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
- 4~8세기를 중심으로 -
한국고대사학회발표
2006년 5월 13일 한국외국어대학교
조경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2. 三國의 불교식 왕호
3. 渤海의 불교식 왕호
4. 中國의 불교식 왕호
5.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
6. 맺음말
1. 머리말
고구려 건국시조의 왕호는 東明聖王, 백제는 溫祚王, 신라는 朴赫居世居西干이다. 東明聖王은 ‘동쪽의 밝은 신성스러운 왕’이란 뜻으로, 한 나라의 개국시조에 어울리는 왕호이다. 온조왕과 박혁거세거서간도 왕호의 뜻이 남다르지만 동명성왕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확립한 광개토왕의 온전한 왕호는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이다. 광개토왕은 王이 아닌 太王이란 왕호를 쓰고 있다. 사비천도를 통하여 백제를 중흥시킨 聖王은 ‘轉輪聖王’이란 의미인 ‘聖王’이란 왕호를 사용하였다. 불교를 받아들여 신라 중고기란 시대를 연 법흥왕은 ‘聖法興大王’이란 왕호를 사용하였다.
이상 언급한 고구려·백제·신라 왕들이 사용한 왕호의 의미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그 왕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왕호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 시대의 역사의 단면을 유추할 수도 있다. 왕호에 반영된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 글에서는 왕호 가운데 불교적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는 왕호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 대상의 왕호의 공간적 범위는 한국사의 고구려·백제·신라와 발해이며 중국도 포함시켰다.
왕호와 더불어 그 왕의 치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는 年號나 尊號 등이 있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永樂 연호나 중국 측천무후의 慈氏金輪 등의 존호 등도 왕호의 범주에 포함시켜 비교하였다.
2. 三國의 불교식 왕호
1) 고구려의 불교식 왕호
(1) 東明聖王
고구려의 개국시조인 東明聖王의 聖王은, 儒敎의 이상적인 군주인 聖王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轉輪聖王으로 볼 수도 있다.1) 불교의 전륜성왕은 정법[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보통 미륵이 하생하기 전, 지상세계의 최고 지배자이다. 그런데 東明聖王은 <<삼국사기>> 본문에 보이는 왕호로, <<삼국유사>> 왕력에는 東明王, <<삼국유사>> 북부여조 <<古記>>인용에는 東明帝, <<삼국유사>> 고구려조 <<國史>> 고려본기 인용에는 東明聖帝로 나온다. 東明聖帝는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조 일연의 설명에도 보인다. 금석문에는 <광개토왕비>에 鄒牟王, <모두루묘지>에 鄒牟聖王이라 했다. 이상을 정리하면 東明과 朱蒙의 왕호로는 ‘王’, ‘帝’, ‘聖王’, ‘聖帝’ 등이 쓰였다.
東明聖王의 ‘聖王’과 東明聖帝의 ‘聖帝’는 유교나 불교에서 모두 쓰는 왕호이나, 다음 사료의 聖王은 불교와의 관련성이 깊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구려[高麗] 요동성(遼東城) 곁의 탑은 고로(古老)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가서 [그] 구름 속을 찾아보았더니 어떤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문득 없어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곁에는 3층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스님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 길쯤 파서 지팡이와 신발을 얻고, 또 파서 위에 범서(梵書)가 있는 명문을 얻었다. 시종하던 신하가 이것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불탑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한나라[漢國]에 있었는데, 그 이름은 포도(蒲圖)<본래는 휴도(休屠)라고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라고 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로 인하여 신심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는데, 후에 불법이 비로소 전해오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시 [탑의] 높이가 줄어 목탑이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育王]이 통일했던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 (중략)」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 기록을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鴨綠]의 밖에 있어 한나라의 유주(幽州)에 속하였으며, 고구려 성왕은 어느 임금인지 알 수 없다. 혹은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왕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 37)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壬寅, BC 19)에 승하하였으니, 그때는 한나라에서도 아직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이 벌써 범서를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불(佛)을 포도왕(蒲圖王)이라고 했으니 아마 서한시대에도 서역(西域) 문자를 혹 아는 이가 있었기에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2)
<<삼보감통록>>은 당나라 道宣이 麟德 원년(664)에 찬한 책이다. 고려의 聖王이 요동성 근처에서 土塔과 梵書를 보고 신심을 일으켜 7층 목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토탑을 세운 이는 인도의 育王이라고 하였다. 토탑, 목탑, 육왕 등과 어울리는 高麗聖王의 ‘聖王’은 유교의 성왕이기 보다는 불교의 (전륜)성왕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育王은 인도의 전역을 통일한 아쇼카왕으로, 그는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전륜성왕의 전형으로 알려져 왔다. 道宣은 고려성왕의 ‘성왕’이 구체적으로 고려의 어느 왕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일연도 어느 임금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설에는 고려성왕을 東明聖帝라고 한 것 같다. 일연은 동명의 재위연대가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으로, 이때는 중국 한나라에 불교가 들어 온 기원 후 67년보다 앞서는 시기이므로 고려성왕을 동명성제로 본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3) 일연이 ‘或云東明聖帝’라고 한 ‘或云’의 전거는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에 동명을 東明聖帝로 언급한 것은 <<삼국유사>> 고구려조 <<국사>> 고려본기 인용의 東明聖帝다. 동명성왕을 동명성제로 보고, ‘或云’의 或者는 高麗聖王을 東明聖帝로 추정한 것 같다.4)
그러나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조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은 요동지방이고, 시간적 배경은 불교를 받아들인 372년 이후 이므로, 일연이 비판한 바와 같이 고려성왕이 동명성왕일 수는 없다. 다만 동명성왕이 불교수용 이후 追尊된 王號라면5) 불교식 왕호인 동명성왕이란 이름도 가능하다. 고구려 불교의 기원이 오래됐음을 강조하여 후대 고려성왕(필자는 광개토왕 이후로 봄- 이에 대해서는 후술)의 행적을 동명성왕에 가탁했을 수도 있다.
東明聖王의 聖王은 아니지만, 聖王이란 용례가 처음 보이는 자료는 장수왕대 지방관을 지낸 모두루의 묘지명이다. <모두루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鄒牟聖王이라 했다. <모두루묘지명> 보다 먼저 세워진 <광개토왕비>에는 鄒牟王이라 했다. 따라서 ‘聖王’이란 왕호는 <광개토왕비>가 세워진 414년 이후 장수왕대 비로서 쓰여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 ‘聖’ 혹은 ‘聖王’이란 왕호(시호를 포함)를 쓴 왕은 鄒牟聖王6), 故國原王7), 廣開土王8)의 3왕이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조에 인용된 <<삼보감통록>>의 高麗聖王의 聖王은 위 3왕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鄒牟聖王 곧 동명성왕이 아님은 앞서 언급했고 고국원왕은 불교수용 이전에 재위한 왕이므로 가능성이 낮다.
광개토왕은 390년 즉위했고, 이듬해인 391년 永樂이란 연호를 쓰고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崇信佛法求福)’란 교서를 내리고, 392년 평양에 9사를 창건할 정도로 불교 홍포에 심혈을 기울인 왕이었다. 또한 요동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중국 승려 담시를 초치하여 불교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조는 轉輪聖王으로 자처한 광개토왕이 요동지역을 점령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에 깔고 등장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요동성육왕탑조의 高麗聖王은 광개토왕일 가능성이 높다.9)
현재 알려진 고구려의 ‘聖王’이란 왕호가 당대에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모두루묘지>의 추모성왕은 <광개토왕비>의 추모왕 다음에 보이므로, 추모성왕의 추모는 추존된 왕호일 가능성이 높다. <모두루묘지의> 호태성왕도 <광개토왕비>에 호태왕으로 나오므로, 호태성왕도 추존된 왕호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생전에 쓰던 왕호를 추존할 수도 있지만 장담은 할 수 없다.
‘聖王’이란 왕호가 추존일 경우 처음 쓰인 시기는 414년 이후 장수왕대 이다. <중원고구려비>에는 왕호가 ‘聖王’이 아니고 ‘太王’인 ‘高麗太王’으로 나와 있다. <중원고구려비>의 구체적인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장수왕대로 보고 있다. 따라서 聖王이란 왕호는 장수왕대만 사용된 왕호로 볼 수 있다. 아마도 聖王이란 왕호를 추존했다면, 그 시기는 427년 평양천도 직후일 가능성이 높다.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은 천도의 정당성을 살리기 위하여 단군신화를 불교적 세계관에 의해 재정리했을 뿐만 아니라10), 고구려 개국시조인 추모와 장수왕의 아버지인 광개토왕에게 聖王이란 존호를 추존한 것으로 생각된다.11)
(2) 琉璃明王
고구려 제 2대 琉璃明王12)은 類利13), 類留14), 累利15), 儒留16) 등으로 불렸다. 琉璃明王과 儒留王의 경우에는 동음이어의 왕호로 볼 수 있으나, ‘琉璃’가 불교 용어임을 염두에 두면, 이 역시 의도적으로 왕호의 변개가 있었을 개연성도 부정하기 어렵다.17) 琉璃는 6면체·菱形·12면체 등으로 된 파란색의 결정체로서 바이칼 호의 남안 지방 등에서 산출되는 보석의 일종이다.18) 유리의 가장 큰 특징은 ‘同化’의 성질이다. 어떤 물건이 유리에 접근하면 유리의 색깔로 변한다고 한다. 이러한 유리의 同化의 德이 세계에 응현하면 衆生을 포섭 교화할 수 있다고 한다.19) 藥師如來를 東方藥師琉璃光如來라 부르는데, 동방과 유리는 오행과도 부합된다. 동쪽의 색깔은 파란색이고 유리는 보통 파란색을 낸다. 중생의 병을 고쳐 제도하는 약사여래에 ‘琉璃’가 加上된 것은, 유리의 同化의 德과 중생 교화의 덕을 덧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東明聖王과 마찬가지로, 琉璃王은 東方의 왕인 고구려왕에게 어울리는 왕호이다. 琉璃明王은 유리왕의 한자 표기가 후대 정리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琉璃’로 정리될 때는 앞서 언급한 ‘琉璃’의 의미에서 따왔다고 볼 수 있다.20)
(3) 永樂太王
永樂太王21)은 廣開土王22), 談德23), 廣開王24), 安25),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26),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27),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28), 開土王29) 등으로 불렸다. 永樂太王의 永樂은 고구려 광개토왕이 처음 사용한 연호이다. 생시에 永樂이란 연호를 왕호로 사용하여 永樂太王이라 불렸다. 광개토왕이 영락이란 연호를 사용한 391년의 중국 북방의 5호 16국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연호의 칭원법은 전통적으로 유년칭원법이었고, 당시 漢族의 남조나 胡族의 북조왕조 모두 유년칭원법을 쓰고 있었다. 광개토왕의 영락연호도 즉위년 칭원법이 아니고 유년칭원법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광개토왕 즉위년은 390년, 영락 원년은 391년이 된다.30) 종래 광개토왕대 기년에 대해서는 <광개토토왕비>의 영락원년을 광개토왕 즉위년인 391년으로 보아, 광개토왕의 즉위년을 392년으로 본 <<삼국사기>>의 기록과 1년의 차이가 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즉위년을 390년으로 본다면, <<삼국사기>>와는 2년 차이가 나게 된다. 2년의 차이가 난다면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삼국사기>> 말년 기사인 390년, 391년의 기사도 광개토왕대의 기사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마련된다.
390년은 고국양왕이 죽은 해이고 광개토왕이 즉위한 해이지만, 영략 원년인 391년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이듬해이므로 <<삼국사기>> 391년조 고국양왕 9년조의 기사는 광개토왕대의 기사로 보아야 한다. 391년조에는 신라와 우호를 닦았다는 기사와,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기사와, 國社를 세우고 종묘 수리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391년조는 5월 고국양왕이 죽었다는 기사로 마감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이어서 광개토왕 즉위년조를 서술하고 있는데 7월 기사로 시작하고 있다. 이 7월 기사는 <<삼국사기>> 고국양왕 9년조의 5월에 이어지는 기사로 실은 광개토왕 영락 원년(391) 7월 기사이다. 이어지는 <<삼국사기>> 광개토왕 2년 기사는 영락 2년(392) 기사로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광개토왕은 즉위한 이듬해인 391년 유년칭원법에 의한 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하면서 대대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특히 불교적 측면에서는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서를 내리고, 유교적 측면에서는 國社와 宗廟를 정비하였다. 영락 2년(392)에는 평양천도의 원대한 계획 아래 평양에 9사를 창건31)하기도 하였다. 광개토왕의 이러한 일련의 계획은 영락이란 연호를 반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32) 따라서 ‘永樂’이란 연호가 의미하는 字意상의 뜻도 남다를 수 있다. 더구나 생시에 永樂太王을 왕호로 사용한데서 더욱 그렇다.
광개토왕의 永樂이란 연호는 중국 역사상 몇 번 사용된 예가 있다. 5호 16국의 前涼의 張文華가 346~353년 사용했고, 明의 成祖가 1403~1424년 사용한 적이 있다. 前涼은 실크로드의 요지인 涼州에 거점을 둔 나라로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위서>> 석노지에 전량을 세운 張軌時代(256~314) 이후 대대로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전량시대부터 불교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말 양주의 불교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확실한 것은 밝힐 수 없지만, 5세기 초의 양주 불교는 北涼의 沮渠蒙遜이 숭불천자였기 때문에 불교가 융성의 극에 달하였다.33) 명나라가 사용한 연호인 永樂은 당연히 불교적 의미는 아니겠지만, 불교 국가인 전량이 사용한 永樂은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3세기에 활약한 역경승 康僧會(?~280)는 ‘惡을 행하면 지옥의 오랜 고통[地獄長苦]이 있고, 선을 닦으면 천궁의 영원한 즐거움[天宮永樂]이 있다’고 하였다.34) <<현우경>>에는 중생의 고통을 없이하는 보시행을 涅槃永樂이라고 했다.35)
광개토왕의 영락연호에는 ‘영락’의 자의인 ‘길 영, 즐거울 락’의 일반적인 의미가 깔려있고, 여기에 불교적 의미의 천궁과 열반의 영원한 즐거움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36)
(4) 長壽王
장수왕은 왕호 그대로 長壽한 왕이다. <<삼국사기>>에는 장수왕이 98세로 죽어 왕호를 長壽王이라고 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37) 불경에서 長壽는 長壽王佛, 長壽王菩薩의 용례가 나오며, 석가모니의 본생담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38) 또한 長壽는 轉輪聖王이 갖는 4공덕의 하나이기도 하다.
(5) 文咨明王
文咨明王은 明治好王, 明理好, 文咨王으로도 불렸다. 明王이나 好王의 美稱이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에 明王의 미칭이 들어간 왕으로 琉璃明王과 文咨明王이 있고39), 好王의 미칭이 들어간 왕으로 好太王(광개토왕), 好太聖王(광개토왕), 明治好王, 陽崗上好王(양원왕), 平崗上好王(평원왕) 등이 있다.40)
<<해동고승전>>의 護法明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明王으로 法興王을 말한다.41) 불경의 長壽王은 長壽明王42)으로도 불린다. 好王의 好는 신체의 미칭 - 우리말로 ‘멋진’ - 으로 생각된다. 相好는 불보살이나 전륜성왕의 신체적 특징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 相은 부처나 전륜성왕, 好는 불보살의 신체적 특징에 주로 쓰인다. 32相 80種好가 그 대표적이다.43)
(6) 寶藏王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시호는 없으며 藏은 諱이다. 寶藏은 長壽와 더불어 전륜성왕이 갖고 있는 4가지 공덕 가운데 하나이다. 寶藏은 摩尼寶藏王, 寶藏如來, 寶藏菩薩 등 불교와 관련된 용어로 볼 수 있다.
(7) 圓覺大王
함경남도 신포시 절골터에서 발견된 금동판 명문에 圓覺大王44)이 보인다. 慧郞이 圓覺大王을 받들기 위해 탑을 만들었으니 도솔천에서 미륵과 천손이 함께 만난다는 내용45)에서 미륵신앙과 天孫의식의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백제의 불교식 왕호
(1) 聖王
백제 聖王의 이름은 明襛으로 나라 사람들이 聖王이라 불렀다.46) 聖王의 이름 표기는 明襛, 明穠, 明으로 나오고, 明王, 聖明王이라고도 한다. 聖王이 유교의 聖王인지 불교의 聖王인지 구분하기는 힘들다. 각각의 시대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47) 불교의 성왕은 轉輪聖王을 말한다. 백제 성왕 당시에 興輪寺가 있었고48), 흥륜사가 미륵을 본존으로 하는 절이라면, 미륵이 하생할 때 지상세계를 다스리는 轉輪聖王을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聖王을 불교의 轉輪聖王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있다. 더구나 백제의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인도에서 율장을 들여오고, 중국 양나라에서 열반경의 주석서를 들여오는 등 불교진흥에 앞장 선 호불군주였다.
聖王이란 왕호가 미륵신앙에 근거한 轉輪聖王에서 왔다고 볼 수 있지만, 이에 법화사상이 덧붙여졌다고 볼 수 있다.49) <<법화경>> 화성유품에 의하면, 轉輪聖王의 큰 아들 大通은 깨달음을 얻어 大通佛이 되었고, 대통의 큰 아들 智積은 阿閦佛이 되었고, 막내아들 석가는 석가모니불이 되었다고 한다. 웅진의 大通寺는 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지어진 절50)이 아니고 백제의 聖王이 부왕인 무령왕의 명복을 빌고, 갓 태어난 위덕왕의 건강을 빌기 위해 세운 왕실의 원찰이었다. 大通寺란 절 이름은 양나라 무제의 大通이란 연호에서 온 것이 아니고 법화경의 大通佛에서 온 것이다. <<법화경>>의 轉輪聖王-大通佛-智積, 轉輪聖王-大通佛-釋迦의 계보가, 백제사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의 전륜성왕은 백제의 聖王, <<법화경>>의 大通佛은 웅진의 大通寺, <<법화경>>의 智積은 사비의 砂宅智積碑의 砂宅智積, <<법화경>>의 釋迦는 백제의 法王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2) 威德王
위덕왕은 부왕인 성왕이 관산성 싸움으로 전사하자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를 결심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51) 본인은 출가 대신 승려 100명을 도승시켰고, 누이와 함께 창왕명사리감을 만들어 부왕의 복을 빌었다. 그런데 威德王의 威德은 불교대학인 威德大學이 있듯이 부처의 위대한 덕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볼 수 있다. 불경에도 威德王佛로 나온다. 한편 성왕이 아들 위덕왕을 위하여 大通寺를 지었다면, 위덕왕의 왕호로 大通이 들어갈 만한데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법화경>>에 大通佛을 ‘大威德世尊’이라 부르고는 있으므로,52) 大通을 왕호로 사용하지 않고 위덕이라 했더라도 그 이면에는 대통불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3) 法王
法王의 法은 儒敎나 法家의 禮法·刑法·法律의 法, 혹은 불교의 佛法으로 볼 수 있다. 백제에는 좌평의 하나인 內法佐平이나 중앙 관서인 22부사의 내관 12부에 法部 등에 法의 용례가 있다. 내법좌평이나 법부 등의 法을 禮法이나 刑法의 뜻으로 보고, 불교의 불법과의 관련성은 무시되고 있지만, 內法은 外法인 유교나 도교에 대해서 불교를 이르는 말이므로 재고의 여지가 있다.53)
法王은 <<법화경>>을 위시한 불경에서 흔히 석가를 말한다. 세간의 군주를 말할 때 人王, 출세간의 군주를 말할 때 法王이라 한다. 法王은 正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다. 그러나 백제의 법왕은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반적인 의미 이상의 상징성이 있는 왕호이다. 백제의 성왕이 대통사를 창건한 것은 <<법화경>>의 전륜성왕-대통불-석가불(법왕)의 계보를 통해 무령왕에서 시작되는 백제 왕실의 聖族觀念을 고양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백제의 법왕은 위 계보에 따라 자신을 석가불로 자처하였다. 백제의 法王은 살생을 금지하고 왕흥사를 창건하고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등 佛法을 실생활에까지 적용한 護法군주였다.
法王의 휘는 宣 또는 孝順이다. 孝順이란 휘는 유교의 孝를 연상시키지만 불교에서도 강조하는 덕목이다. 제석천이 지상세계의 인간선행을 살필 때 부모에게 孝順했는가의 여부를 중시하였다.54)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백제의 법왕이란 왕호는 유교나 법가에서 온 왕호가 아니라 불교에서 온 왕호로 볼 수 있겠다.
백제 왕실과 부처의 계보 비교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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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실의 계보 |
聖王 |
威德王 |
法王 |
武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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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계보 |
轉輪聖王 |
大通佛 |
釋迦佛 |
彌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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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배경 |
법화경의 전륜성왕 석가계보 |
법화경의 수기삼세불 + 미륵하생신앙 | ||
3) 신라
(1) 脫解·婆娑·慈悲·智證
신라의 개국시조인 朴赫居世居西干란 왕호에서는 불교적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2대 이후 부터는 불교 수용이전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색채가 있는 왕호가 보인다. 2대 남해차차웅의 次次雄은 慈充으로 무당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56) 차차웅과 자충의 반절은 ‘중’으로 승려를 가리킨다. 脫解王의 脫解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벗을 탈, 깰 해자를 써서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57) 脫解는 吐解란 발음을 한자화한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58) 불교에서 깨달음을 말하는 解脫이란 용어의 글자의 순서를 바꿔 脫解를 취했을 수도 있다. 婆娑尼師今은 보통 파사니사금으로 음독하지만 바사니사금으로 음독해야 하지 않을까. 婆娑는 裟婆로 사바세계를 말하는 범어에서 온 말이다. 해탈을 탈해로 글자의 순서를 바꿨듯이 사바를 바사로 글자 순서를 바꾼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사바는 보통 사바세계의 주인인 梵天王과 붙어 다니기도 한다. 梵天王의 권위를 빌려오기 위해 니사금에 ‘바사[사바]’란 말을 덧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慈悲麻立干의 慈悲는 불교의 대표적인 덕목으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자비마립간의 재위연대가 458~479년이므로 527년 신라 불교공인 이전에 慈悲가 왕호로 쓰인 셈이다. 그렇다면 후대에 왕호가 정리될 때 불교식 왕호인 ‘慈悲’가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智證麻立干은 智度路, 智哲老, 智大路, 智度路, 至都盧 등으로 불렸다. 위와 같이 여러 소리 이름으로 불리다가 智證으로 확정되었다면 ‘智證’의 字意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智證의 자전적 뜻은 ‘智慧의 證得’이다. 智證은 <<유가사지론>>에서 말하는 4종의 證得의 하나로, 또는 초인간적인 자유무애의 힘을 가리키는 6神通과 결부되어 나온다. <<유가사지론>의 4종의 증득은 有情證得·聲聞乘證得·獨覺勝證得·大乘證得인데, 이 중 성문승증득은 다시 5가지로 분류된다. 5가지는 地證得, 智證得, 淨證得, 果證得, 功德證得이다. 6신통은 神境通, 天眼通, 天耳通, 他心通, 宿命通, 漏盡通을 말한다. 6신통은 智證과 결부되어 신경지증통, 천안지증통, 천이지증통, 타심지증통, 숙명지증통, 누진지증통 등의 관용적인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다. 智證得이나 神境智證通 등의 용례로 보아 智證麻立干의 智證도 불교식 왕호로 볼 수 있다.59)
(2) 法興王·眞興王·眞智王
신라는 527년 법흥왕대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의 법흥이란 왕호 그대로 佛法을 일으킨[興]인 왕이다. <천전리서석>에는 법흥왕이 聖法興大王으로 나오는데, ‘法興’에 ‘聖’과 ‘大’가 加上된 왕호이다. 聖法興大王이란 왕호는 聖王, 法王, 大王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聖王은 유교나 천손사상의 聖王보다는 불교의 轉輪聖王에 가깝고, 法王은 佛法을 실천하는 왕에 가깝고, 大王은 聖과 法에 의해 한층 높아진 왕의 위상을 드러내는 왕호로 볼 수 있다.
법흥왕의 조카인 眞興王은 太子에게 銅輪, 차자에게 舍輪이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태자 동륜이 죽자 동생인 사륜이 眞智王으로 등극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眞智王의 이름은 舍輪 혹은 金輪60)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하였다. 전륜성왕의 순서가 金輪-銀輪-銅輪-鐵輪이므로 태자 동륜 다음의 진지왕에게는 철륜이 맞는데 사륜 혹은 금륜이라고 이름지었다. 舍輪의 舍의 음이 쇠로 읽힐 때 ‘쇠 金’또는 ‘쇠 鐵’로 불릴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는 사륜을 ‘쇠 金’으로 읽어 金輪과 같은 의미로 본 것은 전륜성왕의 순서에 대한 착오로 생각된다. <<삼국유사>>에서는 舍輪王이라고만 하고 金輪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했는데 金輪이란 <<삼국사기>>의 견해를 그대로 따라서인지 아니면 금륜과 철륜을 2가지 가운데 하나를 결정하지 못해서 사륜왕이라고만 했는지 모르겠다.
한편 眞興王이 태자의 이름을 金輪이라 하지 않고 굳이 銅輪이라 한 이유도 궁금하다. 동륜에 앞서 金輪과 銀輪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61) 법흥왕은 聖王62) 혹은 聖法興大王으로 불리운 것에서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을 유추할 수 있고63) 진흥왕도 자신의 아들에게 동륜과 사륜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에서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자처한 것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의 경우 금륜 혹은 은륜을 자처한 구체적인 사례를 찾을 수 없지만, 법흥왕의 경우는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서 신라에 불교를 널리 펴게 한 원종[법흥왕]의 위덕을 찬한 일연의 글에서 金輪을 찾을 수 있다.64) 찬시 중에 법륜이 금륜을 쫒아 구른다고 했으니, 法輪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금륜 전륜성왕의 수레를 따라 널리 퍼져갔다는 말이다. 일연 讚詩의 金輪은 고려시대 일연이 법흥을 금륜으로 부른 것이지만, 금륜이라 부른 이유는 일연이 법흥의 행적을 금륜전륜성왕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3) 眞平王·善德王·眞德王
眞平王의 이름은 淨飯, 그의 부인은 摩耶, 아우 眞正葛文王과 眞安葛文王은 각각 伯飯과 國飯이었다. 정반은 석가의 아버지 정반왕이고 마야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며, 백반과 국반은 정반왕의 동생들의 이름이다. 眞平王系는 자신의 계보를 釋迦族의 계보와 연결시켰다. 정반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는 자연 석가가 될 것이고, 그가 다스리는 신라는 부처가 다스리는 불국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다. 진평왕의 뒤를 이은 왕은 석가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신라 최초의 여왕 善德王이었다.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德曼이고, 왕위에 오르자 聖祖皇姑65)라는 존호를 올렸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상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면, 신라에서 女王이 나왔다는 점이다. 신라에서는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二聖66)이라 했고, 선도산의 산신을 ‘聖母’·‘神母’67)라 부를 정도였지만, 덕만이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여자로 태어난 석가였기 때문이다. 신라 사람들은 그런 德曼에게 ‘聖祖皇姑’라는 극존의 존호를 올렸다. <<대방등무상경>>에 의하면, 淨光天女의 몸은 방편의 몸이요 실제로 여인의 몸이 아니었으며 중생 제도를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여자의 몸으로 나투었다고 한다.68) 善德도 정광천녀와 마찬가지로 중생 제도의 방편으로 여인의 몸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여겼을 것이다. 善德이란 이름도 선덕바라문에서 취했으며, 그는 석가모니로부터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기도 한다.69) 왕이 增長이란 딸을 낳고, 그가 후사를 이어 여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며, 나중에 增長이 장차 부처가 될 때, 이 사바 세계는 도리천의 궁전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된다고70) 하였다. 善德女王이 죽어 낭산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한 것은, 신라 땅을 바로 도리천과 같은 불국토로 만들고자 한 염원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아우인 國飯의 딸이다. 진덕왕의 이름은 勝曼으로 德曼인 선덕왕과 曼을 돌림자로 하고 있다.71) 승만은 덕만처럼 정반[진평왕]과 마야가 부모는 아니지만 큰아버지, 큰어머니에 해당하는 가까운 석가족의 계보다. 석가족의 혈족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승만의 신체적 특징을 ‘손이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를 지나간다垂手過膝’라고 했다. 이 특징은 부처가 갖는 32相 가운데 하나로, 승만이 석가족의 혈통을 가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진덕왕의 이름인 勝曼은 <<勝鬘經>>의 주인공 勝鬘부인에서 유래하였다. 승만부인은 후대에 인간과 천상세계를 다스리는 自在王이 될 뿐만 아니라 장차 普光如來가 될 수기를 석가모니로부터 받았다.72)
3. 발해의 불교식 왕호
1)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文王(737-793)
발해는 武王, 文王, 成王, 康王, 定王 등 周의 왕호를 주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보면 발해는 周나라를 이상 국가로 본 듯하다. 그렇지만 불교이념도 병행하였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에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73)이란 文王(737~793)의 존호와 ‘聖人’, ‘皇上’등의 구절이 적혀 있다. 大興과 寶曆은 발해 문왕의 연호이다.74) 孝感은 유교 덕목인 孝를 강조한 존호이다. 금륜성법대왕의 金輪은 금륜, 은륜, 동륜, 철륜의 4명의 전륜성왕 가운데 첫 번째 전륜성왕을 말한다. 聖은 聖王의 聖이며 전륜성왕을 말하며, 法은 불법을 의미한다. 聖과 法이, 유교의 聖君과 禮法을 말하기도 하지만, 금륜과 어울리는 것은 불교의 성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의 법흥왕도 聖法이 들어 간 聖法興大王이란 왕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金輪과 聖法의 존호사용이 앞서 측천무후가 사용한 존호 金輪聖神皇帝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75) 문왕의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의 존호에는 유교와 불교의 통치이념이 모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4. 중국의 불교식 왕호
1) 天王
중국의 5호 16국시대(304~439)에서 주로 사용한 天王의 사상적 배경으로 다음의 세 견해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殷周 이래로 사용한 天王의 의미이고76) 둘은 유목민적 전통의 天王의 의미이고,77) 셋은 佛敎의 天王의 의미이다.78) 중국의 경우 殷周시대에 天王이란 용어를 사용하다가 500년이 지난 5호 16국 시대(304-439) 다시 天王號가 부활되었다. 5호 16국시대의 천왕호를 호족 전통의 천 관념과 결부 시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덧붙여 5호 16국 시대 극성을 구가한 불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황제 칭호에 대항하여 황제 칭호 이상의 권위를 불교의 天王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天王은 六道에서 人(間世界) 위의 세계로 四天王과 帝釋天王 등등이 있다. 人의 세계의 지배자인 중국의 황제도 천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경우 天孫이나 天帝의 아들이라 하면서도 자신을 天王이라 하지 않았다.79) 후대의 왕들도 天王號를 사용하지 않고 太王이나 大王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해모수에게는 天王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80) 환웅과 해모수는 하늘의 왕 ‘天王’이면서도 잠시 인간세계에 내려와 왕 노릇을 하였으므로 天王이라고 불린 반면 환웅의 아들인 檀君81)이나 해모수의 아들인 朱蒙은 天王으로 불리지 않았다. 인간세계에 남아 인간을 다스리는 이에게는 엄밀하게는 天王이란 칭호보다 太王이나 大王의 칭호가 더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82) 天王이란 칭호를 써 본적이 없는데 桓雄天王이나 天王郞 등의 天王이란 칭호를 최고지배자의 의미로 쓴 것은 아무래도 5호 16국에서 불교적 의미의 天王이란 칭호를 썼던 국제적 배경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2) 慈氏越古天冊金輪聖神皇帝; 측천무후
중국 최초의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는 자신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 나툰 淨光天女라 하였다. 낙양을 神都로 삼고 국호를 周로 바꾸고 자신을 현생의 彌勒이라 하였다.83) 사실 측천무후는 신라의 최초의 여왕 선덕과 진덕을 벤치마케팅하였다. 불교이념을 통하여 여성의 핸디캡을 극복하려 하였다. <<대운경>>을 만들어 자신이 하생한 미륵이며 염부제의 주인임을 널리 퍼뜨렸다.84) 이러한 의미의 존호가 측천이 받은 慈氏越古天冊金輪聖神皇帝이다. 존호의 慈氏는 미륵하생의 미륵불을 뜻하며, 金輪은 염부제를 포함한 사천하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을 뜻한다. 聖神은 聖母神皇85)의 준말로, 聖母는 돌에 새겨진 상서로운 글귀에서 취하였다.86)
5.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비교
(1) 天王
은주 시대의 天王은 진시황의 황제 칭호가 생기기 전 王과 차별을 두기 위해서 만든 왕호였다. 황제 칭호가 최고의 왕호가 된 이후에는 쓰이지 않았다. 5호 16국시대 여러 나라가 天王호를 사용했는데 불교의 (四)天王의 의미로 부활하였다. 고구려는 천왕호를 현세의 왕에게는 사용하지 않고 건국시조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에게 天王郞이라 하면서 사용하였다. 단군신화의 환인(제석천왕) - 환웅천왕 - 단군의 계보도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에서 확립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단군신화의 天王호도 현세의 왕인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천왕에게 붙여졌다. 天孫의식이 강했던 고구려는 하늘에 대한 외경심이 강해 천왕이란 왕호는 시조 이상에게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天王호가 보이지 않는다.
(2) 聖王
불교의 轉輪聖王을 말하는 聖王이란 왕호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모두 보인다. 고구려는 동명성왕[추모성왕]과 광개토왕, 백제는 성왕, 신라는 법흥왕[성법흥대왕]이다. 불교 수용 이전의 聖王은 추존한 것으로 보면 성왕 칭호는 고구려는 4~5세기이고, 백제와 신라는 6세기이지만 백제가 조금 앞선다. 삼국 모두 내적으로 체제가 정비되고 외적으로 영토가 확장된 시기이다.
고구려는 4~5세기 이후 聖王 칭호가 보이지 않는다. 백제는 성왕 이후 7세기 무왕 때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미륵신앙과 결부된 전륜성왕 이미지를 고양시켰지만 왕호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신라는 법흥왕 이후 전륜성왕 이미지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진흥왕은 금륜, 은륜, 동륜, 철륜의 4명의 전륜성왕의 이름 가운데 동륜과 철륜[舍輪]이란 이름을 두 아들에게 지어주었다. 신라의 성왕의 이미지는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대 석가족 신앙으로 넘어가게 된다.
중국은 전륜성왕의 이미지가 약하다. 유교적 의미의 聖王에 대한 관념이 강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여자가 황제가 된 武周 시대 聖王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는 측천무후의 존호에 보이는 慈氏[미륵]와 金輪에서 엿볼 수 있다. 발해는 문왕의 존호에 나타난 聖法과 金輪에서 유추할 수 있다.
轉輪聖王은 보통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新羅와 武周와 발해가 그렇고 고구려도 그렇게 추측된다. 다만 백제의 경우 성왕은 법화신앙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이 특징적이다.87)
(3) 金輪
金輪은 4명의 전륜성왕 가운데 첫 번째를 차지하는 성왕이므로 따로 설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신라와 중국[무주] 발해에서 보이므로 따로 절을 두었다. 신라는 동륜, 철륜은 보이지만 금륜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법흥왕이 금륜을 자처했거나 후대 -아마도 진흥왕- 그렇게 추존했을 수 있다. 신라는 四方觀念을 여러 방면에서 준용했는데, 4명의 전륜성왕 이름을 딴 것도 四方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武周의 金輪은 四方관념보다는 五行思想과 연관이 깊다. 唐은 土德에 의한 왕조이므로88) 5행상생의 土生金에 의하여 측천무후는 金德王으로 자칭하기도 하였다.89) 金輪은 전륜성왕이 굴리는 수레로 전륜성왕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四輪 가운데 金輪을 택한 것은 오행의 金德을 상징한 것으로 土德인 당 왕조를 계승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주의 金輪은 慈氏와 직접 연결된 것이 특징적이다. 물론 금륜[전륜성왕]은 자씨[미륵]가 하생하기 전에 지상세계를 정법으로 다스리는 왕이므로 금륜과 자씨가 직접 연결되는 것이 당연하나, 측천무후의 경우는 자신을 미륵 하생한 미륵으로 보면서 지상의 전륜성왕[금륜]으로 보았다.
발해 문왕의 존호에 보이는 金輪은 그 이상을 추론하기는 힘들다. 문왕의 金輪이 무주 측천무후의 金輪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오행상생의 의미도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오행상생의 의미보다는 신라의 사방 관념에 의한 금륜의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6. 맺음말
고구려에 보이는 불교식 왕호는 東明聖王, 琉璃明王, 永樂太王, 長壽王, 文咨明王, 寶藏王, 圓覺大王이 있다. 이들을 불교식 왕호로 파악한 근거는 주로 불경에 근거했지만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은 제시하지 못했다.
백제에 보이는 불교식 왕호는 聖王, 威德王, 法王 등이다. 사례로는 적지만 위 세 왕호는 <<법화경>>에 의한 계보를 형성한 점에서 주목된다.
신라의 보이는 불교식 왕호는 脫解王, 婆娑王, 慈悲王, 智證王, 法興王, 眞興王, 銅輪(태자), 眞智王[철륜], 眞平王[정반왕], 善德王, 眞德王[勝曼] 등이다. 사례로도 압도적으로 많지만 왕호들마다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
무주에 보이는 불교식 왕호 慈氏, 金輪이며 불교에 五行이 결부되어 있다. 발해에 보이는 불교식 왕호는 金輪과 聖法이며 孝感 등의 儒敎와 결부되어 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불교식 왕호에는 유교나 오행이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대신, 무주는 五行이 강조되었고, 발해는 儒敎의 효가 강조되었다.
1) ‘聖’의 용례와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
문경현, 1976 <신라왕족의 골제> <<대구사학>>11.
김영미, 2004 <신라인의 이상적 인간상> <<한국사상사학>>23.
2) <<삼국유사>> 탑상 요동성육왕탑
3) 일연은 한나라보다 먼저 고려성왕의 배신이 梵書를 먼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아마 배신이 본 문자는 범서가 아닌 西域문자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보감통록>>에는 엄연히 ‘梵書’라 했으므로 배신이 본 문자는 범서가 맞다.
4) 聖王을 聖帝로 표현한 예로 ‘轉輪聖帝 應臨四方(<<佛本行經>>, 대정장 4-59-3)’, ‘轉輪聖帝 戰鬪降伏 外異國王(<<正法華經>>, 대정장 9-109-3)’등이 있다.
5) 추존된 시기가 문제인데, 7세기 영류왕대의 역사서 <<新集>> 편찬시기로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28, 28쪽).
6) <모두루묘지명>
7) 國罡上聖太王(<모두루묘지명>). 聖太王도 聖王의 범주로 볼 수 있다. 신라 법흥왕의 경우 ‘聖法興大王’이라 했는데 법흥을 뺀 聖大王도 聖王의 범주로 파악할 수 있다.
8) 國罡上□□土地好太聖王(<모두루묘지명>)
9) 조경철, 2004. 10 <광개토왕대 영락연호의 검토와 불교> 한국고대사학회발표요지문. 한편 김선숙은 高麗聖王을 故國壤王에 비정하고 있다.(김선숙, 2004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조의 ‘성왕’에 대한 일고> <<신라사학보>>1)
10) 조경철, 2005 <단군신화의 불교적 세계관> <<삼국유사기이편의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장수왕의 祖父인 고국양왕도 聖王이라 할만한데 <모두루묘지>에는 언급이 없다. 장수왕의 증조인 고국원왕에 ‘聖’을 관칭하여 聖太王이라 한 특별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평양천도 이후 장수왕대 ‘聖’을 강조한 것은, 왕실의 ‘聖族’ 관념을 고양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백제 왕실의 聖族觀念에 대해서는 조경철, 2006 <<백제불교사의 전개와 정치변동>>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논문을 참조.
1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5) <<삼국유사>> 왕력.
16) <광개토왕비>
17)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28.
18) 운허, <<불교사전>> 유리.
19) <<불광대사전>> 유리.
20) 琉璃王에 대해서 안 좋은 전승도 있다. 유리왕은 사위국의 왕으로 기원전 6세기 바사닉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석존 성도 후 40년에 부왕이 없는 때를 틈타 왕위를 빼앗고 가비라국의 석가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한다.(운허, <<불교사전>> 유리왕). 明王이 덧붙여진 것에 대해서는 후술.
21) <광개토왕비>
2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2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24) <<삼국유사>> 왕력 고구려 광개왕.
25) <<양서>> 고구려전.
26) <광개토왕비>.
27) <호우총명문>.
28) <모두루묘지>.
29) <삼국사기> 연표.
30) 정운용,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의 연호>, 57쪽 각주 34번에서 유년칭원을 시사.
조경철, 앞의 발표 요지문.
31) 신동하, 1988 <고구려의 사원조성과 그 의미> <<한국사론>> 19.
32) 최근 태왕릉에서 신묘년명의 청동방울이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태왕릉의 피장자가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일 것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신묘년은 391년이다. 만약 영락연호가 유년칭원이라면, 신묘년은 의미가 남다른 연대가 된다. 광개토왕은 신묘년에 永樂이라 칭원하면서 기념으로 청동방울을 만들었으며(아마 여러 개) 그 하나가 태왕릉에서 발견된 것으로 생각된다.
33) 鎌田茂雄, <<중국불교사>>2, 266쪽.
34) <<양고승전>> (대정장, 50-325-하)
35) 지금 나는 내 가죽을 이 사람에게 주어 저 여러 사람들의 소중한 목숨을 구제한다. 그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베품으로써 위 없는 바르고 참된 불도를 이루고 일체 중생을 생사의 고통에서 두루 건져 열반의 영원한 안락이 있는 곳에 편히 살게 하여지이다.(<<賢愚經>> 한18-91) 普度一切生死之苦 安着涅槃永樂之處(大正藏 4-366-3)
36) 유교의 지배올르기가 관통한 동아시아국가에서 왕호나 연호에 유교 이외의 특정한 종교(혹은 사상)적 색채의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불교나 도교적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유교적 의미도 아울러 포괄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때 나라 사람들의 호응을 받기는 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武周의 如意연호나, 궁예의 水德萬歲가 대표적이다.
37)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79년)
38) 부처의 전생이 장수왕. 貪王이 쳐들어오자 長壽王은 인민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태자 長生에게도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 그러나 장생은 탐왕의 고용살이로 몰래 들어가 왕의 신임을 얻고 죽일 기회를 얻었으나 죽이지 않고 탐왕을 회개시킨다는 내용.(<<長壽王經>> <<한글대장경>> 154권, 530족, <<증일아함경>> <<한글대장경>> 9권, 303~312쪽). 長壽가 들어간 절 이름으로는 唐 낙양의 長壽寺와 경주의 長壽寺(<<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가 있다.
39) 백제의 경우 聖明王·明王[聖王]의 용례가 있다.
40) 好壤王(美川王)의 好는 美를 바꾸어 쓴 글자이므로 미칭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41) <<해동고승전>> 아도
42) 대정장 20-839-중
43) 왕의 신체적 특징을 相好와 연결시킨 예로 선덕여왕의 ‘손이 무릎을 내려 왔다[垂手過膝]’(<<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즉위년)가 있다. 垂手過膝은 32相 중의 하나.
44) 圓覺과 大王을 따로 보기도 한다.(<<역주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45) 慧郞奉爲圓覺大王 謹造慈塔 表刻五層 相輪相副 願王神乘兜率 査勤彌勒 天孫俱會(<<역주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46)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즉위년
47) 沙門司馬惠御自言聖王(위서) 沙門 사마혜어가 자칭한 聖王은 불교의 성왕에 가깝다.
48) <<조선불교통사>> 미륵불광사사적.
49) 조경철, 2006 <<백제불교사의 전개와 정치변동>>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학위논문.
50)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
51) <<일본서기>> 권19 흠명 18년 8월.
52) <<법화경>> 화성유품.
53) 조경철, 앞의 박사논문, 49~56쪽.
54) 불경에 孝順은 ‘孝順父母’로 관용화 되어있다.
55) 조경철, 2006 <<백제불교사의 전개와 정치변동>>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학위논문, 158쪽.
56) 次次雄 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57)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니사금
58) 신라의 처음 나라 이름은 斯羅, 斯盧, 新羅라 불리다가 지증왕 4년 新羅로 확정되었다. 신라의 新은 ‘德業日新’에서 羅는 ‘網羅四方’에서 취했다고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 斯羅, 斯盧 등의 소리표기에서 한자화한 新羅라는 국호를 정할 때 고전의 전거를 취하듯이 왕호를 정할 때도 儒佛의 전거를 참고했을 것이다.
59) 고유섭, 1954 <<한국탑파의연구>> 을유문화사, 135쪽에서도 智證이 불교적 시호라고 언급한 바 있다.
60) 眞智王立 諱舍輪(或云金輪)(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지왕). 眞智王金輪卽位( <<삼국사기>> 연표).
61) 김기흥, 2000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159쪽에서 법흥왕을 金輪, 진흥왕을 銀輪으로 추정하였다.
62) 鷄林有聖王出( <<삼국유사>> 아도기라)
63) 김영미, 앞의 글.
64) 聖智從來萬世謨 區區輿議謾秋毫 法輪解逐金輪轉 舜日方將佛日高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 法輪解逐金輪轉의 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법륜이 풀려 금륜을 쫒아구르니(이병도역)/ 금륜을 몰아내고 법륜이 돌아가니(북역, 리상호)/ 법륜이 금륜을 쫒아 구르니(이재호역)/
65) 강력한 통치력을 구사했던 위대한 진평왕 딸 선덕(이정술, 1999 <진평왕 말기의 정국과 선덕왕의 즉위> <<백산학보>>52. 신성한 조선의 황통을 이은 여인(신종원, 2004 <<삼국유사 새로 읽기(1)>> 121쪽.
66)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67) <<삼국유사>> 선도성모수희불사
68) <<한글대장경>> 256권 196쪽
69) <<대방등무상경>>(<<한글대장경>> 256권 161쪽)
70) <<대방등무상경>>(<<한글대장경>> 256권 197쪽)
71) 銅輪, 勝曼, 國飯 등의 이름이 불전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신종원, 1992 <<신라초기불교사연구>> 일조각, 272~274쪽을 참조.
72) <<승만경>>(<<한글대장경>> 149권 559쪽).
73) 貞惠公主墓誌銘/ 貞孝公主墓誌銘
74) 발해의 연호에 대해서는 송기호, 1995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178~186쪽 참조.
75) 王承禮, <당대발해 “정혜공주묘지”화 “정효공주묘지”적비교연구> <<사회과학전선>> 1982-1, 송기호, 앞의 책에서 재인용. 한편 金輪의 전륜성왕으로 추정되는 법흥왕이 聖法興大王(천전리서석) 혹은 大聖法王(<<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이라 한 점도 참고된다.
76) 谷川道雄, <五胡十六國․北周における天王の稱號> <<隋唐帝國形成史論>>(東京, 筑摩書房, 1971)
於是依殷周之制 以咸康三年僭稱大趙天王 卽位于南郊 大赦收死已下 <<晉書>> 권106, 石季龍上
77) 천왕의 여러 의미에 대해서는 松下洋巳, <五胡十六國の天王號について> <<調査硏究報告>>44(學習院大學, 1999)와 시노하라 히로카타(蓧原啓方), <高句麗의 太王號와 太王家認識의 확립> <<韓國史硏究>>125(서울, 한국사연구회, 2004)를 참조. 두 논문은 天王의 의미가 불교나 도교의 의미라기 보다는 胡族의 天관념에 연원을 둔 것으로 보았다.
78) 宮崎市定, <天王なる稱號の由來について> <<思想>>646(1978);<<宮崎市定全集>>21(東京, 岩波書店, 1993).
조경철, 2005 <단군신화의 불교적 세계관> <<삼국유사 기이편의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猗尼渠餘國天王敬信遮須夷國天王(<<晉書>> 권102)
于陀利國天王瞿曇修跋陀羅(<<冊府元龜>> 권968)
79) 天의 의미와 天下觀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
양기석, 1983 <4~5세기 고구려 왕자의 천하관에 대하여> <<호서사학>>11
노태돈, 1999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고구려사연구>>
이도학, 2005 <한국사에서의 천하관과 황제체제> <<한국문화와 주변문화>>
80) 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李奎報, <<東明王篇>>)
81) 물론 단군도 후대에는 檀君天王이라 불렸으나 이때는 天王의 이미지가 통속화된 단계이다.
82) 반면 5호 16국의 왕은 天王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때의 天王의 의미는 직접 제석천이나 사천왕이 인간세계에 하강하여 대리자를 필요치 않은 천왕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겠다.
83) 조경철, 1996 <神都 益山과 佛國土 信仰> <<百濟佛敎史의 展開와 政治變動>>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학위논문.
84) 懷義與法明等 造大雲經 進符命言 則天是彌勒下生 作閻浮提主(<<舊唐書>> 卷183 薛懷義)
85) 五月 皇太后 加尊號曰 聖母神皇(<<구당서>> 권6 수공 4년)
86) 瑞石文云 聖母臨人 永昌帝業 (<<구당서>> 권6 수공 4년)
87) 물론 7세기 무왕 대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전륜성왕이념으로 전환된다.
88) 최병헌, 1978 <고려시대의 오행적 역사관> <<한국학보>>13
唐亦土德 (<<신당서>> 권35 오행지)
89) 蓋武氏革命自以爲金德王 其佛菩薩者慈氏金輪之號也(<<신당서>> 권35 오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