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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 이야기--[11-아쟁쿠르!!]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6.03|조회수385 목록 댓글 0
[중세유럽] 백년 전쟁 이야기--[11-아쟁쿠르!!]
글쓴이 : 게이볼그 번호 : 4715 조회수 : 934 2006.12.0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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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앍하앍 간신히 번역했습니다아-_-

정말 오랜만이네요오. 그 전에는 공부하기 싫어서 했는데 수능 끝나고 놀려니까 하기가 싫어집니다아

그나저나 집에 오니 역시 미디블도 안돌아가는군요 ㅇㅈㄴ 원래 미디블 찍어서 하려고 했스빈다만...어쩔 수 없이 컴퓨터 바꾸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전에 연재가 끝날거라는데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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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지난번에 이야기를 어디까지 했더라,
아마 헨리 4세와 그 반란군들 이야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길고도 지난했던 웨일즈+퍼시+모티머의 반란 3중주를 막아낸 헨리 4세. 뭐, 장막이 쓰러져서 질식사하실뻔 하거나하는 생명의 위협과 아슬아슬한 격전을 치르긴 했어도, 이제 잉글랜드의 반란군은, 이후 역사에서 하이드 해버린 오웨인 글린드워를 제외하고서는 어디 성 위에서 탁월한 경치를 감상하게 되는 운명을 맞았다. 물론, 머리만 남았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되겠지.


 

  과연 초기에 군주는 반란에 직면할 위기에 처하지만 이것을 극복하면 더욱 굳건한 권력을 다지게 된다는, 지지난화에 출연했던 피렌체 대학 마가백교수의 말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팩션을 계승한 헨리 5세의 치세에서 잉글랜드는 굳건히 단결하게 된다. 지난번에 마지막에 복선으로 쓰인 요크가가 랭커스터가에 대항할만한 기미가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헨리 5세의 치하에서 이 것이 일어났다면 그야 말로 기적이었으리라. 그리고, 아시다시피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기적이라고 부르는게다.


잉글랜드의 사정은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우리의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을까나(까나)

 



 잉글랜드에 비하면 프랑스의 상황은 말 그대로 개판 5분 전, 십자군 잔뜩 일으켜놨다가 지진으로 참사회의장이 파괴되버린 미디블 1의 카톨릭 국가, 아 바오아 쿠에서 키시리아가 기렌을 쏴버린 직후의 지온군, 로얄럼블, 기타 이와 비견될만한 상황을 지칭할만한 말을 끌어써도 들어맞을만한 상황이었다.

흔히들 발루아 왕가는 못난 국왕들이 나라를 물에 말아 드실즈음 되면, 뛰어난 국왕이 나타나서 본전을 찾아놓고, 이 본전가지고 좀 투자이윤 좀 만져볼 즈음 되면 다시 못난 국왕이 본전도 다까먹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왕가라들 한다. 과연 이번에도 크게 다를바는 없어서 필립 6세와 장 2세 때 망가진 왕국을 샤를 5세와 드 게클렝이 간신히 재건시켜놨더니, 이번에 등장할 인물은 바로 샤를 6세라는 인물이시다.

 

 

샤를 6세는 이제 사라져가는 기사도의 시대에서 기사도를 숭앙하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 상태가 돈키호테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그리고 훨씬 잔혹했던-사실은 프랑스로서는 엄청난 불행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데, 샤를 5세가 갖은 수를 다 썼음에도 그것만은 고칠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프랑스가 당장 망할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1382년 루즈베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플랑드르군을 대파하고 80년 전 쿠르트레에서 당했던 복수를 해냈고, 파리의 시민들이 일으킨 마이요탱(망치와 비슷한 무기)의 난 역시 효과적으로 평정되었다.
그리고 1389년에 있었던 앙주공 루이 2세와 그 동생인 멘 백작 샤를의 기사 서임식은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토너먼트로 시작해 드 게클렝의 장대한 장례식으로 끝난 3일간의 서임식은 이제 서서히 기사들의 시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잊게해줄만한 대단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젊은 기사들은 죽은 영웅을 기억하며 그와 같은 기사가 되겠다고 다짐했고, 게클렝의 동료들은 그를 추억하며 감회에 젖었다.

(샤를 6세)
하지만 이제 서서히 국왕의 광기는 프랑스를 집어 삼킬 시간이 다가왔다. 1392년, 피에르 드 크라옹(Pierre de Craon)이란 귀족이 프랑스의 위대한 대원수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암살하려했다. 암살은 실패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의 암살시주를 한 사람이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게클렝 때문에 렌에서 수년을 죽쳐야 했고, 마침내 오레 전투의 승리로 샤를 발루아를 죽이고 브르타뉴를 계승한 브르타뉴 공작 존 6세였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왕은 분노했다. 그는 즉시 대군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군해 들어갔다. 그러나 곧 존 6세의 음모보다 몇 배는 음침한 사건이 발생했다.   

때는 무더운 8월, 르망 숲이었다. 한참 진군을 하던 왕에게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남자가 달려오며 외쳤다.

 

"왕이시여! 더 이상 가지 마십시오. 당신은 배신당했습니다!"

 

왕의 수행원은 갑자기 나타난 이 인간을 쫓아냈지만, 구속시키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 놈의 인간은 정신을 못 차렸는지, 행렬 뒤를 따라오며 30분 동안이나 같은 소리를 징징대면서 지껄여댔다. 안 그래도 느릿느릿한 행군에 8월의 무더위, 그리고 이 30분 동안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징징대는 소리를, 그것도 반복되서 들어야 했던 것이 샤를에게는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마족이 생명의 찬가를 듣고 몸을 비비꼬듯 정신이란 녀석이 비비 꼬인 샤를에게 마지막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왕의 수행원이 군기가 빠져서 꾸벅꾸벅 졸다가 왕의 랜스를 떨어트린 것이었다. 랜스가 떨어지면서 또다른 왕의 수행원의 투구를 때리며 금속음을 냈다. 그 수행원이 머리를 감싸쥐고 범인을 돌아보고 강력한 응징을 준비하던 찰나, 갑자기 국왕의 입에서 분노에 찬 말이 튀어나왔다.

 

"매국노들을 향해 전진하라! 놈들이 나를 적에게 팔아 넘기려고 한다!"

 

그리고 말 뿐만 아니라 스스러 전진하시사 검을 마구 휘둘러 용맹스레 적군을 베어 넘기셨다. 5명의 매국노들이 국왕의 검에 쓰러졌다. 아마 그들이 받으려 했던 팩션 리더의 몸값 1만 플로린은 물건너 갔을 것이다. 국왕님은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적을 쓰러트린 후 갑자기 자기도 말에서 떨어져 코마 상태에 빠졌다. 잠시 후, 국왕이 한 늙은 의사에 의해 정신을 차렸을 때, 그가 죽인 사람들은 멀쩡한 수행원들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샤를 6세는 울부짖으면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외쳤지만, 누가 감히 고귀한 프랑스 국왕님을 죽이겠는가? 가끔가다 그가 제 정신이 들 때마다 그는 이렇게 외쳤으니, 이 꼴로 20년이 이어졌던 프랑스가 어떤 꼴이 되어나갈지는 뻔한 일이었다.

 

 

나라꼴이 이렇게 되었으니 프랑스의 실권을 두고 두 명이 다투게 되었다. 한 명은 샤를의 삼촌인 부르고뉴 공 용감한 필립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샤를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였다.

(프랑스의 권력을 두고 다투는 두 공작과 거기서 슬그머니 이득을 보려는 영국)

 

이 암투속에서 프랑스의 꼴은 갈수록 험악해져 갔고, 1404년 부르고뉴공의 작위가 용감한 장에게 넘어갔어도 그 대립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파리의 시민들은 샤를 6세의 마누라이자 왕비이신 바이에른 출신의 이자보에게 저주와 함께 "암퇘지"라는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 때에 루이와 이자보가 간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돌았으니, 루이를 수퇘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1407년, 장군의 별이 낮았는지 아니면 암살자의 눈깔이 꽤나 박혔는지, 아니면 부르고뉴 공이 무한 세이브/로드 반복 신공이라는 궁극기를 구사했는지, 아니면 가드 도그를 비롯한 변변한 레티뉴조차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를레앙공 루이가 부르고뉴 공이 파견한 암살자에게 살해되었다.

 

 

이제, 내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를레앙의 후계권은 아르마냑의 베르나르가 차지했고,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대립은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도 샤를 6세는 1410년, 황금태양의 국왕 기사단을 창설하며 중세판 오덕오덕 망상의 세계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한창 내전이 진행되던 중에, 부르고뉴공은 잉글랜드에게 도움을 청했다. 헨리 4세의 치세에 잉글랜드의 입장은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 프랑스의 국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이었지만, 헨리 5세는 아예 최대한 전쟁 준비를 하는데 그 시간을 활용했다.

(프랑스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헨리 형님)


프랑스의 상황이 이렇게 누덕누덕 해갈 즈음, 1413년, 헨리 4세는 죽으며 아들에게 프랑스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회복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 말 들어서 좋은 학과 가서 성공했다는 말 도 있고, 아버지 때문에 적성에도 안맞는 학과를 갔다가 인생 망쳤다는 사람도 있고 가지각색이지만, 이 번만큼은 헨리 5세 자신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아들과 아버지가 모두 좋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헨리 5세는 어째서 이번 원정을 바랬던 것일까?

 

 

글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헨리 5세의 명성이 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내전에서 탁월한 지휘관이자 전쟁 지도자로 군림했던 그의 모델은 수 십년 전 에드워드 3세이거나, 마검 아수라를 휘두르며 팬드래건...이 아니라 프랑스의 기사들을 도륙하던 흑태자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되냐고?

"국왕님하, 이번에 프랑스로 원정 안가3?"
"왜-_- 귀찮은걸 뭐하러 가?"
"국왕님하는 조낸 전쟁 굇수자너. 근데 왜 가만히 죽치고 앉아있는데? 별이 아깝지도 않3? 아니면 영국인 죽이는데만 잘하는거고 프랑스 애들은 못죽이는거3? 아버지 말씀도 안 듣는 나쁜 초딩인거3? 응? 응? 전투하는 법은 할 줄 아셈? 왕좌 아래 뭐 있다ㅋㅋ 별이나 다시 키워 오셈 "
"아 ㅅㅂ-_- 글엄 니네 내가 원정 가면 선물로 내 캐릭 프리미엄으로 환생 시켜주고 판라 1달 끊어줄거3?"
"음.....뭐, 좋아. 글엄 국왕님하 맘대로 하셈"
 

이리하야, 우리의 헨리 5세는 프랑스로 출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1415년, 헨리 5세는 오래 전에 에드워드 3세가 써먹었던 왕위 계승문제를 꺼내들며 프랑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행동이 워낙 속보였던지 몰라도, 아르마냑과 부르고뉴는 일단 잉글랜드의 위협을 먼저 물리쳐야 한다는데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여기에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어디를 공격하느냐였다. 역시 잉글랜드가 발을 디딜만한 곳은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의 영지가 남아있는 아퀴탱이었다. 그러나 70년 전에 에드워드 3세에게도 그랬듯, 아퀴탱은 너무 멀었고 연락이 끊어지기도 쉬웠다. 노르망디는 프랑스의 요새들을 격파해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베이스 캠프로 쓸만한 성과 요새는 있었다.

 

 

마침내, 8월 14일 헨리 5세와 기사 2,500명과 궁수와 기타 8,000명으로 이루어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에 상륙했다. 그의 목표는 노르망디-루앙-파리-아퀴탱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행렬, 즉 에드워드 3세가 했었던 대 기마대 약탈행렬(chevauchee)의 재구현이었다. 그럼에도 일단 시작부터가 쉽지 않았다.

(상황이 진행됨에 따라 변화하는 헨리 5세의 얼굴)

 

잉글랜드군은 근처의 아르갈리로 시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후 5주 동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 군은 대단히 선전했고 잉글랜드군은 습지대에서 눅눅한 잠자리로 들어야 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프랑스군은 협상을 맺어 시를 넘겨주었다. 이로서 잉글랜드군은 베이스는 마련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가용병력은 기사 900명과 장궁병 5,0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 병력가지고 아퀴탱까지 가라고? 택도 없는 소리다. 그건 너무 무리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잉글랜드로 돌아가? 도시 하나 먹었으니까 대충 이걸로 때우면 되잖아? 하지만 그 때도 의회가 돈을 줄 지는 확실치 않았다. 의회로부터 돈을 더 뜯어내려면 좀 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언제나 말하지만, 지구를 지배하는 것은 예산이다)

 

헨리는 제 3의 길을 택했다. 플랑드르로 그는 것이다. 기묘하게도 그 행렬은 70년 전 에드워드 3세가 갔던 길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전혀 달랐다. 에드워드 3세는 가는 길마다 불지르고-밤마다 잉글랜드군이 얼마나 오줌을 싸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탈하고 하여튼 나쁜짓이란 나쁜짓은 죄다 지르고 간데 반해 헨리 5세의 행군은 "자랑스러운 행진"이라고 불릴 정도로 에드워드 3세가 했던 짓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훈련된 잉글랜드군은 최대한 프랑스군을 자극하지 않고 그 흔했던 약탈도 자제하면서 조용히 플랑드르로 행군하고 있었다. 이것만이라면 좋겠는데 문제는, 잉글랜드군의 식량이 안그래도 부족했는데 약탈조차 잘  안되면서 군대 꼴이 점차 말도 아니게 되어 갔다는 점이다.

 

 

그래도 헨리가 아무 생각없이 이런 행군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이나마 약탈을 하면서도 농민들의 카운터 어택을 받은 잉글랜드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피전트가 아무것도 아닌거 같다고? 소수만 분리되어 있을 때 벼와 쌀을 불리시켜 주는 뼛속까지 아픈 강렬한 어택을 뼈야 안맞고 근육에 맞으면 꽤 아픈건 마찬가지다. 헨리는 최대한 프랑스군을 피하고 있었다. 현재 프랑스의 지휘관이자 드 게클렝의 전술을 이어받은 대원수 샤를 같은 경우,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잉글랜드군을 약화시킬 것이다. 안 그래도 갈 길은 먼데 프랑스군을 만나서 끊임없이 엉덩이 아픈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 동안 수 차례 히로익 빅토리를 터트려왔던 잉글랜드군이라도 감당해?Y 수 없었다. 여기에 장마까지 내렸다. 길은 진흙탕이 되고 잉글랜드군은 그 진흙 속에서 헤매고 다녀야 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군의 진로)

 

 

한편,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이 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봉쇄하고 있었다. 군대를 통솔하는 사람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예니체리 3종 세트와 시파히 조합에게 쓴 맛을 보았던 부시코 원수였다.

(

(부시코 원수를 격파했던 투르크 예니체리 부대의 위풍당당한 위용)

 

 

12살에 플랑드르의 거인을 해치웠던 먼치킨 소년 전사에서, 니코폴리스에서는 형편없이 사로잡혔던 이 분은 이제 제법 나이를 먹어가면서 훌륭한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프랑스 군은 솜 강의 도하 지점을 철저히 봉쇄했다. 마침 때도 장마철이라 어지간한 다리는 전부 무너진 상태. 헨리 5세는 페이크를 써서 코비에 다리(bridge of Cobie)로 가는 척 프랑스군의 주의를 끈 후 급격히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여울을 건넜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부시코 원수는 페론느에서 잉글랜드군을 막았다. 이 때 부시코 원수의 전술은 전에 잉글랜드군이 썼던 전술과 유사했다. 정면 전방에 궁수와 석궁병을, 정면에는 하마 기사가, 양익에는 승마 기사가 배치되었고, 하마기사가 쓰지 않는 말들은 시종과 종자들이 보살피며 유사시에 공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부시코 원수는 막상 이렇게 다 준비 하고서도 숫자가 비슷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북쪽으로 퇴각했다.

잉글랜드군은 겨우 한 숨을 돌렸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더욱 무서운 일이 들어났다.
프랑스군 전체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군을 가로막은 프랑스군의 위용)

 

이 때 프랑스군의 숫자는 약 2만~3만. 석궁병과 궁수들이 1/6, 하마 기사들이 1/2, 승마 기사들이 1/3의 비율이었던데 반해 잉글랜드군은 하마 기사 900명, 장궁병 5,000명 정도밖에 없었다. 만약 개활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프랑스군이 닭대가리에 미디블 2 바보 궁병 버그 AI수준의 얼간이들만 아니라면 잉글랜드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군의 배치는 이전과 비슷했다. 페론느 전투처럼 하마 기사가 중앙에, 승마기사가 측면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부시코 원수의 초기 배치와는 다르게, 석궁병들은 후방에 배치되었다. 진흙에 범해지면서 더럽혀진 잉글랜드군 정도는 가볍게 붙잡아 몸값을 받고 명예를 드높여주겠다는 것이 프랑스군의 생각이었으리라.

AI와 비교해서 인간들의 지능을 존중하건대, 난이도 vh이상으로, 1:2 이상의 병력비를 두고서도 지원군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헨리 5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군들은 어떤 전쟁을 바라나? 아무 변화도 없는 보통 전쟁? 아니면 철풍뇌화의 한계를 다하고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는 태풍과 같은 전쟁을 원하나?"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는 소수, 행복한 소수, 우리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다!!--실제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저기서 나왔다던가 -3-)

 

 

...라고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구라를 깠다.

 

 

실제 헨리 5세가 한 일은 이거였다.

 

(요원 외교관 선택)-(전방의 프랑스군에게 접근)-(클릭)-(프랑스 "뭐라도 말해보시지? 우리가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offer->give region 아르갈리로/demand-> 칼레까지 가게 비켜주세요 ㅠ.ㅠ)

 

어쩐지 이것도 흑태자님하께서 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이 들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일단 헨리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프랑스는 예전에 흑태자와 에드워드 3세가 장 2세를 런던에서 깍듯하게 대우해주었던 것을 잊고 있지 않았다. 친절하게도, 그들은 이번에 헨리 5세에게 세련된 파리의 에펠탑과 샹들리에 거리, 나폴레옹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이유 궁전등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아, 물론 코스는 최고급 호텔로 들어야 한다. 값은 조금 더 올라가고 팁은 좀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게 슬플지도 모르지만.

 

 

헨리 5세는 프랑스군보다는 현명하게,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최대한 전투 준비를 마쳤다. 말뚝을 심고, 군대를 정돈시키며 적의 공세에 대비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군도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샤를은 일단 선공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날 수록 불리한건 잉글랜드군 아니신감. 해 뜨고 세 시간동안이나 프랑스군이 움직이지 않자 헨리는 군대를 전진시켰다.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 사이의 거리는 약 1km.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 앞 350m 지점까지 접근해들어가 말뚝을 심고 화살을 퍼부었다.

 

이쯤 되자 프랑스 귀족들이 안달이 났다.
갑자기 그들은 척척척 거리며 잉글랜드군을 향해 전진했다.
대원수 샤를이 이들을 저지하려 했다.

"뭐, 뭐하는거야?"

프랑스 귀족들은 다른 생각이었나보다.

"멈춰! 싸우는 것이 최선의 길. 눈 앞의 적을 방치하고서 뭐가 기사도고 뭐가 닭돌이란 말인가? 일격에 모조리 해치워버리겠어!"

 

 

결국 샤를은 이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양익의 기사들이 이미 보병 대열을 뚫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목표는 잉글랜드 하마기사. 뒤쪽을 더블클릭 하고 적당히 접근하면 원클릭...하려는 순간, 프랑스군은 뭔가 자신들의 발밑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진흙, 비가 와서 질척질척한 진흙이었다. 더군다나 길이 깔대기 모양으로 잉글랜드쪽을 향해 좁아지는 형상.  프랑스군은 서로 뒤엉켜 있었다. 다행히 진흙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와서 자신들을 집어삼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심하던 프랑스군에게는 매우 유감스럽기 짝이없는 일이겠지만 여기에 잉글랜드 궁수들이 엄청난 장궁의 화살비를 퍼부었다.

(쏟아지는 장궁의 화살비...응?)

 

어떻게 됐냐고?
이쯤 되니 별거 있나? 마탄의 궁수 잉글리시 롱보우맨의 유상무상의 화살은 목표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
프랑스 전위부대가 꼬여들었다. 샤를은 할 수 없이 하마 기사들을 이끌고 전진하다가 후퇴하는 사람들과 뒤섞였다. 이 틈을 향해 잉글랜드군이 밀려들었다. 후위의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밀려들면서 좁은 아쟁쿠르의 길목은 사람들로 빽빽히 가득찼다. 장궁병들은 더 이상 화살을 쏘지 않고, 스커미시 모드를 끈 다음, 알트 우클릭을 눌러 프랑스군을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기사들도 미치겠기는 마찬가지였다. 좁은 길목에서 서로 모여 웅성웅성 거리다보니 짓눌리기 일쑤였고, 드디어 등장한 초기형 풀 플레이트 아머의 환상적인 통기성 때문에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졌다.

한 연대기 작가들이 나중에 썼듯이--

"수많은 고귀하신 분들이 한대도 안맞았는데 뒈져버리셨답니다 ㅇㅈㄴ"

 

가장 대표적인 잉글랜드쪽의 희생자가 요크 공작으로, 그만 이리저리 짓눌리다가 갑옷의 무게 때문에 질식사 해버리셨다.

 

하지만 잉글랜드 기사들이 대열을 유지하는 사이, 장궁병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런 질척질척한 육욕라이프...가 아니라 기동성이 제약되는 진흙밭에선 가벼운 무장만한 장궁병들의 검이 오히려 무서웠다.

무거운 갑옷 때문에 진흙에 붙잡힌 프랑스군에게 잉글랜드 궁수의 망상심음[자바나야]...보다는 더크가 목줄을 툭툭 따주거나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았다. 프랑스군이 몰리는 상황이었지만, 어디 이분들이 여기서 기가 꺾이겠는가?

"어떡하지, 프랑스? 벌써 전위 부대가 박살이 났군. 지휘관들은 사로잡혔어. 어쩔거지? 너는 닭돌이냐, 후퇴냐?"
"그게 어쨌다는 거지, 영국놈들? 고작 전위 부대가 깨진 것 뿐이잖아. 자랑 그만하고 이리와, 덤벼! Hurry! Hurry!"

 

 

...말은 덤비라고 해놓고 프랑스군의 2파, 3파가 덤벼들긴 했지만 이미 전황은 기울어 있었다.
아직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프랑스 소수의 기사들이 헨리 5세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기도 했지만, 성공 가능성은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 조, 경의 저편에 있었다. 물론, 나유타의 일이라도 충분하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일어나지 않으니까 기적이라고 부르는거다.

 

 

여기서 부시코 원수가 페론느에서 기획했었던 후방 공격이 시도되었다.

(강렬한 후방 공격. 버서커라도 견딜 수 ㅇ벗다)

 

소수의 프랑스 기사들이 후위를 파고들어 잉글랜드군 짐마차를 약탈하고 후방 공격을 시도했다. 혹자는 이 때 프랑스군이 시동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데 대해 헨리 5세가 극도로 분노하여 프랑스 포로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포로 때문에 전투가 지체되고, 프랑스군이 포로를 풀어줄까봐 염려되어서 그랬던 점이 크다.

 

 

이제 나머지는 예~~~전에 썼었던 더플린 무어(*스코틀랜드군이 협곡안으로 몰려들어서 지나치게 밀집된 상태에서 잉글랜드군 롱보우와 하마기사의 더블 어택에 두들겨 맞고 개관광 당했던 전투) 전투의 반복이었다. 상황은 더 나빴다. 프랑스군은 스코틀랜드군보다 훨씬 중무장했고, 아쟁쿠르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더플린무어보다 훨씬 좁은 장소였다.
살육전이 거듭된 끝에, 전투가 끝났다.

 


프랑스군은 6,000~1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물론 포로들은 중간에 처형시켜 버렸다. 가끔가다가 부시코 원수라거나, 오를레앙공이라거나 하는 높으신 분들은 살아남았지만, 샤를 알브레 대원수, 알랑송 공작을 비롯한 프랑스의 높은 귀족분들 중에서도 전사한 자가 많았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약 200~1,600까지라고는 하지만, 그 숫자가 프랑스에 비하면 훨씬 미미한 것은 사실이었다.

 

The enemies...are overcomed! 모든 기독교 세계는 오늘의 승리를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이다!

 

Heroic Victory

 

England King Henry V 5,900  200  5,700  6,000
France  Constable Charle 20,000 6,000 ??  200

(헨리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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