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욕의 상처를 씻기 위해서는
우리는 '수욕의 상처'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수욕(受辱)'이란 뭐냐? 욕이란 뭐냐? 수치입니다. 참인데도 불구하고 참되지 못한 대우를 받으면 거기에서 수치가 생기는 것이요. 또한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부끄러움과 수치가 정말 그렇다고 공인되면 그것은 욕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참이 참된 입장을 완전히 부정당하게 될 때 거기에 수욕이라는 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것은 무한한 고통이요. 무한한 불행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자식이 부모 앞에 둘도 없는 효자로서 '효자의 도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할 정도로 효성을 다하여 그로 말미암아 부모가 기쁘고, 부모와 자식이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참된 효자입니다. 그런 기준에 있는 효자인데도 불구하고 효자가 아닌 것처럼 공격을 받고 참효자의 자리를 물려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치욕이 됩니다. 부모와 하나된 효자의 가치가 천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욕이 된 입장에 있는 사람의 수욕의 상처 역시 그만큼 깊은 것입니다.
그러면 수욕의 상처를 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이상의 자리로 올라서야 합니다. 그 이상의 자리로 올라서는 데는 자식의 마음에 고개가 생기고, 부모의 마음에 고개가 생깁니다. 두 고개의 경계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 경계선의 입장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두 경계선의 위치가 점점 멀어지게 되고. 그냥 두면 결국은 영원히 분립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경계선을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냐? 일치시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경계선을 일치시키고, 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래의 상태로 복귀될 수 없습니다.
효자가 부모의 마음을 상심하게 했다면 부모에게서 그 상심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옛날에 효도하던 기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행동하던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효의 표준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감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효의 표준이라고 믿었던 자신을 다시 한 번 비판해야 됩니다. 비판하고 감별해야 할 여건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의 효의 기준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이상으로 효의 기준을 상회시켜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부모가 입은 수욕의 상처를 씻을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군신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하가 군왕으로부터 '충신의 도리가 바로 이것이다. 너야말로 나의 충신이다. 너는 우리의 영광이요. 너와 나의 관계는 역사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관계요 인연이다' 라는 칭찬을 받던 자리에서 '네가 이럴 줄 몰랐다' 하는 변절자의 모습으로 대두될 때, 그 군왕이 입는 상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옛날의 충신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옛날보다 몇백 배 이상의 충성을 하고, 몇천 배 이상의 신의의 도리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군왕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힘듭니다. 옛날보다 천 배 이상의 충성을 다하더라도 상처 입은 군왕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군왕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왕은 그것을 천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신하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바라는 바가 컸다면 큰 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그보다 몇천만 배의 큰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 아픈 마음을 항시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옛날보다 몇 천 배 몇 배의 충성을 하여 군왕의 아픈 마음을 풀어드리고, 군왕이 입은 수욕의 상처를 씻어드리지 않고는 옛날의 충신 자리를 회복할 도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