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동쪽은 충주(忠州) 경계까지 27리이고, 남쪽은 청주 경계까지 28리이며, 서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38리이고, 북쪽은 경기도(京畿道)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3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금물노군(今勿奴郡) 다른 이름은 만노군(萬弩郡)이요, 혹은 수지(首知), 또는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新羅) 때에 흑양군(黑壤郡) 흑(黑)은 혹 황(黃)이라고도 함. 이라 고쳤다. 고려 때 처음에는 강주(降州)라고 일컬었다가 뒤에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이 자사(刺史)를 두었는데 목종(穆宗)이 폐지했다. 현종(顯宗)이 청주(淸州)에 소속시켰더니 고종(高宗)은 임연(林衍)의 고향이라 해서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縣令)을 두었었다. 원종(元宗)이 또 임연 때문에 지의녕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시켰더니 임연이 주벌을 당하자 낮추어서 진주 감무(鎭州監務)를 삼았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감(縣監)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京畿道)로 이속시켰더니 금상(今上) 초년에 복구했다.
【군명】 금물노(今勿奴)ㆍ만노(萬弩)ㆍ수지(首知)ㆍ신지(新知)ㆍ흑양(黑壤)ㆍ황양(黃壤)ㆍ강주(降州)ㆍ진주(鎭州)ㆍ창의(彰義)ㆍ의녕(義寧)ㆍ상산(常山).
【성씨】 본현 한(韓)ㆍ임(林)ㆍ송(宋)ㆍ심(沈)ㆍ유(庾)ㆍ며(㫆)ㆍ고(高)ㆍ양(梁)ㆍ하(河)ㆍ장(張).
【산천】 두타산(頭陁山)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보련산(寶連山)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성산(城山) 고을 서남쪽 7리에 있다. 길상산(吉祥山) 또 하나의 이름은 태령산(胎靈山)이다.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보련산과 서로 연했다. ○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에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萬明)이 임신한지 20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유신(庾信)이다. 태(胎)를 이 산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길상(吉祥)이라고 이름했다. 심곡산(深谷山)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대문령(大門嶺) 고을 서쪽 35리에 있으니 이곳이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다. 협탄령(脇呑嶺) 고을 서쪽 협탄소(脇呑所)에 있으니, 직산현(稷山縣) 경계이다. 주천(注川)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니, 청안현(淸安縣) 반탄(磻灘)으로 들어간다. 우천(牛川) 고을 북쪽 4리에 있으니 주천(注川)으로 들어간다.
【토산】 꿀[蜂蜜]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사향(麝香)ㆍ영양(羚羊)ㆍ산무애뱀[白花蛇].
【봉수】 소을산 봉수(所乙山烽燧) 고을 남쪽 7리에 있으니, 남쪽으로는 청주(淸州) 거차대산(巨次大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에 호응한다.
【누정】 연정(蓮亭) 고을 남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연꽃 사면에서 매우 맑은데, 조그만 누각 가운데 있어 그림자 비추네.” 하였다. 관풍루(觀風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현감(縣監) 이식(李埴)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장양역(長陽驛) 고을 북쪽 22리에 있다. 태랑역(台郞驛) 고을 남쪽 14리에 있다. 옛 이름은 퇴량(堆糧)인데, 그 터는 지금 역(驛) 남쪽 8리에 있다. 시태원(時泰院) 고을 안에 있다. 영제원(永濟院) 고을 동쪽 14리에 있다. 태랑원(台郞院) 태랑역(台郞驛) 곁에 있다. 광혜원(廣惠院) 고을 북쪽 38리에 있는데 죽산현(竹山縣) 경계이다. 원(院) 곁에 정자가 있으니 이는 충청도의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가 인장을 교대하던 곳이다. 협탄원(脇呑院) 고을 서쪽 34리에 있다.
【불우】 길상사(吉祥寺)ㆍ보적사(寶寂寺)ㆍ선적사(先寂寺)ㆍ편각사(片角寺) 모두 태령산(胎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성산(城山)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길상산(吉詳山)에 있다. 신라 때에 사우(詞宇)를 세우고 봄ㆍ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시행하다가 본조(本祖) 태조(太祖) 8년에 이르러 비로소 중지시키고 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금천향(金泉鄕) 고을 북쪽 39리에 있다. 천(泉)은 세속에서는 진(眞)으로 부른다. 향림부곡(香林部曲) 고을 부곡 23리에 있다. 협탄소(脇呑所) 고을 서쪽 36리에 있다. 신지(新池)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니 도우천(導牛川)이 흘러 들어가고 그 가운데 세 섬이 있다. 도당산성(都堂山城)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36척이다. 안에 우물 둘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흘산성(伊訖山城) 고을 서쪽 2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대모산성(大母山城)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6백 7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신라 김서현(金舒玄).
【인물】 고려 임희(林曦) 흥화군(興化君)에 봉했다. 혜종(惠宗)의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이다. 송언기(宋彦琦) 젊어서부터 문장에 능했다. 고종(高宗) 때 과거에 뽑혀 일찍이 몽고(蒙古)에 강화(講和)하는 사신으로 네 번이나 가서 변방이 조금 안정되었다. 벼슬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에 이르렀다. 임금이 다시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려 했더니 마침 송언기가 병이 들자 재상이 말하기를, “송언기가 태어난 것은 국가의 복이요, 죽는 것은 국가의 걱정입니다.” 하였다. 나이 43세로 죽었다. 송국첨(宋國瞻) 성품이 강직하고 악한 것을 원수같이 미워하였다. 문장을 잘하고 과거에 뽑히자 사관(史舘)에 들어갔다. 고종조(高宗朝) 때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형부 상서(刑部尙書)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우거】 본조 권도(權蹈).
【효자】 본조 최사흥(崔士興)ㆍ김덕숭(金德崇) 모두 효자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신증』 【열녀】 본조 말질비(末叱非) 수군(水軍) 정효창(鄭孝昌)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6년 동안 복을 입어 처음과 같이 슬퍼하고, 먼저 찬을 갖추어 시어머니께 바친 뒤에 남편의 묘에 제사지냈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제영】 산세주조위고읍(山勢周遭圍古邑) 이승소(李承召)의 시(詩)에, “홀로 책상에 기대어 잠에서 처음 깨니, 여기서 서울까지 가는데 단정(短亭) 몇인고. 산 형세 돌고 돌아 옛 고을 둘러싸고, 소나무 소리 우수수 성긴 창문에 통하네. 지금 곡식의 가격이 비싸 백성들 바야흐로 곤란한데 어느날 풍속 순후하여 밤에도 문 닫지 않을고. 국가의 은혜 갚지 못하고 부모 또한 늙었으니, 돌아갈 기약 아예 저버리지 말자.”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남변(南邊) 끝이 10리. 북변(北邊) 끝이 70리. 덕립(德立)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월촌(月村)ㆍ백곡(柏谷) 모두 북쪽으로 끝이 20리. 이곡(梨谷) 북쪽으로 끝이 25리. 만승(万升) 서북쪽으로 끝이 40리. 재동(齋洞)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산정(山井)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소답(所沓) 동쪽으로 끝이 25리. 만평(万坪) 동남쪽으로 끝이 30리. 문방(文方) 남쪽으로 끝이 25리. 백락(白洛) 남쪽으로 끝이 30리. 성암(聖巖) 서남쪽으로 끝이 30리. 행정(杏亭) 서쪽으로 끝이 30리. ○ 향림부곡(香林部曲)은 북쪽으로 23리, 협탄소(脇呑所)는 서북쪽으로 36리에 있다.
【토산】 은어.
【사원】 백원서원(百源書院) 선조 정유년에 세웠고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이종학(李種學) 개성(開城)조에 보임. 김덕숭(金德崇) 자는 자유(子悠), 호는 모암(慕庵), 본관은 강릉(江陵), 벼슬은 한산(韓山) 군수,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여(李畬) 자는 유추(有秋), 호는 송애(松崖)로 종학(種學)의 5대손이며, 벼슬은 교리(校理)이다. 이부(李阜) 자는 자릉(子陵), 호는 행원(杏園),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벼슬은 교리였는데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경종 임인년에 세웠고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최석정(崔錫鼎) 태묘에 보인다.
[주-D001] 단정(短亭) : 큰 길. 10리에 장정(長亭)을 두고 5리에 단정(短亭)을 둔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민수 (역) | 1969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교감표점
東至忠州界二十七里,南至淸州界二十八里,西至稷山縣界三十八里,北至京畿竹山縣界三十九里。距京都二百三十四里。
建置沿革
本高句麗今勿奴郡。一名萬弩郡,或云首知,或云新知。新羅改黑壤郡。黑,一作“黃”。高麗初稱降州,後改鎭州。成宗置刺史,穆宗罷之。顯宗屬淸州。高宗以林衍之鄕,陞彰義縣置令。元宗又以衍故,陞知義寧郡事,及衍誅,降爲鎭州監務。本朝太宗十三年,改今名,例爲縣監。
官員 縣監,訓導。各一人。
〔新增〕 燕山乙丑移屬京畿,今上初復舊。
郡名: 今勿奴,萬弩,首知,新知,黑壤,黃壤,降州,鎭州,彰義,義寧,常山。
姓氏: 本縣 韓,林,宋,沈,庾,旀,高,梁,河,張。
山川: 頭陀山。在縣東二十一里。
寶蓮山。在縣西二十里。
城山。在縣西南七里。
吉祥山。一名胎靈山。在縣西十五里。與寶蓮山相連。○新羅眞平王時,萬弩郡太守金舒玄妻萬明妊身二十月,生子曰庾信,藏胎於此山,因號吉祥。
深谷山。在縣北二十里。
大門嶺。在縣西三十五里。京畿安城郡界。
脅呑嶺。在縣西脅呑所。稷山縣界。
注川。在縣東十里。入淸安縣磻灘。
牛川。在縣北四里。入注川。
土産
蜂蜜,紫草,人參,麝香,羚羊,白花蛇。
烽燧
所乙山烽燧。在縣南七里。南應淸州巨次大山,北應忠州望夷山。
樓亭
蓮亭。在縣南。○李承召詩:“荷渠四面十分淸,小閣當中倒影明。”
觀風樓。在客館北。○縣監李埴建。
學校
鄕校。在縣南二里。
驛院
長楊驛。在縣北二十二里。
台郞驛。在縣南十四里。古名堆糧。其基在今驛南八里。
時泰院。在縣內。
永濟院。在縣東十四里。
台郞院。在台郞驛傍。
廣惠院。在縣北三十八里。竹山縣界。院傍有亭,乃忠淸道新舊觀察使交印之所。
脅呑院。在縣西三十四里。
佛宇
吉祥寺,寶寂寺,先寂寺,片角寺。俱在胎靈山。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城山。
金庾信祠。在吉祥山。新羅時,置祠宇,春秋降香祝行祭。高麗仍之。至本朝太祖八年,始停之,令所在官致祭。
厲壇。在縣北。
古跡
金泉鄕。在縣北三十九里。泉,俗作“眞”。
香林部曲。在縣北二十三里。
脅呑所。在縣西三十六里。
新池。在縣東十里。導牛川流入,中有三島。
都堂山城。在縣西三里。石築。周一千八百三十六尺。內有二井。今廢。
伊訖山城。在縣西二十四里。石築。周三千九百八十尺。內有一井。今廢。
大母山城。在縣東六里。石築。周二千六百七十尺。內有一井。今廢。
名宦
新羅 金舒玄。
人物
高麗 林曦。封興化君。惠宗義和王后之父。
宋彦琦。少能文。高宗時登第。嘗四使蒙古講和,邊境稍安。官至判將作監事。王欲復使蒙古,適彦琦遘疾,宰相曰:“宋之生,國之福;宋之亡,國之憂也。” 卒年四十三。
宋國瞻。性剛直,疾惡如讎。善屬文,登第直史館。高宗朝拜監察御史,歷刑部尙書、右散騎常侍。
寓居
本朝 權蹈。
孝子
本朝 崔士興,金德崇。俱以孝子旌門。
〔新增〕 烈女
本朝 末叱非。水軍鄭孝昌妻也。夫死,服喪六年,哀毁如初,先具饌奉姑,而後祭夫墓。今上十四年旌閭。
題詠
山勢周遭圍古邑。李承召詩:“獨憑烏几睡初醒,此去京華幾短亭?云云,松聲蕭瑟透疎欞。祗今糶貴民方困,何日風醇戶不扃?未報國恩親亦老,歸期且莫負丁寧。”
[주-D001] 旀 : 《世宗實錄ㆍ地理志》에는 “彌”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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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진천현
지리지 / 충청도 / 청주목 / 진천현
국역원문원본
국역
◎ 진천현(鎭川縣)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인데,【또는 만노군(萬弩郡)이라 한다. 】 신라가 흑양군(黑壤郡)으로 고쳤고,【흑(黑)이 또는 황(黃)으로도 되어 있다. 】 고려가 진주(鎭州)로 고쳐서 성종(成宗) 을미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을사에 자사를 혁파하였다. 현종(顯宗) 무오에 청주(淸州) 임내에 붙였더니, 고종(高宗) 46년 기미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켜 영(令)을 두었다. 충경왕(忠敬王) 10년 기사에 또 지의령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시켰다가, 임연(林衍)이 베임을 당하게 되매, 진주 감무(鎭州監務)로 강등하였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상산(常山)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 속향(屬鄕)이 1이니, 금천(金泉)이다.【천(泉)을 세속에서 잘못 진(眞)으로 일컫는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안(淸安)에 이르기 19리, 서쪽으로 직산(稷山)에 이르기 23리, 남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21리, 북쪽으로 죽산(竹山)에 이르기 28리이다.
호수가 5백 50호요, 인구가 1천 9백 23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58명, 진군(鎭軍)이 10명, 선군(船軍)이 2백 13명이다.
토성(土姓)이 10이니, 한(韓)·임(林)·송(宋)·심(沈)·유(庾)·미(彌)·고(高)·양(梁)·하(河)·장(張)이다.
땅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6천 5백 99결이요,【논이 4분의 3에 좀 넘는다. 】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참깨·팥이다. 토공(土貢)은 지초·꿀·밀[黃蠟]·대추·칠(漆)·잡깃[雜羽]·여우가죽·삵괭이가죽·표범가죽·족제비털[黃毛]이요, 약재(藥材)는 인삼·복신(茯神)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현의 서쪽 대삼동(大三洞)에 있고,【하품이다. 】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현의 서쪽 구사리(狗死里)에 있다.【하품이다. 】
역(驛)이 2이니, 장양(長楊)·퇴량(堆糧)이요,【세속에서 그릇 태량(台量), 또는 태랑(台郞)이라 한다. 】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남쪽 소이산(所伊山)이다.【남쪽으로 청주(淸州) 것대(巨叱大)에, 북쪽으로 충주(忠州) 망이성(望伊城)에 응한다. 】 태령산(胎靈山)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萬明)이 아이를 밴 지 20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고, 태(胎)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었는데, 화하여 신(神)이 되었으므로, 태령산이라 하였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두고 〈나라에서〉 봄·가을에 향(香)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행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무인(戊寅)에 이르러 비로소 국제(國祭)를 정지하고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속칭 태산(胎山)이라 한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30면
원문
◎鎭川縣: 本高句麗 今勿奴郡, 【一云萬弩郡】 新羅改名黑壤郡, 【黑一作黃】 高麗改爲鎭州。 成宗乙未, 置刺史, 穆宗乙巳, 罷刺史。 顯宗戊午, 屬淸州任內, 高宗四十六年己未, 以衛社功臣林衍內鄕, 陞爲彰義縣, 置令。 忠敬王十年己巳, 又陞爲知義寧郡事, 及衍誅死, 降爲鎭州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鎭川縣監, 別號常山。 【淳化所定】 屬鄕一, 金泉。 【泉俗訛稱眞】 四境, 東距淸安十九里, 西距稷山二十三里, 南距淸州二十一里, 北距竹山二十八里。 戶五百五十, 口一千九百二十三。 軍丁, 侍衛軍五十八, 鎭軍十, 船軍二百十三。 土姓十, 韓、林、宋、沈、庾、彌、高、梁、河、張。 厥土塉, 墾田六千五百九十九結。 【水田四分之三强】 土宜五穀, 粟、芝麻、小豆。 土貢, 芝草、蜂蜜、黃蠟、棗、漆、雜羽、狐皮、狸皮、豹皮、黃毛。 藥材, 人參、茯神。 磁器所一, 在縣西大三洞。 【下品】 陶器所一, 在縣西狗死里。 【下品】 驛二, 長楊、推粮。 俗訛爲台量, 又訛爲台郞。 烽火一處, 縣南所伊山、【南準淸州、巨叱大, 北準忠州望伊城。】 胎靈山。 【新羅眞平王時, 萬弩郡太守金舒玄之妻萬明姙身, 二十月生子, 名曰庾信, 藏胎於縣南十五里, 化爲神, 因號胎靈山。 自新羅時置祀宇, 春秋降香行祭, 高麗因而不革, 至本朝太宗戊寅, 始停國祭, 令所在官行祭, 俗稱胎山。】
【태백산사고본】 53책 14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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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양군(黑壤郡) --- 삼국사기 지리지
흑양군(黑壤郡)註 038황양군(黃壤郡)이라고도 쓴다. 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금물노군(今勿奴郡)註 039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40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진주(鎭州)註 041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도서현(都西縣)註 042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도서현(道西縣)註 043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44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도안현(道安縣)註 045이다.
음성현(陰城縣)註 046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잉홀현(仍忽縣)註 047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48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註) 038
흑양군(黑壤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郡)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4쪽; 정구복 외, 1997d, 237쪽). 도서현(都西縣)과 음성현(陰城縣) 등 2개 현을 거느렸다. 본문에서 보듯이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금물노군(今勿奴郡)을 흑양군으로 고쳤는데, 본서에는 이 기사 외에는 ‘흑양’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흑양군의 본래 명칭인 금물노군을 만노군(萬弩郡)으로도 불렀는데, 본서 열전1 김유신전에 따르면 서현(舒玄)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였으며 그곳에서 유신이 태어났는데, 그의 태(胎)를 묻은 산을 고려 시기에 태령산(胎靈山)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제사지1에는 만노군의 도서성(道西城)이 소사(小祀)의 제장으로 나온다. 흑양군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진천 대모산성(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 1996)과 도당산성(중원문화재연구원, 2005) 등이 있는데, 6세기 중반 이후 신라 서변의 요충지로 천안 방면으로 진출한 백제를 견제하고, 대중국교통로인 당항성과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다고 파악된다(서영일, 1999, 98~104쪽; 박성현, 2010, 259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청주목 진주(鎭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강주(降州)로 일컫다가 그 뒤 진주(鎭州)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성종(成宗) 14년(995)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자사를 없앴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청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고종(高宗) 46년(1259)에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키고 원종(元宗) 10년(1269)에 지의령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시켰다가, 임연이 처형된 후 다시 진주로 강등시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진천현에 따르면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에 진천(鎭川)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고 한다.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 1996, 『진천 대모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중원문화재연구원, 2005, 『진천 도당산성 지표·시굴조사보고서』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039
금물노군(今勿奴郡):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흑양군(黑壤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금물내(今勿內)’로 나오며, ‘만노(萬弩)’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청주목 진주(鎭州)조에는 ’수지(首知)‘나 ’신지(新知)‘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금물노의 ‘노(奴)’, 금물내의 ‘내(內)’, 만노의 ‘노(弩)’ 등은 흑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하며, 금물은 흑양의 ‘흑(黑)’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중세 국어의 ‘거믈’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499쪽). 진천 대모산성 및 그 북쪽의 송두리유적에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는데(최종택, 2016, 4~28쪽), 고구려가 진천 지역을 영유한 사실을 반영한다. 본서 열전1 김유신전에 따르면 서현(舒玄)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였으며 그곳에서 유신이 태어났다고 한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금물노에 상응하는 ‘금만노(今万奴)’명 통일신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고구려 계통 지명이 통일신라 시기에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최종택, 2016, 「湖西地域 高句麗遺蹟의 調査現況과 歷史的 性格」, 『百濟硏究』 63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040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041
진주(鎭州): 신라 흑양군(黑壤郡; 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흑양군에 대한 주석 참조.
註) 042
도서현(都西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흑양군(黑壤郡) 소속의 현(縣)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종전의 괴산군 도안면)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4쪽; 정구복 외, 1997d, 238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도서현(道西縣)을 음이 동일한 도서현으로 고쳤는데, 본서 제사지1에는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의 도서성(道西城)이 소사(小祀)의 제장(祭場)이었다고 한다. 본서 신라본기4 진흥왕 11년(550년)에 도살성(道薩城)이 나오는데, 도서현과 동일한 곳으로 증평 이성산성이나(양기석, 2001, 34쪽) 두타산성(민덕식, 1983, 9쪽) 등으로 비정된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 도살성,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金峴城: 연기 전의)을 서로 함락시키며 공방전을 벌였는데, 이를 틈타 신라가 두 성을 모두 공취하였다. 550년경 도살성과 금현성이 위치한 미호강 유역 일대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신라가 영유한 것이다. 청주 북이면의 낭비성(부연리산성: 중원문화재연구원, 2005)이나 증평군 도안면의 이성산성(충청전문대학 박물관, 1997)을 도서현에 대응하는 성곽으로 상정한다(박성현, 2010, 259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청주목 도안현(道安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도안’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청주목에 내속(來屬)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청안현(淸安縣: 현 괴산군 청안면)조에 따르면 고려시기에 청안에 감무를 두어 도안(道安)을 겸임하게 하다가, 조선 태종 5년(1405)에 두 고을이 백성이 적고 땅이 좁다 하여 합쳐서 ‘청안’으로 이름을 고치고 감무를 두었다가, 13년에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충청전문대학 박물관, 1997, 『증평 이성산성』
중원문화재연구원, 2005, 『청원 낭비성 지표조사보고서』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민덕식, 1983, 「고구려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양기석, 2001,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신라 서원소경 연구』, 서경
註) 043
도서현(道西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도서현(都西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도분(都盆)으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註) 044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045
도안현(道安縣): 신라 도서현(都西縣; 현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도서현에 대한 주석 참조.
註) 046
음성현(陰城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흑양군(黑壤郡) 소속의 현(縣)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4쪽; 정구복 외, 1997d, 238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잉홀현(仍忽縣)을 음성현으로 고쳤는데, 본서에는 이 기사 외에는 ‘음성’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음성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음성군 음성읍의 수정산성이 있다(충북산업대학교 박물관, 1997; 박성현, 2010, 259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충주목 음성현조에 따르면 고려 시기에 충주목에 내속(來屬)시키고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음성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太宗) 13년(1403)에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선조가 청안현(淸安縣: 현 괴산군 청안면)에 소속시켰다가 광해군이 복구하여 현으로 삼았고,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충북산업대학교 박물관, 1997, 『음성 수정산성 정밀지표조사보고서』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047
잉홀현(仍忽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음성현(陰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잉홀의 잉(仍)은 ‘내(乃)와 같은 발음으로 ‘음(陰)’의 훈을 새긴 ‘그늘’에 상응하는 표현이며, 잉홀의 ‘홀(忽)’은 음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503쪽).
註) 048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참조
■김유신의 가계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金庾信)註 001은 왕경(王京)註 002 사람이다.註 003 〔그의〕 12세조(世祖)註 004는 수로(首露)註 005인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註 006 〔수로는〕 후한(後漢)註 007 건무(建武)註 008 18년 임인(壬寅; A.D. 42년)에 구봉(龜峯)註 009에 올라가 가락(駕洛)註 010의 9촌(村)을註 011 바라보고,註 012 마침내 그곳에 나아가 나라를 새로 세우고註 013 이름을 가야(加耶)註 014라 하였다가 후에 금관국(金官國)註 015으로 고쳤다.註 016 그의 자손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9세손(世孫) 구해(仇亥)註 017에 이르렀는데, 〔구해는〕 혹은 구차휴(仇次休)註 018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부(曾祖父)가 된다.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註 019의 후예여서 성(姓)을 김(金)이라 한다.”라고 하였다.註 020 유신비(庾信碑)註 021에서도 또한 “헌원(軒轅)註 022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남가야(南加耶)註 023 시조(始祖)인 수로와 신라〔왕〕는 같은 성이었다.註 024
註) 001
김유신(金庾信): 생몰 595~673년. 883년(헌강왕 9)에 조성된 「중화삼년명(仲和三年銘) 금동사리기(金銅舍利記)」에 유신각간(裕神角干)이라 전한다.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친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유신의 동생이 흠순(欽純) 또는 흠춘(欽春)이고, 여동생으로 보희(寶姬)와 문희(文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문희[문명부인(文明夫人)]는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 김유신의 부인은 태종무열왕과 문희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이다. 김유신은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이찬 삼광(三光), 둘째 아들이 소판(蘇判) 원술(元述), 셋째 아들이 해간(海干) 원정(元貞), 넷째 아들이 대아찬 장이(長耳), 다섯째 아들이 대아찬 원망(元望)이다. 이들 가운데 지소부인의 소생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지소부인은 성덕왕 11년(712) 8월에 부인(夫人)에 책봉되었고, 후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생애를 마쳤다. 김유신의 서자(庶子)로서 아찬 군승(軍勝)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군승이 아찬의 관등까지만 승진한 것으로 보건대, 그의 어머니는 6두품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전덕재, 2013, 324~325쪽).
김유신이 673년(문무왕 13) 7월 1일에 79세로 사망하자,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냈는데, 김유신묘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7-10번지에 있다. 한편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으로부터 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김인문묘를 김유신묘로 비정하고(이병도, 1968; 1976, 719~731쪽; 이근직, 2012, 264~265쪽), 충효동에 위치한 김유신묘를 경덕왕릉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이근직, 2012, 383~384쪽).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이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하였다.
김유신은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함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커다란 공을 세웠기 때문에 통일신라에서 두 사람을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존경과 추앙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시대에 김부식은 본서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하)조 말미의 사론에서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智略)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義勇)이 있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 그런데 유신과 같은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칭송함이 지금[고려]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사대부가 알아주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조차도 능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김유신에 대해 극찬하였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김유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한말·일제식민지시기에 신채호는 김유신은 지혜와 용기를 지닌 명장이 아니요, 음흉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대공은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것에 있을 뿐이라고 평가 절하하였다. 한말·일제식민지시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우리의 주권이 위협받거나 또는 주권이 상실된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외세를 끌어들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박찬흥, 2018; 김영하, 1983).
본서의 열전 10권 가운데 김유신열전이 무려 3권을 차지한다. 김부식을 비롯한 본서의 찬자들은 고려 중기까지 김유신에 관한 전승자료가 많이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김유신을 전범(典範)으로 삼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김유신의 전기를 3권에 걸쳐 할애하여 자세하게 기술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의 찬자는 김장청(金長淸)이 지은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또는 『흥무대왕행록(興武大王行錄)』)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轉載)하거나 또는 일부 내용을 발췌 인용하여 김유신열전의 골격을 구성하고, 본서의 신라본기(新羅本紀)와 가락국기(駕洛國記), 개황력(開皇曆)[개황록(開皇錄)], 김유신비를 참조하여 김유신의 세계(世系)에 대해 서술하는 한편, 고기(古記)로 분류할 수 있는 전승자료에 전하는 김유신 영혼과 관련된 일화를 간략하게 축약하여 김유신열전에 보입(補入)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의 둘째 아들인 원술(元述), 김유신의 적손(嫡孫)인 윤중(允中), 윤중의 서손(庶孫)인 김암(金巖)에 관한 행적을 정리한 전승자료를 활용하여 이들의 전기(傳記)를 김유신열전의 말미에 부기(附記)한 것으로 확인된다(전덕재, 2020). 본서 김유신열전에 전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김유신의 연보를 간략하게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595년(진평왕 17)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였다.
15세(609년; 진평왕 31) 화랑(花郞)에 선출되었다.
35세(629년; 진평왕 51년) 낭비성전투(娘臂城戰鬪)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48세(642년; 선덕왕 11년) 압량(주)군주에 임명되었다.
50세(644년; 선덕왕 13년) 소판(蘇判) 관등을 수여받고,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53세(647년; 선덕왕 16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을 진압하고, 무산성(茂山城) 등을 공격한 백제군을 무찔렀다.
54세(648년; 진덕왕 2년) 642년에 빼앗긴 대야성(大耶城)을 탈환하고, 대야성군주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유골과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을 서로 교환하였다. 이 해에 상주행군총관(上州行軍摠管)에 임명되어 백제의 진례성(進禮城) 등을 공격하여 백제 군사 9천여 명을 목 베고, 600명을 사로잡았다.
55세(649년; 진덕왕 3년) 백제군과 도살성(道薩城)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61세(655년; 태종무열왕 2년)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과 혼인하였다. 도비천성(刀比川城)[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66세(660년; 태종무열왕 7년)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대장군으로서 신라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7~68세(661~662년; 문무왕 1~2년) 평양성 근처에 주둔한 당군에게 식량을 수송하여 공급하였다.
69세(663년; 문무왕 3년)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전하였고, 이 해 11월에 왕경으로 돌아온 후에 토지 500결을 사여받았다.
71세(665년; 문무왕 5) 당나라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000호에 봉하였다.
74세(668년; 문무왕 8년) 고구려 정벌을 위한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에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문무왕의 만류로 고구려정벌에 직접 참전하지 못하였다. 문무왕이 이 해 10월 22일에 태대각간(太大角干) 관등과 식읍 500호, 수레와 지팡이를 사여하였다.
79세(673년; 문무왕 13년) 7월 1일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이병도, 1968, 「김유신묘고」,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을유문화사
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이근직, 2012,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전덕재, 2013, 「신라 하대 득난 신분의 대두와 골품제의 변화」, 『신라문화』 42
전덕재, 2020,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 『사학연구』 139
박찬흥, 2018,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 『동양고전연구』 72
김영하, 1983, 「단재 신채호의 신라삼국통일론 -창강 김택영의 서술 논리와 비교하면-」, 『민족문화연구』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