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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 of the Roses--(1) 전쟁의 시작]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7.06.03|조회수455 목록 댓글 0
[중세유럽] [War of the Roses--(1) 전쟁의 시작]
글쓴이 : 게이볼그 번호 : 4831 조회수 : 653 2007.01.3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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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전쟁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길고 치열했던 장미전쟁의 승자는 헨리 튜더라는, 랭커스터쪽에 가깝지만 양쪽 가문이 아닌 쪽에서 나오게 되었다. 1485년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서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로사 키넨시스와 로사 기간티아가 섞인 적절한 백합 모에를 문장으로 삼게 되었다. 물론, 홍장미와 백장미는 각각 랭커스터와 요크의 문양으로 유명하다. [장미 전쟁]이라고 불릴 이 전쟁을 어느 쪽에서 불을 붙였는지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30년에 걸친 전쟁은 분명 잉글랜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다.

 

월터 스콧경은 [Anne of Gierstein]이라는 소설에서, [시민들은 백장미님과 홍장미님의 권력 투쟁에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답니다]라고 쓰고 있다. 장미 전쟁이 민생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짚어볼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전쟁의 여파는 현재까지도 엮여있어서 아직도 요??와 랭커셔의 학생들은 매년 크리켓 경기를 열고, 맨유와 리버풀 사이의 경기를 장미전쟁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등, 오늘날 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근원을 따지면, 홍장미님 문장은 꽤 오래된 것이다. 본디 이 문장의 근원은 황금 장미라는 왠지 삐까번쩍하고 비싸보이는 물건으로, 에드워드 1세의 마눌님이신 엘레아노르가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이 황금 장미는 에드 2세와 에드 3세 역시 문장으로 사용??다. 그에 반해 홍장미는 에드 1세의 동생이자 랭커스터의 초대 공작이셨던 분께서 가문의 문장을 떼어와 붉은 색으로 색깔을 바꾼데서 유래한다. 이 문장은 후에 헨리 4세가 되는 헨리 볼링브로크가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헨리 튜더 역시 이 문장을 교묘하게 재활용한다. 어째서 이렇게 ?楹캅? 하면, 홍장미님[로사 키넨시스]이든 홍장미 봉오리님[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이든 홍장미 봉오리의 동생[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 쁘띠 쇠르]든간에, 여하튼 홍장미 계통에서 남아나신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왕위를 줏어먹는 헨리 튜더는 로사 키넨시스 직계는 아니다)

 

이에 비해 요크 공작가는 백장미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는 모티머 가문에서 나온 것으로, 후에 왕위 계승을 주장할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백장미는 요크가가 쓰던 수 많은 문장 중 하나였다. 예컨대 요크가가 애용하던 문장으로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 멋진 독수리 문양도 있었다. 하지만 빛나는 베텔리우스 성을 문장으로 쓰던 치킨을 뜯어먹는 불사조군을 문장으로 쓰던간에, 후에 홍장미님과 백장미님을 연결시켜 산백합회의 백합무드를 조성하신 바람직한 헨리 7세에게, 양쪽 왕위 계승권자가 모두 장미 문양을 사용한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우연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자, 우아하신 장미님들은 그렇다고 쳐도, 이제 뼈와 살이 분리되고 피냄새와 쇠냄새가 코끝을 진동시키는 싸나이들의 전쟁터는 어찌될 것인가?

(영웅들이 모여 싸우는 뜨거운 남자의 전쟁은?)

 

 30년이 넘게 진행된 이 전쟁은 과연 잉글랜드의 신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이에 대해서는 의외로 장미 전쟁 와중에 민생안정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보인다. 실제로 장미 전쟁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것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길어썬 전역이라고 해봤자, 1460년 6월 요크 파가 켄트에 상륙한 뒤, 노햄프턴으로 진군한 뒤, 이듬해 타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파를 격파한 채 1년에 못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들보다는 1460년 11월에 있었던 홍수가 잉글랜드 평민들의 삶을 괴롭힌 주적이었으리라 보는 사람도 있다. 어찌되었건, 이 시기에 잉글랜드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한 부르고뉴인 사가가 쓴 다음과 같은 말 역시 이를 대변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유럽의 여러나라 중에서 잉글랜드는 가장 공공 질서가 잘 지켜지며, 신민들이 가장 피해를 입지 않는 나라이다]

 

어찌되었건, 전쟁의 시작은 1455년 세인트 올번 전투에서부터였다. 요크 파와 랭커스터 파 사이에 벌어졌던 이 짧은 접전은 이전부터 있어오던 소규모 분쟁에 불과했다. 좀 상황이 안 좋아진 귀족이 왕에게 자기 사정을 알리려고 했던 뻘짓인데, 이 짓거리가 이후 전쟁으로 일파만파 퍼져버린게 문제였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1451년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 때의 전투는 요크 공작이 굴욕적으로 굴복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에비해 올버니 전투는 달랐다. 요크 파는 그동안 세력을 키워왔으며, 그동안 요크 파의 불만을 억누르는데 크나큰 공헌을 했던 잉글랜드 군의 전설 존 탈보트 경은 그만 얼마 전 카스티용 전투에서 한 프랑스 궁병이 찍어내린 도끼에 두개골이 박살나버렸기 때문이다. 헨리 6세가 탈보트 경을 프랑스로 보내기 꺼려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가 이끌었던 병력이 그토록 적었던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찌되었건 1455년 전투 당시 요크 파의 간덩이가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더 부풀어 올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국 요크가가 초 요크가로 업그레이드!)

 

요크와 랭커스터

 

이제 장미 전쟁이 벌어지게 된 복잡한 그 가계도 놀음부터 따져보자.

정통성으로만 따지자면야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은 손으로 입을 막아도 기어코 떠벌떠벌 떠들어댈 이유가 있었다. 1411년 태어난 그는, 채 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와 삼촌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참상을 맛봤다. 그의 아버지인 케임브리지 백작은, 전부터 계속 이름이 언급되지만 어쩐지 비중없어 보이는 인물인 에드먼드 모티머를 또 왕위에 올리려다가 그만 헨리 5세의 손에 목이 달아나버렸다. 리처드 플랜태저넷은 삼촌인 요크 공작에게 입양되었는데, 이 삼촌은 아버지와는 달리 헨리 5세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그런데 그 충성이 또 워낙 부담스러웠던지, 그는 아쟁쿠르 전쟁에서 빽빽하게 뭉쳐있는 군사들과 통기도 잘 안되는 초기형 플레이트 아머 때문에 그만 질식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승리에 기뻐하고 있을 때 얼마 안되는 잉글랜드군 전사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고 양아버지가 죽어서 리처드가 도합 20억원을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양아버지이자 삼촌이 일찍 돌아가셔서 아들이 없었다는 점은 리처드에게 행운이었다. 결국 다음대 요크 공작은 리처드 소년에게로 넘어갔다.

(요크 공작 리처드)

1424년, 리처드의 외삼촌이자 비중없어 보이는 인물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왕위 계승 음모의 주역으로 몰리게 되어, 우리나라 같았으면 몇 번이고 두상과 흉부가 분리되거나 소가 끄는 수레에 몸이 17분할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에드먼드 모티머 역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로서 요크 가와 모티머 가, 이 에드워드 3세의 계통은 리처드의 대에 와서 하나로 합치되었다.

 

그는 유일한 모티머의 후계자이자, 유일한 요크의 후계자였다. 그는 또한 변경(March)의 백작령, 위그모어의 성주, 그리고 얼스터의 모티머 백작령까지 추가로 부여받았다. 여하튼 이렇게 주렁주렁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것은 좋은데 특히 얼스터 백작령의 경우, 그가 반란을 계획하는데 있어 아일랜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좋은 거점이었다.

 

1438년, 가문 좋으신 요크 공작님은 세실리 네빌이라는, 변경의 영주들 중 힘좀 무지 쓰신다는 네빌 가문의 여식과 혼인했다. 이 결혼 동맹을 통해 요크 공작은 네빌 가문이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손에 넣었다. 네빌 가문은 전술했던 퍼시 가문과 함께 스코틀랜드와의 접경에서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손에 쥔 양대 가문 중 하나였다. 네빌 가문은 후에 요크 공작가의 충실한 동맹으로 남았다. 또한 리처드는 처남이자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그의 곁에서 싸울 충실한 솔즈베리 백작과, 그의 조카이자 후에 삼촌 가문에 이상한 짓거리를 할, 그리고 [킹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을 그와 같은 이름의 리처드 등과 다시 연결되었다.

 

(이상 로사 키넨시스의 인물들)

 

요크 공작님은 나아가 프랑스에서 싸웠다. 물론 백년 전쟁 말기에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계속 밀어붙이기는 했어도, 요크 공작은 중요한 역할을 맡아 막대한 부를 쌓음과 동시에 장군으로서의 명성도 쌓아올렸다. 이제 헨리 4세 이후 왕위를 꼬박꼬박 이어오는 랭커스터 계에게 심각한 적수가 있다면, 이 로사 키넨시스를 문장으로 삼는 요크 가문이 유일했다.

 

하지만 요크 가문에게도 강력한 적수가 존재했다. 그들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이자 서머셋 공작인 뷰퍼트 가문으로, 건트의 존의 불법 사생아 계통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존이 헨리 4세의 모친인 블란체 사망 후 정부였던 뷰퍼트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면서 결국 합법화 되었다. 요크 가와 모티머 가가 리처드에서 하나로 합쳐졌듯, 뷰퍼드 가문과 랭커스터의 직계 역시 나중에 하나가 된다. 이야기 하자면 또 치 떨릴 정도로 복잡하게 진행되는데, 뷰퍼드 가문의 마가렛 뷰퍼드가 다시 오웬 튜더와 헨리 5세의 미망인인 캐서린과 혼인해 낳은 에드먼드 튜더와 혼인해서 후에 헨리 7세가 되는 헨리 튜더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당시 요크 공작 리처드의 적수는 마가렛이 아니라, 그의 숙부인 에드먼드 뷰퍼트이자 서머셋 2대 공작이었다. 리처드와 에드먼드는 헨리 6세가 광기를 발산할 때, 각각 [호국경 Protecter of the Realm]으로 선출되었다. 뭐,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손을 떼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1448년 에드먼드는 리처드를 제치고 프랑스에서 작전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리처드는 저 멀리 아일랜드의 얼스터로 직장을 옮겼는데, 한직으로 내쫓은것 같은 이것이 또 최악이었다. 바로 아일랜드의 옛 이름은 에린. 그리고 에린의 일부에는 모리안 여신의 가호를 받아 열살에 곰을 잡고 한 방에도 잡고 여신도 구출하고 에린을 구원하기도 하고, 맨손으로 검은 회색곰을 때려잡기도 하는 지상 최강의 생물들이 우글우글...

흠...아니, 바로 모티머 가문의 추종자들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가문의 라이벌 관계는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요크 가문은 다음 웨일즈 공, 즉 왕위 계승권자로 선출될 에드워드 왕자가, 헨리 6세의 아들이 아니라 에드먼드 뷰퍼트의 아들이라는 루머를 술술 풀어놓았다. 뭐, 이 바닥이 원래 그렇듯 ~아니면 말고다. 하지만 이런 루머는 뷰퍼트와 랭커스터 가문의 연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결국 이 갈등은 1455년 5월 세인트 올번 전투에서 드러난다. 사실상 이 전투로 장미 전쟁이라는 긴 투쟁이 시작된다. 뷰퍼트가와 요크가는 본격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했다. 세인트 올번에서, 요크 가는 뷰퍼트 가가 손에 쥐고 있는 국왕의 신병을 인도받으려고 했고, 당연히 뷰퍼트 가는 이를 힘으로 막았다. 요크 가는 세인트 올번에서 헨리 6세와 랭커스터 가문을 따라잡았다.

(세인트 올번 전투도)

이 세인트 올번 전투는 여타 전투와는 약간 달랐다. 우선, 이건 언제 시작되고 끝난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끝나버린 전투였으며, 동시에 세인트 올번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이 전투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는 점이다.

 

요크 공작 휘하 군대 3,000명이 접근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랭커스터 가문과 병사 2,000명은 즉시 준비에 나섰다. 그들은 우선 거리에 통나무로 만든 바리케이트를 쌓고, 오래된 참호를 강화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요크 공작 휘하의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14C에 만들어진 시계탑에서 경고의 종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울려퍼졌다.

(세인트 올번의 시계탑)

 

 최초에 양측은 이 전투가 적당한 협상을 통해 끝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요크 가문의 군대가 좁은 길에 왕창 밀려있었던 나머지 랭커스터 가문의 반격에 꽤 피해를 입기는 했다. 하지만 이 때 상황을 뒤집어 버린 사람이 바로  워릭 백작이자 요크 공작 리처드의 조카 리처드였다. 리처드는 소수의 군대를 끌고 수비망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한참 전진하던 리처드가 본 광경은, 왕을 포함한 랭커스타 가문의 귀족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일부는 마치 전투가 시작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투구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즉시 리처드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화살이 날아들고 랭커스터 가문의 병사들이 피식피식 쓰러졌다 그 중 한 대는 무생물 주제에 무엄하게도 헨리 6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랭커스터 가문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리처드와 휘하 군대는 재빨리 광장으로 돌진해들어가 적들을 쓰러트리고 국왕을 사로잡았다. 서머셋 공작은 근처의 여관으로 피난했지만 곧 성의 여관에서 사로잡혔다. 그 즉시 리처드 휘하의 군대는 방어진을 치고 있는 랭커스터 가병들의 후위를 공격했고, 요크 가병들은 곧 이들을 굴복시키고 살육했다.

 

(올바른 보구...아니  특공대의 사용법)

 

세인트 올번 전투는 군사적인 의미로는 사소한 것으로, 랭커스터 가에서 고작 300여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요크 가는 국왕을 사로잡았고 세력을 역전시킨 멋진 승리였다. 덤으로 서머셋 공작의 육신과 영혼을 연결하는 실을 끊어주는 친절도 베풀어 주었다.

 

 

군대 소집

 

 

자아, 그럼 일단 전쟁은 시작했다고 쳐도,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헨리 4세와 5세의 치세동안 랭커스터 가문의 왕권은 강력했다. 그렇다면 과연 요크 공작이라는 대귀족이 감히 왕권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다는 뜻인가? 대답은 [그렇다]다.

 

(경악! 정말 일개 귀족이 국왕보다?)

 

요크 가문은 손쉽게, 심지어는 왕보다도 빠르게 잘 훈련된 베테랑 병사들을 소집할 수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백년 전쟁 당시 잉글랜드 군의 군사소집과 관계 있다.

 

전술한 바 있지만, 잉글랜드는 국왕 혹은 밑의 귀족이나 장군들이 왕과의 협약을 통해 병력을 모집하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지원을 받아 병사들을 고용하고 훈련 시키게 되어 있었다. 예컨대 존 챈더스 경 같은 경우 훌륭한 기사이자 왕의 충신, 그리고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으므로, 손쉽게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잉글랜드군은 기존 봉건 영주들과 그 협약보다 훨씬 긴 기간동안 군대를 소집, 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국왕의 명에 부응해 재빨리 군대를 소집해 국왕님의 비위에 맞추는 것은 출세에 꽤나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므로, 장군과 귀족들은 휘하의 기사나 군사들에게 평생 직장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이 경우 군사를 다시 소집하는데 별다른 재 협상 없이 재빠르게 새로운 군대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440년, 초대 버킹엄 공작인 험프리 스태보드는 에드워드 그레이 경과 매년 40 파운드의 봉급을 받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다. 다른 두 기사는 매년 20 파운드를, 버킹엄 공의 수행원이자 기사 7명은 10파운드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종자들은 이보다 낮은 가격으로 계약을 맺었다. 물론, 이 기사와 종자들은 각각 궁수들과 멘엣암즈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고 있었고 소집 명령이 떨어지면 이들은 고용주 밑에 모여 군대를 이룬다. 세인트 올번 전투에서, 버킹엄 공작은 자기 군대에게 2,000여개의 자신의 문장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런 시스템이 장미 전쟁에 적용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적절한 싱크로가 예상된다)


장미 전쟁은 백년 전쟁과는 달리, 국왕에 대항해 벌어진 전투이다. 물론 군사들 중 일부가 국왕에 대해 충성심을 품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충성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에게 월급 주는 기사와 귀족들이었다. 이런 중간자들 덕분에 국왕에 대한 충성은 손쉽게 그들의 고용주에 대한 충성으로 바뀌게 된다. 즉, 요크 공작같은 귀족이 국왕 못지 않게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 요크 공작은 엄청난 부자에다가 백년 전쟁 말기에 프랑스에 명성을 떨쳤고, 전쟁에 참여하며 이미 군사들과 계약을 해두고 있었으니 만만치 않은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나아가, 백년 전쟁과는 다르게 장미 전쟁은 잉글랜드 내부에서 벌어진터라 상황에 따라 재빨리 군사들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몇 주동안 훈련받고 전장에 투입될 병사들이 이번에는 소집되어 훈련도 제대로 못받고 전장에 나가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결국 프랑스와 붙어본 적 있는 훌륭한 베테랑 병사들, 그리고 스코틀랜드 근방에서 적과 대치하는 군대들-특히 네빌과 퍼시 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졌으며, 이들은 자기 몸값을 톡톡히 받아내며 어떤 의미로는 용병과 같은 양상까지 보였다.

 

(결국 칼날은 자기에게 돌아왔다)

 

 예컨대 1464년, 헨리 6세의 군대가 받을 월급이 뉴캐슬 근방에서 강탈당한바 있다. 이 때 병사들은 무장까지 마치고 출정만 하면 될 상황이었지만 [월급 안주면 여기서 꼼짝도 못하겄수]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국왕이든 반란자든 간에 병사들을 모집하려면 시장으로 가야할 형편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국왕이 병사 소집에서 약간 더 유리할 수는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특히 1461년 이후,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가 각각 자기네 국왕이 진짜라고 티격태격함에 따라, 국왕이 갖는 이점은 금세 사라졌다.

 

(결국 중요한건 돈이다 하앍하앍)

 

또다른 군대 소집으로는 외국 용병들을 고용하는 법도 있었다. 잉글랜드 역사에서는 드물게 이 때는 외국 용병들도 자주 잉글랜드 내부로 들락거렸다. 대표적으로 14651년 워릭 백작 리처드는 2차 세인트 올번 전투에서 유명한 부르고뉴인 핸드건너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양쪽은 1460년대 중반 전쟁에서는 값비싼 독일인 대포부대를 고용하기도 했다. 완소 먼치킨으로 유명한 스위스 용병들이나, 전부터 창병으로 유명한 플랑드르인들도 기다란 파이크를 들고 잉글랜드 땅을 밟았다. 심지어는 툭하면 잉글랜드 땅을 불법적으로 밟고 다니는 스코틀랜드인들마저 잉글랜드 땅을 합벅적으로 밟고 돌아다녔다. 1462년 스코틀랜드 귀족 조지 더글러스 경은 헨리 6세로부터 2,000마르크에 상당하는 영지를 제공받고, 평화시든 전시든 그가 원할 때-물론 이 경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전쟁을 의미한다- 자기 편에서 싸워주기를 요청받았다. 더글러스 경은 자기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 20여명의 스코틀랜드인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영광스러운 잉글랜드인]으로 대우받았다.

 

 

마지막으로 국왕이 봉건 영주들을 소집하는, 이제 사라져 가는 방법도 남아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국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1461년 이후로는 두 명의 국왕이 존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쪽 모두가 써먹을 수 있는 일이었다. 원래 이 방법은 국왕이 왕국의 위기에 처했을 때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었고, 1459년 헨리 6세가 반란군과 싸우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했다. 특이하게도 1460년, 요크 공작은 [왕의 신하로서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이 방식을 사용했다. 이에 응해 네빌 일족의 군사들이 모여들었고, 당연하게도 이들은 국왕을 위해 국왕에게 칼을 겨누었다.

 

(결국 이 방법도 실패였다)

 

이 징집병들의 무장은 대체적으로 영주들에게 의존한다. 일부는 [벌거벗은 이]라고 불릴 만큼 형편없는 무장을 갖춘 이들도 있었고, 다른 부대 중에서는 정규군 못지 않은 부대도 존재했다. 브리드포트의 수집대장에 따르면, 잘 무장한 부대 180명이 모이기도 한 듯하다. 이들 중 100여명은 여러가지 근접 무기를 들었고, 70명은 활과 화살로 무장했다.  이들 징집병의 전투 의지 역시 사실상 영주나 감독관의 전투 의지나 충성도에 의지했다는게 문제기는 했다. 감독관이 별 전투 의지가 없다면 이들은 군기빠진채 포크 하나만 들고 나와 슬렁슬렁 돌아다니기도 했고, 위의 180명 군대의 경우, 투구와 든든한 가죽 갑옷, 검, 버클러, 단검등으로 무장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폴암계열 무기, 창, 도끼, 핸드건, 그리고 독특한 갑옷 등등 각종 무기가 언급된다. 물론 이들 중에는 부랑배나 파렴치한 같은 녀석들도 있었고, 이들은 법전을 두고 행동을 자제하기보다는 하드보일드 커버로 사람을 내려치는 일을 더 잘할 분들이었다. 이외에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돌아와 실업자 신세를 보내던 사람들 역시 이 모임에 집합했다. 하지만 병사들이라고 크게 나아보이지는 않았다. 원래 중세의 병사들은 거친 족속들임은 물론이고, 이들은 돈도 없고 백년 전쟁에서 여러모로 실망한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자기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언제라도 기꺼이 징집관들에게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보듯, 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 대항하는 요크 공작은 국왕군 못지 않은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산백합회의 권력 장악을 노리는 로사 키넨시스와 로사 기간티아의 치열한 격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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