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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년전쟁 이야기--[오를레앙의 메이드]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6.03|조회수1,712 목록 댓글 0



오를레앙의 메이드

 

 

(오를레앙의 메이드처럼, 직업에 성별은 관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히나미자와의 메이드)

 

아쟁쿠르, 크라방에 이어 베르네유 전투에서까지 잉글랜드군에게 무참하게 범해진 프랑스의 운명은 마치 흑태자와 에드워드 3세의 절륜함이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던 때보다 훨씬 위태로웠다. 다행히 절륜함으로 치자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헨리 5세가 그만 밥숟갈을 놓게 됨에 따라 프랑스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기는 했어도 믿었던 스코틀랜드군마저 잉글랜드군에게 처참하게 범해진 현실은 황태자 샤를에게 참으로 안습적인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베르네유 전투 직후 샤를이 내뱉었음직한 단어)

 

1380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전쟁은 게클렝과 흑태자라는 탁월한 두 지휘관이 세상을 뜨면서 일단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하지만  현 상태로는 양쪽 모두 유능한 지휘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측의 가장 유망한 지휘관은 존 탈보트 경이었다. 나중에 뭐시기 와인의 이름에도 들어간다는 이 분은 1387년에 태어나 1403년에 슈르즈베리 전투에 참전했고, 1407~9년까지 웨일즈 전쟁에서 빛나는 판단력과 무자비함을 그리고 절륜함을 여실히 보여주으며 이어 프랑스 전역에서도 나이가 들어감에도 그 맹위가 녹슬지 않음을 증빙해보이셨던 바, 동시대의 잉글랜드 지휘관들에 비해 거의 전설적인 오오라를 뿜어내는 분이셨다. 1427년 프랑스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전역을 이끌어내던 탈보트경의 신속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프랑스의 명장 라 이르가 르망을 점령했을 때의 사태였다. 몽타르지(Montargis)를 공격하던 탈보트경은 즉시 르망을 구하러 300명의 병사들만 이끌고 되돌아와, 새벽녘에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가해 도시를 탈환했다. 이를 통해 탈보트 경은 신속한 지휘관이라는 평판과 함께 병사들의 존경을 이끌어내었으며 이외에도 탈보트경은 혁혁한 전과를 세움으로서, 프랑스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 된 탈보트 경)

 

반면 프랑스 쪽이라고 명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용병 출신의 장군 생트라유와 라 이르, 롱그빌 백작이 될 것이며 오를레앙공의 서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영광을 이끌 장 뒤노아, 브르타뉴 공의 동생이자 1436년 프랑스의 총사령관이 되는 리시몽 경등이 대표적인 프랑스의 장군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명성이 아무리 높다해도, 이들이 세운 공적이 아무리 드높다 해도 현대인들의 기억에 남은 "잔 다르크"라는 이름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오를레앙 공성전

 

 

후에 프랑스가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기는 했어도, 현 상태에서 샤를 7세는 자기 옷자락을 물어 뜯으며 전전긍긍하는 수 외에는 쓸만한 카드가 없어보였다. 1428년, 샤를의 상황은 이제 현대 기술로는 도무지 더이상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지하 암반에 도달해 암반수를 꾸물꾸물 뽑아올리고 있었다. 세느강에서 루아르강까지의 영토는 잉글랜드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잉글랜드군은 더더욱 강력한 기세로 프랑스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의 전의를 꺾어버릴만한 확실한 공격지점을 결정했던 바, 그곳은 바로 오를레앙이었다.

 



(오를레앙 전투즈음의 전황)

 

오를레앙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황태자의 성은 시농에 있었는데, 이 곳을 공격하려면 일단 루아르 강을 건너야 했고, 반대로 샤를이 파리를 수복하기 위해서도 루아르 강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오를레앙은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도하지점으로서 이 곳이 잉글랜드군에게 넘어가면 샤를은 사실상 파리 수복의 열망을 접어야 했다. 반면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점령하면 루아르강을 마음대로 건너 프랑스의 중부와 남부를 마음껏 범할 수 있는 꿈같은 할렘 엔딩이 열려 있었다. 더군다나 오를레앙은 루아르강 이북의 프랑스 소유의 유일한 도시. 오를레앙의 점령은 할렘엔딩으로 가는 선택지였다. 오로지 이를 막을 제약이 있다면 오를레앙은  명목적으로 샤를의 도시가 아니라, 아쟁쿠르 전투 이후 13년 동안 감옥에서 군만두만 먹으며 지내는 오를레앙공의 도시였다는 것이다.

 

 

(오를레앙의 중요성)

 


 오를레앙공이 복수심에 불타 칼을 갈고 있었는지, 아니면 감옥 안에서 해탈을 하여 자신의 정신 세계를 멋들어진 필치로 펼쳐보이는 취화선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확실한 것은 포로가 된 기사의 영지를 공격하는 것은 기사도와 관습법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이 역시 기사도의 시대가 점차 저물어간다는 방증이기도 하려니와, 동시에 오를레앙의 전략적인 위치가 배드 엔딩으로 갈 것인지 할렘 엔딩으로 갈 것인지를 좌우하는 특별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1428년 여름동안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 공격군 5,000명을 조직했다. 이들을 이끌 지휘관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태규가 선정되었다. 솔즈베리 백작에서는 뛰어난 장군들이 자주 배출되었는다. 그들은 부빈 전투에서 활약했던 윌리엄 롱소드를 비롯해, 백년 전쟁과 스코틀랜드 전쟁에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그 위명은 마침내 다른 세계로까지 넘어가 창병에서 자수성가하여 90대까지 팔팔하게 전장터를 뛰어다니며 필살기까지 쓰는 창세전쟁의 살아있는 전설 죠X영감님까지 망라하고 있다. 이번 솔즈베리 백작은 크라방 전투에서 일군을 맡아 다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이끌어내는 전적이 있으며 뛰어난 전략가임을 증명시켜 보일 것이었다.

 

 

잉글랜드군의 첫 목표는 Janville라는 도시였다. 이곳을 기점으로 루아르강 상류 방면의 Jargeau와 하류 방면의 보장시(Beaugency)와 Meung을 공격하여 오를레앙을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킨 후,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곳에서 훌륭한 고화질 야구동영상을 찍겠다는 것이 잉글랜드군의 전략이었다. 이 야구동영상이 유포되면서 프랑스군이 사기는 극도로 떨어질 것이며, 이를 통해 잉글랜드군은 적절한 운용으로 승리를 받아내는 대표적인 사례를 꼽을 수 있었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이여, 언제나 말하노니 멋대로 상대를 능욕하려다가 피보는 것은 자신일지니, 보라, 라인하르트도 양웬리를 관광시켜 자유행성동맹의 사기를 꺾겠다며 "기동적 종심방어"라는 거창한 전술을 쓰며 이겼다고 미소를 짓다가 결국 피보지 않았던가(그런데 정말 그 전술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번에도 잉글랜드군은 또 피를 볼 것이로되 최초의 전략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범하려는자, 범해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Janville가 함락되고 9월 8일 잉글랜드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펼쳐 Meung 역시 무리없이 함락시켰다. 다만 보장시는 거세게 저항했는데, 이곳의 요새화된 성과 수도원은 긴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9월 20일, 잉글랜드군은 성을 포위하고 25일 본격적인 공세를 펼쳤다.프랑스군이 또 다리를 건너오는 적에게 풍성한 화살비를 퍼부어주지 못했는지, 전황은 결국 치열한 백병전으로 흘러갔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격전 끝에 다리를 점거했고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Jargeau 역시 쉽게 함락되었다. 이로서 오를레앙은 확실히 고립되었고, 잉글랜드군은 야구동영상만 찍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난항이 존재했으니 오를레앙은 20kg이 넘는 강철팬티로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점령한 도시에 남겨둔 수비대를 제외하고 약 4,000명이 10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일단 루이르강 남쪽에 집결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남쪽에서 올 프랑스군의 지원군을 저지하고자 남쪽 강둑에서부터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보는데, 자세한 답은 잘 모르겠다. 루아르강 남쪽에서 오를레앙을 공격하려면 400야드의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의 가장 남쪽에는 레투레르(Les Tourelles)라는 두 개의 탑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오크들이 아니라서, 이틀 동안 포격을 퍼부은 후 공격을 개시해 프랑스 군을 쫓아냈다. 하지만 두 개의 탑은 또 결국 잉글랜드군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 줬다.

 


10월 24일, 솔즈베리 백작은 오를레앙을 관측하기 위해 탑 위로 올라갔다. 그가 한참 오를레앙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프랑스측에서 2달 일찍 산타클로스에게 받은 멋진 선물을 백작에게 선물해 주었다. 백작이 탑 위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을 때 바로 멋진 선물, 즉 탄환이 백작을 향해 날아들어왔다. 아돌은 오른쪽이 사각이지만 탄환에게는 사각이 없었다. 백작은 깜짝놀라 대피하려 했지만 그보다는 탄환이 먼저 창문을 깨부수고 들어온 뒤 멋진 스핀을 먹어 튀기면서 백작의 얼굴의 절반을 갈아버렸다. 수행원들이 깜짝 놀라 백작을 후송했지만 결국 백작은 결국 8일 후 사망했고, 잉글랜드군은 유능한 지휘관을 잃어버렸다.

 

(...그런 선물 말고...좀 좋은 걸로 주면 안되는 거였나?)

 

솔즈베리 백작의 사망 후 잉글랜드 군은 서포크 백작이 이어받았다. 서포크 백작은 일단 군대를 후퇴시켰지만, 베드포드 공작은 무시무시한 탈보트 경과 지원군을 파견했다. 12월 1일, 지휘권을 획득한 탈보트경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으로 전진했다. 이번 공격은 강 북쪽에서 전개되었으며, 잉글랜드군은 열심히 삽질을 하고 돌을 날라 가건물을 세우면서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우선 잉글랜드 군은 생 로랑(St. Laurent) 교회에 방어탑을 세웠다. 이 방어탑을 본부로 생 로랑 교회 남쪽의 섬, 일 드 샤를마뉴(Ile de Charlemagne)와 남쪽 강둑의 생 프리베 교회(St.Prive)에도 방어탑이 섰다. 글라스데일 경은 레 투레르의 두 개의 탑과 레 오거스틴(Les Augustins)을 맡았다.

 

 

잉글랜드군은 시간과 예산이 남아 돌았는지 멈추지 않고 땅 여기저기에 방어탑을 세웠던 바,  오를레앙을 빙 둘러싸는 탑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결국 인력이 태부족이라 결국 삽질만 죽어라고 한 잉글랜드군이 제대로 군대를 배치한 곳은 델 라 크루아 보이스(de la Croix Boiss), 그리고 각기 "런던", "루앙", "파리"라는 이름이 붙은 세 탑이었다. 이 방어탑들은 도랑으로 연결되었으며 다시 생 로랑 교회와 연결되었다. 이로서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 북서쪽을 봉쇄했다.

 

 

오를레앙 동쪽에는 서포크 백작이 생 루(St.Loup)교회, 그리고 남쪽 강둑의 생 장 르블랑(St. Jean Le Blanc) 교회에 방어탑을 세웠다.

(오를레앙 방어전)

 

 

다시 그해 겨울, 부르고뉴 공작의 지원군 1,500명이 나타났고 그동안 빵구가 나있던 북쪽과 동쪽의 구멍을 메웠다. 그렇긴 해도 워낙 판을 크게 벌려놔서 완전히 간격이 메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오를레앙의 방어군 2,400명에 민병대까지 합쳐 약 4,000명 이상이었을 방어군은 도시를 요새화하고 수비탑을 정비하며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1429년 2월에야 샤를은 간신히 지원군을 파견할 수 있었다. 이 군대는 헤링의 날(the Day of Herrings)라고 알려진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다.

 

(오를레앙 공성전)

 

잉글랜드군의 존 패스톨프 경은 300대의 수레에 지원품을 싣고 오를레앙으로 가던 것을, 클레르몽 경 휘하의 프랑스군이 따라잡았다. 프랑스군이 오는 것을 본 패스톨프 경은 즉시 수레를 주위에 쌓고 가운데로 대피했다. 이 전술은 나중에 잉글랜드군이 자주 써 먹겠지만 이 시기에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선택은 하필이면 시즈탱크 앞에서 저글링 뭉치기를 한 꼴이었다. 클레르몽 공작은 직접 수레를 넘어 공격하기보다는 대포를 가져와 수레를 날려버리라고 명령했다. 소형 대포들이 연신 불을 뿜으며 돌멩이들을 날려댔고, 잉글랜드군은 돌에 바싹 짓눌려 얇게 펴진 빈대떡이 되던지, 혹은 수레에서 터져 나오는 나뭇조각을 머리에 심고 단체로 염라대왕 앞으로 호출되어 God saves the queen을 열창한 상황을 연출할 뻔 했다. 그러나 결국 또다시 그렇듯이, 가끔가다가 정말 프랑스인의 전략적 마인드가 국가 상징인 닭과 같은 수준이 아닌가 싶을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그 동안 전투를 글러먹게 만들었던 프랑스식 기사도 마인드가 전투를 글러먹게 만들었다. 전황이 유리해지는 것을 본 프랑스 기사들, 특히 존 스튜어트(John stewart of Danley)라는 이름의, 아무리 봐도 영국식 이름이라는 삘이 풀풀 나는 분께서는 크라방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사로잡혔던 것을 복수하고자 스코틀랜드 기사들을 앞세우고 클레르몽 경의 만류를 뿌리치며 죽여라를 부르짖으며 잉글랜드군을 향해 멋진 차지를 걸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수레라는 장애물을 앞에 놓고 차징을 건 무모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수레 안쪽에서 날아오는 화살비는 또 차징을 저지시켰다. 미디블 2를 기준으로 차징 저지된 기사들이 버그 없는 빌맨들에게 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할 수 없이 클레르몽경이 "이 ㅅㅂㄻ"를 부르짖으며 지원하러 달려갔지만 잉글랜드 보병들의 침착한 공격에 격퇴되었다. 이로서 프랑스군은 또다시 쫓겨갔고, 오를레앙은 완전히 고립된 것처럼, 그리고 프랑스는 끝장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지 않는가. 프랑스는 불사신이다. 언제나 범해지고 관광을 당해도 또다시 일어선다.
END OF ALL HOPE인 바로 그 때, 마치 기적처럼 메이드가 왔다!!

 

(죽어도 죽어도 죽지않는 불사신 프랑스)

 


메이드-인- 헤븐!!

 

 

(그 메이드가 아니라구!!)

 

프랑스의 구원자인 잔 다르크. 그녀가 어떻게 프랑스를 구출해 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잔 다르크는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러 납신 구세주도 아닐뿐더러, 세계의 구세주가 되겠답시고 살생부에 악당들 이름을 적어넣는 동인녀들의 우상도 아니다. 더군다나 잔 다르크가 전략적, 전술적인 능력을 마음대로 펼쳤나면 그것도 아니다. 그녀가 활약한 시기는 시농 성의 샤를 황태자를 방문할 때부터 화형당할 때까지 겨우 2년도 안되는 짧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기에, 잔다르크는 누구도 불가능하게 여겼던 일, 즉 패배가 확실한 것 처럼 보이고 단지 군사적인 천재만이 이를 뒤집을 수 있을 것 같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힘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잉글랜드가 프랑스에서 물러나는 일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놓았다.

 

 

잔다르크는 로렌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태어났다. 1424년 여름, 그녀가 13세 때 하늘에서 신께서 프랑스를 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혹자는 뇌종양으로 인한 환청이라고는 하지만, 뇌종양에 걸려 헛것이 보이는 환자가 전황 자체를 뒤집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게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신의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잔다르크의 등장이 전황을 뒤집게 했던 그 여러가지 설명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잔 다르크의 등장이 프랑스 군의 사기를 최대한으로 올려놨다는 점이다. 헤링의 날 이후, 프랑스의 사기는 말 그대로 버텀 라인을 치고 있었다. 축 늘어져 건들건들하던 프랑스군의 눈 앞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메이드가 나타났으니! 만약 메이드가 미소녀까지 겸한다면 어찌 입에서 우오오오 소리를 내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메이드 모에!!"...가 아니라, 성스러운 신의 후광을 업은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은 시골 처녀의 등장이 프랑스 군대의 사기를 다시 치솟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면 사기가 절로 치솟지 않겠는가)

 

 

황태자 샤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헤링 전투 이후 짐수레나 지킬 정도로 분산되어 있던 프랑스군을 한 데 모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지원군까지 더해 잔 다르크를 명목상 사령관으로 삼아 오를레앙으로 파견했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는 법이다.

 

 

새로운 군대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잔 다르크는 1429년 4월 27일 오를레앙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특별히 정예군이라고 할 것은 없었지만 각 개인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양되어 있었다. 그들의 행진은 마치 수도사들의 그것처럼, 기쁘고 고양된 것이었다. 일부는 잔 다르크를 성자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누구는 잔 다르크가 마법사라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잔 다르크를 탐구하면...?)

 

 물론 역사상 사기만 높은 군대가 밥 먹여준 적은 없었다. 전쟁은 또 애니와는 달라서 30%의 가능성을 용기만 믿고 파이널 퓨전을 밀어붙이면 컴퓨터 파일에 에러가 뜨고 애꿎은 파일럿 하나 잡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 역시 전쟁이며, 비잔티움의 보병들의 사기는 그다지 높다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는 대 러시아 전쟁에서 조직과 전술이 갖춰지면 사기의 차이가 실제 전력 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잘 무장하고, 잉글랜드군에 비해 특별히 떨어질만한 조직을 갖춘 군대가 아니었다. 그런 군대에 비정상적인 사기까지 더해졌으니 잉글랜드군이 고정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장궁병들이 죽어라고 화살을 날려도 랜서들이 백기 안들고 차징을 걸어버리면 장궁병들 입에서는 결국 ㅅㅂㄻ가 나오는 법이다. 

 

 

잔다르크의 등장은 지원군 외에도 수비군의 사기도 극도로 높여 놓았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의 유능한 지휘관들은 훨씬 유리한 입지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녀의 카리스마는 비단 병사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지휘관들마저 사로잡았다. 알랑송 공작, 장 뒤노아, 라 이르, 생트라유 등등, 수많은 프랑스의 기라성같은 장군들이 잔 다르크에게 복종했다. 이걸 보면 잔다르크가 실제로도 미소녀였던 모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뇌종양이든 신의 계시든, 여하튼 보통 사람하고 어딘가 다르면 카리스마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모양이다. 나아가, 현대의 역사가들은 잔 다르크가 실제로도 전략, 전술적으로 탁월한 식견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은 기적을 이끌어 냈다.

 

(둘의 결합은...기적을 이루어낸다)

 

오를레앙으로 접근한 잔다르크와 프랑스 군대는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곳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오랜 포위로 고통받는 오를레앙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실제 작전을 지휘한 쪽은 잔 다르크가 아니라 장 뒤노아와 알랑송 공작으로, 이들은 멋진 연합작전을 폈는데, 알랑송 공작이 남쪽 강둑에 군대를 진열 시켜 잉글랜드군을 견제하는 사이, 일부 군대를 상류로 돌려서 그곳을 수비하는 잉글랜드군을 구축하고 수많은 조각배에 보급품을 실어 하류로 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작전은 멋지게 먹혀들어갔다. 그러나 잔 다르크의 존재가 이들이 이런 작전을 수월하게 진행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만약 잔 다르크가 아니었다면 헤링 전투 이후 지치고 배고픈 수비대는 그 전에 성문을 열고 항복했을지도 모르고, 혹은 상류의 잉글랜드군을 쫓아내는데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하다가 꼬리를 밟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를레앙 전투)

 

그 날 잔 다르크와 지원군은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오를레앙에 입성했고, 그리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본격적인 공세를 펼쳤다. 특히 잔 다르크 자신은 앞장 서서 생-루의 보루를 향해 말을 달렸다. 프랑스 군이 뒤이어 공격해 들어갔고 생-루의 보루는 곧 점령되고 불태워졌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소규모 군대를 보고 허겁지겁 달려오던 무시무시한 탈보트 경은 보루에서 치솟는 불길을 보고 그만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며칠 후, 프랑스군은 다시 열성적인 공격에 나섰다. 다음 목표는 레 투레르였다. 잔 다르크는 조심스러운 프랑스 지휘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쪽 강둑을 건너 공격 할 것을 주장했고 장 뒤노아는 생-에냥(St.Aignan) 섬과 남쪽 강둑 사이에 배다리를 놓았다. 약 4,000명의 프랑스군이 오를레앙의 처녀의 지휘를 받으며 레 투레르를 공격했다. 5월 5일, 프랑스군은 곧 적을 쫓아내고 생-르블랑의 탑을 점령,  레 투레르의 두 개의 탑을 고립시켰다.

(오를레앙 공의 서자, 장 뒤노아 백작)

 

5월 7일, 프랑스군은 레 투레르에 대해 본격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프랑스군은 탑의 기반이 되는 다리의 아치를 무너트려 탑을 무너트리려고 했다. 전투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잔 다르크는 부상을 입었다. 잔 다르크의 고해신부 Pasquerel은 "내일은 내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릴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잔 다르크는 다시 부상을 치유한 후, 다시 흰 갑주와 흰 옷을 걸치고 교전에 참여했다.

 

 

레 투레르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다음 날, 장 뒤노아가 다시 공격을 명할 즈음, 잔 다르크는 그를 제지시킨 후 군대를 퇴각시켜 근처의 숲에 매복했다. 그날 저녁, 잔 다르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공격을 명했다. 잉글랜드군은 뒤로 밀려났다. 그 때, 잉글랜드군의 무게에 못 이겨 탑이 무너져내렸다. 대부분의 잉글랜드군은 포로가 되거나 살해당했고, 이들을 이끌던 잉글랜드의 기사 글라스데일은 무수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승리를 이끈 위대한 기사 존 챈더스 경의 깃발을 꼭 쥔 채 루아르강에 빠져 익사했다.

 

 

다음날, 모든 잉글랜드군은 한데 모여 전투대형을 취했다. 프랑스군도 마찬가지로 전열을 짰다. 몇 시간동안 양쪽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잔은 먼저 공격할 의지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퇴각을 결정했다. 길고 지난했던 오를레앙의 공방전은 결국 프랑스의 위대한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전장의 추 역시 기적적으로 프랑스를 향해 기울었다. 마치 렌 공방전에서 게클렝의 활약이 프랑스에게 저항의 희망을 심어주었듯, 오를레앙 전투는 프랑스의 역전의 발판이 되는 중요한 전투였다.

(...희망과 위안이 되지 않는가?)

 

장 뒤노아는 잔 다르크의 등장 이전에는 프랑스군 1,000명이 잉글랜드군 200명을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나기 일쑤였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뒤바뀌었다. 드디어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향해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마침내 오를레앙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그러나 봄이 와서...쭉 봄이라면 좋을 텐데라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싫으면 약을 맞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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