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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버마와 베트남 원정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5.20|조회수342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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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청의 삽질의 시작 --버마와 베트남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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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와 안남(安南)은 모두 청나라의 외번국(外藩國)이였다. 건융(乾融) 시기에 이 두 나라의 통치자 내부에는 잇따라 군사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어 청정부에 대항해 나섰다. 청정부는 서남 변경을 안정시키고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군사를 발동하여 남정하였다.

 

1765년 버마의 왕 맹(孟)은 군사를 파견하여 중국 운남(云南) 서남쪽 구룡강(九龍江-보이(普洱)경내 란창강(瀾滄江) 일대)를 진공하였다. 이 바로 전에 버마의 계가(桂家) 부장 궁리안(宮里雁)이 파용(波龍-미공하(湄公河)서)에서 버마왕 옹기각(雍紀覺)에게 격파당하고 나머지 부대를 데리고 중국의 변경에 있는 맹연(孟連) 토사부(土司部)로 도망가서 운남(云南)의 총독 오달선(吳達善)에게 속국이 되기를 청다. 오달선(吳達善)은 그엥게서 칠보안(七寶鞍)을 얻으려다가 성공하지 못하자 맹연(孟連) 토사(土司)에게 그들을 쫓아내도록 하였다. 맹연(孟連) 토사(土司)는 운남(云南) 총독한테 잘 보이려고 궁리안(宮里雁)이 추방되는 기회에 그의 가산 및 부녀자들을 가로채여 총독에게 바쳤다. 궁리안(宮里雁)의 처 낭점(囊占)이 맨손으로 맹연(孟連) 토사(土司)의 가족 30여명을 죽이고 또한 마을을 불살랐으며 나머지 사람들을 인솔하여 미얀마 동부로 이동했다. 얼마 후 오달선(吳達善)은 공모죄로 궁리안(宮里雁)을 운남(云南)에서 살해하였다. 낭점(囊占)은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옹기각(雍紀覺)의 동생 맹박(孟駁)에게 개가했다. 그해에 옹기각(雍紀覺)이 죽고 맹박(孟駁)이 왕위를 계승했다. 왕비가 된 낭점(囊占)은 맹연(孟連)을 증오하고 중국의 변방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기는 것을 더더욱 증오하였기 때문에 버마 왕을 도와 서남의 결사(結些), 백고(白古) 등 여러 부락을 침략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룡강(九龍江)을 건너 보이(普洱-운남녕이현(云南寧洱縣)), 차산(茶山-녕이(寧洱)북무량산(無量山)) 등 여러 토사(土司) 지역을 점령했다. 그때 오달선(吳達善)은 벌써 천섬(川陝)의 총독으로 옮겼고 운(云), 귀(貴)의 총독인 유보(劉葆)가 군사를 세 갈래 나누어 파견하여 로서(潞西-운남금현(云南今縣), 운현(云縣), 보이부(普洱府)를 각각 수비했지만 전부 패전하고 말았다. 유보(劉葆)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자결했다. 그 뒤로 청정부는 3차례나 군사를 파견하여 버마를 남정했다.

 

이듬해, 청정부는 양응거(楊應琚)를 운남(云南) 총독으로 임명하고 보이(普洱)에 주둔했다. 곧이어 명을 내려 유덕성(劉德成), 화봉(華封), 합국흥(哈國興)  등의 50만 군사를 출동시켜 1000개나 되는 대포를 싣고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버마군을 반격하여 차리(車里-운남경홍(云南景洪))를 수복했다.

 

 9월, 버마군은 재차 신가(新街-팔막(八莫)), 목방(木邦)을 점령했다. 양응거(楊應琚)는 3000명 군사를 인솔하고 영창(永昌-운남보산(云南保山))으로 진군했다. 동시에 그는 명을 내려 총병 오이등액(烏爾登額)의 군사는 목방(木邦)을 소탕하고; 총병 주륜(朱侖)의 군사는 철벽관(鐵壁關)에서 출전하여 신가(新街)를 탈취하며; 제독 이시승(李時升)은 각 부의 군사 1만4천여 명을 소집하여 삼목롱(杉木籠-운남롱산(云南隴山)북)에 주둔하면서 다른 군사와 호응할 준비를 했다. 전쟁 초기에 청군의 진전은 아주 순조로웠지만; 후기에 와서 버마군이 가짜 화담(和談)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신호(神護), 만인(万刃) 두 요충지를 뛰어 넘고 잔달(盞達-운남영강(云南盈江)), 호살(戶撒-용산(龍山)북), 맹묘(猛卯-운남단려(云南端麗)) 등을 포위하여 등월(縢越) 변방에 있는 각 청군(淸軍) 군영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하는 수 없이 철퇴하였는데 양응거(楊應琚)는 오히려 패전한 것을 승리한 것으로 가짜 소식을 조정에 알렸다. 후에 홍력제(弘歷帝)가 진실을 알고 그를 직책을 다하지 않은 죄로 사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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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청정부는 이미 운남(云南)의 관직을 박탈당한 총병 이상의 10여명이나 사형에 처함으로서 군기는 이로서 한층 자숙하게 되었다.

 

1767년, 두 번째로 군사를 출정하여 버마로 향했다.

 

 4월 운귀(云貴) 총독 명서(明瑞)는 영창(永昌)에 이르러 팔기(八旗), 사천(四川), 운남(云南), 귀주(貴州) 등의 군사 2만5천과 1만5천 필의 말을 준비하고 2개월의 식량과 마초를 휴대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 버마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9월 명을 내려 참찬(參贊) 대신 액이등액(額爾登額)과 제독 담오격(譚五格)의 군사 9000명을 인솔하고 등월(縢越-운남서려(云南瑞麗)서북)의 호거관(虎據關)에서 출병하여 노관둔(老官屯)을 진공하고 다시 맹밀(猛密)로 진군하며; 자기는 친히 1만7천명의 주력을 인솔하고 영창(永昌)에서 출병하여 완항(宛項), 목방(木邦)을 진공하며 두 갈래의 군사는 버마의 수도 아와(阿瓦)에서 합류하기로 약정했다.

 

11월, 명서(明瑞)의 군사는 완항(宛項)과 목방(木邦)을 연이어 함락했다. 계속해서 석박강(錫箔江)을 건너서 만결(蠻結)에 이르러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고 버마군의 16개나 되는 군영을 소멸했다.

 

12월에 혁룡(革龍)까지 진군하고 천생교(天生橋)에 접근하여 일부 병력으로 도구(渡口)를 진공하는 척하고 자기는 주력을 인솔하여 천생교(天生橋)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서 강을 건너 버마군의 배후로 돌아가 2000여명이나 섬멸했다. 공상(孔象)에서 길을 잃고 군량은 떨어지고 게다가 북로군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와(阿瓦)의 공격을 포기하고 목방(木邦)으로 군사를 철퇴하던 도중에 버마군의 추격을 당했다.

 

 이듬해 1월, 만화(蠻化)에서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 오던 버마군 4000여명이나 죽였다. 그 뒤로 싸우면서 철퇴하여 방매(邦邁), 호포(虎布), 만이(蠻移), 소천생교(小天生橋), 동자패(童子壩) 등지에서 계속 버마군을 격파하였다.

 

2월말, 맹육(猛育)까지 철퇴했다. 명서(明瑞)는 목방(木邦)이 함락되고 액이등(額爾登)이 인솔한 지원부대는 노관둔(老關屯)에서 저지 당하여 버마군은 5만여 명을 모아 포위 공격해 오고있다는 것을 알고 명을 내려 달흥아(達興阿)와 본진중(本進中) 등의 군사에게 여러 갈래로 길을 나누어 밤새 포위를 뚫게하고 자기는 친히 수백 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뒤를 방어했다. 격렬한 전쟁 끝에 천여 명이 전사하고 명서(明瑞)는 옆구리를 부상당했으며 20여 리를 가다가 자살했다. 이렇게 되어 청군(淸軍)의 제2차 미얀마 출정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1769년 2월 홀력제(弘歷帝)는 전항(傳恒)을 경략(經略)으로 임명하였고 그는 북경(北京)에서 만(滿), 몽(蒙) 병사 1만3천여 명을 인솔하고 남하했다.

 

 4월에 등월(騰越-운남등충(云南騰冲))에 이르러 아계(阿桂)의 군사는 알구강(戛鳩江-빈랑강(檳榔江)) 동쪽 기슭을 따라 맹밀(猛密)을 지나 아와(阿瓦)로 향하며; 자기는 군사를 인솔하여 서쪽 기슭을 따라 맹공(猛拱), 맹양(猛養)을 지나 다시 아계(阿桂)군과 회합하여 아와(阿瓦)를 진공하려고 결정했다. 동시에 명을 내려 아리곤(阿里袞)에게 수사(水師)를 통솔하고 물길 따라 남진하여 육로의 두 부대를 지원하게 하고; 아랑아(雅郞阿)에게 만주병(滿洲兵) 등 3500명울 인솔하여 보이(普洱)에 주둔하고 각 군영의 수비를 강화하며; 낙이분(諾爾奔) 등은 군사 1500명을 인솔하여 완정(宛頂-운남원정(云南畹町))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목방(木邦)의 버마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7월 각 로의 군사는 일제히 진공했다. 8월, 전항(傳恒)이 인솔한 900여명의 군사가 윤모(允冒)에 이르자, 하병휴맹공(賀丙携猛拱-버마에 속함)의 우두머리 탈맹조맹(脫猛鳥猛) 등과 함께 투항을 했고 게다가 30여 척의 배를 몰고 와서 청군(淸軍)을 맞이했다.

 

 9월, 아계(阿桂)의 군사는 신가(新街)에서 버마군을 수륙 협공하여 그들의 대부분 군대와 배를 함몰시켰다.

 

 10월, 삼로의 군사는 대금사강(大金沙江-이낙와저강(伊洛瓦底江))을 따라 수륙이 병진하여 버마군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수토에 맞지 않는 탓으로 아리곤(阿里袞) 이하 장병 1만8천여 명이 죽었다. 전항(傳恒)이 이 소식을 조정에 알리고 홍력제(弘歷帝)는 명을 내려 군사를 거두었다.

 

버마왕 맹박(孟駁)은 신가(新街) 등 전역에서 패전하여 참상이 심각했으므로 11월에 사자를 청정부에 보내어 화의 할 것을 청구하면서 자진해서 중국의 부속국이 되겠다고 하였다.

 

1788년 청정부는 안남(安南-베트남)의 국왕 여유기(黎維祁)에게 복수를 목적으로 군사를 출전시켰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내란이 일어나 완문혜(阮文惠)의 군사가 여성(黎城-하노이)를 점령했다, 국왕 여유기(黎維祁)는 민간으로 숨었고 그의 모친과 처자 등 200여명은 광서용주(廣西龍州)로 도망을 가서 청정부에게 구원을 요구했다. 홍력제(弘歷帝)는 여유기(黎維祁)는 강희제(康熙帝가) 책봉한 왕이고 100여 년을 내려오면서 대대로 베트남 백성들의 조공을 받아왔으므로 이 왕조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은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명을 내려 양광(兩廣) 총독 손사의(孫士毅), 제독 허세형(許世亨)에게 양광(兩廣)의 녹영병(綠營兵) 만여 명을 인솔하고 진남관(鎭南關-지금의 목남관(睦南關))에서 나와 하노이를 진공하고; 운남(云南) 제독 오대경(烏大經)은 8000여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개화부(開化府)의 마백관(馬白關)을 지나 도주하(賭咒河)를 건너 선화진(宣化鎭)을 진공하기로 했다.

 

11월 량산(諒山)에서 진군하여 잇따라 수창강(壽昌江), 시구강(市球江), 부량강(富良江)을 강행하여 건너고 완군(阮軍)을 대패했으며 하노이를 함락했다. 이때 건융(乾隆)은 여유기(黎維祁)를 안남(安南)의 국왕으로 책봉하고 오대경(烏大經)의 부대가 선화(宣化)에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손사의(孫士毅)의 군사를 철퇴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손사의(孫士毅)는 완문혜(阮文惠)를 생포하여 공을 세우려는 마음으로 즉시 철퇴하라는 명령을 어겼을 뿐 아니라 적을 경시하여 방비도 하지 않았다.

 

 이해 그믐 밤, 완문혜(阮文惠)는 연회를 베풀고 있는 기회를 빌어 하노이를 돌연 습격하였고 이에 청군(淸軍)은 황망히 대응했지만 대패하여 철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총병 이화(李化)는 대군이 부량강(富良江)을 건너는 것을 엄호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 제독 허세형(許世亨), 총병 장조룡(張朝龍)도 전사했다. 손사의(孫士毅)는 관외(關外)에 비축했던 수십만에 달하는 양식과 군 장비를 모조리 태워버리고 진남관(鎭南關)으로 철퇴해 왔다. 건융제(乾隆帝)는 손사의(孫士毅)가 명을 어기고 제때에 돌아오지 않은데다가 수비를 제대로 하지않은 죄로 관직을 박탈했다. 그때 안남(安南)은 사이암(태국의 옛이름)와 교전하고 있었다. 완문혜(阮文惠)는 청군(淸軍)이 재차 토벌을 강행하면 앞뒤로 적의 진공을 감당하기가 두려워 그 형을 파견하여 청정부에 상소문을 바쳐 용서를 빌었고 사당을 세워 전사한 청군의 관병들을 추모하고자 했다. 건융제(乾隆帝)도 청군(淸軍)이 수십 년간 계속되어온 전쟁 때문에 국고가 고갈된 상황을 고려하여 완광평(阮光平-완문혜(阮文惠)의 다른 이름)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를 안남(安南)의 국왕으로 봉했다. 원래의 국왕 여유기(黎維祁)는 북경(北京)으로 이주해 와서 한군(漢軍) 기적(旗籍)으로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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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4 15: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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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5.20 중국 역사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독재 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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