 것이라고 보고 있다.
주인장은 환단고기의 기록을 한번 살펴봤다. 거기에는 대중상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중국측에서 볼 수 있는 사리라는 벼슬이며 걸걸이라는 표현도 보이지 않고 있다. 걸걸중상이라는 것을 서병국님은 말갈식 이름으로 보고 있지만 주인장은 원래 이름은 그냥 중상(仲象)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이름이 말갈풍의 걸걸중상이 되고 훗날 거란 세력에 의해 대사리라는 벼슬까지 합쳐져서 중국측은 그의 이름을 '대사리걸걸중상' 이라고 적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신당서를 보면 대중상과 대조영을 부자 지간으로 적고 있는데 반해 구당서는 둘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이를 토대로 걸걸중상이 영주로 이주할때의 원래 이름이고 조영은 발해 건국 이후 바꾼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분명히 이 둘은 다른 인물이며 오대회요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걸걸중상은 조영의 아버지로서 발해 건국은 이미 걸걸중상에게서부터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 걸걸중상에 대한 기록이 극히 적은데 주인장은 이 사람이 수 문제-양제, 당 고조-태종의 관계처럼 뒤이은 아들의 치적에 가려서 그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대중상의 성씨는 대씨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고구려 말기 대귀족층이 모두 성씨를 가지고 있었고 이와 관련된 가계 전승이나 족보, 비문 등이 남겨져 있었던 것을 봤을때 중상-조영 집안도 이랬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여진다.
환단고기는 중상을 서압록 일대를 지키는 진국장군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가 결코 하급 무인 출신은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물론 환단고기가 인용 여부를 의심받는 책인 것은 사실이나 한번 참고해둘만 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역시 그가 고구려의 구장이며 그들이 영주 지역으로 이주할때 가속(家屬)을 이끌었다는 점등을 토대로 그의 집안이 적지 않은 세력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그의 집안도 역시 성씨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씨가 대씨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알아봐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대씨 성이 발해 건국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대씨라는 씨성의 등장과 유래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수나라때 속말말갈의 추장인 '돌지계' 라는 인물이 보이는 바, 중상-조영 역시 본래 이름이 이런 식의 성씨가 없는 말갈풍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성씨가 바뀐 것과 연결지어 서병국님은 '대사리' 라는 거란의 귀관명(貴官名)과 연결시켜 보고 있는 것이다. 대인 혹은 추장이라는 관명과 함께 거기서 대씨라는 성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참고할만 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씨성이 원래 고구려 시절부터 대씨였을 것이라는 추정 또한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아둬야만 한다. 대씨 가문이 고구려에서 그리 크지 않았고 고구려 말기 변방의 신흥 가문이었다면, 그들이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 건국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도 어느정도 유추가 가능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대씨 가문에 대해서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시기 발전했다는 것과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 건국에 맞춰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는 것, 이 두가지 문제가 아닐까 한다. 주인장은 이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결론을 내린 상태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재론의 여지를 마련해두고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바램이다.
여기에 잠깐 덧붙이자면 주인장은 대씨라는 씨성이 고구려 멸망 이후, 高氏를 대체할 새로운 씨성으로서 고구려 유민, 중상-조영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었으며 훗날 발해의 역대 사가들은 그런 그들을 대씨로 기록하여 마치 그들이 고구려 시절부터 그렇게 지냈던 것처럼 기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물론 대씨라는 씨성이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거란의 '대사리' 라는 명칭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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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단수 발해의 마지막태자인 대광현의 후손은 현재 협계태씨,영순태씨,남원태씨입니다 대광현이 고려에 귀부한후 왕건으로부터 태씨성을 받아 그후손들은 모두 태씨가 된것으로 압니다 협계태씨는 시조인 태집성이 고려고종때 몽골침공때 혁혁한 전공을 세워 협계군에 봉해진후 협계태씨가 된것으로 압니다 영순태씨또한 그시조인 대장군이었던 태금취가 고종깨 몽골군을 물리친 전공으로 영순군에봉해진후 영순태씨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태씨는 기본적으로 다 발해대씨의 후예이고 특히 협계태씨는 시조인 대중상부터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07.04.17 00:11
답글 麗輝 음~옛날에 쓴 글인데...? ㅋ 07.04.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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