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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퍼온글]위화도회군

작성자기차여행|작성시간04.01.16|조회수283 목록 댓글 5
위화도회군에 대해 공부하다가 적은것인데요..
역사지식이 초보수준이라 이것밖에 안됩니다
문제제기 하실분은 글남겨주세요
역사지식은 상대방의 문제제기에서 향상되는것입니다^^
p.s 제 주장에 화내지마시고 기분좋게 문제제기해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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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

위회도회군이란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였는가?

1388년(우왕 14) 5월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사5만을 이끌고 위화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위화도에서 재정비 한 후 요동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불어나서 건널수 없게 되었다.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사불가론이다.


사불가론이란 무엇인가?

사불가론(四不可論)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 사불가론에 대해선.. 엇갈린 주장들이 많습니다.


만약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중국의 정세는 혼란기였다..
원나라는 명나라에 밀려 장성밖으로 밀려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만주와 요동은 공백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는 고작5만이었습니다.
사불가론을 개입시켜볼 때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리고
무기를 쓸수없게 됩니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지만..
일단 숫적열세가 있으니 실패하지않았을까요?
고려에서 군사를 지원한다 가정하였을때 본토 군사력에 약해져
사불가론 세 번째와 같이 요동을 공격하는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명나라를 물리쳐 이겼다하더라도. 요동을 지킬만한 여건이
되었을까요? 일단 영토는 넓고.. 군사는 그 영토를 지킬만한 숫자가 없고
명나라와 남쪽에 왜구가 위협을 한다하면.. 아마 힘들겁니다.
최악의 상황엔 고려가 멸망하지않았을까요??


고려는 왜 요동을 공격하였나?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철령이북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를
위협하였다. 명은 철령 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한다고 주장..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고하였다. 이에 반발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을 감행하였다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실패하였다면?

실패하였다면 아마 명나라의 공격에 방어만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이틈을타서 왜구가 침범할 경우도 있고요.


위화도는 어디인가?

평북 의주군 위화면에 딸린 섬.
위치 : 평북 의주군 위화면
면적 11.2㎢. 길이 9 km. 평균너비 1.4 km. 해안선길이 21 km. 압록강의 하중도(河中島)로 의주 하류 쪽에서 2 km, 신의주에서 상류 쪽 2 km 지점에 위치한다. 압록강이 운반한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고려시대에는 대마도(大麻島)라 하여 국방상 요지였다.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회군(回軍)을 단행함으로써 조선시대를 여는 역사적 계기를 이룩한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어적(於赤) ·검동(黔同) 두 섬과 함께 삼도(三島)라 하여 농민을 이주시켜 경작하게 하였으나 1459년(세조 5)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습격을 받은 후 경작을 금지시켰다. 다시 1777∼1800년(정조 1∼24) 위화도 개간의 건의가 있었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10년(순조 10) 의주부윤 조흥진(趙興鎭)의 상주에 의해 정부 후원 아래 대규모의 개간이 실시되었다. 이곳에 이주한 농민은 영구소작권을 인정받아 우대되었다고 한다. 충적토로 이루어진 위화도는 토질이 비옥하여 옥수수 ·조 ·콩 ·수수 등의 산출량이 많다


이성계는 왜 고려를 잊지않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나?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인 정몽주가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었다.
이성계는 7월 공양왕을 내쫓고 고려 국왕으로 등극한다.
즉위 초에는 고려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조준 드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엇다.
조선건국이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고려개혁론자로 나뉜다
정도전과 무학은 이성계를 부추겨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게된다.
역성혁명론(왕조를 바꾸는 일)의 대표격인 정도전 그가 없었다면
조선 개국은 일어나지않았을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위화도회군의 결과

위화도에서 개경을 공격한 이성계는 최영군대와 접전을 벌리고
승리한다.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위화도 회군은 자구책인가? 쿠데타인가?

여기서 나는 의문점을 갖는다. 명장 이성계가 왜 위화도에서 요동공격직전에
이런 상소(사불가론)를 올렸을까? 이건 위화도회군이 자구책이 아닌..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명장이성계 1356년~1388년 까지 30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했고
또한 패배하지않았던 명장이라 한다. 이런 이성계라면 요동정벌당시 우왕에게 사불가론을
말했을 것이다. 왜 위화도에서 사불가론을 올렸을까?
내 개인적 생각으론 이때 이성계가 다른맘을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단 군사5만을 빼내고 위화도에서 재정비한뒤 개경을 칠 생각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이성계 뒤엔 역성혁명론자의 대표격인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무학대사가 있었다....

p.s 누군가 나에게 이런질문을 한다..
만약 이성계가 다른맘을 먹고 있었다면
위화도까지 가지 않고.. 개경을 조금 벗어난뒤 재정비하고
개경을 칠수도 있었다고, 이렇게 해야 병사들도 덜 지친다고.
이런 질문을 하지만.. 여기서 나의 생각은..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하였다.
그러기에 개경을 조금 벗어날수는 없는것이었으며..
우왕.최영 역시 만만한 인물이아니다
안심을 시키키위해 압록강을 건너기직전인 위화도에서
사불가론을 세워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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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법민 | 작성시간 04.01.16 병사들을 개경인근에서 다독인다면 금방 들통나고 민심조차 이반될 소지가 있기에 요동까지 가서 사불가론을 올리고 나서 "확실한 명분"을 만든것이라 생각이 드네요. 이글에 동감이 가는~
  • 작성자moko | 작성시간 04.01.16 고려군 4만명의 병사가 전멸당한다 해도, 고려로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출전한 병사들 중에 상당수가 지위관들의 사병들입니다. 몽고 간섭기 시대에 고려는 관군의 힘은 크게 약해되고, 그것을 만회할 생각으로 사병들이 많이 길러졌습니다. 정부에 위협이 되는 사병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요동을 공격할 수도
  • 작성자moko | 작성시간 04.01.16 있습니다. 명의 무모한 요구에 대한 보복과 요동이라는 땅의 회복, 불만세력의 약화 목적으로 칠것죠. 그리고 요동은 그리 큰 영토가 아닙니다. 고려가 실질적으로 공격한 지역은 한반도의 경상도만큼의 크기인 요동반도입니다.고려가 여진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라 명이 소유한 요동반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 작성자moko | 작성시간 04.01.16 그럼 4만명정도는 충분합니다. 더구나, 요동에는 고려인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14세기 중반때 , 몽고에 파견된 고려군 1570명이 요동을 걸쳐서 중국대륙에 도착했을때 2만명의 군단급 병력이 되었습니다. 즉 요동의 고려인들이 고려군에 합쳐서 된것죠. 임진왜란때, 각도마다 왜군이 배정된 숫자는 2만명안팎이었습니다.
  • 작성자hwanam | 작성시간 04.01.18 고려 말기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데 있어 이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것이 아닐까합니다. 최영등을 비롯한 기존의 기득권층은 내부의 한계를 외적 팽창정책으로서 극복하려 하였고 이성계의 브레인인 신진사대부측은 새로운 사회체제 구성으로서 그 한계를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닐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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