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만력제 시대의 명나라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5.20|조회수711 목록 댓글 0
 

 이 름    333333333333



제 목    [펌] 고려황제 만력황제



만력제


1587년 정해년


그해에 실제로 기억에 남을만큼 중요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중국에선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 사건들은 중국의 과거 그리고 미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들이었다.


황제가 어전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는데도 문무백관들이 황성에 모였다. 이 헛소문의 진원지를 파악할 수 없는 작은 소동으로 황제는 문책 대상을 확정할 수 없었기에 전체경관들에 대해서 관봉 박탈의 징계를 내렸다.


명조의 관봉은 상당히 소액이었기에 고급관리들은 지방관들로부터 상납을 받고 있어서 상관없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하급관원들의 주수입원이 관봉이었다는 것을 볼 때 경제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관념에 의하면 황제의 뜻은 절대적으로 정당한 것이기에 어떠한 반론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문무백관들은 유가사상의 체현자로서 전통적 관행을 완전무결하게 준수할 책무가 있다. 군주와 관리들이 자신들의 직분에 충실하려면 인사관리와 의전절차에 정통해야 했다. 이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해야 하는 중앙집권 국가에 있어서 그 양자는 아주 중요한 통치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업무는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조는 도덕적 규범과 의례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황제가 정한 규범과 의례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었다. 조정의 규범과 의례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보상과 징계였다.


1587년은 약 15년간 천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만력제가 24세 되는 해로 의전 절차에 관해서 통달한 상태에 있었다. 9세에 천자가 된 만력제의 삶은 각종 의례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력제는 즉위 후 지난 15년간 동안 천지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고, 농경 의례를 집전하고, 신년을 경축하는 등의 의례를 주재했다. 황실묘와 왕실 사원에 제사를 지내고 선대의 황제 및 황후의 제사를 빠짐없이 모셨다. 인근 국가에서 보낸 사절단 및 은퇴하려는 관리들을 접견할 뿐 아니라 군대를 시찰하고 선전 포고를 내리며 전투가 끝난 뒤에는 포로를 접수하는 의식을 주재했다. 또한 매년 음력 11월 황제가 새해의 달력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공표하는 의식도 치뤄야 했으며 한림원에 수집된 중요한 문서들을 접수하는 의식 등등도 치뤄야 했다.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면서 만력제는 하루에 서너 차례씩 의관을 바꿀 때도 있었다.


이렇게 만력제는 즉위와 동시에 개성과 사생활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궁전 구내를 거닐 때에도 채찍으로 길을 쓸어내는 환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행원들이 항상 붙어 다녔다. 매일 열리는 어전회의는 상당히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하루라도 어전회의에 불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력제 이전 정덕제가 어전회의의 전통을 처음으로 깨뜨리기 했지만 이후 다시 융경제 때에 정상화된 후 만력제가 황제에 오르면서 대학사 장거정은 상당히 어전회의를 축약했었다. 어린 만력제는 대반 풍보의 지시사항에 대해서는 장거정에게 물어보고 장거정이 초안을 잡은 답신에 대해서는 풍보에게 물어보면서 황제에게는 두 사람 모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명조의 근본규정에 의하면 황제의 권력은 위임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실제로도 위임된 적도 없었으나, 황제가 소년이었을 때는 이러한 규정이 철저하게 집행될 수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관례상 하루에 서너 건의 문서에만 답신을 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공문서들은 이들 환관들이 처리하였다. 환관들이 주관적으로 임무를 처리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처리한 답신을 황제가 직접 답신한 것으로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환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황제는 장거정이 부친상으로 인해 관직을 벗어나야 함에도 그를 붙잡아 두고 또한 장거정 탄핵에 대해서도 상소를 제기한 자에 대해 중형을 내리라고 명하는 등 그를 아주 신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장거정이 표리부동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반 풍보의 감독을 받아서 비밀 경찰은 황제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지 못하였다. 장거정은 황태후에게도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황제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충고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장거정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이 한 곳 있었는데 그것은 궁녀들이었다. 1582년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장거정의 사망이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고, 황제가 장거정을 잃은 비통함에 빠졌던 상황에서 아홉 명의 비빈이 책립된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비빈 중에 숙빈 정씨와 황제의 관계가 평생 지속되어 명조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국가적 위기의 주원인(유우부단한 황제가 내리는 결정에 관했다고 함)이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장거정 사망후 그에 관련된 여러 탄핵 운동이 벌어지고 이와 관련된 풍보도 관등직위를 박탈 당하고 장거정과 풍보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1584년에 황실의 감찰관이 장거정의 죄상을 공표하였다.


황제는 장거정 왕사에게 내렸던 총애를 거두고 대반 풍보를 유형보냄으로써 완전한 통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행동의 자유란 환상에 불과하고 천자는 제도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자란 것을 깨닫게 된다. 장거정이 죽은지 5년 뒤 황자 책봉문제가 야기된다.


수석대학사 신시행


신시행은 장거정의 제자로서 황제의 스승이다. 유순한 성격의 그는 수보의 지위를 맡으면서 관료 집단과 황제와의 끊임없는 대결을 중재해주는 역할을 했다.


신시행은 황제에게 기본 교과를 가르쳤던 다섯 명의 교사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오래 그리고 자주 경연을 했던 사람으로 수석 대학사가 되고 나서도 그는 황제의 학업 전반을 관장하고 있었다.   


거대한 영토를 가장 훌륭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의례적인 절차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황제에게는 마음대로 통솔할 수 있는 군대가 없었고 광대한 토지라는 토대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천자라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황제는 천자의 지위를 유지 할 수 없었다. 허식이든 아니든 여러 차례 거듭되는 조두는 황제의 재배권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1587년 신시행이 수석 대학사가 된지 4년이 흘러 장거정 사망후 장사유가 그 후임자로 있었어나 그의 부친사망으로 직무를 대행하여 그는 대학사직을 맡게 되었다.


명조는 중앙이 문서에 의거해서 전국을 통제하도록 조직된 국가였다. 그러므로 행정적인 실무 경험이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황제의 통치 업무의 대부분은 인사관리와 관련된 것으로 일반화된 기준에 따라서 문서로 처리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현관이 있다해도 그의 덕치는 일반적인 의미의 효율적인 통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현관에게는 혁신이나 특별한 정책을 실시할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다. 현관들은 질서유지와 징세업무 부담을 전가하기 위해서 간접적인 방법에 의존했다. 현관은 지역 신사층의 도움을 받아 세를 거두었다. 지역 신사층은 제 때 세를 납부케 하고 분쟁을 재판없이 막후에서 해결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친족들이 돌보게 하고, 과부의 재가는 막고 효자의 효성은 기리며 본받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그 고을의 평판이 높아지고 이로 관리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다.


산사층의 손을 잡느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한정되어 있었다. 신시행은 문관집단의 긴밀한 협조가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정부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관료제가 다루어야 할 가장 긴급한 문제는 다름아닌 관료제 자체였다. 관료제는 문관제도와 무관제도를 포함하는 개념이었지만 실제로는 창건이래 시간이 흐르면서 무관제도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평상시 무관은 문관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문관들은 대부분 3년마다 시행되는 과거에 합격한 자들이었다. 생원, 거인, 진사 순으로 되어 있었다. 관직으로 진출하는 길 만고는 개인이 두각을 나타내고 창조적인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길이 아주 제한되어 있거나 아예 없기에 과거제는 중요했다.


한사람의 응시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개 가족 전체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문관집단은 공통된 사상으로 뭉쳐진 집단이어야 했다. 그러니 문관 중의 핵심인물인 경관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통치란 무릇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원리를 철저히 깨치고 있었고 또한 도덕적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경관들이 도덕적 원칙과 상식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행동한 집단은 아니었다. 대과에 합격한 진사 중에는 고리대금업과 토지 매입 등 여러 가지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서 권세를 이용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또한 관리들이 유혹에 굴복하는 정도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패한 관리들과 대조적으로 도덕적 원칙의사소한 위반도 용인하지 않는 엄격한 관리들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했다.


명조에서 관리들 사이의 인맥관계는 중앙집중화된 정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요악이지만 거대한 영토를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데는 많은 약점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약점은 각 지방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할 수 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명조의 관료제도는 행정 책임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없게끔 조직되어 있었다.

 

신시행은 만력제가 즉위한 1572년 당시 장거정의 처신을 훌륭하게 판단했다. 국정운영의 효율성과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국가의재정을 튼튼히 하고, 또한 재정분야에서도 손을 봤다.  그러나 장거정은 바로 그곳에서 파멸의 씨앗을 심었다. 명조의 징세제도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1100개의 현은 표면상으로 보아 모두 동등한 행정단위였지만 실제로는 각 현에 할당된 세금총액은 상이하였다. 부유한 현은 가장 가난한 현보다 몇 백 배나 많은 세금을 할당받았다. 세금과 관련된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상례라는 이름의 추가세금이었다. 백성들이 세금을 내기도 전에 추가세금부처 내도록 각 지방현관들은 강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거정은 수석 대학사 재직시 규정된 세금총액을 완납하도록 일선 관리들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 지방관이 강압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정부가 표방해온 인후 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며, 평소 이용해 왔던 지역 신사층을 통한 간접통제 방식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국정운영의 효율성를 달성하려고 또한 장거정은 문관집단의 이중적 성격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관리들이 도덕적 원칙에 충실할 때에만 가능한 일들을 장거정은 자신이 급조해낸 효율성으로 대체해 나가려고 했다. 그러한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측근을 임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려 했다. 이러한 장거정의 조치는 거대한 제국이 과도하게 중앙집권화함으로써 나타나는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장거정의 실패원인을 거울삼아 신시행은 문관집단은 도덕적 규범을 고수하면서도 자기 실현에 대한 강력한 충동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므로 문관집단이 가지 이러한 이중성을 직시하고 문관들 사이의 여론, 특히 그들 중세서 문사들의 의견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 대정치가의 중요한 임무로 보고 그는 중재자의 역할을 자체하고 나선 것이다.


신시행은 만력제를 설득하여 장거정이 시행했던 효율성 위주의 행정방식을 폐기하고 문관들에 대한 인사평가에서 그는 전례없이 3대 중요부서인 이부, 도찰원, 한림원의 관리를 유임시키고 황제를 설득하여 황제가 군대 통솔권의 포기 및 북경 외부로의 여행 제한, 동창을 관장하는 환관 장경의 권한 제한 등에 동의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황제가 장거정 사건 이후 각종 의례에 따른 직무를 수행하도록 설득하지는 못했다. 황제는 더욱 냉소적으로 되어갔던 것이다.


장거정이 없는 세상


장거정 사후의 명조는 천천히 혼돈지경으로 빠져들어 갔으며 그로부터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만력제는 오랫동안 문관집단에 대항하여 실제적인 파업을 해 왔던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만려제는 황장자 대신 황삼자를 황태자로 삼고자 하는 자신의 희망을 짓밟고 아끼는 여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조정 대신들엑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십여년이 넘도록 문관집단에 대항하여 이상한 투쟁방법을 구사했다 황제는 황장자에 대한 관례 의식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한림원 학사들에게 그의 교육을 위탁하지도 않았다.


결국 여론에 굴복하여 황장자를 황태자로 지면하였지만 그의 태도는 마지못해 하는 듯한 냉소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다시는 문관집단이 희망하는 대로 황제의 의무를 수행하려 하지 않았다. 수십 년동안 조정내의 각종의례는 황제가 배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고 황제는 수도 안팎의 수많은 고급 문관직을 충원하지 않고 방치했다.


만력제는 또한 성가신 상소문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쓸모없는 서류더미에 묻어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만력제의 재임 말기에 공석으로 남아있던 관직들은 관련된 관리들의 입장에서 싸우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관직이 되어버렸다.


수십 년간 만력제가 행했던 직무태만과 부작위는 이미 문관집단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손상시켜던 것이다. 더구나 장거정과 관련된 논쟁이 종결된 후 문관집단 사이에는 황제에 대한 불신이 싹이 움터 올랐다. 문관들에게 협조하지 않기 위해서 황제는 수많은 고급문관직을 폐지해 버렸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고 있던 수많은 문관들도 점차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노력이 모두 허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문관 집단은 표면적으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응집력을 잃어버린 문관 집단은 화약과와 다름없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48년간 만력제 시대를 살았던 고급문관들은 중심적인 지도력을 상실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있었으며 냉소주의와 기강 이완은 하급관원들에게까지 퍼져 탐관오리들은 부정행위를 저지를 절호의 기회를 가졌다.


이렇게 문관집단의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이 때 일부 문관들이 동림당으로 알려진 집단으로 일어섰으나 황제의 적극적인 승인이 없이 이루어지는 도덕적 개혁 운동은 성공을 거둘수 없었다. 명조는 당쟁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심각한 무방비 상태에 처해 있었다. 명조의 사법체계는 극도로 단순하여 분쟁사건을 중재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전에 청구된 기술적인 문제들조차 충분한 심의없이 절대적인 선악을 가르는 윤리도덕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1587년 이후 황위 계승문제는 조정에 가장 큰 혼란과 높은 관심을 야기시킨 사건이었다. 1590년초에 신시행을 포함한 대학사들은 즉시 상로를 황태자로 책립하지 않으면 사직하겠다며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런 최후통첩을 받은 황제는 1592년 초에 황장자를 황태자로 지명하겠노라 약속하고 이후 황위계승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1591년 10월에 한 관원이 이 문제를 다시 상소하는 바람에 만력제는 다시 황위 책립을 연기한다고 했다. 이 사건과 연관되어 신시행은 관직생활을 마감했다. 수석 대학사가 사직하게 된데 분노한 황제는 다른 문관들에 대한 해임을 명하였고, 탄핵문서를 제출한 급사중은 평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1592년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승리를 거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황위책립연기라는 비일관적인 처사는 군주가 신의가 부족할 뿐 아니라 용기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문관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명조가 이러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은 황제가 문관집단 사이의 분쟁을 조정할 법적 장치가 없었다는데 원인이 있었다. 즉 만력제가 왜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황위 계승문제는 자신의 특권 사항이므로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라고 선언하지 못한 것은 명조는 황제가 그러한 주장을 할 만큼 사법제도가 정비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력제의 즉위 후 명조의 성격은 변화하고 있었다. 왕조 개창후 2백년이 지난 지금 이미 확고히 구축된 문과제도는 문관집단과 격리된 채 천명을 대표하는 일개 평범한 군주만을 필요로 했으며, 군주의 뛰어난 통치능력보다는 공평무사한 태도를 중시했다. 16세기의 문관집단은 황제의 재결이 필요한 문제에 황제가 실제적으로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군주제도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문관집단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황제로서는 그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만력제는 어려서부터 지시를 내리기보다는 지시에 따르도록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조정의 내적 작동체계를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이 거기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황위 계승문제에 대해 문관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했던 것을 보면 예전부터 그들 간에는 불안감과 심한 경쟁의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명조가 개창된지 2백년이 지난 1572년 일개 문관 장거정이 만력제를 대신하여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도거적 규범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함으로 해서 행정적 통일성에 입각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직무들이 실제로는 개인적인 수완에 의해 처리하였다.


이는 명조가 개국당시부터 방대한 영토의 통치에 필요한 행정비용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세금총액을 규정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리들에게는 제도적 개혁을 추진할 권한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급자들을 통제할 권한이 없었다.


하급관리들은 관봉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이를 보충한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결국 관료집단은 도덕적 원치과 사적인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관료집단은 양극으로 분화되었다. 관료제도는 문과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고 도덕적 원칙을 고수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관료제도의 미숙함은 관리들에게 불로소득적인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장거정이 재정을 충실화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후임자인 신시행은 목표수준을 현격히 낮추었다. 그는 양극단의 조화를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만력제는 황제로서의 직분을 이용하여 실제적으로 명조를 개혁하려 하지 않았는가?


만력제의 재위기간에 황위계승논쟁은 또다른 근본적인 갈등을 표면화시켰다. 문관들의 황제에 대한 절대복종의 의무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명조의 절대군주제도는 문관제도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진 제도였다. 문관제도는 자체의 힘만으로는 존립할 수 없었기에 황제가 가진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동원했던 것이다. 황제가 가진 권위가 실제적인 힘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관집단은 군주는 논쟁의 최종 중재가이기 때문에 직접 그 논쟁에 참여해서 안되며 창조적인 힘을 동원하여 직무수행에 임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정이 세워진 것이었다. 황제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1587년에 황위계승문제가 제기되고 만력제를 괴롭힌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1587년 무렵에 군주의 태도가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없었던 정해년은 명 왕조사에 있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해였다고 할 수 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황제


신시행의 재임 시절 그가 남긴 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하의 범람 문제를 위해 반계순을 복직시켜 복구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어느 정도 성공하였고,


1590년 명군이 몽고 연합군과 충돌 위기 때에도 무역특권과 보조금 등의 미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였으며 군사제도는 반드시 문관의 통제하에 놓여져야 한다는 문관우위의 원칙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하지만 요동 건주 사건을 처리를 잘못하여 후에 누르하치의 청 건국에 일조했다는 것은 나중에 나타난다.


신시행이 수석 대학사시절 황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군주와 문관집단은 상화 존중하면서 공존해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중재자 역할을 했다. 문관들의 의견이 많이 담겨져서 황제에게 기밀정보를 제공했던 동창과 은의위의 활동이 대폭 축소되었다.


만력제가 어림군에 열성을 보일 때 신시행은 환관을 설득하여 어림군의 기세를 꺽었으며, 황제의 북경 밖 순시도 중단되었다. 신시행을 비롯한 문관들은 군주의 창조적인 능력을 차단하는 일에 힘을 모아 만력제가 능력을 발휘할 통로를 차단하였던 것이다. 문관들은 명조는 자신들의 묵시적인 동의가 없으면 단 하루도 존립할 수 없는 체계이며 명조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자신들이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디 어린 나이에 용상에 올라 무능한 국가 제도가 강제하는 가장된 의례 외에는 창조적인 힘을 사용할 곳을 찾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황제를 둘러싼 문관들에 의한 집단적인 정치로 황제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보았다. 이제부터는 만력제 치하의 여러 사회, 경제제도에서의 문제점을 살펴볼수 있다.


유별난 관리 해서


해서는 유별난 관리가 아니라, 엄청난 의지력과 도덕성을 가진 사람으로 그는 명조의 여러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하지만 해서는 사법 제도의 미비성과 잉여자본을 상공업에 투자하지 못하게 했던 당시의 이상한 정치 상황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명조의 통치작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영토가 광대하며, 인구 또한 많다는 것이다.


홍무제 당시 왕조는 각 지역의 지주들에게 아주 낮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관리들의 여비를 포함하나 다양한 지출은 부호들이 부담했기에 지방정부는 관리들의 봉금 등의 고정예산만 가지고 행정을 운영하였다. 이것은 단기적 관점에서는 상당한 인력과 물자의 절약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명조의 재정 활동은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


각 부현의 세금총액 규모는 변하지 않았기에 재정수입은 언제나 불변이었다. 명조에서 상공업은 경제의 중요요소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공업으로 얻은 소득도 농경으로 얻은 소득과 똑같은 방식으로 분배될 뿐 경제발전의 원동력인 산업자본으로 전환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투자대상을 찾을 수 없었던 잉여자본은 대부분 농지로 흘러 들어가서 소작농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게 되었다.


정부의 수입의 주된 원천은 농민들이었지만 정부는 고리대부업자나 혹은 이웃, 친척들의 빚독촉과 착취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해서는 자신이 덤벼들었던 농촌문제가 국지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명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보다 발달된 화폐제도와 보다 정교한 상업법이었다. 그런 제도적인 변화없이는 이자율이 낮아질 수가 없었다. 명조의 화폐문제는 홍무제가 국가 재정작용과 무관한 화폐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명의 문관제도는 많은 농민들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없는 특수한 체계로 내재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의 개인적인 권리를 규정하고 보장해 주려면 문관들은 백성들의 사소한 문제에까지 관여해야 했다. 하지만 지방정부는 부족한 세금을 가지고 농민들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복잡한 사법제도를 운영할 여력이 없었다 전국의 행정체계를 통일시켜야 했기 때문에, 명은 지방정부의 사법적 권한을 사회 규율의 유지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권한으로 한정하였다. 명조의 사법제도는 개국당시부터 기술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6. 고독한 장군 척계광


이 장에서는 명의 군사적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명조의 문관집단은 15세기 중반부처 16세기 중반에 이르는 동안 원숙기에 도달하였다. 반면에 무관들의 사회적 지위는 명조의 역사상 최저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명대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기록상의 군사력과 실제 군사력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홍무제는 세습적인 군사제도를 고안했으나 그 제도는 애초부터 수많은 민호들이 강제로 군역에 동원되었고 군대가 조직되자 탈영 나중에는 각 군호가 자신에게 배당된 면세 농지를 매각하거나 담보물로 삼았다. 이동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군사제도는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명의 군사력이 취약하게 된 원인은 군수품 보급체계에도 있었다. 군수물자의관리는 일반 행정과 통합되어 이루어졌으며, 각 부현의 지방관들은 서로 군수물자를 측면 지원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 결국 사위 군사단위는 상황변화에 따라 보급지점과 보급망을 선택할 기회를 찾지 못했으며, 물자제공을 할 수 없는 사정의 현이 생기면 다른현에서 이를 보충할 능력도 의무도 없었기에 군수 물자가 부족하게 될 수도 있었다.


군수 보급 체계의 감독 관리권은 중앙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실제 집행권은 무수한 하급기관에 위임되었다. 이러한 군수 보급 체계가 사회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컸으며 일원적인 통제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수품의 제조기술이 정교화 될 수 없었다. 도한 세습군호제에 의한 임명절차는 후대에 상대히 복잡하게 되었으며, 자격을 갖춘 모든 이들에게 군관이 될 길을 열어줄 의도에서 시행된 무시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세습 군호가 아닌 자가 지휘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급 군관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조정은 총독과 순찰사에게 각급 군관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인사배치는 정부의 군관제도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군수 보급과 통신체계는 문관의 휘하에서 통합되었다.


문관들은 군사문제에 대해 본능적으로 직업적으로도 관심이 없었다. 병영이 쇠퇴하고 있는 지방의 문관들은 군사문제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바꾸어 놓은 것이 16세기 중반의 왜구의 침입사건이었다.


왜구의 침입은 국제무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해상세력과 명조의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명조의 취약함이 드러났고, 명조의 군사력이 허약했기 때문에 왜군은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장거정의 측근이었던 척계광이 장거정과 문관의 지원 하에 전통적인 정치 체계와 농경 중시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군사를 창설하였다. 명군은 동남해안을 약탈하던 왜구들의 무리와 장성 이북의 이민족들을 척계광이 키운 효율적인 군대들로 막아내었다. 그가 키운 군대는 농민군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것이었다. 들이 다루기 쉬운 무기를 씀으로서 농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조직적인 면에서 볼 때 척계광은 제한된 테두리에서나마 군제개혁을 시도했다. 허나 그 자체가 이미 문관지단이 원칙을 삼고 있는 평형을 깨뜨린 행위었다. 바로 이런 죄 때문에 그는 외롭게 삶을 마칠 수밖에 없다. 문관만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가 나은 결과일 것이다. 필수적인 군제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명조 내에서 팔기군은 중국의 농경사회적 기반과 문관집단에 의한 통치에 적응할 수 있었고, 부패한 세습군호제도를 뿌리뽑고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1587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 의 요약


만력제는 1573년 즉위하여 1619년까지 4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는 기간동안 재위에 계셨다. 지면 관계상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력제 46년의 통치기간 동안 명나라는 확실히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


만력제도 집권초기에는 장 거정(張 居正)같은 현신을 중용하여 세제(稅制)개혁과 요긴한 치수(治水)사업 등을 벌이며 제법 의욕도 보이고 치적도 쌓았으나 이도 한때, 후반기로 갈수록 몹시 어지러워졌다. 특히 '만력의 3대정(大征)'이라는 3번의 전쟁이 재정파탄에 결정적이었다. 평균 7백만냥 씩  지출.


당시 명나라는 조세와 요역을 차례로 은(銀)으로 대납케 하다가 급기야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 하여 완전한 은본위(銀本位)의 화폐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거듭된 엄청난 재정지출로 은이 절대적으로 모자란 것이다.


더구나 1588년 유럽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해군에 괴멸되면서 스페인의 동방무역마저 동반 와해되는 외적요인도 심각함을 가중시켰다. 당시 스페인은 식민지였던 신대륙 남미에서 막대한 은을 채굴해와 이를 도자기나 차(茶)같은 중국의 특산품을 구입, 유럽시장에 되파는 중개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 글로벌 네트워크도 무적함대라는 무력을 바탕으로 수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력제는 이를 획기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환관을 대거 파견하여 은광의 개발과 온갖 세금의 신설로 은을 수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황제의 조서를 앞세운 환관들의 가렴주구와 행패는 실로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재난'이라 할만 하였다.


그 결과는 숨막힐듯한 세금을 참지 못하고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환관이 살해되는 등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진 것이다.


이후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급기야 침묵하던 지배계층내에서도 비판과 동요와 균열을 불러일으키니 이른바 '동림당(東林黨)'이 대표적이다. 1604년부터 실체를 보인 동림당의 양심적 관료와 재야 지식인그룹은 환관과 이들과 결탁한 부패 관료들의 전횡을 맹렬히 성토하며 농민의 궐기를 옹호한다.


마침내 민심이 이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혼란상에도 불구하고 만력제의 태도는 전형적인 왕조말기(末期)의 황제, 그 모습이었다. 이 낙천적이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자금성의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고립된 채' 무려 10만명의 궁녀와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실로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관료들의 만력제에 대한 결제보고는 항상 힘들었는데 이유는 중간에 낀 환관의 맹랑한 농간도 있었지만 무었보다도 궁녀들과 온천욕하기를 좋아해 좀처럼 집무실에는 안 나왔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씀씀이도 대범하여 황태자의 결혼식에 국가예산의 절반을 단번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력제는 또한 후손들에게 '확실한 관광상품' 한가지도 남겼으니 오늘날 중국관광코스에 꼭 들어가는 볼거리인 '명13릉'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자신의 무덤 '정릉(定陵)'을 남겼다. 이 '지하궁전'은 그의 나이 불과 22살 때부터 착공하여 6년간 8백만냥을(임진-정유 전비가 7백만냥 이었음)쏟아부어 만들었다고 한다. 1644년 이 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분노에 찬 농민군이 가장 많이 훼손했던 무덤이 이 정릉이라 하니 당시 민폐와 원성이 어느 정도였나 짐작할 수 있겠다


모친인 이태후는 원래 별볼일 없던 시녀 였는데  융경제가 어린 시절 어쩌다가 손을 대서  덜컥 애가 생겨서 (주익균 님이죠 그 아이가 ) 국모가 되었소  그러나  그녀는  순박한 사람이고  악인은 아니오  그녀가 첨엔 아들 만력황제를 명군으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했고  장거정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엿소 어려서 부터 만력제는 엄격한 스승인 장거정과 이태후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았소  어린 만력제는  이태후에게 무릎꿇고 혼난적이 많았고  장거정도  강연시간에 큰소리로 공개적으로 어린 황제를 꾸짖은 적이 많소   근데  이게 주익균씨가 장성한 후엔  역효과를 가져왔으니 엄격한 교육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닌듯하오


명의 마지막 명재상 장거정은 만력10년 까지 사실상 국정을 독단하오


장거정은(1525~1582)의 자는 숙대(叔大), 호는 태악(太岳)으로 호북성 강릉(江陵)출신이었다 그도 불합리한 사회,경제,정치를 근본적으로 고치려는 시도는 할수없었으나 ㅜㅜ) . 그는 만력(萬曆) 원년(1573) 내각수보가 되었는데 만력 10년에는 정치, 군사, 경제 방면에서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은 만력(萬曆)초 10년간 내각수보로서 전권을 행사하였는데 그의 정치적 수완은 융경(隆慶)초에 입각하면서부터 발휘되었다. 가정 41년 수보가 된 서계(徐階)는 양정화가 시도하려 했던 「공론정치」를 계승하여 언로를 개방하였는데, 가정 45년(1566) 세종이 죽자 그의 유조(遺詔)문제로 각신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가정 연간의 관료처벌 등의 실정(失政)을 시인하고 계승자가 그것을 시정해주기를 바란 유조는 서계에 의해 작성되고 목종(穆宗;1567~1572)의 승인을 받았다.


  서계의 비호를 받던 한림학사 장거정도 목종의 즉위와 함께 대학사가 되어 유조작성에 참여하였다. 서계는 이로써 세종의 실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가정시기 탄핵받은 인사를 복권시킴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어 수보로서의 권한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목종의 황태자 시절 시강(侍講)으로서 신제(新帝)의 총애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 의도적으로 유조작성에서 제외되었던 대학사 고공은 서계의 선수에 반격을 가하여 유조가 선제를 비방했다고 공격하였다. 서계와 고공은 내각의 실권을 놓고 공방전을 벌였는데 서계가 언관의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급사중(給事中)과 어사(御史)가 고공에 대한 집중탄핵을 행하여 융경 원년 고공은 대학사직을 사임하였다. 고공은 사임 후 다시 문하의 급사중을 동원하여 서계에 대한 비리를 탄핵하자 이에 대학사 장거정이 서계의 사직청원을 받아들이도록 표의에 작용하여 융경 2년(1568) 서계는 사임하였다.


  융경초 환관이 다시 득세하였으므로 장거정은 환관에게 공작하여 융경 3년(1569) 과단성있는 고공을 다시 입각하도록 하여, 온건한 수보 이춘방(李春芳) 밑에서 차보(次輔)로서 장거정과 함께 능력있는 적임자를 적소에 배치시키는 등 추진력있는 정치를 끌어나갔으나, 과도관에 대해서는 불시고찰(不時考察)을 단행하면서까지 그들을 교체하였다.


  융경 6년(1572) 수보가 된 고공은 서계에 대한 적몰을 주장하여 장거정과 대립하게 되고, 이어 목종이 죽자 장은 고공과 대림하였던 사례태감 풍보(馮保)와 결탁하여 고공이 황제권을 위협했다고 체포하여 유배시켰다. 이로써 10세로 즉위한 신종(神宗;1573~1619)의 황태자 시절 시강이었던 장거정은 섭정태후의 지지와 함께 수보가 되어 죽기까지 10년간 전권을 행사하였다.


그의 확고한 정치적 기반은 일면 환관과 제휴하여 언관의 비판으로부터 환관을 보호해줌으로써 황제의 지지를 확보하고, 일면으로는 사리를 추구하는 환관에 대한 언관의 비판을 일정 정도 지지함으로써 정치상의 다양한 세력관계를 이용하여 그 균형을 취하면서 통제해나간 데에 있다.



장거정의 개혁


1.정치 개혁


대내적으로 사회경제적 변화, 이갑체제의 붕괴에 의한 질서의 동요와, 대외적으로 북로남왜의 위기를 겪고 있던 융경·만력기의 상황에서 장거정은 전권을 가지고 행정·재정개혁을 행하고 대외강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행정개혁으로 관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만력 원년부터 고성법(考成法)을 실시하였다. 관료가 상주하여 황제의 재가를 얻은 사안은 반드시 해결되도록 하여 일의 완급, 거리의 원근에 따라 기한을 정하여 그 집행여부를 책으로 만들어 매달 보고하고 매해 총결을 지어, 지연되거나 보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조사하여 책임추궁을 행하고 관료의 근무평가에 이를 반영한 것이다. 曺永祿 『考成法의 시행과 科道官의 대응』


                                            『중국근세정치사연구』 지식산업사 1988. P.217 참조



  공무처리보고의 문책도 3벌을 만들어 지방·육과·내각에 보내도록 했기 때문에, 각 기구가 상호 견제, 경쟁하게 되고 관료에게도 상벌을 통해 일을 독촉할 수 있으므로 행정의 효율성은 제고되었다.


  관리임용면에서 장거정은 재능있는 자를 실력위주로 등용하고 친소관계를 따지지 않았다. 관리들의 고과(考果)도 엄격히 적용하여 명과 실이 일치하였고, 포상과 징벌을 엄히 구분하여 그 중에서 재덕이 출중한 신진관리를 선발하고, 재덕이 없고 부패한 관리는 파면함으로써 명 후기의 관리풍토의 부패성과 불공평한 인사정책을 개선시켰다.


  그 외 장거정은 사적인 인간 관계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특히 왕국광·양박과 같은 자파의 인물을 이부상서로 앉혀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언관은 고성법에 걸릴까 두려워 비판을 자제하게 되었다. 또한 장거정은 재야 사인층의 정치비판을 금지하기 위해 만력 7년, 그 결합의 장이 되고 있는 서원도 폐쇄·탄압하였다. 이같은 고도의 정치적 수완으로 관료계를 철저히 통제하였기 때문에 과도관들의 장거정의 정책에 대한 반대, 특히 그의 사후에 분출한 격렬한 비판은 개혁의 목표 자체보다는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 곧 관료에 대한 통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외정책으로는, 가정 29년(1550) 북경까지 위협하여 ‘경술지변’을 초래하는 등 북변을 괴롭혔던 몽고의 알탄칸과 융경5년(1571) 화의를 맺었다. 선대총독 왕숭고의 건의에 따라 융경 4년, 명에 투항한 알탄의 손자 바하나기를 우대하고, 그를 몽고에 거주하는 한인 반역자 조전 등과 교환하는 교섭을 성공시켰으며, 이어 강화를 맺어 알탄칸에게 순의왕을 봉하고 호시(互市)를 허가하였다. 이 교섭은 장거정이 중앙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당시 수보 이춘방, 차보 고공도 찬성하였던 것으로 경술이래 대외 강경책을 주장하였던 조정길은 대학 사직을 사임하는 등 중대한 정책변화였다.


이 화의의 배경에는 당시 변상과 염상으로 크게 활약한 산서상인가 출신관료들의 적극적인 추진이 있었고, 이들은 화의와 더불어 장거정과의 결합을 공고히 하여 장거정의 수보시절 육부와 내각의 요직을 거의 독차지하였다. 강화에 동반한 호시는 국가의 보장을 받는 안전한 무역으로 이들의 출신배경인 산서상인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준 것이다. 이러한 몽고와의 강화노선은 장거정의 재임기간 중 관철되어 무장평화를 유지함으로써 군사비가 절감되어 국가재정에는 도움이 되었다.


2.군사개혁


군사상으로는 군비를 강화했는데 특히 변방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그는 변리(邊吏)를 발탁하고 향병(鄕兵)을 훈련시켜 변방과 내지의 수비를 공고히 하고, 유능한 장수로써 변방을 지키게 하여 만리장성 연변에는 적의 종정을 살필 수 있는 적대(敵臺)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장수를 올바로 선발할 수 있었고 군대를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으며, 향병훈련이 갖추어져 명군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 결과 몽고군의 수차례에 걸친 침범을 패퇴시키고 그들과 다마(茶馬)의 호시(互市)를 여는 방향으로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었다.


3.재정개혁 


1) 재정지출의 합리화


명조는 중기 이후 대지주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세원(稅源)의 감소와 군사비 및 통치집단의 소비증가로 재정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장거정은 이러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우선 재정지출의 합리화를 도모하였다. 장거정의 재정지출의 합리화 정책은 수입을 줄이지 않고 정부 지출의 철저한 감소에 초점을 맞추고 행해졌다.


    Huang Ray. "Taxation and Governmental Fiance in Sixteenth-Century Ming China" (Cambridge Univ. Press. 1974), P.295



그는 중요한 지출을 위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삼가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지출방면에 있어서 주된 생각이었다. 주백체, 『中國財政思想史稿』(福建人民出版社, 1984), P.130


그가 재정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대외적으로 Altan한(汗)과의 강화가 이루어졌고, 왜구의 침략이 줄어듬에 따른 전비(戰費)의 감소를 들 수 있다. 특히 북변에서 평화가 정착되면서 기존의 둔전을 경작하던 군사들을 농경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세수(稅收)의 확보에도 기여하였다.

 

그런데 당시 국가재정이 어려워진 원인 중의 하나는 황실의 소비증가와 더불어 명중기 이후 급증한 종실(宗室)의 확대였다. 명초에는 종실녹미(宗室祿米)가 중앙관료들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으나, 그 때에는 종실의 사람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 부담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명중기 이후로 내려오면서 종실의 사람수가 격증하고 現代의 宗室人口는 洪武年間 58명 泳樂年間에는 127명에 불과하였으나 正德年間에는 2,945명으로 늘어났으며 嘉靖 32年에는 19,611명으로 증가하였다.


           顧誠, 『明代的宗室』 , 『明淸史國際學術討論會論文集』 (天津人民出版社, 1981). P.96


녹미(祿米)소비 또한 팽창하였으니 종실문제는 점차 심각한 국가 재정위기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특권을 이용하여 토지겸병을 행하며 법을 어기고 기강을 문란하게 하였다. 이에 장거정은 신종에게 건의하여 황실과 종실의 사치에 대해서 그는 매우 가벼운 것이라도 반드시 이(理)에 근거하여 되도록 그 지출을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李龍潛, 『明淸經濟史』 (廣東高等敎出版社, 1988), P.177


  또한 장거정은 국가의 지출이 많이 드는 토목공사를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장거정의 뜻에 동조하여 신종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는 궁중에서의 토목공사를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장거정은 재정지출의 합리화의 일환으로써 기구를 정돈하고 용원을 감축하였으며, 관리의 역전이용을 제한하였다. 명대의 방대한 관료기구는 중앙. 지방을 막론하고 이후 계속 팽창하여 국가재정을 악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명중기 이후 용관(冗官)이 계속 증가하였다.


  이에 만력(萬曆)9년(1581) 장거정은 이부(吏部)에 명을 내려 각성의 관원수를 조사하여 주(州)·현(縣)을 합병하거나 감축하여 가구를 간단히 하고, 또 관리 중에는 용원(冗員)이 많아 이를 정돈하였는데, 당시 제거된 용원은 관리 10에 2~3명이었다 『張太岳行實』 , 『張太岳集』  卷47, P601


고 한다. 이와 같은 장거정의 기구축소와 용원의 제거는 만력 7년(1579) 이치(吏治)를 정돈하고 현명한 관료를 등용시킨 기초 위에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는 역전이용(驛傳利用)에 대한 제한이다. 명대의 역전제도는 원대의 기반 위에서 발전하였는데 규모면에 있어서 명대의 驛傳은 비록 東西로 아시아와 유럽의 양대륙에 가로놓여있던 元代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組織과 管理상에 있어서는 元代에 비해서 잘 정비되었다. 明代는 京師(南京·北京)를 중심으로 각지의 驛傳을 건립하였다. 驛傳은 陸路와 水路를 통하여 전국의 城市와 農村, 內地와 邊疆, 內河와 沿海의 연결을 도모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통일된 교통운수망을 형성하였다.                 張海瀛, 앞의 책, P.92


,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시대에는 역전의 이용에 엄격한 규정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이용의 폭이 확대되었으며, 감합(勘合)의 관계도 소홀히 하게 되고 타인에게 증여하는 등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였다. 대소 관원에 의한 남용은 역정(驛丁)과 관호(館戶) 및 일반민에게까지 큰 부담이 되었다.


  따라서 장거정은 고성법(考成法)의 전면적인 시행과 더불어 역전제도를 정비하였는데, 만력 3년(1575) 경부터 역전의 이용에 대한 규제의 방향이 제시되었다. 규제의 주된 내용은 첫째, 관원은 공차(公差)의 경우가 아니면 감합을 발급하지 않고 둘째, 수행원은 인역(人役)은 이갑(里甲)에서 부(夫)·마(馬)만을 취(取)하게 하고 비용을 취급하는 것을 금지하며 셋째, 관원의 인사이동에 있어서는 감합을 발급하지 않고 넷째, 발급을 받은 감합은 임무의 종료지점에서 반환하고, 종합하여 병부에서 조사하는 것 등이다. 神宗實錄 卷42, 萬曆 3年 9月 戊午條; 同 卷58, 5年 正月 乙卯條


  그런데 이러한 조치들은 일반민의 곤란을 제거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관원의 기득이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관료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상당한 열의를 가지고 일에 임하였으니 역전의 이용에 법을 어기거나 남용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관료의 역전이용을 제한함으로써 국가는 재정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이처럼 장거정이 재정상에 있어서 재정지출을 줄여나가고자 했던 근본적인 목적은 이를 통해서 국가재정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였고, 그것은 곧 그의 재정 재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부세제도의 개혁과 강남지주층 견제


  장거정이 정계에서 활동하던 가정(嘉靖)·윤경. 만력년간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상품 생산의 발전이 이루어져 자본주의적 맹아가 나타나는 한편, 지주층에 의한 대토지소유의 진전과 지주경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가 정책으로 제시했던 것이 토지장량(土地丈量)이나 일조편법(一條鞭法) 일조편법은 명대 후기 장거정에 의해 시행된 세제. 당의 양세법 이래로 중국의 세제는 양세(하세, 추량)와 각종의 요역이 있었는데 양자를 통합해서 一條로 하고 납세자의 토지 소유면적과 丁數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고 이것을 은으로 납부하게 한 것이다. 이는 복잡한 세제를 간편하게 한 것으로 당시의 사회·경제의 변화에 대응하고 국가의 조세수입을 확보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제도는 16세기 중기부터 지방별로 시행하였고, 17세기 말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청대에는 地丁銀制로 바뀌면서 조세 제도가 더욱 발전하였다.


과 같은 요역· 징수제도의 개혁이다.


장거정이 실시한 토지장량은 기본적으로 전국의 전토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하여 명중기 이후 계속된 대지주의 토지겸병과 부역 부담의 극심한 불균등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괴를 바로 잡고, 세량징수의 확보. 강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가 토지장량을 실시하면서 개혁의 주된 대상으로 설정하였던 것은 대지주, 특히 토지겸병이 가장 심하였던 강남지역의 지주층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선 당시 국가에서 수취할 수 있는 세원이 줄어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강남지역의 토지겸병과 그에 따른 세량징수의 불균등한 실태를 살펴보겠다. 당시의 토지겸병은 위로는 황제로부터 훈척(勛戚). 환관. 신사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토지를 겸병하여 재부(財富)를 축적하는 동시에 다양한 방법으로 납세를 기피하였다. 즉 그들은 우면특권(優免特權)을 이용하거나, 세량. 요역이 전토소유액을 중요한 부과기준으로 설정된 이상, 다액의 세량 및 중역을 부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토를 은닉하거나, 타인명의로 이전해서 가능한 한자기의 토지소유액을 속임으로써 세량을 탈면하고 중역을 기피하였다.


이와 같은 지주의 세량탈면·요역기피는 결국 무지(無地)혹은 소지(少地)의 빈약한 농민에게 전가되어 부세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토지겸병과 부역의 불균등현상은 유민(流民)과 인구 이동을 초래하였으며, 국가지배하에 편제된 호수가 감소하게 되었다. 이로써 명정부가 직접 징세할 수 있는 토지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니 이것은 곧 국가 재정수입의 갑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토지장량의 다음 효과로는 어린도(魚麟圖) 어린도책은 명대에 조세 징수의 기초로 만즐어진 토지 대장. 책머리에 總圖를 그렸는데 토지를 세분한 모양이 물고기 비늘과 같다고 해서 ������어린������이란 이름이 나왔다. 여기에는 토지의 字號 또는 번호·위치·地目·면적·형상·세율·소유자 및 전호의 성명 등이 기입되어 있다.


가 거의 전국적으로 작성되고 새로운 징세대장이 완성되었음을 들 수 있겠다. 전국적으로 장량은 자장(自丈)·복장(覆丈)의 2단계가 채택되었는데 자장단계에서 어린도가 만들어졌으며, 만력 9년의 장량에 즈음해서는 전국적으로 어린도가 만들어졌다.


한편 장량책의 전개와 더불어 징세대장으로는 명대 부역징수의 기본대장인 『부역황책(賦役黃冊)』 부역황책은 명대에 시행된 일종의 호적으로 110호를 1리로 하여 각 호의 가족 성명·연령·재산 등을 기입하였다. 호부에 제출된 표지와 색깔이 노란종이로 되었으므로 황책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또, 호적이면서 동시에 田賦·요역을 할당하는 원부가 됨으로 부역황책이라고 한다.


은 다만 형해화된 구문(具文)이 되고 징세편역의 실제에는 ”백책(白冊)“이 사용되었다. 더욱이 이 백책은 구체적으로 각 인호에 대한 부과대장으로 되었다.


이러한 장거정에 의한 전국 전토의 측량은 이후의 많은 제도적 개혁을 가능하게 하였다. 가정년간(嘉靖年間) 수차례 행해졌다가 중지되었던 일조편법(一條鞭法)을 만력 9년부터 다시 시행하였으니 장거정에 의한 장량시행 결과 일조편법이 지금까지보다 좀 더 용이하게 행해지는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토지장량의 기초 위에서 시행된 일조편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부·역을 합병하는 것으로 각종 요역을 하나로 합쳐 징수하였으니 징세수속의 번잡함을 간소화          시켜 지방 아문의 서리들에 의한 중간착취 등의 종간을 제한시킬 수 있다.


    ② 역 부담방법의 개선이다. 즉 요역에 응하는 자는 반드시 직접 노역에 복역할 필요가 없이 대            역은을 관부에 바치고 관부에서 그 돈으로 사람을 따로 고용하여 일을 시킬 수 있게 하는 방법          이다.


    ③ 종래 호와 인정단위로 역은을 징수하던 방법을 바꾸어 토지를 단위로 징수토록 하였다.


    ④ 민간에서 세금을 걷고 직접 운송하던 방식에서 관에서 걷고 관에서 운송하는 방식으로 바꾸었          다.


이와 같은 일조편법의 실시에 있어서 장거정의 공헌은 이미 가정 10년(1531)어사 박한신의 상소로부터 시작되어 『世宗實錄』 卷 123, 嘉靖 10年 3月 乙酉條



절강성과 강소성 일대에서 국부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일조편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데 있으며, 지속적 제도로 정착시키고 부역제도의 계통을 형성한데 있다. 주백체, 『中國財政思想史稿』 (福建人民出版社, 1984), P.315~316


이러한 부세제도의 개혁은 위로부터 국가정책으로서 행해진 기본적으로는 재정재건책이었으며, 지주 특히 강남지주층의 대토지 소유의 전개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장거정이 재정개혁의 일환으로 행했던 최대의 사업인 장량에 대해서 그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던 동림파 동림당은 명말에 고헌성이 향리의 동림 성원에서 환관의 비행과 정치의 문란을 비판한 것에 동조하여 모여든 동지를 말한다. 양명학의 관념론을 배척하고 주자학에 의한 경세치안을 주장했다. 한 때 세력이 컸으나 반대파가 환관과 결탁해서 탄압했으므로 쇠퇴하였다. 동림파와 이에 반대하는 부패 관료의 비동림파 간의 정치 싸움으로 명말에는 당쟁이 더욱 격심하여 명의 멸망을 가져오게 되었다.


인사들의 입장은 어떠했는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동(張棟)은 강서(江西), 신건(新建)을 예로 들면서 장량 자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신건은 전지의 원액은 56만 여지만 어린도책에도 기재된 바가 없고, 어느 때의 장량에 의한 것인지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이 때문에 어느 전지에 할당된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허량이 4천여석이나 생기고 있다. 둘째, 전지의 매매가 행해질 경우 계약 문서에 과칙을 적지 않기 때문에 과칙의 혼란에 편승한 부당한 매매가 행해지고 있다. 셋째, 이 결과 부가는 ‘무량의 전’을 소유하고 그 이익을 향유하는 반면 빈민은 ‘무전의 량’으로 고통받고, 도망하는 사태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장거정의 재정개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토지장량에 대해서 장거정과 동림파 사이에 특별한 의견의 대립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동림파가 비판했던 것은 고성법의 압력 하에서 장거정에 영합한 지방관이 단궁을 사용하여 전무를 늘린다거나 허량을 전무에 할당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 대해서이고, 중앙에 부를 집중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강남 지방에서 특히 심하게 전개되고 있던 지주층의 토지겸병과 탈세를 방지하고, 국가의 재정수입 증대를 도모했던 장거정의 정책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시로 북변군사비는 연 100만 량을 절약할 수 있게 되고, 16세기 전혀 국고보유가 없던 일반적 상황에서 장거정이 죽기 전 국고에는 9년 분의 미(米)가 비축되었고 은고에는 600만 량, 내고(內庫)에는 400만 량의 잉여가 보유될 수 있었다.

 

장거정 개혁의 비판


  그의 개혁실시에는 많은 비판도 따랐다. 내각에 대한 과도한 권력집중과 고성법에 의한 관료통제는 실시초부터 많은 관료들의 반대를 야기하였고, 특히 고성법 때문에 탄핵을 자유로이 할 수 없었던 과도관들은 고성법이 언로를 막는 것, 정치비판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국고의 잉여라는 것도 역으로는 지방의 재정자율권을 축소하고 고성법에 매인 지방관의 민중에 대한 수탈강화를 초래한 것이었다. 몽고와의 강화도 결과적으로 경계심을 해이하게 하여 방위체제를 약화시키고, 필수품인 중국의 포백을 가지고 무용한 노마(駑馬)와 교환할 뿐이라고 이부상서 장한은 비판하였다. 장한은 항주부의 중소견직물생산가출신으로 특권대상인가출신인 산서관료와 대조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장량은 고성의 성적을 올리려는 관료에 의해 증액보고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장거정의 정책에 대해 이러한 비판을 한 관료, 특히 언관들이 모두 처벌된 상황하에서 만력 5년 9월 장거정이 부상을 당하자 그 복상문제를 놓고 관계가 다시 비등하였다. 예대로 하면 장은 복상을 위해 27개월간의 정우(丁憂)를 치러야 했으나, 장의 지지자들에 의해 탈정(奪情)이 제안되고 신종이 사직과 창생을 위해 그를 허가한다는 지(旨)를 내리자 주로 육부. 한림을 중심으로 탈정에 대한 반대가 제기되었다. 탈정 자체는 봉건도덕상의 문제이나 그보다는 장을 퇴진시키는 기회로서 정치적 의미가 중요한 것이었다. 장은 이에 대해 가차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부상서 장한은 곧 사직해야 했고, 4품 이상 경관(京官)들은 자기평가서인 “자진(自陳)”을 제출해야 했으며, 6년마다 행하는 정기 경찰(京察)시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임시의 경찰이 단행되어 반대파는 제거되었다. 이후 관료의 근무평가인 고찰(考察), 경찰은 당쟁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장거정 사후 명 사회

 

장거정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던 관료계는 만력 10년 그가 죽자, 이부·과도관·한림이 중심이 되어 장에 대한 사후탄핵을 단행하고 고성법을 폐지하며 장당(張黨)을 모두 제거하여 그의 10년간의 개혁정치는 종식되었다. 장거정에 대한 탄핵은 그의 정치목표에 대한 평가는 없이 그의 개인생활의 비합법적. 비도덕적인 면에만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치는 대내·외적인 위기상황에서 황제일원적인 중앙집권지배를 강화하여 효율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것이었으나 관료에 대한 엄격한 통제로 분권공치(分權公治)를 주장하는, 후에 동림당으로 불리우는 인사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은 것이다. 내각수보로서 장의 개혁정치는 행정구조 자체를 재조직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갖는 것으로, 그의 실권은 승상과 같이 법제적으로 육부에 대한 통속체계를 갖는 것이 아닌 사적인 정치


IP Address : 216.80.4.230


2007-02-05 03:08:11


  새로고침  


 3333333333  1950년대 정릉이 발굴된 후 만력황제의 유골이 관찰되었는데 뼈에 심한 기형의 전조가 보였는데 아편중독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강했소 근데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유골을 불태욷고 가루로 만들어 버려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게 되었소 216.80.4.230 2007/02/05  


패스워드  


    210 / 3043 pages    LOGIN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