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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과장암구택(過丈巖舊宅)

작성자달여울|작성시간26.06.23|조회수33 목록 댓글 0

 

과장암구택(過丈巖1)舊宅)---장암선생의 옛집을 지나며   

 

뇌연집(雷淵集) 5권 남유용(南有容) 저     

 

草䟽2)三登3)渡海舟4)      초소삼등도해주

斯人5)眞不負6)春秋7)      사인진불부춘추

平生憂樂誰同志                평생우락수동지

牛渚8)丹巖9)亦近洲10)    우저단암역근주   

 

 

閔忠文11),文忠12)二公別業13)在牛灣14)及丹巖15)   민충문,문충이공별업재우만급단암  

 

상소를 올려 세 번이나 유배를 가니

이 분은 진실로 대의(大義)를 저버린 분이 아니네 

일평생 고락을 누구와 같이 했는가 

우저 단암이 가까이 있었네   

 

민충문(민진원), 민문충(민정중) 두 분 별저(別邸)가 우만(牛灣), 단암(丹巖)에 있다.           

 

※풀이)   

*丈巖 1) : 정호(鄭澔, 1648(인조 26) ~ 1736(영조  12))를 말하며 부친은 정경연(鄭慶演)임. 장암 정호의 사당은 중앙탑면 창동리에 있다.

松江 鄭澈이 高祖父.

*草䟽 2) : 초(草)를 소(䟽)하다, 상소를 올리다.

*三登 3) : ‘세 번 오르다’이나 ‘세 차례’로 해석함.

登은 舟를 수식한다.

丈巖 鄭澔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경성에 유배되었고 1710년 흥해. 갑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721년 신임사화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渡海舟 4) : ‘배로 바다를 건너다’이나 ‘유배(流配)가다’로 해석함.

*斯人  5) : 이 분은. 

*不負 6) : 저버리지 않는다. 

*春秋 7) :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미하나 대의(大義)로 해석.

*牛渚 8) : 우저(牛渚)는 여주시 우만동 ‘우만(牛灣)’을 말함. 

*丹巖 9) : 여주시 단현동 단암(丹巖) 즉 부라우를 말함. ‘부라우’는 <불바우>의 우리말 지명임. 붉은바우 --->불바우 ---> 불아우(ㅂ탈락)---> 부라우로 변천. 

 

충주시 대소원면 완오리에 <부루터>란 지명이 있다.

○부루터[불방리(佛坊里)] 《 마을》  검은들 동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 미륵을 모셨던 곳이라 함.

--- 중원향토기(2)  p304 ---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 이안면(利安面)에는 불방리(佛方里)로 나온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 이류면(利柳面) 완오리(完五里)에는 이안면 불방리(佛坊里)로 나온다.

부루터는 <불우(佛宇)터>에서 온 말로 봐야 한다. <佛宇>는 절집을 말한다. 

 

수안보면 온천리에 <노부란>이란 지명이 있다. 오산마을에서 수안보 방향으로 조금 가면 있는데 도로명주소는 <노포란길>로 되어 있다. 노포(老鋪)는 오래전통을 이어온 가게란 뜻이나 일본에서 온 한자로 한국에서는 쓰지 않았던 말이다. 노포(老鋪)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조선시대 가게를 뜻하던 한자는 假家, 廛이 있었다. 

○노부란(鷺孵卵, 論坪)《 마을》오미 개울 건너에 있는 마을. 이 마을 洪承根氏의 밭가운데 원터가 있음. 많은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출토됨.

--- 중원향토기(2)  p243---

원(院)이 있었으니 노불안(老佛安), 노불원(老佛院)으로 추정되나 관련자료는 찾을 수 없다.

 

*近洲 10) : 가까운 물가 즉 경기도 여주시를 말함.

*閔忠文 11) : 민진원(閔鎭遠)의 시호임.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라버니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임. 

민진원(閔鎭遠)은 민정중(閔鼎重)의 조카임.

*文忠 12) : 민정중 (閔鼎重]의 시호임. 호는 노봉(老峯)임.송시열(宋時烈)의 문인임.

*別業  13) : 별저(別邸)를 말함.

*牛灣  14) : 여주시 우만동 우만(牛灣) 즉 <소만이>를 말하며 마을 앞으로 남한강 물이 소(沼)가 졌으므로 ‘소만이 또는 우만이’라고 하였다 함.

*丹巖 15) : 여주시 단현동에 있는 바위이며 진원(閔鎭遠)의 호임.       

 

 ※민유중(閔維重)은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며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되는데 외손자가 이재(李縡)입니다. 뇌연집(雷淵集)을 지은 남유용(南容有)은 이재(李縡)의 문인입니다. 그리고 장암 정호(鄭澔)와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은 교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들인데 이들의 사승(師承)관계를 살피는 것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아버지: 민광훈(閔光勳)

큰형: 민시중(閔蓍重), 작은형: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민유중 자녀: 사남 민진원(閔鎭遠), 차녀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閔維重은 고종의 비(妃)인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아내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6대조가 된다. 여흥부대부인의 시어머니 민씨는 閔鼎重의 5세손으로 여흥부대부인과 14촌간이다.

 

 

 ※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호(鄭澔) 관련기사      

 

영조 42권, 12년(1736 병진 / 청 건륭(乾隆) 1년) 10월 15일(을해) 1번째기사    영부사 정호의 졸기   

 

영부사 정호(鄭澔)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유하기를, “선조(先朝) 때 기사(耆社)에 동참했던 사람이 홀로 장수(長壽)를 누렸었는데, 지금 졸서했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슬프기 그지없다. 예장(禮葬)을 내리고 3년 동안 녹봉(祿俸)을 줄 것이며, 그의 아들 정희하(鄭羲河)는 복제(服制)가 끝나기를 기다려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호는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인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몸가짐이 강직하고 방정하였는데, 언론이 과격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위가 삼사(三事)에 이르렀으나, 집에서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 고장에 살면서 청신(淸愼)하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           

 

정조 42권, 19년(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4월 6일(병술) 2번째기사    호서 유생 민혁수 등이 정호를 충주의 누암 서원에 배향토록 허락할 것을 상소하다   

 

호서(湖西)의 유생 민혁수(閔赫洙)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정호(鄭澔)는 바로 고(故) 상신(相臣)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현손(玄孫)으로서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송시열(宋時烈)의 문인입니다. 가학(家學)에 이미 연원(淵源)이 있을 뿐더러 사승(師承) 또한 학문의 요체를 이어받아 행동이 독실했고 조예 역시 정밀하고 심오하였습니다.   아, 선정신 송시열은 평생토록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일종의 음험하고 사악한 기운이 그 사이에서 싹터 창을 거꾸로 잡고 정도(正道)를 엄폐하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성인에게 모욕을 가한 결과 세도(世道)가 혼란스럽게 되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호만은 외롭고 위태로운 단 하나의 몸으로 성내어 부르짖으며 찢어발기려는 세력과 맞서면서 한 번도 화복(禍福) 때문에 동요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진퇴(進退) 때문에 혹 태도를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임 사화(辛壬士禍)를 당하여 흉악한 패거리들이 무함하면서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자, 정호는 팔십 노인으로 시골집에 물러가 있다가 병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흉악한 무리들이 환첩(䆠妾)과 결탁하여 국본(國本)을 동요시키고 있는 정상을 극진하게 진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흉악한 무리들의 모함을 받아 서쪽 변경과 남쪽 섬에서 3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지면서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여 입조(入朝)하게 되자 맨 먼저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고 나라의 적을 성토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연석(筵席)에서 아뢰거나 차자를 올려 논할 때에 간절한 정성을 바치면서 끝내는 거취(去就)를 결정짓는 데에까지 이르렀던 것인데, 대의(大義)를 밝히고 종사(宗社)를 보위하는 방도를 모두 강구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문득 진달하며 다하지 않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세도(世道)가 비록 낮아졌어도 태반의 사류(士類)가 이 의리야말로 하늘과 땅을 지탱시켜 주고 만고토록 행해져야 할 것으로서 추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정호의 힘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문(斯文)을 주장하며 세도를 구해 준 공로는 실로 선정(先正)이 돌아가신 뒤로 오직 이 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올려 높이 받드는 일이 한 세상의 공의(公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비록 따로 사당을 새로 세워 추모하는 정성을 길이 표한다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또한 장차 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충주(忠州)의 누암서원(樓巖書院)이야말로 문정공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인 동시에 정호가 노년을 보낸 곳인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정호가 죽은 이듬해인 정사년에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면서 따로 사당을 건립할 것 없이 여기에 배향(配享)하자고 하였는데, 스승과 제자를 함께 한 자리에 모시게 되면 마치 마루에 올라가 수업을 받는 것처럼 될 것이니 법에 비추어 보아도 구애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호는 문충공(文忠公) 신(臣) 민정중(閔鼎重)과 문순공(文純公) 신 권상하(權尙夏)와 더불어 모두 문정공의 고제(高弟)로서 세상에서는 정자(程子) 문하의 양시(楊時)·사양좌(謝良佐)와 주자(朱子) 문하의 황간(黃幹)·채침(蔡沈)에 비겼습니다. 그런데 민정중은 서원이 건립된 초기에 때를 같이하여 배향되었고, 권상하 역시 지난 을사년에 이미 상소로 청하여 제배(躋配)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정호를 함께 배향하는 것이야말로 어찌 더욱 순서로 볼 때 당연히 행해야 할 의전(儀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윤허를 내리시어 국가에서 덕있는 이를 높이고 어진 이를 본받게 하는 의리를 드러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의 사연을 해조(該曹)에 내려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충청도 유생 민혁수 등이 상소한 것을 보건대, 문경공(文敬公)정호를 선정신 문정공송시열을 향사(享祀)하는 누암 서원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정호는 강직하고 방정한 자질과 정대한 학문의 소유자로서 선정(先正)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종신토록 준수한 것은 오직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요결(要訣)인 하나의 직(直)자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문(斯文)이 그 덕택에 더욱 중해지고 의리가 천명(闡明)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선조(先朝)께서 유시를 내려 태산 북두(泰山北斗)에 비유하시고 백발 단심(白髮丹心)이라고 표창하셨으며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융숭하게 추장(推奬)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누암 서원으로 말하면 선정을 제사 드리는 곳일 뿐더러 또 정호가 옛날 살던 마을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정호의 학문과 사업으로 볼 때 이 서원에 배향하는 것이 타당한데, 이는 공의가 똑같이 일치하고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근거로 삼을 만한 최근의 사례도 있는 일입니다. 배향하는 한 조목을 특별히 허락하여 시행케 하는 것이야말로 어진 이를 본받게 하는 성전(盛典)을 빛내는 일이 될 듯싶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추배(追配)하는 의전(儀典)은 어렵게 여겨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을 이 서원에 함께 제사지내게 하는 일에 대해서 백 사람이 비록 어렵게 여긴다 하더라도 이 사람만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고(故) 상(相) 민정중과 고 유신(儒臣) 권상하를 함께 배향하고 추후에 배향할 당시에 이 대신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미처 함께 행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함께 제사지내자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야말로 사림(士林)의 흠이 될 뿐만이 아니라 조정의 궐전(闕典)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청한 것도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할 것이니,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토록 하라. 그리고 추배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본사(本祠)에서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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