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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충주 연안이씨 쌍효각(忠州 延安李氏 雙孝閣)

작성자달여울|작성시간26.06.21|조회수27 목록 댓글 0

贈承政院 左承旨 李公 諱時熙 及 弟 將

仕郎公 諱時杰 卽 判中樞府事 文康公

諱石亨 七世孫 贈吏曹判書行司憲府掌

令 諱潭之 六世孫 贈司憲府 執義 行義

興縣監 諱麟瑞之孫 贈司僕寺正 諱欄之

子也 承旨公 兄弟 天姿謹厚 行誼純備

尤篤於誠孝 常侍親側 左右就養 一心同

力 洞屬靡懈 并居一室 怡愉湛樂 鄕鄰

豔服 正公以宿患積月 沉淹二公至誠侍

護 不脫衣帶晝夜 嘗冀以驗吉凶藥餌罔

效 漸至危篤 每中夜齋沐 稽顙禱天 請

以身代 及其屬纊兄弟相携 號天絶而復

甦 旣葬同處廬次 執衰 以禮 斯毁骨立 幾

不可支 母夫人每握手泣 慰二公黽勉承

奉 而朝夕 啜粥不食菜果 哭泣不輟 三年

如一日 親知來吊者 莫不寬涕嗟歎 後八

年母夫人猝患劇疾 頃刻昏窒 二公斷指

灌血 賴以回甦 而全廢食飲 唯思雉炙 時

値夏月 卒難得進 二公垂淚焦煎 忽有一

雄雉自何而墜 前二公抱而進之 病胃稍

開鄕里咸稱其孝 感所致及衰

兄弟憑尸

擗踊淚盡繼血屢致氣絕居憂之節一如

前喪未 嘗釋衰粥飮三載 二公時季 皆已

六十餘矣 過哀成疾服闋 未幾 二公相繼

而殁逮在 崇禎 再丁酉 士林二百八十餘

人齊聲呈文道伯狀聞有復戶之典 辛丑

因襤衣 啓達特蒙旌閭之 命棹契旣成乃

以士友僉議題其額 曰雙孝閭 丁丑又蒙

追贈之恩改板以揭而旌閭 歲久傾圮 王

子春 承旨公之玄孫 一源 克遵 其先人

遺戒謀諸宗人 鳩材營葺 五閱歲而始成

嗚呼 二公格天之孝 旣可以永垂無窮而

又其平日懿德善行無愧古人者甚多今

不盡述也

 

崇禎三丁巳七月 日 族孫 嘉善大夫

工曹參判兼 經筵官 元子右諭善 城輔

 

<교정ㆍ표점>

贈承政院左承旨李公諱時熙及弟將仕郎公諱時杰記

贈承政院左承旨李公諱時熙,及弟將仕郎公諱時杰,卽判中樞府事文康公諱石亨七世孫,贈吏曹判書行司憲府掌令諱潭之六世孫,贈司憲府執義行義興縣監諱麟瑞之孫,贈司僕寺正諱欄之子也。

承旨公兄弟,天姿謹厚,行誼純備,尤篤於誠孝。常侍親側,左右就養,一心同力,僮僕靡懈。并居一室,怡愉湛樂,鄕鄰豔服。

正公以宿患積月沉淹,二公至誠侍護,不脫衣帶,晝夜嘗冀,以驗吉凶,藥餌罔效,漸至危篤。每中夜齋沐,稽顙禱天,請以身代。

及其屬纊,兄弟相携,號天絕而復甦。旣葬,同處廬次,執衰以禮,柴毁骨立,幾不可支。母夫人每握手泣慰二公,黽勉承奉,而朝夕啜粥,不食菜果,哭泣不輟,三年如一日。親知來吊者,莫不揮涕嗟歎。

後八年,母夫人猝患劇疾,頃刻昏窒。二公斷指灌血,賴以回甦,而全廢食飮,惟思雉炙。時値夏月,卒難得進。二公垂淚焦煎,忽有一雄雉,自何而墜前。二公抱而進之,病勢稍開,鄕里咸稱其孝,感所致。

及喪,兄弟憑尸擗踊,淚盡繼血,屢致氣絕。居憂之節,一如前喪,未嘗釋衰,粥飮三載。二公時皆已六十餘矣,過哀成疾。服闋未幾,二公相繼而歿。

逮在崇禎再丁酉,士林二百八十餘人齊聲呈文,道伯狀聞,有復戶之典。辛丑,因褒衣啓達,特蒙旌閭之命。鄕契旣成,乃以士友僉議,題其額曰「雙孝閭」。丁丑,又蒙追贈之恩,改板以揭。而旌閭歲久傾圮。

王子春,承旨公之玄孫。一源克遵其先人遺戒,謀諸宗人,鳩材營葺,五閱歲而始成。

嗚呼!二公格天之孝,旣可以永垂無窮,而又其平日懿德善行,無愧古人者甚多,今不盡述也。

崇禎三丁巳七月日,族孫嘉善大夫工曹參判兼經筵官元子右諭善城輔

 

<번역>

증(贈) 승정원 좌승지 이공 휘 시희와 아우 장사랑공 휘 시걸은 곧 판중추부사 문강공 휘 석형의 7세손이며, 증 이조판서·사헌부 장령을 지낸 휘 담의 6세손이고, 증 사헌부 집의·의흥현감을 지낸 휘 인서의 손자이며, 증 사복시정 휘 난의 아들이다.

승지공 형제는 천성이 근엄하고 후덕하였으며 행실과 의리가 순수하고 완전하였다.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항상 부모 곁에서 모시며 좌우에서 봉양하였고,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다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방에 함께 살면서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아버지 정공(正公)이 오래된 병환으로 여러 달 동안 누워 계시자 두 형제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 밤낮으로 옷과 띠도 풀지 않았으며, 길흉을 점쳐가며 온갖 약을 써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매양 한밤중에 목욕재계하고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빌며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마침내 임종에 이르자 형제는 서로 붙들고 하늘을 향해 통곡하다가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나곤 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에는 함께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상복을 입고 예에 따라 상례를 행하였다. 슬픔이 너무 깊어 몸이 수척해져 뼈만 앙상하게 남아 거의 지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손을 잡고 울면서 두 아들에게 몸을 돌보라고 타일렀으나, 형제는 아침저녁으로 죽만 마실 뿐 채소나 과일도 먹지 않았고 곡을 그치지 않았다. 삼년상을 하루같이 지냈으므로 조문객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그 뒤 8년 후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한 병에 걸려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두 형제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넣어 드렸고, 다행히 정신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음식을 전혀 드시지 못하다가 오직 꿩고기만 생각하였다. 때는 한여름이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두 형제는 눈물을 흘리며 애태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수꿩 한 마리가 떨어졌다. 형제는 이를 안고 들어가 어머니께 올렸고, 어머니의 식욕이 조금 회복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는 관 곁에 기대어 통곡하였고, 눈물이 다하자 피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며 여러 차례 기절하였다. 상중에 지낸 절도는 아버지 상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삼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죽만 먹으며 지냈다. 그때 형제는 이미 모두 예순이 넘은 나이였는데도 지나친 슬픔으로 병을 얻었다. 상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형제는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숭정(崇禎) 기원 후 정유년(丁酉)에 이르러 선비 280여 명이 연명하여 감사에게 보고하니, 나라에서 복호(復戶)의 은전을 내렸다. 신축년에는 다시 아뢰어 특별히 정려문(旌閭)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정려문이 완성되자 향중 선비들이 의논하여 그 현판에 「쌍효려(雙孝閭)」라 이름하였다. 또 정축년에는 추증의 은전까지 내려 현판을 새로 만들어 걸게 되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 정려문이 기울어 허물어지자, 왕자춘의 아들 일원(一源) 곧 승지공의 현손이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종족들과 의논하였다. 재목을 모으고 중수 공사를 벌여 5년 만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아아! 두 공의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은 영원히 후세에 전해질 것이며, 또한 평소의 아름다운 덕행도 옛사람들에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 훌륭한 일이 매우 많으나 여기서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숭정기원 후 정사년(丁巳) 7월

족손(族孫)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경연관 원자우유선(元子右諭善) 성보(城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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