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집(耳溪集)은 홍양호(洪良浩, 1724 ~ 1802)의 문집으로 1843년(헌종 9)에 홍양호의 손자 홍경모(洪敬謨)가 간행하였다. 홍차기에 관련한 전기는 여러 곳에서 보인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나 청구야담(靑邱野談)에도 나온다.
洪孝子次奇傳
童子洪次奇。忠州老隱洞人也。方在腹。父寅輔坐殺人繫獄。及乳數月。母崔氏將訟寃詣京師。次奇養於仲父。父呼仲父。不知爲寅輔子也。甫數歲。與羣兒戲。忽驚啼不食。姆問其故不應。良久乃止。如是者月三。家人恠之。後人從邑中來。證其日。卽州官訊囚日也。a241_316b聞者莫不異之。家人見其然。恐傷其心。愈諱其父事。至十歲。父念年老無出獄期。恐一朝命盡。不得見子面。乃使家人告以實。携至獄門。次奇抱父大哭。遂居邑中不去。負薪易米以供父。居數年。崔氏屢上言。不報。客歿於京。旣返葬。次奇哭辭父曰。母訟父寃。未遂飮恨而歿。又無長成子。兒雖幼。非兒去。誰復脫父死者。父憐其弱不許。次奇脫身潛行。遂徒步入京。撞申聞皷。事下按使。又不報。次奇卽留京不歸。明年夏。會大旱。 上諭中外理重囚。次奇伏闕下。遇公卿赴朝者。輒泣訴父寃。凡十餘日。觀者無不感動。往往持飯a241_316c饋之。或梳其頭。以去蝨。判刑部尹東暹。因議囚。入對白其狀。 上爲之惻然。勅按臣詳閱以聞。按使以獄老事眩奏。置可否間。 上特命貸死。放嶺南。始命按臣也。次奇冒盛熱。走三百里詣使司。號泣丏父命。及具奏。次奇又疾行先驛。未抵京百里。疾作。從者勸少留。次奇不可。擔到邸。力疾復伏闕。痘瘡大發四日已不省。時爲夢語曰。吾父活耶。及赦下。傍人呼告之。次奇驚覺曰。信耶。豈寬我也。乃讀示判辭。次奇卽開眼視。擧手祝天者三。躍然起而舞曰。父活矣父活矣。遂仆不能言。是夜次奇竟死。時年十四。遠近聞者。莫不爲之流涕。
外史氏曰。次奇吾宗人之子也。以藐然五尺之童。挺身叫閽。繭足數百里。力竭而病作。身殞而父活。何其壯也。生於父入獄之年。死於父出獄之日。天之生之。殆不偶然。古之殉於孝者。未有若是其烈也。悲夫。若其母之賢。宜乎生是子也。昔童汪踦死於齊難。孔子曰。能執干戈。以衛社稷。可勿殤也。次奇亦云。
<번역>
홍효자 차기전(洪孝子次奇傳)
홍차기는 충주 노은동 사람이다.
그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 홍인보(洪寅輔)가 살인죄로 옥에 갇혔다. 차기가 젖먹이였을 무렵 어머니 최씨는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차기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그는 작은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인보의 아들인 줄 몰랐다.
몇 살 되지 않았을 때 여러 아이들과 놀다가 갑자기 놀란 듯 울며 음식을 먹지 않는 일이 있었다. 유모가 까닭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가 한참 뒤에야 진정되곤 했다. 이런 일이 한 달에 세 번 정도 있었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뒤에 고을에서 온 사람이 날짜를 대조해 보니 모두 관아에서 그의 아버지를 심문하던 날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가족들은 아이가 상심할까 염려하여 더욱 아버지 이야기를 숨겼다. 그런데 차기가 열 살이 되자 아버지는 자신이 늙어 언제 출옥할지 모르고, 혹시 죽기 전에 아들을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가족을 시켜 사실을 알려 주게 하고 차기를 옥문으로 데려오게 했다.
차기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크게 울었다. 그 뒤로는 고을을 떠나지 않고 나무를 해다 팔아 쌀을 마련하여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몇 해 동안 어머니 최씨는 여러 차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서울 객지에서 죽었고, 장사를 치른 뒤 돌아왔다.
차기는 아버지에게 울며 작별을 고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려 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한을 품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장성한 자식도 없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지만 제가 아니면 누가 다시 아버지를 죽음에서 구해 드리겠습니까?”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불쌍히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기는 몰래 집을 나와 걸어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도착해 신문고를 쳤다. 사건은 관찰사에게 내려졌으나 다시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다. 차기는 그대로 서울에 머물렀다.
이듬해 여름 큰 가뭄이 들자 임금은 전국의 중죄수들을 다시 심리하라고 명하였다. 차기는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조정 대신들이 조회에 들어갈 때마다 울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열흘이 넘도록 계속하니 보는 사람마다 감동하였다. 어떤 이는 밥을 가져다주었고, 어떤 이는 그의 머리를 빗겨 주며 이를 잡아 주었다.
형조판서 윤동섬이 죄수 문제를 의논하다가 임금에게 차기의 사정을 아뢰었다. 임금은 크게 측은히 여기며 관찰사에게 사건을 자세히 조사해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관찰사는 사건이 오래되어 진상이 분명치 않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임금은 특별히 사형을 면하게 하고 영남 지방으로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관찰사에게 재조사를 명했을 때 차기는 무더운 여름날 삼백 리 길을 달려가 관찰사 관아에 이르러 통곡하며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보고가 이루어지자 그는 다시 급히 역참 길을 따라 서울로 향했다.
서울까지 백 리쯤 남겨 두었을 때 병이 났다. 동행한 사람들이 잠시 쉬어 가자고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들려 서울 숙소에 도착하였고, 병든 몸으로 다시 대궐 앞에 엎드렸다.
그때 천연두가 크게 발병하여 나흘 만에 의식을 잃었다. 혼수상태에서도
“우리 아버지가 살아나셨는가?”
라고 잠꼬대를 하였다.
마침 사면 명령이 내려오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알려 주었다. 차기는 깜짝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저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까?”
사면 판결문을 읽어 주자 그는 눈을 뜨고 바라보며 세 번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춤추며 외쳤다.
“아버지가 사셨다! 아버지가 사셨다!”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날 밤 차기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외사씨(外史氏, 外史氏曰이란 저자의 논평을 말한다.)가 말하였다.
차기는 우리 종족 사람의 아들이다. 겨우 어린 소년의 몸으로 궁궐 문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수백 리 길을 걸어 다니다가 기력이 다해 병들었으며, 자신은 죽고 아버지는 살려 냈다. 그 기상이 얼마나 장한가.
그는 아버지가 옥에 갇힌 해에 태어났고, 아버지가 석방된 날에 죽었다. 하늘이 그를 세상에 내보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옛날 효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처럼 지극하고 열렬한 경우는 드물다.
또한 그의 어머니의 어진 덕을 생각하면 이런 아들이 태어난 것도 당연하다.
옛날 제나라의 난리 때 죽은 동자 왕기(汪踦)에 대해 공자는
“능히 창과 방패를 잡고 나라를 지켰으니 어린 나이에 죽었다고 해서 요절이라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차기 또한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