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父母經 - 086. 일본에 선교사 파견 참아버님께서는 1958년 5월 30일 새벽 충남 계룡산 갑사 뒤뜰 소나무 숲에서 최봉춘씨에게 두 시간 가까이 말씀을 하신 뒤 일본 선교사 파견을 결정하셨다. 누구보다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로지 일본을 구하시기 위해서였다. 최 선교사는 벅찬 설렘과 감회를 안고 1958년 7월 15일 부산을 출발하여 몇 곳을 거쳐 히로시마 구레항으로 항해 중 일본 당국에 불법 입국자로 잡혔다. 오무라수용소 감금, 외부병원 입원, 병원 탈출 끝에 도쿄 도착 후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던 중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도쿄교회‘ 이름으로 전단지를 돌리며 하나 둘 새 식구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9년 10월 2일 신주쿠구 도쓰카초 니초메(新宿區 戶塚町 二丁目) 85번지에서 가진 첫 예배를 출발로 일본 협회가 발족되었던 것이다. 6 일본과 아버님은 일대일로 하면 원수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를 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벌거벗고 있고 굶고 있으면 그를 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일본에 최봉춘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일본 전체가 반대하고 한국 자체가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수십년 후에는 그것이 한국을 위하고 일본을 위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양국 국민이 손을 모아 감사하는 날이 틀림없이 올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본에 선교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대한 탄압이 최절정에 있을 때 일본 선교사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한 사람의 일꾼도 아쉬운 그때 눈물을 머금고 일본에 사람을 보내는 데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룬 업적은 일본 역사상에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와서 한국은 아버님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을 사랑합니다. 아버님도 일본의 역사상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했습니다. 일본 사람 이상으로 일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일본이라면 일본 사람 이상의 심정으로 일본을 사랑해야 됩니다. 7 일본이 내 원수이지만 내가 일본을 어느 나라보다도 사랑함으로써 앞으로 아시아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 수 있는 상대적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주체국 앞에 상대적 국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에 그런 사명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본을 구하기 위해 빚을 얻어서 선교사를 보낸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을 위해서였습니다. 8 우리가 일본에 선교사업을 개척한 때가 1958년입니다. 그때는 자유당 정권하여서 한일국교 정상화를 극렬히 반대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삼고 소련과 중국이 후원하는 입장에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에 이 난국을 해결할 하나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일본을 뚫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활동을 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일 간에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치하에 있는 한 국민으로서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이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9 우리의 뜻이 세계적인 뜻이라면 이웃 국가 일본에도 뜻을 펼쳐야 될 책임이 있고, 세계 여러 나라에도 뜻을 펼쳐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수난길을 거치면서도 세계에 선교사들을 보내야 합니다. 세계적인 책임을 하는 데에도 먹고 남거나 쓰고 남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을 개척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때 빚을 얻어서 선고사를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를 떠나보낼 때 ‘너는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을 구해야 된다.’라고 하면서 보냈습니다. 죽더라도 가야 한다고 내몰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자신의 생활도 영위하기 어려운데 빚을 얻어서 그런 일을 하니 이해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뜻의 길은 좋을 때 평탄하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10 아버님이 일본으로 떠나는 선교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잠을 안 자고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너를 위해 정성들일 것이다. 죽더라도 임무를 다할 때까지는 돌아오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가 부산을 통해 일본에 가자 붙잡혀서 히로시마에 있는 요시우라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 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한국을 송환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한테 표를 받아 들고 생명을 걸고 갔던 사나이가 죽으면 죽었지 돌아올 수는 없었습니다. 송환되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가던 중 열차에서 뛰어내리려니 기차 속도가 빠르고 굴이 많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송환되기 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송환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금식을 했습니다. 일주일, 열흘을 금식하는 바람에 열병 같은 것을 앓게 되어 의사로부터 심장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전도를 해서 일본 통일교회 용사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11 아버님이 일본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천운은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을 넘어선 자리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천운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하는 일을 하려니 항상 죽음이 엇갈리고 고통이 엇갈리고 핍박이 엇갈리는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남 좋은 대로 한다면 무슨 핍박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는 상충입니다. 가로막을 때에는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12 일본에 첫 번 선교사를 보낼 때 내가 부탁한 말은 ‘누구보다도 일본 사람을 사랑해라. 눈물 흘리면서도, 몰리면서도 사랑해라. 쫓기면서도 사랑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증거할 수 있는 사실을 남겨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일본 민족이 그 나라를 위해 충성한 이상으로 그 기준을 뚫고 올라가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은 머리 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수용소에 끌려 들어가서도 도망쳐 나와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현재 제도하에서는 나쁘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일본 민족이 두고두고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반대하는 입장에서 나쁘게 평하고 조건을 들고 반박했을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지남에 따라 남긴 사연은 앞으로 올 수많은 후손들을 눈물과 더불어 품을 수 있는 동기의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
| 真の父母経 - 086. 日本に宣教師派遣 真のお父様は、一九五八年五月三十日の早朝、忠南の鶏龍山・甲寺の裏庭にある松林で、崔奉春(チェボンチュン:日本名、西川勝)に二時間近くみ言を語られたのち、日本宣教師として派遣することを決定された。誰よりも日本を愛する心で、ただ日本を救うために、そのようにされたのだった。崔宣教師は、抑え切れない胸の高鳴りと感慨を抱いて、一九五八年七月十五日、釜山を出発し、いくつかの場所を経て広島の呉港に向かう航海の途中で、日本の当局に不法入国者として捕らえられ、収容所への拘束、病院への入院、病院脱出ののちに東京に到着し、その後、み言を伝えた。そうして、一九五九年十月二日、新宿区戸塚町二丁目八五番地で行われた最初の礼拝をもって、日本教会が出発したのである。 6 日本とお父様は、一対一で見れば怨讐です。日本統治下で、たくさんの拷問を受けました。しかし、神様は怨讐を打てとは命令されません。怨讐に着る物がなく、食べる物がなければ、「その人のために施しなさい」と言われるのです。ですから、お父様は、日本に崔奉春を宣教師として送りました。日本全体が反対し、韓国自体が反対する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しかし、お父様は、数十年後にはそれが韓国のためになり、日本のためになる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両国の国民が手を合わせて感謝する日が必ず来る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いかなることがあっても日本に宣教師を送ったのです。 統一教会に対する弾圧が絶頂にある時、日本宣教師の派遣を決定しました。一人の人手も惜しいその時に、涙をこらえて日本に人を送ることは、誰も知り得ない苦悩があったのです。死を覚悟して成し遂げた業績は、日本の歴史上において消し去ることができない事実です。 今になって韓国は、お父様に対して感謝しています。神様は日本を愛しています。お父様も、日本の歴史上、誰よりも日本を愛しました。日本人以上に日本を愛するのです。神様が愛する日本であれば、日本人以上の心情で日本を愛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 7 日本は私にとって怨讐ですが、私が日本をどの国よりも愛することによって、今後、アジアで神様のみ旨を展開できる相対的基準になり得るのです。そのようにしなければ、主体国の前に、相対的国家を探し出すことはできません。日本には歴史的にそのような使命があるので、誰よりも愛する心をもち、日本を救うために借金しながら宣教師を送ったのです。それは、日本のためでした。 8 私たちが日本の宣教事業を開拓した時が一九五八年です。その時は自由党の政権下にあり、韓国と日本の国交正常化に激しく反対していた頃でした。そのような状況で、大韓民国が生き残るためには、どの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 北朝鮮は、金日成主席を中心としてソ連と中国が後援する立場に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ので、この難局を解決する一つの突破口を開くためには、日本を通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ました。ですから、日本に宣教師を派遣して活動させたのです。その当時は日韓の間に外交関係がなかったので、大韓民国の統治下にある一国民として、日本に宣教師を派遣することは困難な時代でした。 9 私たちのみ旨が世界的なみ旨ならば、隣国の日本にもみ旨を展開すべき責任があり、世界の各国にもみ旨を展開すべき責任が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受難の道を経ながらも、世界に宣教師たちを送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世界的な責任を果たすにおいても、食べて余ったり、使って余ったりするから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厳しい中でするのです。私たちが日本を開拓する時もそうでした。当時、借金をして宣教師を日本に送りました。なぜなら、日本を誰よりも愛したという条件を立て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知っていたからです。 宣教師を送り出す時、「あなたは滅びたとしても、日本を救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いながら送りました。「死んでも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せき立てたのが、ついきのうのことのようです。足もとに火がついて、自分の生活も厳しいのに、借金をしてそ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で、理解ができないというのです。このように、み旨の道は、良い時に平坦な歩みを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 10 お父様は、日本に出発する宣教師に、「あなたが無事に到着するまで、眠らずにあなたのために祈り、あなたのために精誠を尽くすつもりだ。死んでも任務を果たすまでは戻ってきてはいけない」と言いました。 彼は、釜山を通って日本に着くなり捕まって、広島の吉浦拘置所に拘留されました。その後、いくつかの収容所を転々とさせられ、韓国に送還される身となりました。しかし、お父様から切符をもらい、命を懸けて行った男として、たとえ死ぬようなことがあったとしても、帰ることはできません。送還のために下関に向かう途中、列車から飛び降りようとしたのですが、速度が速く、トンネルも多かったので、それはできませんでした。そうして下関に着いて、送還されるのを待つだけという状況になりました。送還されればすべてが崩れてしまうのです。ですから、知恵を絞って、断食をしました。 一週間、十日間と断食をするので、熱病のようなものにかかって、医者から心臓病と診断されたのです。そうして治療するために病院に入院しているときに、逃げ出してしまいました。その後、伝道をして、日本統一教会の勇士たちをつくり上げたのです。 11 お父様は、日本に宣教師を送りました。天運は、人間がつくった制度と法を超越したところから訪れるのです。私は天運を知っているので、そこに備えようとするため、常に死が交錯し、苦痛が交錯し、迫害が交錯するところを歩んできました。人が望むままにしていれば、何の迫害がある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ときは相いれません。遮る時には遮るのです。ですから、統一教会員たちは、このような道を行くのです。 12 日本に最初の宣教師を送る時、私が頼んだことは、「誰よりも日本の人を愛しなさい。涙を流しながらも、追われながらも愛しなさい。追い回されながらも愛したということを、その人たちが証できる事実を残しなさい」というものでした。 他国の人として、日本民族がその国のために忠誠を尽くした基準を突破して越えていくようになるときは、その民族は頭を下げ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です。これが鉄則です。そのような立場で、収容所に引っ張られていっても、逃げ出して伝道を始めました。そのことを、現在の制度のもとでは悪く思うかもしれませんが、日本民族はいつまでも記憶にとどめるでしょう。当時は反対する立場で批判し、条件を挙げて反駁したかもしれませんが、歴史が週ぎるに従って、残した事情は、今後生まれてくる数多くの子孫たちを、涙とともに抱き得る動機の源泉になるのです。 |
| Chambumo Gyeong - 086. Dispatch of Missionaries to Japan In the early morning of May 30, 1958, in a garden in the pine woods behind the Gapsa Temple on Mt. Gyeryong, True Father spoke for the better part of two hours with Choi Bong-chun (Choi Sang-ik). He then decided to send Mr. Choi as a missionary to Japan. Father made this decision out of his overwhelming love for Japan; he was determined to save that country. Missionary Choi left Busan on July 15,1958. After traveling for some time, he arrived at the port city of Hiroshima with a heart full of expectation and deep emotion. Upon his arrival, the Japanese authorities arrested him over his immigration status. He had to go through suffering and innumerable hardships before he could finally arrive in Tokyo and begin to propagate the Word. His method included handing out leaflets with the name "Tokyo Church of the Holy Spirit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 He soon found new members. The first church service was held at 85 Nichome, Totsukacho, Shinjuku, Tokyo, on October 2, 1959. Thus the Japanese HSA-UWC was born. 6 If I look at Japan from my own point of view, it is my enemy. I was tortured many times under Japanese rule. But God commands us not to strike our enemy. Rather, if the enemy does not have clothes or is starving, He says to take care of him. This is why I sent Choi Bong-chun as a missionary to Japan. I knew that the whole of Japan and Korea was against us. But I also knew that in a few decades, it would become clear that this work was for their benefit. I knew that someday the people of both nations would clasp their hands together in respect and thank me. So I sent him to Japan despite the costs and the risks. The persecution directed against the Unification Church was at its peak, and it was during such a time that I decided to send out Choi Bong-chun. Nobody understands the suffering we endured to send just one person to Japan. We sent this missionary at a time when not one person could be spared, and we held back our tears as he left. The achievement he made by putting his life on the line can never be erased from the history of Japan. Now Korea is thankful to Reverend Moon. God loves Japan. I love Japan more than anyone in the history of Japan. I love Japan more than the Japanese themselves. If God loves Japan, I want to love Japan with a deeper heart than even the Japanese. (1969/04/27) 7 Even though Japan is my enemy, I have loved that country more than anyone else has. Because of this, Japan can respond as my object partner and work for God's Will throughout Asia in the future. Otherwise, I would not be able to find a country to serve as an object partner to the subject partner country. Because that is Japan’s destiny, in a show of love for Japan stronger than anyone else's, I borrowed money to send a missionary to Japan and thereby save Japan. (083-109, 1976/02/05) 8 In 1958 when we sent the first missionary to Japan, the Liberal Party of Korea was in power. It was vehemently opposed to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Japan. What could I do to ensure the survival of Korea? I knew that the Soviet Union and China were supporting North Korea and Kim Il-sung. For certain we had to find a way into Japan. This is the reason I sent the missionary to Japan. At the time, becaus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Korea were not yet established, it was not easy to send a Korean national into Japan to do missionary work. (110-167, 1980/11/17) 9 If we are trying to fulfill God's Will for the whole world, then we have a responsibility to do the same for the neighboring nation of Japan and many other countries. Thus, we have to send out missionaries to the world, even though we are still on a suffering path ourselves. We cannot wait until we have money to spare. We have to do it under difficult circumstances. Thus it happened that when we pioneered Japan, we borrowed money to send our missionary there. I did this because I knew I had to set the condition of having loved the enemy nation of Japan more than any other person has ever loved it. Upon the missionary's departure, I told him, "You must give everything you have to Japan in order to save it." It seems like only yesterday that I sent this man off, telling him he had to go even at the cost of his life. We did not even have enough money to make ends meet, yet I borrowed the money to send him. At the time, no one could understand why I did this. The path of God's Will is difficult. It is not the path of happy times, nor is it a smooth road over level ground. (032-307, 1970/07/26) 10 I said to a missionary going to Japan, "I will pray for you and set conditions for you. I will not sleep until you arrive in Japan. Do not come back until you have completed your mission, even if it means death." Upon arrival in Japan from Busan he was arrested and sent to Omura Prison. He was transferred to several facilities until finally he was scheduled to be sent back to Korea. But he felt he simply could not come back, even if it meant his death, since he had already risked his life to go there after I gave him his ticket. While he was on the train to Shimonoseki, he thought of jumping from the train but it was too fast and there were too many tunnels. So he arrived at the prison in Shimonoseki and waited to be sent back to Korea. But he knew that if he was sent back to Korea, everything would be lost. So he used his wits and started fasting. One week, then ten days of continual fasting eventually made him sick, whereupon a doctor diagnosed him with heart disease. He was sent to a hospital for treatment, from which he escaped. This is how he pioneered Japan and eventually trained many brave Unification Church soldiers. (023-137, 1969/05/18) 11 I sent out a missionary to Japan. Heavenly fortune seeks you out when you go beyond manmade systems and laws. Because I know how heavenly fortune works. I have to prepare accordingly, and that generally means that my path is full of danger, pain and persecution. If you always please others, there will not be any persecution. But when you are trying to do what is right for God, then you will be in conflict with others, and if they are in authority they will obstruct you. Despite this, Unification Church members are going heaven's way. (058-317, 1972/06/25) 12 When I sent the first missionary to Japan, I told him, "Love the Japanese people more than anyone else does. Love them even while you are shedding tears and even when you are trapped in a corner. Love them even while you are being chased out. Love them to such a degree that the evidence of it will force them to testify to the fact that you loved them." When a foreigner demonstrates loyalty beyond the level that Japanese people show to their own country, then the Japanese people have no choice but to bow their heads before him. This is an ironclad rule. While following this rule, Missionary Choi was taken to prison, but he managed to escape and started to witness. Some may think what he did was wrong from the viewpoint of conventional behavior, but the Japanese people will remember it gratefully for years to come. At the time, they may have opposed us and judged us negatively, but with the passage of time, their descendants will embrace this phase of history tearfully and take it as a source of inspiration. (159-056, 1968/01/28)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