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군 역사 관련자료(雪城) ---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국립중앙도서관.
작성자달여울작성시간26.06.14조회수34 목록 댓글 0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음성현(陰城縣)
번역문:
동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8리이고, 북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18리, 청안현(淸安縣) 경계까지 35리이고, 서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울까지 2백 48리이다.
---> 조선시대 청안현은 지금 괴산군 청안면, 증평군 일대와 청주시 북부지역인 북이면, 오창읍 일대라고 한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 흑양군은 지금 진천군 진천읍 일대라고 한다. 『鎭川縣 建置沿革: 本高句麗今勿奴郡。一名萬弩郡,或云首知,或云新知。新羅改黑壤郡。黑,一作“黃”。高麗初稱降州,後改鎭州。신증동국여지승람 』
고려(高麗)에서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잉홀(仍忽)ㆍ설성(雪城)ㆍ잉근내(仍斤內) 육익(六翼)
---> 원문을 보면 잉근내 아래 작은 글씨로 육익이라 써있다. 육익(六翼)은 지명이 아니라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는 책을 말하며 이 책을 인용했다는 표시로 봐야한다. 주관육익(周官六翼)은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말 공민왕(1351~1374)때 김지(金祉)가 저술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김지는 공민왕11년(13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괴산군(槐山郡)편을 보면
『 建置沿革: 本高句麗仍斤內郡。新羅改槐壤郡。高麗改槐州。顯宗九年屬忠州,後置監務。本朝太宗三年,陞知槐州事。十三年,改今名,例爲郡。
郡名: 仍斤內,槐壤,槐州,始安。』
라고 나온다.
고구려때 지금 괴산군은 잉근내(仍斤內), 음성군은 잉홀(仍忽)이라고 했다. 그런데 음성현 군명(郡名)에 잉근내(仍斤內)라 한 것은 인접한 지역으로 시대가 내려오면서 경계가 달랐던 모양이다. 삼국사기 지리지(1145년(인종 23))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 槐壤郡本高句麗仍斤內郡 景德王改名今槐州』
잉홀(仍忽)은 건치연혁에 고구려때 지명이라고 나온다. 홀(忽)은 고구려 지명에 많이 보인다. 예) 인천 미추홀(彌趨忽)과 매소홀(買召忽), 수원 매홀(買忽).
[흑양군(黑壤郡): 거느리는 현(縣)이 두 개인데 ㆍㆍㆍ음성현(陰城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잉홀현(仍忽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黑壤郡: 領縣二 ㆍㆍㆍ陰城縣本高句麗仍忽縣景德王改名今因之.) 삼국사기 지리지 흑양군(黑壤郡, 지금 진천)]
설성(雪城)은 조선시대 음죽현(陰竹縣)의 별호(別號)이기도 했다.
『建置沿革: 本高句麗奴音竹縣。新羅改今名,爲介山郡領縣。高麗顯宗九年屬忠州,後置監務。本朝太宗十三年,改爲縣監,自忠淸道來隷本道。
郡名: 奴音竹,雪城。
驛院: 留春驛。在縣東五里。無極驛。在縣南三十里。富民院。在縣東五里。貫寺院。在縣南十三里。長海院。在縣東十三里。
題詠: 雪城千古地。李守綱詩:“云云,佳氣更蔥蘢。”【제영】 설성천고지(雪城千古地) 이수강(李守綱)의 시에, “설성은 천고의 땅인데 아름다운 기운이 다시 어리었도다.” 하였다. ---> 설성(雪城)이 오래되었음을 말한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음죽현(陰竹縣)
【성지城址】 설성(雪城) 서쪽으로 5리에 있는데, 성산(城山)이라 하고 둘레는 5리이다.』
음죽현은 지금 이천시 장호원읍과 설성면 일대가 되고, 설성산성(雪城山城) 터가 남아있다. 설성산(雪城山)은 장호원읍 서쪽에 있고 음성군 감곡면 경계와 직선거리로 8km, 음성군청과 25km 거리에 있다. 고려 현종때 충주에 속했고 조선 태종 13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예속시켰다고 나온다.
음성군 감곡면도 본래 충주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음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음죽현이 무극역(無極驛)과 장해역(長海驛, 지금 장호원)을 관할한 것으로 보아 음성군 생극면 일대도 음죽현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
이천군 부분에서 음죽현에 해당하는 청미면, 설성면, 율면 지역만 옮겼다. 음죽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천군에 통합되었다. 율면(栗面)을 보면 음성군 법왕면 석원리와 두의면 용산리 일부가 이천군에 포함되었다.
음성군과 가까운 음죽현(陰竹縣)은 1895년(고종 32)에 23부제 시행으로 충주부(忠州府) 음죽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 시행으로 경기도에 속하게 된다. 이후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천군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음성군(陰城郡)을 달리 설성(雪城)이라 부르는 것은
오래되었는데 조선시대와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음죽현(陰竹縣)과 가까운 지역이었고 일부 음성군 지역은 음죽현에 속했던 역사와 관련있다고 봐야 한다. 설성산성(雪城山城)터가 지금도 이천시 장호원읍과 설성면 경계에 실존한다면 이를 원형(原型)으로 보는게 맞다.
「설성산성(雪城山城址):
설성산성 축성법의 특징은 6-7세기 신라의 전형적인 축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설성산성은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며 쌓은 성으로 확인된다. 신라의 산성은 군사적인 기능 뿐만 아니라 행정 치소로도 기능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노음죽현(奴音竹縣)이었다. 신라가 점유한 이후 신라 노음죽현의 치소성으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성산성은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신라의 축성법과 치소성의 구조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서 인용.」
다른 의견으로는 음성읍내에서 가까운 수정산성(水精山城)과의 관련성이다. 아래 고적조에 나온다. (古跡:古山城。在水精山上。石築。周一千二百七十一尺,高丈餘。內有一井。今廢。城之南有古邑遺址,號官坪。)
수정(水精)은 수정(水晶)을 뜻하며 맑고 희게 빛난다. 눈(雪)을 연상한다. 조선시대에 이미 고산성(古山城)으로 나온다면 고려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 존재하던 산성(山城)으로 추정된다. 설성(雪城)은 이 산성을 달리 부르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한 지역을 부르던 군명(郡名)이라면 대표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명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떤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서 보수성(保守性)과 고착성(固着性)을 갖는다.
일제시대에 필사한 [음성읍지(陰城邑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군명: 잉홀 흑양 잉근내 육익 설성 음성
[연혁] 재삼한시 위고구려영역 칭잉홀현 신라시개금명 예흑양군(금진천)영현 지라말경순왕시 민심귀우고려잉속충주 개칭설성치감무 본조태종십삼년개칭음성(郡名 仍忽 黑壤 仍斤內 六翼 雪城 陰城.
[沿革] 在三韓時 爲高句麗領域 稱仍忽縣 新羅時改今名 爲黑壤郡(今鎭川)領縣 至羅末敬順王時 民心歸于高麗仍屬忠州 改稱雪城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改稱陰城)」---> 고려때 설성(雪城)으로 바꾸어 부른 것으로 나오는데 별호(別號)일 것이다. 사서(史書)에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음죽현(陰竹縣)과 음성현(陰城縣)은 그늘 음(陰)자를 같이 쓴다. 음(陰)자를 쓰는 지명은 많지 않다. 음성(陰城)의 음(陰)은 잉근내(仍斤內)와 잉홀(仍忽)의 음(音) 잉(仍)을 잇는다고 볼 수 있다.
음죽현 건치연혁을 보면 고구려때 노음죽현(奴音竹縣)이었고 신라때 음죽현(陰竹縣)으로 고쳤다. 앞의 노(奴)자를 생략했다. 정복전쟁으로 땅을 빼앗으면 지명(地名)부터 바꾼다. 노음죽(奴音竹)을 당시에 어떻게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자(漢字)도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새김(訓)과 음(音)이 변한다.
그리고, 성(城)을 굳이 실재하는 석성(石城)이란 의미를 떠나 한 고을을 지칭하는 의미로 새긴다면 음성지역이 겨울철에 추운 지역인데 눈(雪)이 많이 쌓였던 사연과 연관지울 수 있다 하겠다. 음성지역이 겨울철에 추운 것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으로 서쪽에 바람을 막아주는 큰 산이 없기 때문이다.
이웃한 지역에 같은 지명이 존재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한 지명이 이동(移動)하고 이웃 지역에서 모방(模倣)하는 일은 흔하다. 이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한 고을이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겪기도 하고 사람들의 교류(交流)가 빈번(頻繁)하고 때로 이주(移住)하며 혼돈(混沌)과 착종(錯綜)이 있어 혼동(混同)하기 때문이다.
<호서읍지 음성현(1871년)에 첨부된 지도>
맨 위 우측에 성(城)이라고 쓴 글씨 옆에 수정산(水晶山)이라고 써있다. 향교와 여단, 가섭산이 보인다.
성곽: 고산성재수정산상 축주일천이백칠십이척 고장여 금유형지 내유일정 금폐 성지남유고읍유지 호남평(城郭: 古山城在水精山上 築周一千二百七十二尺 高丈餘 今有形址 內有一井 今廢 城之南有古邑遺址 號南坪. 호서읍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관평(官坪)으로 써있으나 남평(南坪)으로 되어있다. 남평(南坪)은 잘못 쓴 것 같다. 다른 읍지에는 관평(官坪)으로 써 있다.
<필사본 동여도(東輿圖) 음죽현 부분. 1861년 이후>
설성산성(雪城山城) 천미천(天民川, 지금 청미천(淸渼川)), 장해원(長海院, 지금 장호원(長湖院)), 무극(無極)이 보인다. 무극 옆에 관촌(館村), 석원(石院), 육십티(六十峙) 육십령, 소탄(所呑)이 보인다.
<필사본 동여도 음성현 부분. 1861년 이후>
수정산(水精山)이 보인다. 가섭산(伽葉山)에 봉수대를 표시했다. 사장(沙將) 위에 질음티(叱音峙)가 보인다.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사장산이 있고 기름재가 있다. 질음티(叱音峙)는 기름재, 기름고개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음성도엽 2차지도, 1910년 측도, 1912년 제판>
음성읍 동쪽 해발 389m라 쓴 곳이 수정산이다. 해발고도는 기준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음성도엽 3차지도,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 아래는 음성읍내 확대부분.
음성읍 동쪽 해발 393.8m라 쓴 곳이 수정산이다. 해발고도는 기준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래 음성읍내를 확대한 지도에 도수장, 우편국, 학교, 경찰서, 향교, 군청이 보인다.
<음성군 읍내 현재지도>
수정산 정상에 수정산성이 있다.
【성씨】 본현 송(宋)ㆍ윤(尹)ㆍ경(敬)ㆍ정(鄭)ㆍ박(朴)ㆍ채(蔡)ㆍ최(崔)ㆍ이(李)ㆍ신(申) 모두 속성(續姓)이다.파천(巴川) 채(蔡)ㆍ경(敬)ㆍ윤(尹).
---> 파천부곡에 채, 경, 윤씨가 속했음을 말한다. 아래에 나온다.
【산천】 가섭산(迦葉山) 현 북쪽 8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 진산(鎭山)이란 말은 한 고을을 지켜주는 산이란 뜻이다. 즉 진호(鎭護)한다는 의미다. 가섭산은 음성읍 북동쪽에 있는데 가섭산봉수가 있었다. 아래에 가섭산봉수가 나오는데 봉수대(烽燧臺)에는 조선시대에 무관인 별장(別將)과 지방벼슬아치인 감관(監官)과 군인들이 주둔했었다. 호서읍지(1871년) 충주목편 봉수 항목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마산봉대 : 재주서이십리 동응대림산급심항산 서응음성가섭산 별장일인 감관오인 군인일백명(馬山烽臺: 在州西二十里 東應大林山及心項山 西應陰城迦葉山 別將一人 監官五人 軍人一百名) 」가섭산봉수대에도 같은 수의 별장과 감관 및 군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군인 백명은 적은 수가 아니다. [충청좌도각군읍지 음성현, 1871년. 1895년]을 보면 烽軍 二十五名 保軍 七十五名이라 나온다. 봉군, 보군 둘다 봉수대에서 일했다.
하지만 산성(山城)이나 봉수대(烽燧臺)가 없는 고을의 경우 진산(鎭山)은 풍수(風水)로 볼때 조산(祖山), 조종산(祖宗山)이 되는 산을 선택했다. 꼭 산이 읍(邑)의 북쪽에 없을때는 적당한 산을 골랐다. 괴산군이 이에 해당된다.「山川 : 錦山。在郡西二里。鎭山。신증동국여지승람 괴산군 」
마지막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을 보면
옛 土城터에 성황당이 있고 진산(鎭山)이라 했다. 쉽게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위하는 산이었다.
【산천】 당선산(唐羨山) 고을 동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인데, 토성(土城) 터가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당(城隍堂) 당선산(唐羡山)에 있다. 여단(勵壇) 고을 북쪽에 있다.
정자산(亭子山) 현 동남쪽 10리에 있다. 품현(品峴) 현 서쪽 10리에 있다. 사장산(沙將山) 현 서북쪽 10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 현 동쪽 3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현 서쪽 19리에 있다. 밀암(密巖) 산성(山城) 밑에 있다. 웅암(熊巖) 현 서남쪽 10리에 있다. 옥천산(玉川山) 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대추[棗].
【봉수】 가섭산봉수(迦葉山烽燧) 동쪽으로 충주 마산(馬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주 망이산(望夷山)에 응한다.
【누정】 의송정(倚松亭) 객관 동쪽에 있다. ○ 권극화(權克和)의 시에, “남주(南州)에 몇 누대(樓臺)를 두루보니, 경치가 하도 많아 내 정취(情趣)를 어지럽힌다. 오늘 설성(雪城)에 서늘한 기운 넉넉하니, 베개를 비스듬이 솔바람 소리 듣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였다. 『신증』 최운생(崔淑生)의 시에, “깊은 가을 뜨거운 날이 구름 산에 새어나오니, 빛이 푸르고 푸르러 늙은 얼굴에 비친다. 부들과 버들이 서리를 만나 모두 절개를 떨어뜨렸는데, 그대의 풍채를 대하니 문득 돌아가기를 잊었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감원역(坎原驛) 현 서쪽 1리에 있다. 양혜원(楊惠院) 현 남쪽 9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현 서쪽 19리에 있다.
【불우】 서가섭사(西迦葉寺)ㆍ상봉악사(上鳳岳寺) 모두 가섭산(迦葉山)에 있다. 성주사(聖住寺)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산성(古山城) 수정산(水精山) 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2백 71척이고, 높이가 10척 남짓이고,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성 남쪽에 고읍(古邑)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관평(官坪)이라고 부른다. 금촌부곡(金村部曲) 현 서쪽 15리에 있다. 파천부곡(巴川部曲) 현 남쪽 20리에 있다.
【인물】 고려 채정(蔡靖) 현(縣)의 아전이다. 공부에 힘써 경서에 통하여 과거에 올랐다. 동도(東都) 서기(書記)에 재직할 때에 맑은 덕이 있었다. 임기가 차자 국학 학정(國學學正)에 전보(轉補)하였는데 선비들이 공경하고 어려워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제수하였다.
『신증』 본조 박숙진(朴叔蓁)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제영】 고목행상인(古木行相引) 서강(徐岡)의 시에, “닭이 울자 관도(官道)로 향하였는데, 머리를 돌리니 벌써 아침 햇빛이로구나. 고목은 가는 대로 서로 연달았고, 먼 뫼뿌리는 바라보면 다시 에워쌌네. 말은 잔디 풀을 먹으며 서 있고, 제비는 보리 바람에 스치어 난다. 지쳐서 빈 관사에 찾아드니, 정신이 피곤하여 옷을 이기지 못한다.” 하였다. 백구겸수정(白鷗兼水靜)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음성(陰城)은 오랜 고을인데, 양지골에는 아침 햇빛이 깨끗하다. 산이 좋으니 병풍이 천 폭이요, 시내가 맑으니 옥(玉)이 한 둘레로다. 흰 갈매기는 물과 함께 고요하고, 누른 학은 구름과 함께 난다. 잠깐 동안 임당(林塘) 울밀한 곳에 앉으니, 푸른빛이 옷에 뚝뚝 들게 맡겨 두네.” 하였다.『신증』 지벽산장현(地僻山藏縣) 양희지(楊熙止)의 시에, “땅이 궁벽하니 산이 고을을 감추었고, 숲이 그윽하니 새가 사람을 부른다. 창 바람은 벼루 물을 말리고, 처마 햇빛은 발 티끌을 쏜다. 세월은 쇠한 살쩍을 붙여 주고, 건곤(乾坤)은 병든 몸을 맡겨 둔다. 임금의 시골이 길이 눈에 있으니, 혼과 꿈이 다시 부산하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1895)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25년(1592)에 청안(淸安)으로 예속시켰다가 광해주 10년(1618)에 복구시켰다.
【군명】 설성(雪城)
【관원】 현감(縣監) 충주 진관병마절제도위(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한다. 한 사람이다.
【방면】 동도(東道) 끝이 5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서(近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원서(遠西)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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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城縣
東至忠州界八里。北至同州界二十五里。南至槐山郡界十八里,至淸安縣界三十五里。西至鎭川縣界四十里。距京都二百四十八里。
建置沿革:
本高句麗仍忽縣。新羅改今名,爲黑壤郡領縣。高麗屬忠州,後置監務。本朝太宗十三年,例改爲縣監。
官員: 縣監,訓導。各一人。
郡名:
仍忽,雪城,仍斤內。六翼。
姓氏:
本縣 宋,尹,敬,鄭,朴,蔡。崔,李,申。竝續。
巴川 蔡,敬,尹。
山川:
迦葉山。在縣北八里。鎭山。
亭子山。在縣東南十里。
品峴。在縣西十里。
沙將山。在縣西北十里。
水精山。在縣東三里。
普賢山。在縣西十九里。
蜜巖。在山城下。
熊巖。在縣西南十里。
玉川山。在縣南五里。
土産: 棗。
烽燧: 迦葉山烽燧。東應忠州馬山,北應忠州望夷山。
樓亭: 倚松亭。在客館東。○權克和詩:“南州閱遍幾臺亭景物紛然亂我情。今日雪城饒爽氣,也宜欹枕聽松聲。” 〔新增〕 崔淑生詩:“秋高烈日透雲山,正色蒼蒼照老顔。蒲柳逢霜渾落節,對君風彩却忘還。”
學校: 鄕校。在縣東一里。
驛院: 坎原驛。在縣西一里。
楊惠院。在縣南九里。
長信院。在縣西十九里。
佛宇: 西迦葉寺,上鳳嶽寺。俱在迦葉山。
聖住寺。在普賢山。
祠廟: 社稷壇。在縣西。文廟。在鄕校。城隍祠。在縣東二里。厲壇。在縣北。
古跡: 古山城。在水精山上。石築。周一千二百七十一尺,高丈餘。內有一井。今廢。城之南有古邑遺址,號官坪。---> 관평(官坪)은 관터, 관들로 불렀을 것이다.
金村部曲。在縣西十五里。
巴川部曲。在縣南二十里。
人物:
高麗 蔡靖。縣吏。力學通經。登第,掌東都書記,有淸德。秩滿,補國學學正,諸生敬憚之。高宗時,拜樞密副使。
〔新增〕 本朝 朴叔蓁。登第,官至大司憲。
題詠:
古木行相引。徐岡詩:“鷄鳴向官道,回首已朝暉。云云,遙岑望復圍。馬銜莎草立,鷰拂麥風飛。倦極投空館,神疲不任衣。”
白鷗兼水靜。徐居正詩:“陰城是古縣,陽谷淨朝暉。山好屛千幅,溪明玉一圍。云云,黃鶴與雲飛。小坐林塘密,從敎翠滴衣。”
〔新增〕 地僻山藏縣。楊煕止詩:“云云,林幽鳥喚人。窓風枯硯水,簷日射簾塵。歲月粘衰鬢,乾坤任病身。帝鄕長在目,魂夢更紛綸。”
군명을 보면 잉근내(仍斤內) 아래 작은 글씨로 육익이라 써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1년(중종 26) 간행>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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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충주목 음성현
지리지 / 충청도 / 충주목 / 음성현
국역
◎ 음성현(陰城縣)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인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라, 충주(忠州)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치었다.
---> 고구려때 잉홀현, 신라 경덕왕때 음성현(陰城縣)으로 고쳐 흑양군(지금 진천읍 일대라 하며 고구려때 지명 금물노군(今勿奴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고 했다. 영현(領縣)은 쉽게 하위(下位) 행정구역으로 보면 된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병제천(幷梯川)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乾川)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청안(淸安)에 이르기 26리, 북쪽으로 충주 석적산(石積山)에 이르기 19리이다.
호수가 1백 71호요, 인구가 7백 26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이 33명이요, 선군이 46명이다.
본주(本州)의 토성(土姓)이 2이니, 박(朴)·채(蔡)요, 망성(亡姓)이 4이니, 송(宋)·윤(尹)·경(敬)·정(鄭)이요, 속성(續姓)이 3이니, 최(崔)·이(李)·신(申)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 (厥土塉, 風氣寒)
---> 땅이 메마르다는 것은 가뭄을 잘 탄다는 뜻인데, 큰산과 강이 없고 낮은산이 많으며 토양이 화강암이 풍화된 마사토가 많은데 원인이 있다. 하지만 음성에는 조선시대부터 가뭄을 극복하고 논농사에 꼭 필요한 물을 가두기 위한 제언(堤堰)이 많았다.
간전(墾田)이 1천 9백 93결이요,【논이 10분의 3에 좀 넘는다. 】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녹두·닥나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대추·칠·족제비털·잡깃·잇[紅花]·지초·종이·잘[山獺皮]·여우가죽·표범가죽이요, 약재(藥材)는 산골[自然銅]·인삼·복신(茯神)이다.
역(驛)이 2이니, 감원(坎原)·용안(龍安)이요, 봉화가 1곳이니, 가섭산(加葉山)이다.【남쪽으로 충주(忠州) 임내 익안(翼安)의 마산(馬山)에, 북쪽으로 충주 망이성(望伊城)에 응한다. 】
---> 용안(龍安)은 충주시 신니면 용원(龍院)이다.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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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陰城縣: 本高句麗 仍忽縣, 新羅改今名, 爲黑壤郡領縣。 高麗因之, 屬忠州任內, 後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縣監。
四境, 東距忠州 並梯川七里, 西距忠州 乾川十七里, 南距淸安二十六里, 北距忠州 石積山十九里。
戶一百七十一, 口七百二十六。 軍丁, 侍衛軍三十三, 船軍四十六。
本土姓二, 朴、蔡; 亡姓四, 宋、尹、敬、鄭; 續姓三, 崔、李、申。
厥土塉, 風氣寒, 墾田一千九百九十三結。 【水田十分之三强】 土宜五穀, 粟、小豆、菉豆、桑楮。 土貢, 蜂蜜、黃蠟、棗、漆、黃毛、雜羽、紅花、芝草、紙、山獺皮、狐皮、豹皮。 藥材, 自然銅、人蔘、茯神。
驛二, 坎原、龍安。 烽火一處, 加葉山。 【南準忠州任內翼安馬山, 北準忠州望伊城。】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원문, 국립중앙도서관>
음성현 부분.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원문, 국립중앙도서관>
음죽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