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참父母經 / Chambumo Gyeong - 355 - 서대문형무소 수감생활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4.05.26|조회수249 목록 댓글 0
참부모경 - 355. 서대문형무소 수감생활

참아버님은 수인번호 390번을 달고 김원필, 유효원, 유효영, 유효민씨 등 간부 4명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셨다. 기록적인 면회 행렬을 이룬 식구들에게 참아버님은 결코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한편 간수를 비롯한 교도소 간부와 감방 수인들까지 참아버님의 인격에 감화를 받아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7 1955년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통일교회 문 선생이 어떻고 어떻다면서 소문이 한바탕 났습니다. 내가 쇠고랑을 차고 들어가니까 구치과장이 나를 부르더니 기합을 주려고 설쳤습니다. 나는 속으로 ‘너 나에게 한 달 이내에 굴복하나 안 하나 어디 두고 봐라.’라고 했습니다. 맨 처음에 들어갈 때는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원숭이 취급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내가 너희같이 데데한 사나이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일주일 이내에 거기에 있는 간수들을 다 휘어잡았습니다. 감옥에서도 선생님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나올 때에는 소장까지 나와서 ‘문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그곳의 구치과장이 나를 비웃었습니다. 그때 내 기분이 상당히 나빠서 집어치우라고 해놓고 여기서 반드시 소장까지도 굴복시키고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며칠이 지나니 그 사람이 아침에 나에게 와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있으면 아침에 와서 그냥 슬쩍 지나갑니다. ‘네가 그냥 지나가지만 가다가 다시 와야지.’라고 생각하면 아니나 다를까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왔다가 다시 갑니다. 내가 ‘네가 다시 와서 인사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치과장이 언젠가는 나를 찾아와서, 어느 날 아침에 떡을 해먹었는데 떡이 목에 걸려서 넘어가질 않더라고 했습니다. 떡이 왜 안 넘어가겠습니까? 조상이 걸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선조들이 아버님을 푸대접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밀리에 떡을 해먹다가 혼이 났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 나보고 ‘스승님’이라고 합니다. 그런 뒤로는 아버님의 심부름을 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나올 무렵에는 소장까지 찾아와서 여름이라고 참외를 사 주고 수박을 사 주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형제간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님을 증거하는 몇 달 동안에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증거받겠다고 그를 전도하겠습니까? 아버님이 전도하지 않아도 전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에 아버님을 만나겠다고 식구들이 죽자 살자 면회를 왔습니다. 감옥살이하는 아버님을 면회했다면 그것은 역사에 남는 것입니다. 그때 면회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앞으로 표창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시집갈 때나 장가갈 때에 가슴에 품고 가서 그 가정의 보물로 간직해야 됩니다. 감옥까지 나올 때에는 간수들과 수장까지도 나와서 배웅했고, 간수들 중에는 아버님을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이 가는 길 앞에는 원수가 생겨나지만 반드시 그 길은 개척된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수난길을 가더라도 자기 혼자 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리에서 아벨을 결정합니다. 참된 종교는 감옥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탄도 싫어하는 인간들이 모인 그 세계에서도 여느 인간들이 갖는 그 이상의 희망과 소망을 갖게 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세계 역사가 출발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사탄세계의 참소를 받지 않고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라도 간섭받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세계까지 연결될 수 있는 새출발의 기원이 벌어집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10 나는 전부가 죽으라고 하고 망하라고 했는데도 안 망했습니다. 왜 안 망했습니까? 사람들이 욕하면 욕할수록, 내가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눈물을 흘리고 나를 위로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데 형무소에 서로 면회를 가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통일교회 교인들은 오전 8시 이후에 면회할 수 있는데 새벽 1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앉아 있습니다. 그것이 서대문형무소에서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치게 해도 저렇게 미치게 해놓았노?’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전 8시가 넘어야 면회를 할 수 있는데 새벽 1시부터 줄을 서 있다는 것입니다. 전날부터 와서 지키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1 내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몇 개월 있을 때 사람들이 나를 통일교회 문아무개라고 불렀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형무소에 들어가 보면 왕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다 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보고 무엇이라고 불러도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달도 있을 수 있고 두 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두 주일쯤 지나게 되자 그들이 나를 어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들 중 제일 골칫거리인 사람, 모두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사람을 데려다가 몇 마디 같이 얘기하며 잘 타일렀습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골칫거리인 사람이었는데 문이라는 사람이 들어오더니 그 사람이 달라졌다고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얼마간 지나자 그 사람은 말하지 않았지만 감방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문 아무개 말을 잘 듣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들을 위한 입장에 서서 대한민국을 대신해서 대통령도 갖지 못하는 심정을 가지고 현재 한국의 운명과 미래 한국의 운명, 그리고 이 민족이 가져야 할 국민사상을 중심삼고 그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책임자 앞에는 머리 숙여야 하는 것이 천리원칙임에 틀림없습니다. 
 
12 형무소에서 아버님을 괴롭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감옥 안에서 아버님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있을 때 감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님을 참 좋아했습니다.그러니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나를 푸대접하던 사람들이 만나러 오면 벌써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여 ‘앞으로는 그런 마음을 갖고 내 앞에 오지 마라.’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또한 거기에서 목사라는 한 양반은 아버님이 이단이고 원수의 입장이라고 맨 처음에는 서슬이 시퍼래서 ‘당신이 주장하는 교리가 도대체 뭣이오?’라면 대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시간을 정해놓고 찾아와서 상당히 친해진 일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소문이 자자해지니 형무소 소장까지도 만나려고 했습니다. 같이 들어간 제자들도 악착같이 아버님을 따르고 모시니까 사람들이 ‘세상에 저렇게 욕을 하고 반대해도 저렇게 끈질기니 과연 통일교회 문 선생은 난 사람이야.’라고들 했습니다. 아버님의 자리는 이렇듯 미천한 것 같았지만 최고 귀한 자리이고 누구더러 대신하라고 해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아무리 큰소리치는 사람이라도 절대 못합니다.

13 사람들이 ‘문 아무개는 기분 좋지 않은 사람이야.’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지만, 과거를 생각해 보더라도 나는 부끄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아니면 내가 그렇게 되었느냐,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그렇게 만든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은 망하지만 그렇게 된 사람은 흥하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망하는 것이요, 선한 것은 흥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천하의 역사가 공증할 수 있는 참된 자리에서 섰을 때에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쇠고랑을 차고 갈 때 지나가는 행인 여자들까지도 곁눈질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오냐, 너희가 걷는 그 걸음걸이는 거룩해 보이고 여기 이 사나이는 불쌍해 보이지만 아직까지 비교의 기준이 안 나왔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됐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자리가 드러나게 될 때에는 옳고 그른 것이 판결난다.’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14 아버님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출발해야 했지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언제 나가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10년을 살든, 아니면 거기서 죽든 뜻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태연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무슨 도를 닦느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시정해서 앞으로 보람 있는 길을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태산이 첩첩이 가로막았으면 굴을 뚫고 고속도로를 내서라도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그때까지 나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내 기력이 다했는데도 뜻 앞에 내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협조하지 말라고 해도 협조하십니다.
 
15 오늘날 통일교회가 나아가는 입장에서 여러분의 하루하루 생활 전체를 얼마만큼 그 시간권 내에서 실감 있게 전체화해서 전개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깊이 혹은 높이를 기독교가 출발하던 그때와 비교해 볼 때 우리가 크게 되면 우리는 급진적인 승리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패자의 서러움을 맛보아야 합니다.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수치를 느껴 보아야 하고 망신도 당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님에게도 그러한 때가 있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가기 전 법정에 섰을 때, 과거에 아버님을 따르던 사람이 ‘이북에서도 감옥살이를 하더니 여기와서도 감옥살이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렸구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내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감옥을 드나들면서 투쟁해 왔습니다. 이 모든 원한을 모아서 가다 보면 그 원한을 전부 풀고도 남을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치려야 지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입술이 부르트고 몸이 불편해도 양양해하는 원수의 등을 내가 양발로 딛고 넘어설 때까지 나는 갈 것입니다. 사탄을 대해 끝까지 싸워 나갈 것입니다.

 

真の父母経 - 355. 西大門刑務所での収監生活

真のお父様は、囚人番号三百九十番を付け、金元弼、劉孝元、劉孝永(ユヒョヨン)、劉孝敏(ユヒ ョミン)など、幹部四人の弟子と共に西大門刑務所に入監された。記録に残る面会の行列をつくった 食口たちに対し、真のお父様は、決して動揺しないことを願われた。一方、看守をはじめとする刑務 所の幹部と監房の囚人たちの中には、真のお父様の人格に感化され、敬意を表する者もいた。

7 一九五五年に西大門刑務所に入ったことがあります。その時、「統一教会の文先生はああだこうだ」 と言って、大変なうわさになりました。私が手錠をかけられて入ると、拘置課長が私を呼び、気合を 入れようと乱暴に振る舞いました。私は心の中で、「あなたが一カ月以内に私に屈服するかしないか、 今に見ていなさい」と思いました。

最初、入る時には、動物園の猿でも見物するかのように、猿扱いしようとしたのです。ですから私 は、「どれ、あなたたちがやりたいようにやってみなさい! 私はあなたたちのようなつまらない男で はない」と思いました。こうして一週間以内に、そこにいる看守たちをすべて意のままにしました。 監獄でも「先生」という言葉を聞くようになりました。出所する時には、所長まで出てきて、「文先 生!」と言ったのです。

8 私が西大門刑務所にいるとき、そこの拘置課長が、私のことをあざ笑いました。そのとき、私は 相当に気分が悪く、一言、釘を刺しておいて、「ここで必ず所長まで屈服させて出ていこう」と考えま した。何日か過ぎると、その人が朝、私の所に来て、「ぐっすりお休みになりましたか」と言いました。 ある時は、じっとしていると、朝やって来て、そのままさっと通り過ぎます。「あなたはただ通り過ぎ ていくが、行く途中でまた戻っ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ると、案の定、振り返るというのです。 そうして、こちらに来てから、また行くのです。私が「あなたはもう一度来て、挨拶をしなければな らない」と考えていると、また、そのようにするというのです。ある日、拘置課長が私のところに来 て、「朝、餅を作って食べたのだが、餅が喉に引っ掛かってのみ込めない」と言うのです。餅がなぜの み込めないのでしょうか。先祖が引っ掛かるようにしているというのです。彼の先祖たちが、お父様 を冷遇すれば大変なことになると知っているので、そのようにするのです。ひそかに餅を作って食べ たら、ひどい目に遭ったというのです。

私はそのようなことを既に知っていました。ですから、そのような話をしてあげたところ、私を見 て「先生」と呼ぶのです。そのようなことがあってからは、お父様の言うことをよく聞いてくれまし た。そうこうするうちに、私が出る頃には、所長まで訪ねてきて、夏だからといっては、まくわうり を買ってくれたり、すいかを買ってくれたり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ようにしながら、兄弟の間 でもできなかった話をするのです。お父様と一緒に生活する数カ月の間に、自分が(今まで)経験し たことを話すのです。私が証をしてもらおうとして、彼を伝道するでしょうか。お父様が伝道しなく ても、伝道されるというのです。

9 西大門刑務所で監獄暮らしをするとき、お父様に会おうと食口たちが必死の思いで面会に来まし た。監獄暮らしをするお父様と面会すれば、それは歴史に残ることです。その時の面会証を持ってい る人たちに対して、あとで表彰します。それを持っている人がいれば、結婚する時に胸に抱いていき、 その家庭の宝物として大切に保管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監獄から出てくる時は、看守たちや所長まで出てきて見送り、看守たちの中には、お父様に従って 教会に通うようになった人もいます。このように、天が行く道には怨讐が現れますが、必ずその道は 開拓されるというのです。アベルになるためには、必ず神様と一体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どの ような受難の道を行くとしても、自分一人で行くと考えてはいけません。神様は、サタンの讒訴を受 けない場で、アベルを決定するのです。

真の宗教は監獄から出発します。サタンも嫌う人間たちの集まったその世界でも、普通の人間がも つ、それ以上の希望と望みをもつようになれば、そこから新しい世界の歴史が出発します。そのよう にしてこそ、サタン世界の讒訴を受けることなく、また高い位置に上がっても干渉されません。そこ から、新しい世界まで連結される新しい出発の起源が生じます。そこから神様と一つになるのです。

10 すべての人が「死ね」と言い、「滅びろ」と言ったにもかかわらず、私は滅びませんでした。なぜ 滅び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人々が罵れば罵るほど、私が孤独であれば孤独であるほど、涙を流して 私を慰労する人が次第に増えたからです。

私が刑務所に入っていれば、我先にと刑務所に面会に行こうとするのです。また、統一教会員たち は、午前八時以降に面会ができるのに、夜中の一時から列をつくって座りながら待っているのです。 それが、西大門刑務所での記録です。ですから、人々が「人々を狂わせるにしても、どうやったらあ そこまで狂わせることができるのか」と言ったのです。午前八時が過ぎてから面会ができるのに、夜 中の一時から列をつくっているというのです。前日から来て座っている人もいました。

11 私が西大門刑務所に数カ月間いた時、人々は私を「統一教会の文某」と呼びました。おかしな話 のようですが、刑務所に入ってみると、自分を王様のように思っていない人がいません。すべての人 が横柄に振る舞うのです。

しかし、私は、私を見て何と呼はうと、何も答えずに黙って座っていました。入ったその日から黙 っていました。一カ月でもそうしていることができ、二カ月でもそのようにしていることができます。 しかし、一、二週間ほど過ぎると、彼らが私に気兼ね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朝、起きてみると、私 が祈っているのです。それをどうして止め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私は、彼らの中で一番の厄介 者と言われる人、みなから「死んでしまえばよい」と思われているその人を連れ、一言、二言、言葉 を交わしながらよく諭しました。「以前はあれほど厄介者だった人が、文という人が来てからその人が 変わった」と言わ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こうしてしばらくたつと、人が話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が、監房の人たちの間で、その人が文某の言うことをよく聞くと、うわさになったのです。なぜなら、 私も彼らのことを思う立場に立ち、大韓民国に代わり、大統領ももち得ない心情をもって、現在の韓 国の運命と未来の韓国の運命、そして、この民族がもつべき国民思想を中心として、彼らのために涙 を流し、祈ったからです。心情の主人になっているからです。善なる責任者の前には頭を下げなけれ ばならないのが天理原則である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

12 刑務所でお父様を苦しめた人たちの顔が今も目に浮かびます。監獄の中でお父様についてのうわ さが広まっても、一言も語りませんでした。西大門刑務所にいる時、監房の中にいるすべての人たち が、お父様のことをとても慕っていました。ですから、訪ねてくる人がたくさんいました。私を冷遇 していた人たちが会いに来れば、すぐに彼らの心を看破して、「これからはそのような気持ちで私の前 に来てはいけない」と叱りました。

また、そこにいた、牧師だという人は、お父様が異端であり、怨讐の立場だといって、最初はものすごい剣幕で、「あなたが主張する教理とはいったい何だ」と言って食ってかかってきました。しかし、 最後には決まった時間に訪ねてくるようになり、とても親しくなりました。うわさが大きく広がった ので、刑務所の所長までが会おうとしたのです。

一緒に監獄に入った弟子たちも、熱心にお父様に従って侍るので、人々が「世の中があれほど罵り、 反対していても、あそこまで徹底しているとは。なるほど、統一教会の文先生はただ者ではない」と 言いました。お父様の立場は、このように、卑しいように見えましたが、最高に貴い立場であり、誰 かに「代わりになりなさい」と言っても代われない立場です。どんなに大口をたたく人でも、絶対に できないのです。

13 人々は、「文某は不気味な人だ」と言って、色眼鏡をかけて見ますが、過去を考えてみても、私は 恥ずべきことは一つもありません。誰かがそうなるように仕向けたか、でなければ、私がそうだった のか、二つのうち一つのはずです。誰かがそうなるように仕向けたとすれば、それは、そのように仕 向けた人の責任です。そのようにさせた人は滅びますが、そのようにされた人は栄えるのです。悪な るものは滅びるのであり、善なるものは栄えます。純粋で、天下の歴史が公証する真の立場に立った 場合は、滅びることはありません。手錠をかけられて歩いていくとき、通りがかりの女性たちまでも、 横目で見ながら顔をしかめるのを見て、「よし、あなたたちが歩くその足取りは高潔に見え、ここにい るこの男は哀れに見えるが、まだ比較する基準が現れていないから分からないだけだ。しかし、その 立場が明らかになる時には、正否の判決が下るだろう」と考えて、今まで歩んできました。

14 お父様は、統一教会を中心に大韓民国を率いて出発すべきでしたが、監獄に入りました。監獄に 入ってからも、「いつ出られるのだろうか」とは考えませんでした。監獄で十年間暮らそうと、あるい はそこで死のうと、み旨のための道であると考えて、泰然としていました。ほかの人とは違いました。 その場で修練をしたのです。

何の修練をするのでしょうか。このすべてのことをいかに是正して、今後、生き甲斐のある道を行 くかを考えました。泰山が幾重にも立ち塞がっていれば、トンネルを掘って高速道路を造ってでも行 くのです。そうして倒れれば、神様が責任をもちます。しかし、気力が残っているうちは、神様の助 けは要りません。それまで、自分のために祈る必要もありません。そうして、私の気力が尽きたにも かかわらず、み旨に私が必要であれば、「協助しないでください」と言っても神様は協助されるのです。

15 今日、統一教会が前進していく立場で、皆さんの一日一日の生活全体を、どれほどその時間圏内 で、実感をもって全体化し、展開させるかが問題です。その深さ、あるいは高さを、キリスト教が出 発した当時と比較してみた場合に、私たちのほうが大きければ、私たちは急進的な発展、急進的な勝 利を成し遂げるでしょう。それから、敗者の悲しみを味わ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顔を上げられない ほどに羞恥を覚えてみなければならず、恥もかかされてみなければなりません。お父様にもそのよう な時がありました。西大門刑務所に行く前に法廷に立った時、かつてお父様に従っていた人が、「北朝 鮮でも監獄暮らしをして、ここに来ても監獄暮らしをするのを見ると、まだその癖を捨て切れていな いのだな」と言いました。その言葉を、私は今も忘れずにいます。

私は一生の間、監獄を出入りしながら闘ってきました。このすべての怨恨を集めて進んでいけば、 その怨恨をすべて解いて余りある時が来るはずです。ですから、疲れようにも、疲れることができま せん。いくら唇が腫れ上がり、体の調子が悪くても、得意げになっている怨讐の背中を、私が両足で 踏み越えていくまで、私は行くつもりです。サタンに対して最後まで闘っていくのです。 

 

Chambumo Gyeong - 355. Life in Seodaemun Prison

In Seodaemun Prison, True Father was assigned number 390. Four disciples were imprisoned with him: Kim Won-pil, Eu Hyo-won, Eu Hyo-young and Eu Hyo-min. So many people visited Father in prison that it must have broken the record for the number of visitors. He encouraged all the church family members who visited him, telling them, "Do not waver." By his heart and way of life, Father earned the respect of the guards, the warden and the other inmates.
 
7 I was imprisoned in Seodaemun Prison in 1955. Many rumors were circulating about me as the leader of the Unification Church. So as I entered the prison in shackles, the manager of my cell block glared at me angrily and shouted that he would punish me. I said to myself, "Wait and see. Within one month, I will win you over."

In the beginning, I was watched and treated as if I were a monkey in a zoo. I thought, "Do as you please! Unlike you, I am not a good-for-nothing!" Within one week, I won the hearts of the guards. People began calling me "Teacher," even in the prison. When I was released, the warden of the prison came out and called me "Teacher Moon." (039-050, 1971/01/09)
 
8 When I entered Seodaemun Prison, the manager of my cell block belittled me. I was quite upset with his behavior, but I determined to win him over before my departure from the facility. A few days later when he came to my cell, I greeted him cheerfully, "Good morning!" Sometimes he silently walked by my cell, and I thought, "You are just passing by, but you will come back." Then, just as I expected, he actually did.

One day he came to me and told me that on a certain morning he was eating rice cakes, and one got stuck in his throat. Why do you think he choked? It was because his ancestors caused it to happen to him, knowing that if their descendant kept on mistreating me, they and that descendant would be in trouble. Not only that, he was eating the rice cake by himself, and his ancestors wanted him to change his ways. After I explained all this to him, his attitude changed. He started to call me "Teacher," and he also ran errands for me.

Even the warden came to respect me. On the day of my release, he brought me a cantaloupe, a watermelon, and other seasonal fruits. He shared personal stories with me that he had not revealed even to his own siblings. He testified about me to the prison officers and guards. Do you think he testified to me because I witnessed to him? I never witnessed to him directly, yet I knew how to witness to him. (033-267, 1970/08/16)
 
9 I know the yearning heart you had when you came to see me in Seodaemun Prison, as if nothing else in your fife mattered. History will remember your names. Someday in the future I will reward all the family members who came to visit me in prison. So treasure your visitor's pass and keep it safe. Any of you who has one should regard it as a family heirloom. And when you marry, keep it close to your bosom.

When I left the prison, all the guards and even the warden came to see me off. Some of those guards later joined the church. In this way, despite the enemies I faced, I pioneered the path of heaven. In order to become Abel, we must unite with God at all costs. Therefore, whatever the suffering on your path, you should never think that you are walking that path alone. God chooses as Abel those who will not rest until they win over those who accuse them.

True religions start from prison. A new history can begin from the worst place, if in that place you have more hope and a greater vision than anyone else. Then Satan's world cannot accuse you or interfere with you, even when you are later elevated or promoted. That is why in prison you can make a new start that connects you to a new world. In prison we can experience the heart of God and become one with Him. (034-050, 1970/08/29)
 
10 People wanted me to die or come to ruin, but I didn't. Why didn't I? I was insulted and isolated, but the more people cursed me and drove me into a corner, the more people shed tears for me and comforted me.

Our members fought for a place in line to visit me in prison. Visiting hours began at 8:00 a.m., but our members waited in line from 1:00 a.m. to get a pass. Seodaemun Prison had never seen such a thing in its history. Some people even waited in line more than 24 hours. (168-264, 1987/09/27)
 
11 When I first arrived at Seodaemun Prison, people disparaged me as "Moon of the Unification Church." It sounds odd, but in prison everyone thinks he is a prince. Everyone thinks he is better than the others. However, whenever inmates spoke to me in a derogatory way, I kept silent. From the first day, I did not say a thing. I could stay that way for one or two months. However, after one or two weeks, the inmates started to regard me with some kind of awe. When they woke up in the morning, they saw me praying. Who could stop me from praying?

One inmate was giving everyone a headache, and the other prisoners wished he would die. However, I took him under my wing and started speaking with him. People said that after I came to the prison, this troublesome man changed. When, after some time, that inmate no longer said anything to insult the other prisoners, the rumor started, "That troublemaker listens to Moon very well."

This happened because I try to have the heart that the president of Korea should have. My heart prompted me to live for the sake of all the prisoners. I believe that it is the right heart for a loyal citizen of this nation; it is the heart that all the people of Korea should have. So I prayed, shedding tears for that prisoner. In other words, my heart was the heart of an owner. That is why he bowed his head to me. It is heaven's principle that people bow their heads in front of a good person who takes responsibility for them. (024-041, 1969/06/22)
 
12 I can still picture the faces of those who tormented me when I was in Seodaemun Prison. Vicious rumors about me circulated inside the prison, but I did not say a word in response. Despite the negative environment, my cellmates came to like me very much. Also, I had many visitors. Some of those who came had bad intentions toward me. Aware of their intentions, I admonished them, "In the future, do not visit me with such a heart."

There was an inmate who used to be a pastor. He called me a heretic and an enemy, and angrily challenged me, shouting, "What you teach is no good!" But after hearing me, he came to see me on a regular basis and we became very close.

The rumors about me spread quickly, so much so that even the warden wanted to meet me in person. In the meantime, my disciples who were imprisoned with me served and attended me wholeheartedly. Then the people there started to say, "Many people insult and accuse Reverend Moon of the Unification Church, but he withstands it so well. Truly, he is an extraordinary person."

In this way, even though I was in the lowest place, I upheld my position as God's representative with integrity and authority. I had to, because there was no one else who could take my place. There is no one else, no matter how much worldly power he has, who can take over my responsibility before heaven. (021-160, 1968/11/17)
 
13 People looked at me with jaundiced eyes and said, "That guy Moon is no good." Yet I am not ashamed of anything in my past. The question is: Did others fabricate this image of me, or did I create it by my own deeds? It is either one or the other. If others fabricated it, it is their fault and they will perish, even as the one who is unjustly criticized will prosper. Evil perishes but good prospers. You will never perish when you stand in a position that is true, pure, and attested to by history.

When I was in handcuffs, Christian women passing by would look at me out of the corner of their eyes and grimace. I thought to myself, "Now your path seems holy, and this man whom you look upon seems miserable. But you cannot tell the outcome because you do not have the standard for comparing my situation with yours. When that is revealed, the judgment will come as to who is right and who is wrong." With these thoughts in my mind, I could come this far. (040-325, 1971/02/11)
 
14 1 should have been able to guide the Republic of Korea centering on the Unification Church, but instead I was put in prison. Yet even in prison, I was not anxious about when I would get out. I was calm and peaceful, because I regarded prison as my path for the sake of the Will. I was resolved to stay on my path no matter how many years I might spend in jail, even to the end of my life. This is one way that I am different from others. Even in that situation, I focused on spiritual self-cultivation.

What kind of self-cultivation? I meditated on how to resolve the situ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which had lost a glorious opportunity. I contemplated how I could create a path of hope for the nation, one that would bear fruit. It was as if I was surrounded by mountains, and I had to look for ways to drill through them one after another to make a tunnel and build a highway.

I thought that if I happened to collapse, God would take responsibility. However, as long as I had energy to go on, I would not ask God for help. Therefore, I did not pray for myself. Without asking God for help, I gave out all of my energy, knowing that by doing so, God would surely help. (033-167, 1970/08/11)
 
15 As the Unification Church advances, the question is, within the limited time you have every day, how much can you wholeheartedly invest yourself for the whole purpose? We will rapidly advance and win victory if the standard of our life is higher and deeper than that of the early Christians. It is good to taste the sorrow of loss. Experience shame and suffer humiliation to such a degree that you cannot lift up your face.

I had such a time. In the courtroom before going to Seodaemun Prison, an ex-member said to me, "You were in jail in North Korea, and here you are again. You just cannot give up the old habit." I cannot forget those bitter words.

While going in and out of prison, I carried on the fight to dissolve all of God's bitter grief. Although I faced many painful, even resentful situations on the way, I knew that if I kept going, the time would come when it would all be dissolved. That is why even now I cannot afford to grow weary. Though my lips are blistered and my body suffers aches and pains, I will move forward until the day I defeat the enemy Satan, until he lies prostrate and I am standing with my two feet upon his back. I will fight him all the way to the end. (025-332, 1969/10/12)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