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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 오산마을 열락정기

작성자달여울|작성시간26.06.20|조회수25 목록 댓글 0

說樂亭記

新槐舊延之地 上芼面 溫川里 烏山 一色峰巓 淸溪上 有亭巋然 楣之以說樂棠 是陜川李氏 世來藏修之所也 日其宗英 琪鉉 太鉉 潤鉉 訪余於龜山樵社 而言曰 我先祖 護軍公 諱洽 宣祖 辛丑年間 肇自畿驪簻軸于此 講修文學 啓迪後生 而斯亭創矣 次名揚矣 自是厥後有若 諱春載 德賢 德仁 復彦 祖聃 膺淳 淳聃 膺礼 號 鍾山 昌寅 號 重岩 性默 號 束村 溱鉉 號 仁溪 諸公 或 直幹而承緖 或旁抽而繼聲 時習之說 及人之樂 不墮乎 地而在乎 人作成人材 自不尠焉 鄕俗漸美 文風稍振庶 可爲西湖之鄒魯矣 噫 自島夷逞毒 鬼方騁佐以後 斯文之厄甚於焚坑經籍而芭籬 典禮而糞壤 黌堂全廢 絃誦無聞而斯亭 亦未免只有空墟 迺者 重岩 仁溪 二公 慨歎不己 曰累世說樂之所 竟至於斯爲昆者 何忍棄置而不念肯搆乎 遂謨諸諸族 乙亥春 復建數間茅棟 癸未春 更易之以瓦棟 因揭舊楣 欲圖其永保 然而尙無紀棠之文 不惟恐其先蹟之愈 久而愈泯 又頗有騷 人墨客 登眺者 亭無主人之譏子有垂惠 勿靳濡毫 余戲然歛袵 曰奉先孝思 誠然誠然 如余朽筆非其任 奈何辭之 固而請益勤 乃不獲己而忘陋復之 大抵 孝子慈孫之慕先也 不忍泯其跡 故一硯之舊也 而猶執而泣 一氈之微也 而或世守之 況累世藏修之地 肄業之所 又非一氈硯之可此則其有肯搆之責者 水不忍廢 地不忍荒 此說樂亭之所以復建也 顧今 彛倫斁塞 人道掃如辱先忘親者 滔滔而盛門之如此美擧 尙可以揭先徽 警俗態而諸先公 學術之正 擩染之深 亦可推而驗也 豈不善乎 亦不休乎 然凡爲諸公之後者 勿以此爲足更進一步 欲存諸公之跡 必傳諸公之心 欲傳諸公之心 必期於繼述諸公正學 習之熟 說之深而克致其及人之樂 一如諸先公之爲而永世勿替焉 則此棠肯搆之盡善盡美者也 斯亭也 將自與山高水長 同其壽矣 其敬念而勗之哉 用是爲張老之頌焉 繼之以詩曰

一色峰巓李氏亭 世來講學好門庭
說深胸抱培天性 樂及英材賴地靈
鞏固肇基先蔭厚 繼承肯構後昆馨
遊人欲識箇中趣 看取歲寒松栢靑


高宗九十九年 歲次 壬寅福月吉日 恩津 宋錫星 謹記

 

 

<번역>

 

열락정기(說樂亭記)

예전 연풍이었으나 새로 괴산이 된 땅, 온천리 오산(烏山) 일색봉(一色峰) 정상 아래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곳에 우뚝 선 정자가 있으니, 그 편액을 열락정(說樂亭)이라 하였다. 이는 합천 이씨가 대대로 학문을 닦고 수양해 온 곳이다.

어느 날 그 종중의 영재인 기현(琪鉉), 태현(太鉉), 윤현(潤鉉)이 구산초사(龜山樵社, 精菴 宋錫星翁은 앙성면 영죽리 상영죽(上永竹) 산막(山幕)에서 살았던 분이다. 구산초사는 宋翁이 자신이 사는 집을 堂號로 지은 이름이다. 樵舍로 읽을 수 읽고 땔나무나 해서 먹고 사는 시골의 초라한 집에 사는 노인이라는 겸사(謙辭)로 봐야 한다. 초수(樵叟), 초옹(樵翁)은 늙은 나뭇꾼이란 뜻이다. 山幕이란 마을이름에서 보듯이 먹고살기 어려운 산골에서 산전(山田)을 일구며 漢學을 공부했던 유학자라고 전한다. 인근 사람들은 송학자(宋學者)로 불렀다고 한다. )의 나를 찾아와 말하였다.

“우리 선조 호군공(護軍公) 휘 합(洽)께서 선조 신축년(1601)에 경기 여주(驪州)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셔서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계도하셨는데, 이 정자도 그때 창건되었습니다. 그 뒤로 춘재(春載), 덕현(德賢), 덕인(德仁), 복언(復彦), 조담(祖聃), 응순(膺淳), 순담(淳聃), 응례(膺礼), 종산(鍾山) 창인(昌寅), 중암(重岩) 성묵(性默), 속촌(束村) 진현(溱鉉), 인계(仁溪) 등의 여러 선조께서 계통을 이어받거나 방계에서 가문을 빛내며 학문을 계승하였습니다.

배움을 익히는 즐거움과 남을 즐겁게 하는 기쁨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음을 실천하여 인재를 길러낸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마을 풍속은 점차 아름다워지고 문풍(文風)도 진작되어, 장차 이 지역이 서호(西湖)의 추로(鄒魯), 곧 학문의 고장이 될 만하였습니다.

아아, 왜적이 독을 부리고(일제강점기), 오랑캐의 세력이 날뛰게 된 이후에는 유학(儒學)이 겪은 액운이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도 심하여, 경전은 울타리 재료가 되고 예법은 거름더미처럼 버려졌습니다. 학교는 완전히 폐지되고 글 읽는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이 정자 또한 폐허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에 중암과 인계 두 분이 개탄하며 말하기를,

‘대대로 학문을 강론하던 이곳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손된 자가 어찌 차마 버려두고 다시 세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여러 종친들과 의논하여 을해년 봄에 몇 칸의 초가를 다시 세웠고, 계미년 봄에는 기와집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그리고 옛 편액을 다시 걸어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정자를 기록한 글이 없으니, 선조의 자취가 세월과 함께 더욱 사라질까 두려웠고, 또한 시인 묵객들이 올라와 조망하면서도 ‘이 정자는 주인이 없다’고 할까 염려하여, 선생께서 붓을 아끼지 말고 글을 지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말하였습니다.

‘선조를 받드는 효심은 참으로 훌륭하나, 나의 쇠한 붓으로는 그 책임을 감당하기 어렵소.’

그러나 거듭 청하는 뜻이 더욱 간절하므로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고 졸렬함을 무릅쓰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효자와 자손이 선조를 사모함은 그 자취가 사라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된 벼루 하나라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작은 깔개 하나라도 대대로 간직합니다.

하물며 여러 세대에 걸쳐 학문을 닦고 수양하던 장소요, 공부하던 터전이겠습니까. 이는 벼루나 깔개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 후손으로서 이를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물은 버려둘 수 없고 땅은 황폐하게 둘 수 없기에 설락정이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에는 인륜이 무너지고 사람의 도리가 사라져 조상을 욕되게 하고 부모를 잊는 일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가문이 이처럼 아름다운 일을 행한 것은 선조의 빛나는 업적을 드러내고 세속의 폐단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며, 여러 선조들의 바른 학문과 깊은 교화 또한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선조의 후손들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선조의 자취를 보존하려면 선조의 마음을 전해야 하고, 선조의 마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바른 학문을 계승해야 합니다.

배움을 익힘을 더욱 깊게 하고, 즐거움을 더욱 충실히 하여 마침내 남을 이롭게 하는 기쁨에 이르러 여러 선조들처럼 행하고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정자를 다시 세운 뜻을 완전히 이루는 길일 것입니다.

이 설락정은 장차 산의 높음과 물의 흐름처럼 그 수명을 함께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후손들은 이를 깊이 새겨 힘쓰기를 바랍니다.

이에 장로들의 부탁에 응하여 찬송의 뜻을 담아 다음과 같은 시를 덧붙입니다.

 

일색봉 정상에 이씨의 정자 있으니

대대로 강학하던 아름다운 가문이라.

학문 깊어 천성을 길러내고

즐거움은 인재에게 미쳐 땅의 영험에 힘입었네.

터를 굳게 닦은 선조의 은덕 두텁고

계승하여 재건한 후손의 향기 또한 높도다.

이곳의 참된 뜻을 알고자 하는 나그네여,

세한(歲寒)의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보라.

 

고종 99년 임인년(1962) 복월(福月, 음력 10월) 길일에 은진 송석성(宋錫星) 삼가 쓰다.

 

<참고>

1)「열락(說樂)」은 『논어』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의 ‘열(說, 기쁨)’과 ‘락(樂, 즐거움)’에서 취한 이름이다.

2)「서호의 추로(西湖之鄒魯)」는 학문과 예의가 성한 고장을 뜻합니다. 서호(西湖)는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 서쪽 호수이며 풍광이 아름답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말이 있다.

3)「고종 99년」은 대한제국 고종의 즉위년(1864)을 기점으로 계산한 연호로, 1962년 임인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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