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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프랑스 전쟁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5.20|조회수256 목록 댓글 0
 

  

 이 름    333333333333

제 목    1883년 베트남을 놓고 청과 프랑스가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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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프랑스 식민자들은 베트남 전 국토를 점령하고, 나아가 중국 가운데의 서남 관문을 관통하여 침입하는 것을 전략목적으로 한차례 중국 침략 전쟁을 발발하고 역사에서는 이를 중국-프랑스 전쟁이라고 칭한다.

 

일찍 18세기의 하반기에 프랑스 식민자들은 베트남을 기지로 삶고 중국 서남과 중부 지역를 통하는 침략 통로를 개척하려고 기도했었다. 제 2차 아편전쟁이 결속되자 프랑스 정부는 곧 바로 침화군 중에서 3500명을 소집하여 베트남 남쪽 변경을 진공하였고 게다가 1862년 6월에 베트남의 완복시(阮福時) 왕조를 핍박하여 제 1차 <사이공조약(西貢條約)>을 체결했으며, 사이공을 중심으로 베트남 남방의 넓은 지역를 프랑스에게 할양하도록 했다. 1873년 후, 북쪽 변경도 점령하고 홍하(紅河)를 따라 중국의 서남 지역으로 침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베트남 북부에 대하여 무장 공격을 발발했다.

 

베트남 통치자와 만청(滿淸) 통치자 사이에는 일종의 특수한 역사관계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의 국왕은 청정부 황제의 “책봉”을 받아들이고 아울러 정기적으로 사람을 북경(北京)으로 파견하여 “조공(朝貢)”을 하고; 청왕조는 베트남에 대하여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침략을 당하자 베트남 국왕은 한편으로는 흑기군(黑旗軍)에게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도와주도록 청하고 한편으로는 청정부의 구원을 청구했다. 그러나 서태후(西太后) 나납씨(那拉氏)가 쥐고 있는 만청(滿淸) 정부는 대외적으로 양보하고 타협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비록 1882년부터 얼마간의 군대를 계속 증원 파견하여 베트남 북쪽 국경 지대에 주둔시켰지만 “분쟁의 발단을 우리가 만들어서는 안된다”며 재삼 지시하며 시종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했다. 이 기간에 광동(廣東), 광서(廣西) 변경에서 베트남 북쪽의 보승(保勝)으로 이동해 온 흑기군(黑旗軍)의 수령 유영복(劉永福)은 여러 차례나 군사를 인솔하고 베트남 군민과 배합하여 하노이(河內) 등에서 프랑스군에게 침통한 타격을 주었고 완(阮)씨 왕조는 그를 “삼선부제독(三宣副提督)”으로 임명하고 선광(宣光), 흥화(興化), 산서(山西) 3개성을 관리하여 프랑스군이 홍하(紅河) 상류 지역에 대한 침략을 저격하도록 했다.

 

프랑스 침략자들은 흑기군(黑旗軍)이 홍하(紅河) 상류 지역를 공제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운남(云南)을 직접 엿볼 수 없게 되어 이 “눈의 가시”를 제거해 버리고자 결정했다.

 

이해 3월 프랑스 사이공 식민당국은 해군 상교 이위리(李威利)를 파견하여 수천 명 군사를 인솔하고 북상하여 북쪽 변경에 대한 무장 진공을 재차 발동하였다. 4월 하노이를 점령했다.

 

이듬해 3월에 남정(南定)도 함락했다. 계속해서 홍하(紅河)를 거슬러 끊임없이 상류를 향하여 침범했고 게다가 10만원 현상금을 내걸고 흑기군(黑旗軍)의 근거지인 보승(保勝)을 함락하려 했다. 이에 유영복(劉永福)은 수천 명 군사를 출정시켜 베트남의 북방 변경 총독 황좌염(黃佐炎)의 소속부대와 회합하여 프랑스군을 반격했다. 5월 하노이 성 서쪽의 지교(紙橋) 부근에서 매복전을 벌려 수백 명 적군을 섬멸하고 양위리(楊威利) 등 프랑스 군관 30여 명을 죽였다. 전쟁 후 베트남 정부는 유영복(劉永福)을 “삼선정제독(三宣正提督)”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고 곧 이어 사이공 프랑스군 사령 파활(波滑)을 북방 변경 프랑스군 총수로 하고 육군을 증원 파견한 외에 북방 함대도 세우고 해군 소장 고발(孤拔)이 지휘하도록 했다.

 

 8월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북침했다 ; 파활(波滑)이 한 갈래 부대를 인솔하고 홍하(紅河)를 따라 흑기군(黑旗軍)을 진공하고; 고발(孤拔)이 인솔한 해군은 베트남 수도 순화(順化)를 진공했다. 파활(波滑)의 부대가 연달아 좌절을 당할 때 고발(孤拔)는 순화(順化)로 쳐들어갔고 완복시(阮福時)가 병사하여 정국이 불안한 기회를 틈타 베트남 정부를 핍박하여 제1차 <순화조약(順化條約)>을 체결했으며 베트남을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함락시키고자 기도했다. 계속해서 만청(滿淸) 정부를 위협하여 북쪽 변방에 주둔한 중국군대를 철퇴하고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점령을 승인하며 게다가 중국과의 불평등한 상무협정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무리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곧 무력도발을 결정했다.

 

 12월, 프랑스 침략군은 거리낌 없이 북쪽 변방에 주둔해 있는 중국 군대를 향하여 진공을 발동하였고 청군(淸軍)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하여 중국, 프랑스 전쟁이 정식으로 폭발했다.

 

이번 전쟁은 두 단계를 걸쳤다. 첫 번째 단계는 베트남 북방 홍하(紅河) 삼각주 내의 산서(山西), 북녕(北寧) 등지에서 주로 진행되었고; 두 번째 단계는 중국의 동남 연해 지역와 베트남 북방 두 전장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당시 만청(滿淸) 정부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대하여 여전히 평화를 보수하는 방침을 택하여 베트남에서는 “북방을 보수하고 적극 전(滇), 월(粵) 두 관문을 고수하라”하고; 중국에서는 연해의 각 항구와 장강 연안 일대를 지키는 것이다. 그 작전 부서로는 북방 변경에서는 북녕(北寧)을 중점으로 산서(山西)를 모퉁이로 하고 각각 명을 내려 광서(廣西) 순무(巡撫) 서연욱(徐延旭)과 운남(云南) 순무(巡撫) 당형치(唐炯馳)에게 전선에 나가서 각 진영의 군사를 감독 인솔하고 엄밀히 수비함으로서 남쪽 관문을 고수하라고 했다. 연해 방면에는 천진(天津), 광동(廣東을) 중점으로 연해 각 성의 항구마다에 요충지를 택하여 배치함으로서 프랑스 해군의 습격과 교란에 방비하였다. 또한 명을 내려 장강 중하류에 위치한 각 성들은 강 기슭의 형세를 중요시하고 요충을 지켜 적의 선박이 강 따라 연안 도시에 대한 침범을 방비하게 하였다. 프랑스군은 먼저 산서(山西)를 함락한 다음 북녕(北寧)을 진공하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산서(山西)는 홍하(紅河)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고 북녕(北寧)과 대각선으로 대칭하고 있어 하노이를 굽어보면서 공제할 수 있기 때문에 홍하(紅河) 중상류를 지키는 전략요지이다. 수비군 5000명에 흑기군(黑旗軍) 6개 진영과 계군(桂軍) 1개 진영이 성 북쪽 제방을 지키고; 흑기군(黑旗軍) 5개 진영이 성 동쪽을 지키며; 흑기군(黑旗軍), 계군(桂軍) 각 1개 진영이 성 남쪽을 지키고; 전군(滇軍) 3개 진영이 성 서쪽을 지켰다. 게다가 베트남 북방 총독 홍좌염(黃佐炎) 등이 200명 군사를 인솔하고 남쪽 성문 밖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11월 프랑스 원정군 총사령 고발(孤拔)은 6000명 군사를 이끌고 수, 륙 두 부대로 나누어 하노이에서 산서(山西)를 향하여 진격했다. 14일에 공격을 개시하고 부사(扶沙) 요새를 파괴했다. 흑기군(黑旗軍)과 격렬한 싸움 끝에 성 북쪽의 제방 진지를 점령했다. 16일 부리(扶里) 포대를 함락하고 서문으로 성내에 쳐들어와 잔인한 대 도살을 진행했다.

 

프랑스군이 산서(山西)를 함락하는 전쟁에서 수비군에게 천여 명이나 살상되어 공격을 계속해 나갈 힘이 없었다. 이때 청정부는 명을 내려 광서(廣西) 순무(巡撫) 서연욱(徐延旭)의 군사는 북녕(北寧)을 엄수하게 하고, 운귀(云貴) 총독 잠육영(岑毓英)은 신속히 관문을 나가 흥화(興化) 방면의 방어를 강화하게 하고 또 양광(兩廣)의 총독 장수성(張樹聲)에게 “능력 있는 장령을 먼저 파견하여 강한 여단을 통솔하고 진남관(鎭南關-우의관(友誼關))으로 신속히 달려가 후방을 충실하게 하라” 하였다.

 

1883년 2월, 프랑스 육군은 북방 변경으로 일개 보병 여단과 두 개의 포병대대, 일개 공병을 증원 파견하여 원정군의 총 병력이 1만8천여 명에 달하고 두 개 여단으로 편성했다. 게다가 포선이 20여 척이나 있었다.

 

 3월 프랑스군은 북녕(北寧)을 향하여 진군했다. 원정군 부사령 니격리(尼格里)가 제2 여단을 인솔하고 해양(海陽)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태평강(太平江)을 거슬러 북상하고; 신임한 원정군 총사령 미락(米樂)과 부총사령 파리(波里)가 인솔한 일개 부대는 신하(新河)를 가짜로 진공하는 척하고 주력군은 신하(新河) 남쪽 기슭을 따라 동쪽으로 질주하여 전진했다.

 

 11월 제1 여단은 북녕(北寧)의 동남쪽에서 신하(新河)를 건너서 제2 여단과 회합했다. 다음날 북, 동, 남 3개 방향에서 동시에 북녕(北寧)을 향하여 진공했다. 제2 여단의 일개 부대는 함대의 포화력의 지원을 받으며 계양(桂陽), 춘수(春水) 등지로 진공하고; 제1 여단은 신속히 서쪽으로 기동하여 북녕(北寧) 남쪽에서 공격을 발기하고; 제2 여단의 다른 일개 부대는 수로를 따라 성 북쪽까지 돌아가서 용구(涌球-답구(答求))를 탈취하고 청군(淸軍)의 뒷길을 차단하려했다. 그날 오후 제2 여단은 용구(涌球)를 가볍게 탈취하고 나서 북녕성(北寧城)을 진공했다. 마침 성밖에서 독전하던 청나라 장수 황계란(黃桂蘭) 등은 상황이 긴급함을 알고 뜻밖에도 지휘를 포기하고 량강(諒江), 태원(太原) 방향으로 도망가 청군(淸軍) 전부가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곧 이어 프랑스군은 군사를 나누어 청군(淸軍)을 추격하여 량강(諒江), 랑갑(郞甲), 태원(太原) 등지를 연이어 함락했다.

 

4월, 홍하(紅河) 삼각주 전부의 중요한 도시를 점령했다. 그리고 나서 한편으로는 광주(廣州)를 공격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한편으로는 가급적으로 청정부와 강화할 것을 유인했다.

 

5월 11일 이홍장(李鴻章)은 프랑스 해군 중교 복록낙(福綠諾)과 천진(天津)에서 <중국 프랑스 간명조약(中法簡明條約)>을 체결하여 전쟁의 제1단계의 결속을 상징하였다.

 

청정부의 타협은 결코 “화국(和局-평화 국면)”으로 바꾸지지 못했다.

 

 6월 미락(米樂)은 명을 내려 육군 중교 두삼니(杜森尼)의 군사를 북상시켜 량산(諒山)을 진공하게 했는데 북여(北黎-북려(北麗))에서 청군(淸軍)에게 격퇴 당했다. 프랑스 정부는 “북여(北黎) 충돌”을 핑계로 중국 침략 전쟁을 확대했다.

 

 7월 13일 프랑스 해군 식민 부장 배용(裴龍)은 전보로 고발(孤拔)에게 명령하여 조달할 수 있는 모든 선박들을 복주(福州)와 기융(基隆)으로 파견하게 하였다. 곧 이어 고발(孤拔)이 인솔한 원동 함대는 중국의 동남 연해 지역으로 몰고 들었다.

 

 8월, 그 함대 부사령 리사비(利士比)는 2척의 군함을 이끌고 대만의 기륭(基隆) 항구로 쳐들어가 전에부터 이 해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른 한 척의 프랑스 군함과 회합하고 기륭(基隆)에 대한 첫 번째 진공을 발기하였지만 수비군의 반격으로 연거푸 패전하여 퇴각하였다. 북경에서 담판을 하고 있던 프랑스 대표는 “기륭(基隆) 사건”을 핑계로 계속해서 청정부에게 “북여(北黎)사건”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협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 프랑스의 외교관계는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이전에 기륭(基隆)에서 패배하여 철퇴한 프랑스 함대는 연이어 복건(福建) 연해로 침입해 들어왔다. 고발(孤拔)은 6척의 군함을 인솔하고 마미항(馬尾港)의 박라성탑(泊羅星塔) 부근까지 침입하여 기회를 엿보아 중국 함대를 공격하려했다. 곧 이어 프랑스의 순양함 2척이 또 항구 내로 침입했다. 당시 복건(福建)의 군사 지휘를 책임진 흠차회변(欽差會辨) 복건(福建) 해강(海疆) 사의(事宜) 대신(大臣) 장패륜(張佩綸)과 민절(閩浙) 총독 하경(何景) 등은 청정부의 “우리측에서 먼저 도발해서는 안 된다”는 지령에 근거하여 프랑스 함대의 침입에 대하여 감히 저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발(孤拔)에게 우호적인 접대까지 하며 효과적인 방어를 하지 않았다. 복건(福建)의 수사(水師)도 반드시 적군이 먼저 포사격을 해야 반격을 할 수 있다는 명을 받들고 있었다. 담판이 결렬된 후 다음 날, 프랑스 정부는 고발(孤拔)에게 전보를 보내어 중국의 복건(福建) 해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8월 24일 고발(孤拔)은 낙조의 기회를 틈타서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여 갑작스런 공격을 시작했다. 복건(福建) 해군은 미쳐 닻도 올리지 못하고 적군함의 한바탕 포탄에 명중되어 두 대가 침몰하고 많은 군함이 부서졌다. 장패륜(張佩綸) 등은 싸움이 두려워 도망을 했고 수사(水師)의 지휘를 책임진 부장 장성(張成)도 군함을 버린 채 도망하여 각 군함의 장병들은 통일적인 지휘를 상실한 상태에서 황망히 전투에 응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하층 관병들은 의연히 용맹하게 반격을 가하였다. “건승(建勝)”함선은 고발(孤拔)이 승선한 “와이달(窩爾達)”호를 격상하였고; “진위(振威)” 함선의 대장 허수산(許壽山), “복성(福星)” 함선의 대장 진영(陳英) 및 “복승(福勝)”, “건승(建勝)”의 대장 여한(呂翰) 등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1시간도 채 되기 전에 복건(福建) 수사(水師)는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일주일 후 프랑스 함대는 비로소 민강구(閩江口)에서 전부 철수했다. 이번 마강(馬江)의 해상 전쟁에서 복건(福建) 수사(水師)의 군함은 9척이 함몰되고 2척이 부서졌으며 그 외에도 10여 척의 병선이 훼손되고 700여명의 장병들이 전사했고; 프랑스 함대는 2척의 군함과 한 척의 수뢰정이 격상되고 고발(孤拔)이 부상을 입어 훗날 상처로 인하여 병사했다.

 

26일 청정부는 어쩔 수 없이 선전포고를 발포하고 명을 내려 전선에 있는 해륙 각 군이 대 프랑스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9월, 고발(孤拔)은 프랑스 정부의 지령을 받고 리사비(利士比)와 함께 각각 함대를 인솔하고 마조오(馬祖澳)에서 출발하여 대북(臺北)을 향하여 진공하였다.

 

 10월 2일 고발(孤拔)의 함대는 손쉽게 기륭(基隆)과 사구령(獅球岭)을 함락하였다.

 

8일 리사비(利士比)의 함대는 담수(淡水)의 수군에 의하여 격파되었다.

 

 23일 프랑스 침략자들은 대만 해협의 봉쇄를 선포했고 대만의 수비군을 고립하려고 기도하였다. 조국의 영토를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 각지에서는 대만을 지원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복건(福建) 전선의 군민은 반 봉쇄 투쟁을 진행하였다.

 

이듬해 1월 청정부는 남양(南洋) 해군에게 명을 내려 “천제(天濟)”, “남친(南琛)”, “남서(南瑞)”, “어원(馭遠)”, “징경(澄慶)” 등 5척의 군함을 파견하고 총병 오안강(吳安康)의 통솔 하에 상해(上海)에서 남하하여 대만을 지원하도록 하여 2월에 고발(孤拔)이 이끈 함대와 절강(浙江) 석포(石浦) 천두산(擅頭山) 부근 해상에서 만났다. 오안강(吳安康)은 적들과의 교전이 두려워 군함을 인솔하고 도주했다. “어원(馭遠)”, “징경(澄慶)”은 시속이 빠르지 못하여 석포항(石浦港)으로 몰려 프랑스 군함이 봉쇄하여 격침시켰다.

 

28일 고발(孤拔)은 4척의 군함을 인솔하고 진해(鎭海) 해상으로 들어와 “천제(天濟)” 등 3척의 군함을 추격하였다. 적들은 여러 차례 밤새 몰래 건너오거나 또는 어뢰로 공격을 했지만 모두 진해(鎭海)의 수비군에 의하여 격파되어 하는 수 없이 남으로 되돌아갔다.

 

동남 연해에서 군민이 일어나 프랑스군의 침입에 항거함과 동시에 청군(淸軍)은 북방 변경의 전장에서도 반격을 발기했다. 동쪽 전선에서는 계군(桂軍)이 량강(諒江), 태원(太原)을 진공하고 서쪽 전선에서는 전군(滇軍)과 흑기군(黑旗軍)이 선광(宣光) 및 백학(白鶴), 영상(永祥) 부근 지역을 진공했다. 양쪽 군은 태원(太原), 영상(永祥) 일대에서 군사를 돌린 후 힘을 합쳐 북녕(北寧), 하노이를 진공하였다. 전쟁 초기단계에 계군(桂軍)이 반격전에서 불리하게 되고 전군(滇軍)의 동쪽 진공도 저지되었다.

 

3월에는 각 전선의 청군(淸軍)이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서쪽 전선에서는 중국과 베트남의 군민이 긴밀히 배합하여 먼저 임조(臨洮) 부근에서 프랑스군을 패전시키고 계속해서 광위(廣威)등지를 함락했다. 동쪽 전선의 청군(淸軍)은 진남관(鎭南關-우의관(友誼關)) 대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문련(文淵-베트남 동등(東登)), 량산(諒山)을 점령하고 있었고 기회를 엿보아 다시금 진남관(鎭南關-우의관(友誼關))을 침범하려고 했다. 동쪽 전선의 총지휘 마자재(溤子材) 노장군은 진남관(鎭南關)으로 달려가 대오를 정돈하고 전선을 지켰다. 그는 관내에서 8리쯤 떨어진 관전애(關前隘-애구(隘口))를 예설 진지로 선정하고 비교적 완정한 방어공사를 축성하였다. 동시에 양쪽에서 호응하고 정면에서는 종심 진행의 배치방식을 채택하고 중병을 두어 수비하였다. 자신이 친히 9개 진영을 인솔하고 정면 방어를 담임하여 두 고개 사이에 세워진 장벽 및 양측 산 고개에 있는 요충을 지키고; 총병 왕효기(王孝褀)의 부의 8개 단은 마군(溤軍)의 뒤에 주둔하여 제2 제대로 편입하고; 상군(湘軍)은 왕덕방(王德榜) 부대의 10개 단을 거느리고 관외(關外) 동남의 유애(油隘)에 주둔하면서 좌익군의 안전을 보장함과 동시에 적의 퇴로를 위협하며; 그 외의 5개 단은 구파(扣波)에 주둔하면서 우익군의 안전을 보장하고; 군무를 책임진 광서(廣西) 제독 소원춘(蘇元春) 등의 부대 18개 진영은 관전애(關前隘)의 뒤쪽에 있는 막부에 주둔하여 후대 작용을 하고; 또 12개 진영은 빙상(憑祥)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기동작용을 하였다. 전선의 병력을 총계하면 62 진영에 3만여 명에 달했다. 월초에 마자재(溤子材)는 프랑스군이 곧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군사를 파견하여 문련(文淵)을 야습하여 프랑스군의 부대를 흩트려 놓아 적들이 지원군이 채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공하도록 다그쳤다.

 

 7월 프랑스군 동경군구(東京軍區) 부사령 내격리애(內格里埃) 상교는 천여 명의 군사로 관내(關內)를 침입하고 다른 천여 명의 군사를 관외(關外) 동남쪽 고지에 주둔시켜 후발대로 하였다. 곧 이어 적군은 포화의 엄호 하에 두 갈래로 나누어서 관전애(關前隘)로 쳐들어와 동쪽 고개에 있는 3개 보루를 점령하고 따라서 장벽을 향하여 맹렬한 진공을 들이댔다. 이때, 마자재(溤子材)는 한편으로는 각부에 명을 내려 전쟁을 맞아 싸우고 한편으로는 명을 내려 구파(扣波), 막부(幕府)의 각 군사에게 책응해 나서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춘(蘇元春)의 군사가 동쪽 고개까지 달려와 프랑스군의 진공을 제지하였고; 왕덕방(王德榜)의 부대는 프랑스군의 노새와 말로 조성된 운수대를 습격하여 적들의 예비군대 증원을 견제하였다. 다음날 마자재(溤子材)는 손에 긴 창을 들고 적진에 돌입하고 전군을 인솔하여 장강으로 접근해 오는 적군과 육박전을 벌려 재차 관전(關前)까지 쳐들어온 적군을 격퇴하였다. 그 기세로 적군을 추격하여 문련(文淵), 량산(諒山)을 연속 함락하고 내격리애(內格里埃)에게 중상을 입히고 프랑스군을 랑리(郞里) 이남까지 쫓아냈다.

 

진남관(鎭南關)의 대 승리는 청군(淸軍)으로 하여금 중국, 프랑스 전쟁에서 패배를 승리로 바꾸었고 민족정신을 진흥시켰다. 청군(淸軍)이 승승장구로 동서 양로로 나누어 남쪽으로 추격할 무렵, 만청(滿淸) 정부는 오히려 타협하여 화의하는 정전철병령(停戰撤兵令)을 하달하였다. 4월 프랑스와 <파리 정전 협정(巴黎停戰協定)>을 체결했다. 6월 또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프랑스와 <중, 프랑스 신약(中法新約)>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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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5 16: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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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3333333  이때 좌종당의 남양함대가 붕괴될 때 이홍장의 지원이 없어서 후일 좌종당계열의 상군들이 이홍장의 회군을 전혀 돕지 않는 가운데 청일 전쟁은 일본과 이홍장 계열 군대만의 싸움이 되었소 24.148.83.203 2007/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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