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쯩자매(徵姉妹)----한나라에 맞서다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5.20|조회수426 목록 댓글 0
 

이 름    333333333333

제 목    [펌] 쯩자매(徵姉妹)----중국에 맞서다 ---베트남의 외세에 대한 투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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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미국과 종전 협정을 맺고 통일 국가를 이루어 냈다. 오랜 역사 동안 중국과 프랑스와 미국과의 끈질긴 전쟁 끝에 이루어낸 통일과 완전 자주 독립이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유사하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도 3천년간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베트남 사람들은 위대하다. 그 중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국가적 영웅이 있다. 쯩 자매이다.



- 여자의 몸으로 일어서 중국에 맞서다.


‘남자 영웅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하였지만 두 자매는 당당하게 서서 나라의 원수를 갚았네’15세기 베트남의 한 시인이 쯩자매를 위해 바친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에 점령되었다. 초기 한나라의 베트남 통치는 간접적이고 폭압적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그 속에 안주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기원 후 40년을 전후로 베트남에 대한 착취를 본격화하였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나 터져 나왔지만 아무도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알게 모르게 배인 패배의식이 베트남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 것이다. 그때 쯩 짝과 그녀의 여동생 쯩 니가 분연히 일어났다 그녀들은 사람들에게 중국을 몰아 내고 자주권을 찾자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있던 베트남 사람들은 두 자매의 이야기에 서서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던 많은 베트남의 남자들이 여자의 몸으로 중국에 당당히 맞선 쯩 자매에 감동하여 그녀들의 지휘 하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 지방 영주의 총명한 딸들.




 



쯩자매는 기원 후 14년경 북 베트남의 지방 영주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들도 처음부터 베트남 민족을 이끈 강인한 지도자로 자란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 가까운 북베트남 지역의 영주의 딸로 자라면서 중국의 폭압을 지켜보기는 하였지만 여자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자매의 어머니가 혜안을 가지고 어수선한 시대를 살아가는 딸들에게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교육을 직접 가르치기는 하였다. 두 자매는 어린 시절 총명하고 건강하게 자랐지만 대중의 앞에 나서 지도자가 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매의 맏이인 쯩 짝은 부모의 권유와 사랑으로 또 다른 지방의 영주 티 삭과 결혼을 하고 행복한 영주의 부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동생 쯩 니 또한 앞날의 장밋빛 행복을 꿈꾸는 조신한 처녀였을 뿐이었다.



- 남편을 잃고 분연히 일어서다.


두자매의 맏이 쯩 짝의 남편 티 삭은 베트남을 독립시켜려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티 삭은 주변의 영주들을 모아 중국을 몰아낼 비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티 삭의 아내 쯩 짝도 남편의 계획에 동조하여 그를 내조하였다.


티 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영주들의 계획은 은밀하고 조용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비밀 계획은 발각되고 티 삭은 중국군에게 잡혀가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남편의 목이 중국군의 성밖에 내 걸린 것을 목격한 쯩 짝은 누군가 남편의 원한을 갚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과 함께 비밀 계획을 진행하던 다른 사람들은 중국군의 잔인한 처벌이 두려워 감히 나서지를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한 쯩 짝은 자신의 개인적 불행이 사실은 베트남 민족 전체의 불행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언니의 고통을 통해 새롭게 베트남 전체의 불행에 눈뜬 여동생 쯩 니와 함께 중국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결심한다.


미망인으로 상복을 입을 것도 거부한 쯩 짝과 동생 쯩 니는 사람들 앞에 나서 중국군을 몰아 내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발달된 병기와 조직을 갖춘 중국군과 맞설 것을 두려워하였다. 게다가 쯩 자매를 여자라고 불신하였다.


쯩 자매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그녀들은 직접 호랑이를 사냥하여 그 가죽으로 전투에 대한 명령서를 작성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녀들의 확고한 의지와 강인함을 본 베트남 사람들은 이제 쯩 자매의 지휘아래 중국을 몰아 내기 위한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마침내 전쟁은 시작되었다.


쯩자매는 함께 나란히 코끼리에 올라 전투를 직접 지휘하였다. 또 자매는 군대의 지휘를 모두 여성들에게 맡겼다. 베트남의 뛰어난 여성 36명이 지휘하는 8만의 베트남 군대는 여성의 따뜻함과 노련함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기원후 40년. 중국 한나라의 군대에 맞서 베트남의 사람들은 봉기하였다. 정규군도 아닌 지원병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군사들은 오로지 폭압과 착취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의 하나만을 품고 중국군에 맞섰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였다.


중국군을 몰아 낸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지배 하에 있던 65개의 성을 되찾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쯩 자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가혹한 중국의 착취에 고통 받던 베트남 사람들은 이제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베트남의 자유는 3년 만에 끝나고 만다.


후한의 광무제가 다시금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베트남을 쳐들어 온 것이다. 쯩 자매는 다시 전투에 나섰다. 베트남 사람들은 다시는 중국에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똘똘 뭉쳐 중국에 맞섰다. 그러나 중국은 베트남에 비해 너무 큰 나라였다.


쯩 자매는 기원후 43년. 지금의 하노이 부근에서 중국과 최후의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서 베트남 군사 수 천명은 산 채로 잡혀 목이 잘리고 만 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쯩자매는 적군의 손에 들어가 능욕을 당하는 대신에 자결을 택했다. 자매는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베트남은 그 후 900년 간 중국의 지배 하에서 고통 받다가 972년에 가서야 겨우 독립을 하게 된다.



- 베트남의 국민 영웅


쯩 자매는 지금도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 받는 영웅이다. 특히 베트남 여성들 열이면 열 모두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들 쯩 자매를 꼽는다고 한다. 베트남 하노이에는 자매를 기리는 길인 하이 바 쯩(쯩자매)이란 이름의 길이 있다. 베트남의 중요 축제에는 쯩 자매 축제가 있고 많은 사당에서 쯩 자매를 모시고 있다. 이외에도 쯩 자매와 관련한 시와 노래, 연극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쯩 자매를 기념하는 우표와 동상, 대학 등이 만들어졌다.



하이바쯩 (Hai Bà Trưng - '쯩‘ 자매)은 중국의 천년 지배기간 (B.C. 111~A.D. 938) 중 최초로 독립 국가를 세운 여성 지도자다. 쯩 자매가 세운 나라는 A.D. 40부터 3년 동안 지속되었다. ‘쯩’ 자매 부대에는 무려 75 명의 여성장군이 있었다.


"역대 왕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두 자매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맹세한 후 코끼리를 타고 제일 먼저 진군했다. 두 자매 휘하 장군들도 각기 정해진 지역을 향해 군을 이끌고 . . . .



하늘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   하이바쯩 (Hai Bà Trưng - ‘쯩’ 자매)


1. 기원전 179년 찌우다는 앙즈브응 왕이 다스리는 어우락 국을 빼앗고 남비엣에 복속시켰다.


(훙브응시대 종말) 기원전 111년 전까지 찌우 왕조 역시 중국의 ‘漢’나라에 복속되고 만다.


당시 ‘한’나라는 3다시 이 지역을 ‘야오찌’ (북부)와 ‘끄우쩡’(그 아래), 그리고 ‘녁남’ (중부) 세 부분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AD. 8년 ‘왕망’이 ‘漢’나라를 집어삼켰으며 다시 ‘유수’가 그를 죽이고 제위에 올라 스스로 광무제 (Quang Vũ Đế)라 칭했다. (동한 시대)

 

2. AD. 34년  한나라는 ‘야오찌’로 총독을 파견했다.


그는 제일먼저 양민들을 강제로 불러들여 노역을 시키고 군졸을 삼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대거 이곳으로 이주하여 땅을 차지하고 마을을 이루어 이곳 주민들과 서로 동화되어갔다.

3. 한나라의 관리들은 기존의 통치자인 ‘락뜨응’이나 ‘락허우’를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거나 모욕을 주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차후에 일어날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한족은 복장에서 예식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풍습과 습관을 강제로 바꾸려 했다.


백성들은 점차 더 가난해지고 억울한 일도 늘어만 갔다. 가만히 엎드려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부녀자들이 겁탈을 당하거나 치욕을 당하는 것이었다.


중세와 노역 역시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한나라를 향한 증오심은 날이 갈수록 더 크게 불타올랐다.

4. ‘메린’ (지금의 하따이 성 부근)에는 훙브응 시대 장관직을 맡던 명망 높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그의 마음 한 가운데는 항상 나라를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쯩짝 (Trưng Trắc)과 쯩니 (Trưng Nhị)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두 자매는 한나라를 향한 증오심을 불태우며 날마다 활과 무예연습으로 신체를 단련했다.

5. ‘메린’ 옆의 ‘쭈징’은 인구가 많고 산업이 제법 발달한 곳인데 이곳의 촌장 역시 의협심과 애국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용모가 준수하고 무예에 능한 티삿 (Thi Sách)이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족장들의 회의에 자주 참여하여 함께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무술 훈련을 거듭하면서 나라를 구할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편 ‘메린’과 ‘쭈징’의 족장 두 사람은 본래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들은 자주 만나 주로 하나라의 악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를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곤 했다.

 

6. 어느 날 ‘티삿’은 아버지를 따라 ‘메린’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기서 우연히 ‘쯩짝’과 ‘쯩니’ 두 자매를 만났는데 이들은 만나자 마자 금방 친해졌고 그 와중에 ‘티삿’과 ‘쭝짝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돌자 두 지역 사람 모두가 즐거워했다.

7. 한편 동찌우 (Đông Triều)에서는 이미 500명의 의병이 일어나 한나라의 폭정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깨사이 (Kẻ Sải) 지역에서도 쩡느응과 티잉바오 두 사람이 1천여 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한나라 군대를 괴롭혀왔다.


이들이야말로 한나라에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들이었다.


또한 즈응럼 (하따이 성 소속)에서도 한나라 군대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두 자매가 궐기하기로 결심했다.

8. ‘야오찌’의 형세는 날로 험악해져갔다.


이들의 반란으로 편히 잠을 청할 수 없었던 한나라 군대는 마침내 진압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심한다.


마침 그 사이 ‘티삿’과 ‘쯩짝’ 두 집안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결혼식 준비로 들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나라 군대는 축제분위기에 들뜬 주민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티삿’을 끌고 갔다.


그리고 만일 각 지역에서 반란을 멈추지 않는다면 ‘티삿’을 죽여 버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런 공갈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날카로운 칼날이 ‘티삿’의 목을 내리쳤다.


시뻘건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9. ‘티삿’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두 자매의귀에 들어가자 마침내 참아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두 자매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애국심에 불타는 연설을 했다.


드디어 때를 기다려왔던 주민들의 마음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일거에 한마음이 된 것이다.

10. 그런 와중에서 수십 명씩 소규모로 저항하던 의병들이 두 자매의 의병에 가담하여 그들의 지휘를 받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의병의 수는 늘어만 갔다. 한편 ‘아뚜’에는 50여명의 처녀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은 활 솜씨가 백발백중에 바람같이 빨라 한나라 군대는 이들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들 역시 ‘하이바’ (Hai Bà) 자매 부대에 합류했다.



18. 패잔병들은 배를 타고 달아나려 했지만 ‘사릉’ (Sa Lương) 장군이 지키는 의병들이 배에 불을 지르자 산 채로 물고기 밥이 되었다.


‘하이바쯩’ 자매는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루이러우’로 입성, 감격스런 해방을 선포했다.


사가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쯩짝’과 ‘쯩니’ 자매가 부르짖자 인근 65 성이 일제히 호응했다.


- ‘레방 흐우’ (Lê Văn Hưu)의 ‘다이비엣스끼’ (Đại Việt Sử ký) -


19. 두 자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2년간 면세조처였다.


한나라의 악정과 중세에 시달려 허리가 휘도록 일하던 백성들은 “만세! 만세!”를 외쳐댔다.


‘훙브응’ (Hùng Vương)시대의 옛 관직이 회복되고 결혼, 장례, 복장, 그밖에 각종 풍습들이 되살아난 것은 물론이었다.


20. 20년간 한나라의 폭정에 시달렸던 이 지역에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젊은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노인들은 둘러앉아 전쟁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며 ‘르우껑’ (rượu cần)을 마셨다.


하지만 한 나라의 ‘광무제’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AD 32년경 병력을 재정비한 후 ‘마빙’ (Mạ Viễn)을 비롯한 왕의 신임을 얻고 있던 노련한 장군들 셋을 앞세워 대군을 파병했다.


21. 2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2천척의 배를 나누어 탄 후 국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북쪽 산간지방을 통하여 침입하려던 첫 번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숲속의 지형에 통달한 소수민족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2. 바다를 통해 들어오던 군사들로 여장군 ‘레쩡’의 격렬한 반격에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마침내 2달 후 ‘마빙’의 군사들은 ‘야오찌’에 발을 디뎠다.


한편 ‘하이바쯩’ 자매는 ‘꼬로아’에서 필사적인 항전 체제에 돌입했다.


23. 여러 번의 공격에도 성과가 없자 ‘마빙’은 일단 ‘꼬로아’ 북쪽의 ‘랑박’ (Lãng Bạc)에 기지를 만들고 길게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자 북쪽에서 원병을 끌어들여 ‘어우락’을 접수하고 두 자매를 생포하기 위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24. 43년 음력 3월 8일 엄청난 손실을 입고 ‘껌케’ 기지가 포위되자 두 자매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학’강에 뛰어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병사들은 이곳에서 5천명 이상을 학살했다. 

25. 44년, 마침내 한나라 군대는 북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차라리 죽을 지언정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이다. 

26.  두 자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하노이’의 ‘동녕’ (Đồng Nhân) 사당 (2월 3-6일), ‘하따이’ 성의 ‘학몽’ (Hát Môn) 사원 (3월 8일, 9월 4일), 그리고 ‘메린’의 ‘하로이’ (Hạ Lôi) 사당 (1월 6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화려하게 치장한 선남선녀들이 남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예식을 거행한다.


비록 짧은 통치기간이었지만 이후 수많은 영웅 전사들의 모본이 되었던 ‘하이바쯩’ 자매는 앞으로도 베트남 민중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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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3 18: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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