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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정치사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5.27|조회수245 목록 댓글 0
 

2. 정치사

 

앙골라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이르고 퇴보된 유럽식민 지배를 겪었다. 포루투갈 탐험가들은 처음에 1482년 후에 소위"앙골라 식민지"라고 불리게 되는 앙골라와 접촉을 했지만, 포르투갈 인들이 라운다 해변에 영구적인 정착을 처음 시도한 것은 1575년이다. 그때까지도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사실상의 거주보다는 무역에 가까운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군사 행동은 노예를 모으거나 값비싼 광물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수행되었다. 무역 방식이 더욱 복잡해져서 노예무역을 포기해야 되는 19세기의 상황 속에서 포르투갈 인들은 그들의 행정조직을 만들기 위한 선행 조치로서 앙골라의 내부를 다스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앙골라는 100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인종어족으로 의미 있는 8개의 주요 집단은 다음과 같다. 바콩고Bakongo, 음분두Mbundu, 오빔분두Ovimbundu, 루안다-초궤Luanda-Chokwe, 은간궬라Nganguela, 나아네카-훔베Nyaneka-Humbe, 헤레로Herero 그리고 암보Ambo 등이다. 처음 세 개의 집단은 근대에 와서 각각 총인구의 10%, 20%, 35%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각 비율은 이민과 난민에 의해 달라지기도 한다.

 

주요한 민족집단들은 결코 거대한 단일 집단이 아니다. 오빔분두Ovimbundu는 22개의 추장이 다스리는 부족집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중 비에Bie와 바이룬두Bailundo가 두드러진다.

 

저 멀리 북쪽에 있는 바콩고Bankongo부족과 북쪽에 있는 뎀보스Dembos지역은 포르투갈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1961년 이후의 마지막까지 하였던 중요한 곳이다. 오빔분두족은  앙골라의 온화한 중앙 평원에 거주했는데, 그 곳에서 그들은 대서양 연안을 향해 뻗어 나가고 앙골라의 내륙으로 뻗어가면서 활동적인 무역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포르투갈에 대한 저항은 현대까지 계속되었지만, 1838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1844년에서 85년 사이의 베를린 협약 이후에 가속화된 정복과 이주과정이 포르투갈로 하여금 식민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도록 하였다.

 

군사행동은 1878년에 저 북쪽에서 시작된 개신교 선교 활동과 그 성장을 같이하면서 40년 간 계속 되었다. 중앙의 오빔분두 부족국가는 19세기 말 이후에 정복되었고 남쪽의 콰냐마Kwanhama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초에 붕괴되었다. 앙골라의 몇몇 지역의 저항이 그 후에도 계속되었지만, 포르투갈은 1922년에 무력충돌은 사라지고 "평화화"되었다고 주장했었다. 노예제도가 19세기 후반부에 실질적으로 사라지면서 노예제도는 20세기의 강요된 노동체제-노예제도와 유사하거나 변질된 노예제-로 수정되었는데 이 강요된 노동 체제에 의해 앙골라가 개발되고 착취되었다.

 

20세기 초의 많은 정착민은 데그라달로스(degradalos) 즉 추방된 범법자들이었다. 범법자에 대한 추방은 1954년까지 포르투갈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았는데 1932년부터는 범법자들을 포르투갈에서 앙골라로 더 이상 추방하지 못하되, 다른 포르투갈령 식민지로에서 앙골라로의 추방은 가능하였는데 1932년부터 앙골라로의 범죄인 유입이 줄었다. 20세기의 백인 자유민 정착도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현대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싼 가격으로 백인의 교외 정착 구역을 형성하려던 포르투갈의 1950년까지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앙골라로 온 사람들은 상업을 위해도심지로 모여들었다. 시골에 남은 소수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인에 대해 강제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정착식민지로서의 앙골라의 매력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커피붐동안 더 커졌다. 1950년 이후에 포르투갈은 유럽 정착민들을 포르투갈에서 데려오느라 많은 돈을 썼고, 1961년의 신국수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소유로 땅이 넘어가자 전통 아프리카 농촌은 와해되었고,  앙골라 내외로 저 임금의 노동일을 찾아 떠나게 하였다. 식민시대가 끝날 때 앙골라에 있던 유럽인 인구의 약1%가 계획된 교외 정착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1900년에 10,000명 보다 적은 수의 백인이 앙골라에 살고 있었다. 1950년에는 그들은 80,000명이 채 못되었다. 지난 25년간의 식민지배동안 이민이 증가하여 앙골라에 사는 백인의 수는 33만에 이르렀다. 그들 중 1/3 정도가 앙골라에서 태어났다. 새로 이민 온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전혀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문맹인 포르투갈 농부들이었다. 포르투갈인 사회의 다수가 1974년과 독립 직전인 1975년 앙골라를 떠났다.

 

무력정복이 완성되기 전에,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자들은 20세기 초 그들이 점령한 세 지역을 따라 수송 기반을 구축했다. 루안다Luanda에서 말란지Malanje까지(1886년-1919년 사이) 벵궬라Benguela에서 벨기에령 콩고congo국경까지(1903년-1928년 사이) 모카메데스Mocamedes에서 세르파 핀토Serpa Pinto까지(1905년-1960년대 사이) 철도가 놓여졌다. 군대는 철도를 이용해 이동했고, 철도는 유럽인의 정착을 촉진했고 또한 농장에서 강제 노동력을 이용해 수확한 상품가치가 높은 농작물들-커피, 사이잘삼, 설탕, 목화-을 철도가 수송했다. 벵궬라Benguela철도는 자이레와 잠비아의 광물을 수송했다.

 

앙골라의 식민경제는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편 1913년에 북쪽에서 시작된 다이아몬드 채굴은 1920년 이래로 상업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 시작된 석유시추는 식민시대가 끝날 무렵에 커피를 앞지르고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라운다, 벵겔라, 로비토 그리고 노비리스보아에서 작은 소비 지향적인 제조와 가공부문의 성장을 허가하는 정책의 변화가 있은 1960년대에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해 앙골라의 산업화를 제지하였다. 그러나 앙골라의 대표적인 상품은 음료수와 담배 그리고 타이어나 포장 같은 품목이었다. 중공업을 위한 설비는 없었다. 앙골라의 현대 독립운동은 1940년대 말의 문화부흥 운동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지적인 운동은 강제적인 노동제도에 저항하는 거대한 미주위 분개에 반하는 것이었다. 1961년 독립운동가들과 지역인들의 모임들이 반란을 조직하기 전까지 아프리카 사회와 식민지 행정 사이에 또는 부당한 노동 업무에 항의하는 자발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반란의 직접적인 반응으로 1962년 10월1일 효율성을 위한 새로운 시골의 노동규칙이 포르투갈에 위해 통과되었다.  

 

2.1 1960년대 저항운동 시작

 

1961년 2월 4일과 1961년 3월 15일에 두 개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첫째는 1956년 12월 10일에 설립된 MPLA(앙골라 인민 해방 운동) 지지자들이 라운다에서 식민지를 억압하는 기관인 정치범 수용소를 현저하게 증가시키는 것에 대항하였다.

 

둘째는 유력한 바콩고족 지지자들이 북부 앙골라에서 유럽인 대농장주와 메스티조(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에 대항하였다. 바콩고족은 1957년에 UPNA(북앙골라 인민연합)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1962년에는 FNLA(앙골라 민족 해방 전선)의 일부가  되었다. 두 저항은 식민당국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으며 반식민 투쟁은 처음에는 북부와 카빈다주에서 발생하였으나 후에는 앙골라 동부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바뀌었다. 1964년 일부 FNLA의 남부 출신들이 북부의 종족주의를 비난하면서 탈퇴하고 1966년 3월 UNITA(앙골라 민족 완전 독립 연합)를 만들었다.

 

후에 앙골의 최남단의 소규모 게릴라 작전에 참여하였다. 자신들의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MPLA와 세력을 겨루었다. 북부 지역에서는 MPLA가 자이르의 국경을 넘어 앙골라에 접근하는 것은 FNLA에 의해 방해되었다. 비록 정치적 계획에는 기본적으로 다소의 차이점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관심인 정치적 임무는 달랐다. MPLA는 PAIGC와 Frelimo와 연결되어있었고 구 소련연방을 지지하였으며 국민 동원에 바탕을 둔 군대식 자유투쟁을 규정하였다. 지도자는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에 반대하여 투쟁을 통해 인종차별과 종족주의 초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FNLA는 북부 앙골라의 지지를 받았고 자이르의 대변인이 되었으며 첫번째 목표인 MPLA의 위장된 서구식 파괴정책을 하였다.

 

지도자인 홀덴 로베르토(Holden Roberto)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운동에 모든 지원을 제공해 주는 자이레의 마부투(Mobutu)와 가까운 동지가 되었다. UNITA는 남부의 오빔분두의 지지를 받았으며 포르투갈 우익 세력의 조정을 받았다. 또한 중국 모택동주의(Maoist)조직의 지지에 힘입어 적대 관계인 Sino-Soviet착취를 추구하였다. 지도자는 조나스 사빔비(Jonas Savimbio)이며 남아공과 수교를 맺으면서 기회주의를 드러냈다.

 

1974년 포르투갈의 극우주의가 무너지고 난 후 유럽 이주자들은 앙골라의 다양한 정치세력들과의 협상을 시작되었다. 1975년 11월11일 독립이 되면서 포르투갈과 MPLA, FNLA, UNITA가 함께 참여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미 계획되어있던 선거가 치러졌다. 과도 정부는 붕괴되었고 자이르 군대는 1975년 CIA가 자금을 댄 위장 군조직과 함께 FNLA의 세력을 보강하기 위해 앙골라 북부 국경 지역으로 이동했다. 남아공 군대는 UNITA를 돕기 위해 앙골라 남부의 국경지역으로 이동하였다. MPLA는 남아공의 불법적인 점령에서 나미비아(Namibia)을 해방시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SWAPO(남서아프리카 민족조직)의 활동에 동조하였다. MPLA는 1975년 11월 전투병력을 지원하기 시작한 쿠바로부터 군사도움을 받았다. 기니(Guenea)와 기네 비소(Guine Biso) 역시 소규모 원조를 지원하였고 모잠비크, 나이지리아, 알제리아도 장비를 보내왔다.

 

1976년 2월까지 자이르 군대는 북쪽 국경선에서 철수하였다.(그리고 MPLA는 미국이나 미국의 용병을 죽이거나 포로로 사로잡았다.) 3월말 남아공의 마지막 군대가 남쪽 국경까지에서 밀려났다. 나머지 FNLA와 UNITA 군대는 남아공과 자이레 정부에 의해 나미비아와 자이레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MPLA와 1975년 11월11일에 선언된 새롭게 수립된 앙골라 인민 공화국을 동요시키기 위해서였다. 국경에서의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1976년 초 MPLA는 전국적으로 그 행정 능력을 확립하였다. MPLA의 아우구스티노 네뚜(Augostinho Neto)는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정부 고위직에 대한 주요 편성이 지연되었다. MPLA의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1978년 12월 수상직을 없애고 당시 수상직에 있던 로포드 나시멘또(Lopo de Nascimento)를 해임하였다. 동시에 많은 장관(각료)들이 다시 인선되었다.

 

사실상 이것은 독립 후 1977년 5월 니또 알베스( Nito Alves)와 그의 동료에 의해서 시도되었던 쿠데타 이후 두 번째로 맞는 MPLA 당 기구내의 큰 위기였다. 이것은 MPLA를 정당으로 변화시키려는 중요한 목적에서 당의 행동과 규율에 관한 엄격한 규칙에도 불구하고 MPLA 지도층간의 불협화음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78년 11월 멜로 안투네스(Melo Antunes)는 포르투갈 대표단을 이끌고 정치적인 대화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르완다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두 나라의 관계는 새로운 상황에 돌입했다. 포르투갈의 무역 관광 장관이 1979년 1월에 방문하여 2월에 전기 생산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 앙골라 정부는 5300명의 포르투갈인 교사들을 배치하였고 이 기간 동안 앙골라에 쿠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은 공식적인 미국의 외교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국과도 화해의 시도가 있었다. 사실상 앙골라는 카빈다 지역에서 걸프오일(Gulf Oil)생산을 승인하였고 미국의 다른 석유회사들과의 협의도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미국 정부도 앙골라 정부의 우호적인 성향을 확신하였다.

 

미국은 남아공에서의 커다란 위기를 모든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했고 르완다 정부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승리의 카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78년 6월 20일, 싸이러스 번스(Cyrus Vance) 미 국방부 장관은 자이르와 앙골라의 화해, 나미비아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 위해서 앙골라와 보다 정기적인 대화통로가 개방되기를 원하고 있음을 발표를 했다. 워싱턴은 이런 정책이 자이르 경제의 생존에 앙골라를 간접적으로 연결시키고 남아공에서의 현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다. 앙골라 정부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UNITA에 대한 원조가 단절되는 것에 경제정책을 두었다. 1985년 4월 회의에 서명하기 전에 유럽연합(EC)으로부터 기술사업에 있어 상당한 원조를 받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 쿠바 동독과 소련이 앙골라의 경제, 행정 및 공공서비스에 걸친 모든 분야에 걸쳐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였다.

 

1979년 남아공과 로데지아 군대가 앙골라의 영토에서 벌인 전투들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2월 26일 다섯 대의 로데시아의 미라주 제트기가 짐비브웨 난민 수용소를 공격하기 위해 보마시를 폭격했다. 거의 동시에 남아공의 공군은 나미비아 남쪽의 SWAPO 수용소를 폭격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앙골라의 경제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고 군사력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하였고 농촌지역을 황폐화시켰다.

 

2.2 1979년 9월 10일 네토 사망

 

네토는 암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1979년 9월 10일 모스크바 병원에서 쇼크로 인한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충격을 주었다. 해외 관측자들은 앙골라에 예상되는 리더십의 위기와 정치무대에서의 네토 퇴진의 결과로 인한 정부정책의 변화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네토는 그 자신이 의사였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의 건강상태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MPLA와 정부 내부의 새로운 변화가 그의 죽음 후에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하였다. 8월 당 통제 위원회는 당내 강한 파벌주의노선에 대해서 강한 반대를 표명하고 당 규율을 강조했다. 9월 모스크바로 신병을 치료하러 떠나기 전 네토는 기획부 장관이며 부수상인 조제 에두아르도 도스 산토스(Jose` Eduardo dos Santos)를 국가 임시 수반으로 지명했다. 산토스는 네토의 죽음 이후 이 역할 계속했다. 루치오 라라(Lucio Lara)가 네토의 지명으로 MPLA의 당수가 되었다.

 

네토는 앙골라의 내부 문제를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교정책과 외교분야에서도 자신의 지지자나 반대자 모두에게 정치적으로 명성이 있었다. 해방운동의 대표로 독립 후에는 17년 동안 국가의 수반이었음에도 그의 죽음이 당이나 국가 통솔에 있어 권력의 공백이나 심각한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1980년 1월 산토스 대통령은 앙골라군 연합사령관이 국방문제를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장관인 헨리크 텔레스 까레이라(Henrique Teles Carreira)를 해임하였다.  앙골라의 언론은 까레이라의 해임이 소련에서 군사 훈련 과정에 참여할 계획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까레이라는 독립 이후 국방장관을 역임해왔고 포르투갈에 대항하던 게릴라전에서의 지휘관이었다.

 

1980년 루안다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으로 16명의 UNITA 대원에게 사형이 선고되어 8월 15일 집행되었다. 6월 25일 루안다에서 발생한 폭탄사건으로 1978년 이래 124명이 체포되었다. UNITA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MPLA의 포로 50명을 사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1981-1983년 남아공은 표면상 앙골라에 기반을 갖고 있는 스와포게릴라를 붕괴시키기 위해 일련의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남아공의 이런 정책은 앙골라 병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초래했다. 상대방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공격이 양측에 사망(손실)을 포함한 심각한 공격이 3년 이상 발생하였다. 1981년 8월 '프레토리아 작전'이라고 명명된 주요 공격이 앙골라 영토 내 200마일에 가해졌고 앙골라 영토 내에 남아공의 장기 주둔을 야기하였다.

 

이런 공격을 주도함으로써 남아공은 UNITA를 지원하고 있었고 남동부 지역 도처에 공격을 가했다. 1983년 3월 UNITA는 64명의 체코인과 20명의 포르투갈인을 인질로 붙잡았으며 1983년 8월 칸굼베(Cangumbe)를 점령하였다. 11월에는 앙골라 보잉 737기가 격추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계속되는 남부와 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의 점령은 남아공의 무기와 원조가 지원됨으로써 난공불락의 힘을 과시하였다. 정당간에는 나미비아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남아공과 앙골라 간에는 1982년 12월 까보 베르디(Cape Verde)에서 두 국가의 정관들이 회담을 갖기까지 직접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주요 조항은 쿠바군의 앙골라 주둔과 UNITA에 대한 남아공의 지원이었다. 이런 이련의 일들이 남아공에 휴전을 요구하였고 나아가 협상을 가져왔다.

 

1983년 MPLA 내부에 심각한 오점이 표면화되었다. 1월에는 사망한 전 대통령 네뚜의 전기 작가인 코스타 안드라데(Costa Andrade)를 포함한 MPLA의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숙청되었다. 그해 초 30명의 정당의 군인들이 조직화된 격동기동안 해고 되으나 2월 18명이 재임명되었다. MPLA 기간부대의 대장인 루쓰 라라(Ruth Lara)와 중앙위원회의 위원인 아내 루시오 라라(Lucio Lara)가 정직된 채였다.

 

2.3 남아공과의 투쟁

 

1984년 1월 앙골라에 군사력 지원을 철회하자고 제안했던 남아공은 SWAPO 게릴라 들이 국경선을 넘나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2월 루사카 협정의 일환으로 휴전이 협약되었다. 남아공이 동시에 모잠비크와 은코마티 협약 탈퇴에 조인하였을 때 난관돌파에 대한 희망이 높았다. 그러나 남아공은 앙골라가 25,000명으로 추정되어지던 쿠바군을 감축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남아공군대의 철수를 연기하였다. 앙골라가 남부지역에서 쿠바군의 철수에 동의하였을 때 희망이 다시 상승되었으나 남아공은 나미비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다시 주춤하였다.(하락하였다)

 

남아공은 마침내 1985년 4월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빈번하게 '광적인 추격'의 특수임무로 묘사되던 앙골라 내부에 공격을 가하였다. 남아공 파괴자들은 1985년 5월 카빈다(Cabinda) 유전을 공격하였고 그들 면전에서 남아공 특공대의 약탈자인 위난드 두 토이트(Wynand 여 Toit)에 의해 배신을 당했다.

 

남아공 또한 앙골라 공격을 목표로 남부 아프리카로 진격해 들어갔는데 그 사건은 많은 비로 곡물이 더 자랄 수 있게 되었던 그 이듬해까지 반복되었다. 그사이 전쟁은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질질 끌었다. 1987년 6월 미국의 레이건(Reagan) 행정부는 '자유의 전사들'인 UNITA를 지원하기 위해 1천 5백만 달러를 의회에 요청하였다. UNITA군은 9월 발전 프로젝트 일을 하던 스웨덴인 3명을 납치하였다가 2개월 뒤 석방하였다; 그럼에도 불그하고 사빔비는 공식적인 미국의 인정을 계속 받았다. 잠바(Jamba)에 있던 본부에서 UNITA는 MPLA와 쿠바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산토스 대통령은 1985년 2월 9일 자이레와 체결한 안보와 국방협력에 관한 협약에조인하였을 때 북부 국경 지역의 안보를 위하여 자신이 가진 외교권의 이점을 취하였다. MPLA의 두 번째 회의가 1985년 12월 2일에 루안다에서 열렸다. 6시간에 걸친  산토스 대통령의 연설 중 세 번째는 경제 문제와 특히 농업 분야의 문제점 그리고  소작농들을 농촌 지역에서 당 지도력 안으로 충분히 끌어들이지 못한 실패에 대한 것이었다.

 

산토스 대통령은 13명의 공산당 정치국에서 자신이 권위를 강화하였다. 그는 뛰어난 정당 창시자이자 이론가인 루시오 라라(Lucio Lara)와 두 명의 게릴라 전문가인 루디 키사순다(Ludi Kissassunda)대령과 산업부 장관이자 당 산하의 법무부 사무총장인 헨리크 산토스 오남브웨(Herrique Santos Orambue)를 제명하였다. 제명된 이들 몇몇은 미국에 의해 지역 평화에 있어 장애가 되었던 인물들이었다. 공산당 정치국의 새로운 인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기술부 장관들과 초대 여성멤버인 경제분야의 당 사무관인 마리아 맘보 까페(Maria Mambo Cafe)였다.

 

1987년 9월 산토스 대통령은 국가경제의 성향에 있어 주요 정책 변화를 신호로 앙골라가 국제통화기금의 회원에 가입하려한다고 발표하였다. MPLA의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은 12년 동안의 통치를 통해 루안다체제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왜 거절했는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로 인용되어왔다. 미국의 강경 노선은 그 발표후에도 완화되지 않았다. 1988년 최소한 군사적으로 수세에 몰린 다수의 지도자들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회담을 시도하였다. 6월 20일 앙골라, 쿠바, 남아공 세 나라는 쿠바군이 앙골라에서 철수한다는 주요 원칙에 동의하는 '뉴욕 협정(New York)'에 서명하였다. 그런 다음 6월 22-23일 앙골라 쿠바 남아공과 미국은 쿠바군 철수시기를 논의하기 위해 케이프 베르디에 있는 살(Sal)섬에서 비밀리에 회담을 열었다.

 

2.4 쿠바군 철수 합의

 

앙골라의 투쟁은 나미비아 독립 추진과 더불어 팽팽하게 결속되어있었다. 오랫동안 첨예했던 점은 쿠바군이 북부지역에서 MPLA를 지원하면서 남아있던 것만큼 오래 남부 앙골라에서 UNITA를 지원하고 있던 남아공이 군대철수를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1988년 일련의 회담을 통해 마침내 12월 22일 양측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남아공은 2000명까지 병력을 철수하는 것에 동의하였고 보도에 의하면 쿠바군은 27개월 내로 논의된 숫자의 군대를 철수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앙골라의 하바나(Havana)와 루안다(Luanda)에 있는 쿠바군의 병력이 약 50,000으로 추정되었으며 미 국무부도 50,000명이라는 추정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데 동의하였다. 7000명의 유엔군과 20명의 민간 감시단이 1989년 4월 1일 철수를 감시하였고 예정대로 철수는 진행되었다.

 

1989년 3월 보고서에 사빔비가 마녀사냥과 의견을 달리하고 고통받았던 것이 표면화되었다. 그 보고서는 미국의 일부 압력단체가(불과 몇 주전에 죠지 부시(George Bush)가 레이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던) 워싱턴에 보고되었다. UNITA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는 일부 압력단체의 촉구가 관철되었다. 부시대통령은 UNITARK 정치적 안정에 이를 때까지 적절하고 효과적인 모든 원조를 지속할 것임을 언급한 편지를 개인적으로 보냈다.

 

외교적인 난관의 돌파는 1989년 6월 자이레 대통령 모부투가 자이레 남서부 지역의 그바돌리테(Gbadolite)에 있는 그의 개인 소유의 호화주택에서 산토스와 사빔비를 화해시키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화해의 악수를 했고 이틀뒤인 6월 24일 효력이 발생하는 휴전협정인 Gbadolite 선언에 서명하였다. 이 휴전협정은 또 며칠뒤에 역시 실패하였다. MPLA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을 찾으려고 1990년 2월 견고한 UNITA의 마빈가(Mavinga)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파플라(Fapla)군대를 파병하였는데 실제로 그들은 그 요새를 빼앗았다.

 

Mavinga 점령은 사빔비에게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중요한 차질이었고 산토스 대통령에게는 주요 업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 판도는 1990년 5월 다시 변하였는데 UNITA가  다시 Mavinga를 재탈환하였던 것이다. 사빔비는 '1976년 이래 가장 중요한 전투'로서 묘사하였다. 4면전 (4파전) 즉 미국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던 UNITA와 남아공 대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MPLA와 쿠바군의 양상 - 남아공과 쿠반군 철수를 가속화시킴으로서 2파전 전투가 되었다.

 

1990년 4월 포르투갈이 MPLA 정부와 UNITAR 사이의 평화회담 소집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앙골라와 그 외 지역에서도 열전이 진행되고 있었고 냉각이라는 결과를 이행하기 위한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있었다.

소련연방은 붕괴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MPLA와 UNITA 양측은 군사적 후원자들이 열정을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슈퍼파워로서 공격의 인정을 받았던 MPLA는 1990년의 보편적인 국제정세와 발맞추어 재편성을 위한 신속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것은 1990년 6월 다당제 정부 체제로 입증되었는데 1990년 10월 외형상 맑스-레닌주의를 완전하게 포기하였다. 1991년 3월 헌법 개정을 위한 국회를 소집하였으며 1992년 11월 다당제 선거가 실시될 것임을 발표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효과적으로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자유의 전사'라는 사빔비의 허세를 꺾었다.

 

평화회담은 1991년 진척되었고 5월 1일 MPLA와 UNITA 양측은 포르투갈에서 평화정착에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전은 5월 15일 이루어졌고 뜻깊은 날인 5월 25일 마지막 쿠바군이 공식적 예정에 앞서 철수하였다.

 

2.5 1997/98: 평화협정 불이행

 

1997년과 98년에 걸친 주요 문제는 1994년 11월 루사카평화협정의 전폭적인 수용에 대해 UNITA가 공격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사빔비의 기대는 별도로 UNITA는 MPLA가 정부를 지배하는데 여전히 의문을 갖고 있었다. 만약 군대를 해산시키고 힘(영향력)을 없애고 부의 원천인 다이아몬드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일 수 있다는 의구심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신 민족연합 정부 화해(GURN)의 형성은 1997년 초 몇번씩이나 연기되었다. 타협은 1997년 4월 사빔비가 4월 11일 신정부 출범식을 보이콧하였음에도 야당 지도자로서의 특별한 역할이 자초되었다. 그러나 UNITA는 정부인사 87명 중 4명의 장관과 7명의 차관 임명을 수락하였고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였다.

 

앙골라 정부와 UNITA 양측은 콩고의 모부쿠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롤랑 카빌라(L멱뭇 Kabila)의 캠페인에 참여하였다. UNITA는 모부투편이었고 루삼바(Lusamba)와 자이레 동부에 있는 고마(Goma)에 5월 중순 잠바 기지에서 2000명의 병력을 급파하였다. 그러나 앙골라 정부가 승자편에 개입한 것이었다. 군대가 국경 접경지인 마타디(Matadi)를 넘었고 5월 킨샤사(Kinshasa)에 카빌라가 입성하기 전에 카빌라의 승리를 확인하였다. 산토스는 카빌라가 UNITA가 모부투 집권하에 항상 유리했던 콩고공급루트를 차단하여 산토스 자신을 도울 것으로 예상하였다.

 

콩고내전은 UNITA가 여전히 앙골라 내에서 견고한 군대를 배치하고 있음 나타낸 것이었다. 6월 유엔은 앙골라가 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증대됨에 따라 평화정착을 완성하는데 완전 실패한 것에 대해 UNITA를 강하게 비난하고 제재조치를 하겠다는 경고를 하였다. UNITA는 그들의 통제하에 있는 영토를 양도와 그의 명령하에 있던 많은 군대를 드러내는 것을 거절하였다.

 

UNITA군이 약 70000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평화협정전과 같은 수준이었다. 30,000명 이상의 UNITA군이 해산을 기다리고 있던 유엔 캠서에서 탈주하였고 UNITA군에 다시 재합류하였다.

 

2.6 1997년 10월 UNITA에 대한 유엔의 제재조치

 

10월 안전보장이사회는 항공여행금지와 해외공관폐쇄를 명하면서 UNITA에 대한 제재조치를 가하였다. 유엔은 또한 1998년 1월 평화유지군 철수를 언급하였다. UNITA 자체에 그 협정의 전폭적인 수락에 대한 의견이 분열되었다. 그들의 내각 각료들과 루안다에 있는 MPs의 대다수가 수락을 원하였으나 사빔비는 MPLA와 통치권에 대한 그의 권력 포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사빔비의 입장은 11월 10일 UNITA 멤버가  말란지(Malange)의 정부 감옥에서 질식사하자 강건해졌다.

 

1998년 1월 정부는 UNITA 자금의 70%가 쿠안고(Cuango)계곡에 있는 UNITA 소유의 다이아몬드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UNITA가 재무장하고 있다는 몇몇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다이아몬드 협상은 긴장상태를 완화하는데 기여했고 3월 11일 UNITA는 전역에서 그들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으로 합법화되었다. UNITA는 신속하게 루안다에 사무실을 다시 오픈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간(Vogan)에 있는 '검은 닭의 소리(Voice of Black Cockerel)'라는 자신들의 선전기관인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하고 '각성(깨어남)'이라는 상업방송국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사빔비는 여전히 루안다에서 야당지도자로서의 그의 신분을 거절하였고 1998년 초 UNITA와 정부간의 충돌 보고서가 점점 증가하였다.

 

UNITA는 북부와 동부의 마을과 촌락을 통제하에 두었고 출입도로를 자신들의 휘하에 두었음을 발표하였다.

 

평화진척은 유엔 특별사절인 알루닌 블론딘 베이(Alouine Blondin Beye)가 6월 26일 계획된 충돌로 인해 살해되자 더 타격을 입었다. Beye는 양측의 회담을 이끌고 평화협정 조항을 이행하게 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Beye의 죽음이후 충돌은 더 한층 증가되었고 9월 UNITA 출신 각료 중 다수는 순수하게 평화진척을 더 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GURN 정부에서 밀려났다.

 

앙골라 정부는 UNITA의 대통령으로 사빔비를 물러나게하고 UNITA 부흥위원회를 설립하는데 노련한 지도자인 죠지 발렌팀(Jorge Valentim)과 유제니오 마누발콜라(Eugenio Manuvakola)을 후원하면서 UNITA를 분열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UNITA 각료는 사빔비에 충성한 아벨 치부쿠부쿠(Abel Chivukuvuku)를 따랐다. 10월 찬반투표에서 53표 중 49표로 승리한 치부쿠부쿠는 압도적으로 UNITA 국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정부는 해외여행이 금지된 사빔비의 충복들에 대한 훈련시설을 점령하려하였다.

 

9월 정부는 평화진전과 내전에서 그릉 뒤에서 후원했던 동료들을 이끌었던 그를 비난하면서 사빔비를 위한 SADC의 동반자로서 후원을 받는데 승리하였다. 앙골라는 8월 콩고에 5000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였고 대다수 서부지역에서 반란군을 축출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 주요 목적 중 하나는 UNITA에 대한 전적인 콩고의 지원노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한때 앙골라군은 그들의 주된 목적을 확신해왔고 콩고 동부지역에서 카빌라의 전쟁을 추격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콩고에 머물고 있었다.

 

2.7 1991. 5. 31 리스본 평화회담

 

1991년 5월 31일 대통령인 MPLA의 도스 산토스와 UNITA의 수장인 사빔비(Savimbi)는 리스본에서 비세스(Bicess)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소수의의 협정 위반에도 불구하고 유전은 계속되었고 자유전사인 사빔비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광고판의 선전들이 선거에서 권력을 위한 내용으로 총알을 대신하였다. 두 단체는 서로를 폄하하였다. 가장 심각한 주장은 UNITA 내부의 비밀 기구인 브룬다(The Brund)가 라이벌을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Savimbi에게 전적인 해명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UN 감시단의우나벰(Unavem)은 선거인 등록이 UNITA가 다른 지역에 장애가 됨으로써 몇몇 지역들이 오랫동안 장악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역에서 예정보다 빨리 이뤄지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앙골라 초대 다당제 독립 선거일이 1992년 9월 29일로 확정되었다.  

 

2.8 1992년 9월 MPLA 승리

 

1992년 가을 산토스와 사빔비는 누가 당선되든 함께 할 것을 논의했으며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11명의 후보자가 선거에 참여했으며 단 두 명만이 투표율의 3%이상을 획득했다. dos Santos는 49.57%로  Savimbi의 40.07%를 이겼다.MPLA는 57.85%로 의회선거에서 230석중 129석을 차지했고 UNITA는 31.39%로 70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곧Savimbi는  그가 싸워왔던 목표인 자유가 선거에는 없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선거결과에 승복하는 것을 거절했고 산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몇주만에 앙골라의 평화는 끝나고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앙골라의 국민들은 다시금 전면전의 중간에 서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두 세력들의 완전히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으며 무기,탄약,지뢰의 보급은 완벽한 상태였다. 1993년 1월에 전쟁은 최고조에 달했는데 이는 정부의 군대가 도시의 중심부에서 UNITA를 몰아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1월 25일과 2월 21일 아디스 아바바엣의 평화회담은 조정뿐만 아니라 정전을 도출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해 초부터 큰 전투가 사빔비의 아빔분두 중심부의 수도인 후암보에서 개시되고, 결국, 3월에 UNITA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벵구엘라 철도 위의 다음 마을인 쿠이토에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무기를 판매하려고 하는 외부의 힘에 의한 전향(변화)에 의하여 앙골라 정부는 자국에 무기판매를 금지하는 국제조약을 어기게 만들었다. 평화회담은 4월과 5월 아비얀에서 개최되었지만 결국에는 어떤 성과물도 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미국의 새로운 클린턴 행정부는 평화회담 개최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시도들의 실패는 (미국의 앙골라에 대한) 정책을 바꾸고, 3월에 앙골라 정부가 오랜 동안의 UNITA에 대한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종료하였음을 인식하게 하였다. 남아공은 계속적으로 UNITA의 지원을 변하게 하였다. UNITA에 의해 점령된 중요한 도시들은 치열한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정부에 의해 다시 회복되어진, 소요 오일 콤플렉스는 UNITA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정부군은 8월 해변의 벵구엘라로부터 내륙쪽으로 몰아내는 공세를 시작하였다.

 

정부군에 의해 점령된 중심도시 큐티오와 메논게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발생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사빔비가 비케세 조약에 기반한 타결의 수용을 거부하였을 때, 9월 26일 만장일치로 UNITA에 대한 무기와 연료보급 제재를 부과하였지만 자이레는 계속 금수를 무시하고, 앙골라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교환하게 하였다.

 

2.9 15 November 1993 : Lusaka 평화회담

 

더 추가된 평화회담은 유엔 대표 앨리오운 블론딘 비예의 책임하에 더 악화된 전투와 심야에 남아공에서 UNITA로의 무역 밀수의 루머의 배경에 대하여 잠비아 루사카에서 11월 15일, 그리고, 연속적으로 12월과 1994년 1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는 정부군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군사전문가를 보냈다. 3월 새로운 반대그룹 DCO는 회담을 개최하고 UNITA와의 평화회담을 요구하였다. 정부군은 여전히 UNITA에 의해 점령된 원유지를 다시 되찾기 위한 군사행동을 시작하였다.

 

UNITA는 5월까지 일년이상 포위공격을 받아온 쿠이토를 계속 폭격했다. 루사카평화회담은 1994년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6월이 되어서 합의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정부 구성 시 UNITA가 행정부에 4명의 각료 임명까지 의견이 합의에 도달했다. 하지만 문제해결의 장애는 후암보Huambo였는데 후암보는 중심지였다. 넬슨 만델라는 7월7일에 산토스, 모부토와 함께 프레토리아 정상회담에서 평화를 위한 첫걸음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프레데릭 칠루바(Freederick Chiluba)와 죠아킴 치사노(Joaquim Chissano)도 참석하였다. 사빔비는 만델라와 따로 만나기로 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그 회담은 산토스와 모부투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성과가 없었다. 그동안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앙골라 정부는 7월에 카푼포Cafunfo, 카토카Catoca  두 곳의 주요 다이아몬드 생산지를 장악했고 산토스는 앙골라에서의 UNITA의 영향력이 40%로 줄었다고 말했다. 8월이 되어서 합의는 후암보의 차기지사문제를 해결하는데 까지 이르렀으나 새로운 문제로 최종합의는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평화협상은 결국 루사카에서 11월 20일에 체결되었는데 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회담에 참석할 수 없다던 사빔비에 의해서도 산토스에 의해서도 아니었다. 그 합의는 정전과 UNITA, 연합정부 그리고 새로운 국민 투표로 나타났다. 사빔비는 11월 23일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후암보 중심지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FAA를 비난하는 UNITA의 라디오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MPLA는 M-17헬리콥터를 격추시키고 이로 인해 22명이 사망하자 UNITA를 비난했다. 유엔 감시단은 앙골라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선택된 지역에 감시자와 유엔평화유지군을 6000명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출처 : 올아프리카  |  글쓴이 : africa의 모든 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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