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바로 전쟁에서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들이다. 즉 항왜들 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순왜라고도 한다.
조선군의 편에 서서 예전에 같은 편이던 일본군을 공격하는 항왜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항왜들은 조선군에 편입되어 조선군에 많은 도움을 주며, 전쟁에서 조선군이 승리하도록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오늘날 김충선 말고는 항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심해서 당당하게 자신들이 항왜 이거나 항왜의 후손이라고 말하기 뭐 해서 숨겼다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런 사실도 잊어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추측을 해 본다. 김충선은 전공을 많이 세우고 당상관의 벼슬을 받은 양반신분이 되어 그의 후손들이 당당하게 밝히는 것과 달리 많은 항왜들은 조선에 동화된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한국에 상당수의 항왜 후손들이 있겠지만, 그들 자신들이 항왜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당사자들도 모르니,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항왜들의 존재에서 대해서 일반인들은 김충선라는 이름 석자만 기억하고, 그외에는 자세히 모르는 것을 같아서 나는 항왜에 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시기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에 투항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투항한 사람들 대부분이 왜구들이었다. 왜구들은 조선의 회유와 토벌의 성공과 조선의 방어체계가 발달되어 더 이상 노략질이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경제적 혜택과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 투항을 하였다. 가족과 함께 조선에 투항한 사람들도 많았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투항하는 사람들을 다 받아들이라는 전교가 내려진 만큼, 조선에서는 그들을 박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렇게 조선에 건너온 사람들 모두가 조선땅에 뿌리박고 살지는 않았다. 일부는 살다가 다시 일본으로 간 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예의 나라인 만큼 일본으로 다시 가는 사람들을 붙잡지 않고 마음대로 가게 해주었다.
이렇게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들을 조선정부에서는 무관의 벼슬을 내려주고, 전답과 집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모두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였다. 일부 사람들만 그런 대접을 받았고, 대부분이 조선의 평민으로 살거나 왜노비라고 하여 노비로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이 전쟁에서 수많은 일본군들은 조선에 투항을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항왜가 이시기에 생긴 것이다.
1592년도에 이때 조선에 투항을 하는 일본인들은 매우 적었다. 적은 이유는 이 시기에는 일본군에게 매우 유리한 상태이기도 하지만, 조선정부한테도 문제가 있었다.
1592년 9월에 진해에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격파하고 평소태라는 일본군 장수를 붙잡아 의주 행재소로 보내는 경우처럼 조선군은 장수급 인물들을 붙잡거나, 투항을 하면, 모두 살려주었다. 이처럼, 주요인물 외에는 조선군은 투항하거나 붙잡힌 포로들은 모두 살해하였다.
당시 전쟁 초반에는 조선군은 일본군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조선에 투항했다가 조선군 장단점을 파악하고 다시 도망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주요 직책에 있지않더라도 검술에 능하거나, 조총과 화약 제조술에 능한 사람이 있으면, 이들도 살려주었다. 왜냐하면, 당장에 조선군에 유용하게 이용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군은 조총과 왜검을 사용하는 일본군의 전술에 변변한 저항도 못한 체 무너졌기 때문에 이를 벤치마킹해서라도 일본군에 저항할 필요성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항왜들을 이용하던 조선정부는 전쟁 초반에서는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듬해 1593년에도 매한가지였다. 1593년부터 일본군은 조선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평양성에서 다시 한강으로 다시 남해안으로 전선이 축소되면서 많은 일본군은 장기간의 전쟁에 염증을 냈고, 배고픔과 추위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대거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때에도 조선군은 투항하는 일본군들을 포로로 잡힌 병사들과 같이 모두 살해하였다. 그러자, 많은 일본군들은 중국군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중국군이 이들을 받아주고, 대접도 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1593년 5월에 이여송 진영으로 일본군 수백명이 투항을 하여 조선정부로서 항왜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1593년 중반부터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어 이듬해 1594년부터 조선정부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면서 항왜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항왜을 유치하였다.
그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조정에서는 항왜에 대해서 시끄럽게 논의를 했나 본다.
영남에서 일본군과 대치중인 고언백이나 김응서나, 정기룡같은 현지 장수들은 항왜유치에 긍정적이었지만, 중앙에 앉아있는 문관들 대부분은 반신반의한 상태였가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는 조총개발에 항왜가 큰 기여를 하였고, 전쟁 초반에 일본군이 유리한 상태였지만, 투항을 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 큰공을 세운 김충선의 존재로 인해서 항왜유치에 적극 찬성하면서, 조선정부는 전략이 바뀌었다.
이렇게 시작된 항왜유치 작전은 일본군들의 투항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그 소문이 일본군에게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군에 투항했다. 특히 1595년에는 많은 항왜들이 조선군에 갔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충격을 받아 일본군 진영내에 목책을 두어 탈영을 방지하라는 명령을 조선에 있는 장수한테 내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의 항왜유치 작전은 노량해전으로 전쟁이 끝나는 시기까지 계속된다.
단독으로 간 자도 있고, 무리를 지어 간 항왜도 있는가 하면, 자신 동료의 목을 베어 조선군 진영으로 온 사람도 있고, 무기나 기밀 자료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만큼 각지각색으로 조선군 진영으로 일본인은 투항했다.
이렇게 조선군에 들어간 항왜의 숫자는 얼만 정도의 규모일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항왜의 성명만 해도 40명이고, 항왜의 이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자만 해도 1000명이 파악된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어느 기사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군한테 한 말이 기록된 것이다.
(일본에서 꺼리고 있는 점은 항복한 왜인이다.
그 숫자가 이미 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 왜인들은 반드시 우리 일본의 용병술을
털어놓을 것이다 )
이 대목에서 항복한 일본군이 만여명이면, 대단한 수치다. 여기에 그시점부터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투항한 항왜의 숫자를 계산한 것과 붙잡힌 전쟁포로를 합치면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럼 투항한 일본군 대부분은 누구일까? 김충선처럼 장수급의 사람도 있지만,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은 아마도 일반 병사다.
이렇게 많은 항왜들이 생긴 원인은 무엇일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서 보급품의 부족으로 생긴 배고픔에, 상급자의 횡포에, 불리한 국면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등으로 대규모 일본군의 탈영이 생겨 항왜가 발생했다고 본다. 아니면, 사야가처럼 反히데요시의 이유로 투항한 사람도 있다.
그럼 항왜가 조선군에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조선군의 조총개발과 생산에 항왜가 이용된 것이다. 1593년 2월부터 일본군이 남쪽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중앙정부는 본격적으로 조총개발에
시도한다. 조선 장인들은 항왜와 일본군 포로들과 같이 자체 조총 개발에 몰두하여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명나라 사람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조선은 심혈에 기울여서 마침내는 동년 3월에 자체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조총을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의 12월에는 지방까지 조총생산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의 훈련도감의 삼수병 양성과 지방의 속오삼수제를 적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프로젝트에 항왜의 공은 매우 컸고,그 영향으로 조선군의 전통적인 활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에서 검과 조총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변했다.지방에서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에 대비하여 170여 자루의 조총을 만들었고, 김성일도 호서의 숙련공들을 모아 산청에서 조총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일본군의 조총을 완전모방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개인화기들을 개량한 수준이라고 본다. 1594년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 진영에서는 항왜인 사야가의 도움으로 조선의 개인화기의 장점과 조총의 장점을 반반 섞은 조선형 조총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항왜들은 조선군의 조총 개발과 생산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다.
또한 항왜들은 검술을 조선군에 가르쳐주었다.
고려시대만 해도 잦은 전쟁과 백병전을 중요시하는 전술로 인해서 검술이 발달했지만, 조선에 이르러서 200년의 평화와 화기의 발달과 활을 중요시 했기때문에 도나 검같은 칼에 의한 전투기술이 쇠퇴했다. 그래서 100년간의 내란으로 발달되어 실전 전투에 유용한 왜검술이 조선군에게 꽤나 탐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군은 왜검술에 능한 항왜한테 배웠다. 특히 선조는 서울에서 아동 들을 모아서 항왜한테 왜검술을 전수받도록 전교를 내린 경우가 있다.
항왜들은 실제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실제로 김충선은 1592년 4월 13일에 전쟁이 발생난지 얼마 안된 1592년 4월 20일경에 경사 좌병사 박진한테 투항을 하여 기장 동래 양산 기장 전투에서 참가하였다. 한달동안 8차례나 되는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곽재우군에 연합하여 경상도 연안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1597년 12월의 울산성 전투에서 김응서의 휘하 장수로 참가하여 성안에 있는 가토군의 제 1부대를 전멸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 전투는 김충선을 비롯한 조선측의 항왜 150명이 참가하였다. 이런 항왜들을 전문적으로 이용한 조선측 장수중에는 김응서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여타 다른 장수들과 달리 항왜들을 중시하여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하여 이들이 전투에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도록 유도를 잘하는 만큼 심리적으로도 능한 장수였다. 그의 휘하에는 항왜 1000명이 있었고, 대표적인 장수가 사야가 김충선이다. 그는 항왜들을 선봉으로 세워 동래왜성을 공격하여 탈환하기도 하였다. 명랑해전에도 항왜가 참여했고, 여러 전투에도 항왜들은 조선군에 편입되어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외에도 항왜들은 그들이 몸 담았던 일본군의 전략전술같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첩보와 암살, 조선 함대의 격군으로 동원되었다.
또한 이이제이의 원칙으로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여진을 경계하기 위해서 북방으로 많은 항왜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전쟁이 소강상태인 상황에서 여러 지역의 민란을 진압하는데도 항왜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조선군은 항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항왜들을 유치했다고 본다.
그러나 부작용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였다. 당시 조선은 전쟁으로 재정이 열악한 상황이므로 많은 항왜들에게 좋은 대접을 못해 주었고, 여진과의 국경지대로 항왜들을 투입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항왜들의 반발이 심해 말썽히 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한테는 실보다는 득이 많았던 항왜는 조선군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할수있게 해준 숨어있는 배역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선정부에게는 항왜들은 이제는 필요한 존재가 아닌 부담스러운 존재로 바뀌었다. 이들이 본국과 연락을 처하거나, 도망을 쳐서 조선의 내부 사정을 알려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들에 대해서 의심을 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이들에 대한 그나마 해주었던 대접을 점차 소홀히 했고, 이들을 점진적으로 북쪽으로 옮겼다. 당시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은 여진문제로 골치를 썩기 시작했다.선조은 의주로 임시수도를 정하여 근 1년을 그곳에서 보냈고, 요동의 명나라 장수들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관계로 북방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정통하였다. 북방에 야기될 소요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는 임진년의 절차를 밟지 않을려는 심산으로 북쪽 국경지대를 단단이 하기 위해서 항왜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북쪽으로 가지 않는 항왜들은 거처를 정해주고, 그 곳에서 농사짓게 하는 한편, 관가의 감시를 받게 했다.
그 후 한동안 역사의 저편으로 항왜들은 사라졌다. 그러다가 항왜들이 다시 역사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25년이 지난 후인 이괄의 난이었다. 당시 이괄은 북쪽의 조선군을 동원하여 서울의 인조정권을 공격하였는데, 그 반란군의 선봉군이 항왜 150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항왜인지, 아니면 일부가 그 후손인지 모르겠지만, 그때가지 항왜가 조선의 북쪽에서 조선군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이괄의 반란군을 토벌했을때, 조선 관군쪽에 또한 사야가가 이끄는 항왜들이 활동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당시 사야가 즉 김충선은 전투 도중에 옛날의 자기 부하로 활동한 서아지라는 항왜출신의 반란군 장수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참수해서 큰 공을 세웠다. 1637년에 경상도 관군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는 70먹은 노구의 몸으로 항왜의 후손들을 이끌고 진격하는 도중에 쌍령전투에서 소수의 청나라군을 격파하고 산성부근 까지 오다가 조선이 항복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으로 끝으로 그 후 항왜의 활동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조선군의 편에 서서 예전에 같은 편이던 일본군을 공격하는 항왜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항왜들은 조선군에 편입되어 조선군에 많은 도움을 주며, 전쟁에서 조선군이 승리하도록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오늘날 김충선 말고는 항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심해서 당당하게 자신들이 항왜 이거나 항왜의 후손이라고 말하기 뭐 해서 숨겼다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런 사실도 잊어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추측을 해 본다. 김충선은 전공을 많이 세우고 당상관의 벼슬을 받은 양반신분이 되어 그의 후손들이 당당하게 밝히는 것과 달리 많은 항왜들은 조선에 동화된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한국에 상당수의 항왜 후손들이 있겠지만, 그들 자신들이 항왜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당사자들도 모르니,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항왜들의 존재에서 대해서 일반인들은 김충선라는 이름 석자만 기억하고, 그외에는 자세히 모르는 것을 같아서 나는 항왜에 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시기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에 투항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투항한 사람들 대부분이 왜구들이었다. 왜구들은 조선의 회유와 토벌의 성공과 조선의 방어체계가 발달되어 더 이상 노략질이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경제적 혜택과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 투항을 하였다. 가족과 함께 조선에 투항한 사람들도 많았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투항하는 사람들을 다 받아들이라는 전교가 내려진 만큼, 조선에서는 그들을 박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렇게 조선에 건너온 사람들 모두가 조선땅에 뿌리박고 살지는 않았다. 일부는 살다가 다시 일본으로 간 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예의 나라인 만큼 일본으로 다시 가는 사람들을 붙잡지 않고 마음대로 가게 해주었다.
이렇게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들을 조선정부에서는 무관의 벼슬을 내려주고, 전답과 집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모두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였다. 일부 사람들만 그런 대접을 받았고, 대부분이 조선의 평민으로 살거나 왜노비라고 하여 노비로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이 전쟁에서 수많은 일본군들은 조선에 투항을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항왜가 이시기에 생긴 것이다.
1592년도에 이때 조선에 투항을 하는 일본인들은 매우 적었다. 적은 이유는 이 시기에는 일본군에게 매우 유리한 상태이기도 하지만, 조선정부한테도 문제가 있었다.
1592년 9월에 진해에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격파하고 평소태라는 일본군 장수를 붙잡아 의주 행재소로 보내는 경우처럼 조선군은 장수급 인물들을 붙잡거나, 투항을 하면, 모두 살려주었다. 이처럼, 주요인물 외에는 조선군은 투항하거나 붙잡힌 포로들은 모두 살해하였다.
당시 전쟁 초반에는 조선군은 일본군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조선에 투항했다가 조선군 장단점을 파악하고 다시 도망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주요 직책에 있지않더라도 검술에 능하거나, 조총과 화약 제조술에 능한 사람이 있으면, 이들도 살려주었다. 왜냐하면, 당장에 조선군에 유용하게 이용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군은 조총과 왜검을 사용하는 일본군의 전술에 변변한 저항도 못한 체 무너졌기 때문에 이를 벤치마킹해서라도 일본군에 저항할 필요성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항왜들을 이용하던 조선정부는 전쟁 초반에서는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듬해 1593년에도 매한가지였다. 1593년부터 일본군은 조선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평양성에서 다시 한강으로 다시 남해안으로 전선이 축소되면서 많은 일본군은 장기간의 전쟁에 염증을 냈고, 배고픔과 추위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대거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때에도 조선군은 투항하는 일본군들을 포로로 잡힌 병사들과 같이 모두 살해하였다. 그러자, 많은 일본군들은 중국군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중국군이 이들을 받아주고, 대접도 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1593년 5월에 이여송 진영으로 일본군 수백명이 투항을 하여 조선정부로서 항왜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1593년 중반부터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어 이듬해 1594년부터 조선정부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면서 항왜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항왜을 유치하였다.
그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조정에서는 항왜에 대해서 시끄럽게 논의를 했나 본다.
영남에서 일본군과 대치중인 고언백이나 김응서나, 정기룡같은 현지 장수들은 항왜유치에 긍정적이었지만, 중앙에 앉아있는 문관들 대부분은 반신반의한 상태였가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는 조총개발에 항왜가 큰 기여를 하였고, 전쟁 초반에 일본군이 유리한 상태였지만, 투항을 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 큰공을 세운 김충선의 존재로 인해서 항왜유치에 적극 찬성하면서, 조선정부는 전략이 바뀌었다.
이렇게 시작된 항왜유치 작전은 일본군들의 투항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그 소문이 일본군에게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군에 투항했다. 특히 1595년에는 많은 항왜들이 조선군에 갔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충격을 받아 일본군 진영내에 목책을 두어 탈영을 방지하라는 명령을 조선에 있는 장수한테 내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의 항왜유치 작전은 노량해전으로 전쟁이 끝나는 시기까지 계속된다.
단독으로 간 자도 있고, 무리를 지어 간 항왜도 있는가 하면, 자신 동료의 목을 베어 조선군 진영으로 온 사람도 있고, 무기나 기밀 자료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만큼 각지각색으로 조선군 진영으로 일본인은 투항했다.
이렇게 조선군에 들어간 항왜의 숫자는 얼만 정도의 규모일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항왜의 성명만 해도 40명이고, 항왜의 이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자만 해도 1000명이 파악된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어느 기사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군한테 한 말이 기록된 것이다.
(일본에서 꺼리고 있는 점은 항복한 왜인이다.
그 숫자가 이미 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 왜인들은 반드시 우리 일본의 용병술을
털어놓을 것이다 )
이 대목에서 항복한 일본군이 만여명이면, 대단한 수치다. 여기에 그시점부터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투항한 항왜의 숫자를 계산한 것과 붙잡힌 전쟁포로를 합치면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럼 투항한 일본군 대부분은 누구일까? 김충선처럼 장수급의 사람도 있지만,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은 아마도 일반 병사다.
이렇게 많은 항왜들이 생긴 원인은 무엇일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서 보급품의 부족으로 생긴 배고픔에, 상급자의 횡포에, 불리한 국면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등으로 대규모 일본군의 탈영이 생겨 항왜가 발생했다고 본다. 아니면, 사야가처럼 反히데요시의 이유로 투항한 사람도 있다.
그럼 항왜가 조선군에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조선군의 조총개발과 생산에 항왜가 이용된 것이다. 1593년 2월부터 일본군이 남쪽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중앙정부는 본격적으로 조총개발에
시도한다. 조선 장인들은 항왜와 일본군 포로들과 같이 자체 조총 개발에 몰두하여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명나라 사람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조선은 심혈에 기울여서 마침내는 동년 3월에 자체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조총을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의 12월에는 지방까지 조총생산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의 훈련도감의 삼수병 양성과 지방의 속오삼수제를 적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프로젝트에 항왜의 공은 매우 컸고,그 영향으로 조선군의 전통적인 활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에서 검과 조총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변했다.지방에서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에 대비하여 170여 자루의 조총을 만들었고, 김성일도 호서의 숙련공들을 모아 산청에서 조총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일본군의 조총을 완전모방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개인화기들을 개량한 수준이라고 본다. 1594년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 진영에서는 항왜인 사야가의 도움으로 조선의 개인화기의 장점과 조총의 장점을 반반 섞은 조선형 조총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항왜들은 조선군의 조총 개발과 생산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다.
또한 항왜들은 검술을 조선군에 가르쳐주었다.
고려시대만 해도 잦은 전쟁과 백병전을 중요시하는 전술로 인해서 검술이 발달했지만, 조선에 이르러서 200년의 평화와 화기의 발달과 활을 중요시 했기때문에 도나 검같은 칼에 의한 전투기술이 쇠퇴했다. 그래서 100년간의 내란으로 발달되어 실전 전투에 유용한 왜검술이 조선군에게 꽤나 탐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군은 왜검술에 능한 항왜한테 배웠다. 특히 선조는 서울에서 아동 들을 모아서 항왜한테 왜검술을 전수받도록 전교를 내린 경우가 있다.
항왜들은 실제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실제로 김충선은 1592년 4월 13일에 전쟁이 발생난지 얼마 안된 1592년 4월 20일경에 경사 좌병사 박진한테 투항을 하여 기장 동래 양산 기장 전투에서 참가하였다. 한달동안 8차례나 되는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곽재우군에 연합하여 경상도 연안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1597년 12월의 울산성 전투에서 김응서의 휘하 장수로 참가하여 성안에 있는 가토군의 제 1부대를 전멸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 전투는 김충선을 비롯한 조선측의 항왜 150명이 참가하였다. 이런 항왜들을 전문적으로 이용한 조선측 장수중에는 김응서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여타 다른 장수들과 달리 항왜들을 중시하여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하여 이들이 전투에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도록 유도를 잘하는 만큼 심리적으로도 능한 장수였다. 그의 휘하에는 항왜 1000명이 있었고, 대표적인 장수가 사야가 김충선이다. 그는 항왜들을 선봉으로 세워 동래왜성을 공격하여 탈환하기도 하였다. 명랑해전에도 항왜가 참여했고, 여러 전투에도 항왜들은 조선군에 편입되어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외에도 항왜들은 그들이 몸 담았던 일본군의 전략전술같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첩보와 암살, 조선 함대의 격군으로 동원되었다.
또한 이이제이의 원칙으로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여진을 경계하기 위해서 북방으로 많은 항왜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전쟁이 소강상태인 상황에서 여러 지역의 민란을 진압하는데도 항왜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조선군은 항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항왜들을 유치했다고 본다.
그러나 부작용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였다. 당시 조선은 전쟁으로 재정이 열악한 상황이므로 많은 항왜들에게 좋은 대접을 못해 주었고, 여진과의 국경지대로 항왜들을 투입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항왜들의 반발이 심해 말썽히 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한테는 실보다는 득이 많았던 항왜는 조선군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할수있게 해준 숨어있는 배역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선정부에게는 항왜들은 이제는 필요한 존재가 아닌 부담스러운 존재로 바뀌었다. 이들이 본국과 연락을 처하거나, 도망을 쳐서 조선의 내부 사정을 알려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들에 대해서 의심을 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이들에 대한 그나마 해주었던 대접을 점차 소홀히 했고, 이들을 점진적으로 북쪽으로 옮겼다. 당시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은 여진문제로 골치를 썩기 시작했다.선조은 의주로 임시수도를 정하여 근 1년을 그곳에서 보냈고, 요동의 명나라 장수들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관계로 북방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정통하였다. 북방에 야기될 소요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는 임진년의 절차를 밟지 않을려는 심산으로 북쪽 국경지대를 단단이 하기 위해서 항왜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북쪽으로 가지 않는 항왜들은 거처를 정해주고, 그 곳에서 농사짓게 하는 한편, 관가의 감시를 받게 했다.
그 후 한동안 역사의 저편으로 항왜들은 사라졌다. 그러다가 항왜들이 다시 역사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25년이 지난 후인 이괄의 난이었다. 당시 이괄은 북쪽의 조선군을 동원하여 서울의 인조정권을 공격하였는데, 그 반란군의 선봉군이 항왜 150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항왜인지, 아니면 일부가 그 후손인지 모르겠지만, 그때가지 항왜가 조선의 북쪽에서 조선군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이괄의 반란군을 토벌했을때, 조선 관군쪽에 또한 사야가가 이끄는 항왜들이 활동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당시 사야가 즉 김충선은 전투 도중에 옛날의 자기 부하로 활동한 서아지라는 항왜출신의 반란군 장수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참수해서 큰 공을 세웠다. 1637년에 경상도 관군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는 70먹은 노구의 몸으로 항왜의 후손들을 이끌고 진격하는 도중에 쌍령전투에서 소수의 청나라군을 격파하고 산성부근 까지 오다가 조선이 항복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으로 끝으로 그 후 항왜의 활동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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