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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세계 - 17. 기독교의 새로운 장래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14.12.09|조회수360 목록 댓글 1

기독교의 새로운 장래

1974.9.18
미국 메디슨 스퀘어 가든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오늘 밤 이곳에 서 있게 된 것을 큰 행복으로 느끼고 있으며, 여러분들이 이곳까지 와 주신데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늘 밤 우리들은 이 인상깊은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밤 내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테마는 ‘기독교의 미래상’입니다. 오늘 밤의 말씀을 드리기 이전에 나는 여러분께 한 가지 개인적인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되풀이하기 위하여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계시를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한 분이시고 성경도 단 한권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에는 4백개가 넘는 기독교 교파가 있습니다. 그것은 똑같은 성경을 놓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성경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풀이해 주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떠한 것이냐 하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계시의 형식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밤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드리고자합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알려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자연히 인간의 해석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여러분들에게는 아주 새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상, 즉 진정한 하나님의 사상을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이미 인간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모두 다 실천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에 여기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직접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에 예언된 하나의 위대한 최후의 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 날은 바로 주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또다시 오셔야 합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다시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요?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도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또 영원하고 불변하며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목적은 창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최초의 남자와 여자, 즉 아담과 해와가 창조된 후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의 계명을 지켜주기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해와가 계명을 잘 지킴으로 말미암아 그의 목적이 달성될 것을 마음 속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희들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불복종의 결과에 대하여 분명히 말했습니다. 물론 불복종의 결과는 죽음을 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간이 타락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에게는 영적(靈的)인 죽음이 찾아왔고 하나님의 목적은 실현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나쁜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원하셨던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불복종 후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습니다.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것은 지상의 천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가 없게 되었고,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살아 있는 지옥, 즉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지상의 천국 

만일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에게 복종했더라면 그들은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천국이란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아담과 해와는 완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죄없는 사람으로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법칙을 복종함으로써 완성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자와 여자로서 완전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동안에는 그들의 관계는 남매지간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남매지간의 진정한 전통을 세워 놓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남성과 한 사람의 여성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완성한 상태에 이른 후에나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하늘적인 결혼생활을 하게 하고 한 쌍의 하늘적인 부부로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로 하여금 최초의 남편과 최초의 아내가 되게하여 천국 건설을 시작하려고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실현 되었더라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은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를 번식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자녀도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이외에 그들은 또 어떻게 될 수 있었을까요? 죄는 절대로 인류에게 계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녀들을 둠으로써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참아버지와 참어머니가 되어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한 최초의 가정을 이룰 수가 있었다면 그 가정을 중심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민족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하나님을 중심한 국가와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에서는 오직 하나님이 통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태초에서부터 영원까지 완전한 통치만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만일 에덴동산에서 그러한 것이 성취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그렇게도 많은 다른 민족과 언어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담을 중심한 하나의 전통 밑에서 모두가 다 아담의 민족에 속해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사용했던 하나의 언어는 전세계의 언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세계는 그야말로 하나님 아래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대로 모든 인간들은 지상의 천국에서 태어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지상에서의 육신생활을 끝마치면 영계(靈界)에 있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원초적(原初的)인 청사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에는 사탄도 있을 수 없고 악도 있을 수 없으며 지옥도 또한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지옥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머지 않아 탄생될 그의 어린 자식을 위하여 감옥을 만드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를 선한 아버지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자식들을 괴롭게 하는 지옥이 필요했겠습니까? 

본래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는 천국만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인간은 그의 본래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고 인간 폐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지옥이란 인간 쓰레기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지옥과 실락원 

여기에서 우리는 더 나아가 타락한 인간과 타락한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악한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거짓 아버지인 사탄에게 굴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아버지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아버지인 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아버지인 사탄과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최초의 남자와 여자는 사탄의 아들 딸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짓 아버지인 사탄 밑에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축복도,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불법적인 부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녀를 번식했을 때 그 자녀들도 모두가 다 똑같은 거짓 아버지 밑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탄의 자녀로 모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이후 원죄를 지닌 자녀를 번식하여 죄악 세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죄의 세계, 불신의 세계, 범죄의 세계, 그리고 혐오와 전쟁의 세계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서로가 파괴적 행위를 하면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상지옥인 것입니다. 사실상 이 지상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31절에도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인공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짓 주인인 사탄과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탄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어 왔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살아있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우려하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구원은 곧 복귀다 

하나님은 그의 쇠사슬을 스스로 끓을 수 있고 또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 힘은 하나님 자신의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복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의사는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그는 환자가 정상적인 건강으로 되돌아가게 해줍니다. 그것이 치료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를 물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그것이 즉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란 비정상적이며 본 궤도를 벗어난 자리에서부터 선한 본연의 자리에로 인간을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복귀와 똑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천국으로 복귀하시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그의 결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1). ”

하나님은 자신이 그렇게 하실는 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본래 계획하셨던 자리로 복귀하시겠다는 결정적인 각오를 드러내어 내가 분명히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지옥을 천국으로 복귀하실 수 있겠습니까? 인류를 복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재창조자로서 이 땅위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죄많은 인간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이 지구상에 천국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최초의 복음으로서 마태복음 4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를 위한 준비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복귀하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 먼저 그 준비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국가를 준비함으로써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 있는 믿음의 기대(基臺)를 세우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은 사탄의 소유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메시아가 아무런 준비된 터전도 없이 지상에 오시면 이 사탄세계는 그를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주관(主管)하실 수 있는 한 나라의 주권을 세우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용의주도하게 역사(役事)하셨습니다. 유대 나라가 바로 이 메시아를 위한 준비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메시아가 착륙할 수 있는 기지로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당신의 최후의 중심인물인 메시아를 탄생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기독교는 2천년 전의 유대나라와 같이 메시아의 재림을 위한 착륙기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성도들은 그의 재림을 위한 신앙의 터전을 마련하여 역사의 최후의 완성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의 이 세계는 문제 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메시아만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메시아의 사명은 타락하여 고통받고 있는 인류를 이 죄악 세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본연의 완성된 하나님의 선한 세계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의 악한 지배권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를 세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복귀할 목적을 가지고 오셨던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의 재림의 목적도 본연의 하나님 나라를 복귀하려는 것으로 예수님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불변한 목적이요 유일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현대의 선민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구세주의 협조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주님을 위한 터전을 예비하여 그가 오실 때 그를 영접하고 지상(地上)에서 사탄을 몰아내는 메시아의 사명에 동참함으로써 전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막연한 천국을 꿈꾸고, 그 천국의 안이한 보금자리를 차지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리나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기독교인들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다윗아, 너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하늘편 챔피언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희생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나를 당신의 제단 위에 어린 양으로 써 주시옵고, 나를 희생시켜서 이 세계를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0세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부르심을 듣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나만의 천국(天國)’, ‘나만의 구원(救援)’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또한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모든 세계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때에 나만의 조그만 천국이 보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이와 반대로 전세계가 구원된다면 여러분 자신의 구원은 이미 거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계속 이처럼 개인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머지 않아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구원을 바라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켜 드리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문제를 해결해 드릴 때 모든 인간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갖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서러우신 심정(心情)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불붙기 시작할 것입니다. 

2천년의 역사(歷史)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전세계를 하나님에게로 복귀시켜 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 기회가 왔을 때에 그것을 놓치곤 하였습니다. 바로 그 기회가 지금 다시 한번 우리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기회가 미국에 찾아왔습니다. 

만약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올바르게 실천한다면 우리들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으로 바로잡을 수 있고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목전(目前)에 다달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가 다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끊임없이 간구의 기도만 드리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지금 실현할 수 있어야 하며, 천국을 이 뉴욕시에 실현시켜야 하겠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하나님의 예정된 완성의 때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우리는 그의 각 분신(分身)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 세계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육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정신을 갖게 되면, 우리는 이 세계를 진정한 천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메시아를 위하여 살고 죽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이 가질 수 있는 특권(特權)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전세계를 구하는 것이지, 기독교나 특정 교회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성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 말씀에는 세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그처럼 사랑하는 것이지 기독교회나 기독교인 만을, 또는 특수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메시아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에게 ‘주님이여 당신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구세주이십니까? ’라고 묻는 다면, 주님은 대답하기를 ‘아니다! 나는 전인류를 위한 구세주야’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하나님에게‘하나님이여, 당신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분입니까? ’라고 묻는 다면 하나님은, ‘아니야! 나는 전우주의 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야’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2천년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자기를 중심한 이익을 목적으로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마치 군인정복자처럼 오셔서, 자기들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고 로마 제국을 멸망시켜서, 이스라엘 나라에 영광과 권세를 부여하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참뜻을 몰랐습니다. 

그와 반대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구와 같이 이용하여 세계를 하나님의 품속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세계를 복귀하시고 전인류를 완전한 선의 세계로 복귀코자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신다면 하나님은 실패의 하나님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탄에 의하여 패배한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의 입장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기독교계를 바라볼 때에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싸워서 이겨야 할 크나큰 전투가 남아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사탄의 가공할 만한 힘, 곧 죄악의 힘과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탄 골리앗과 싸우기 위한 현대의 다윗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윗아, 어디에 있느냐? ’ 하고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주여, 당신의 다윗이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십시오’라고 대답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깊은 잠에 취하여 있는 것 같습니다. 몇명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깨어서 잠든 기독교인들을 깨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추수기가 이 우주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추수하러 내보낼 일꾼이 없으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래 하나님은 줄곧 사탄의 힘에 대항하여 싸워 오셨습니다. 이 전쟁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최후의 전투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두번째로 이 최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이제 그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군대인 기독교인들은 잠만 자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탄에 대하여 한번도 전면 공격을 못해 보시고 ‘게릴라 전법’만을 써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면공세를 취하실 수 있는 한날, 곧 하늘의 디 데이. 마치 노르만디 상륙작전의 디 데이 같은 한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날이 바로 메시아가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 디데이가 가까왔습니다. 성서는 전인류를 이 최후의 전선으로 이끌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준비의 기록인 것입니다. 성서의 목적은 주님의 재림, 즉 이 디 데이가 도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서는 암호다 

그러면 정확하게 말해서 성경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수수께끼의 책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서는 평이한 말로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고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서를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하게 하셨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사실 그대로 표현하게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악의 세계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그의 사자(使者)들과 중심 인물들을 이 죄악세계로부터 빼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노아는 이와 같은 인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이 죄악세계 가운데 언제나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비밀을 공공연하게 문자 그대로 나타낸다면 이 비밀은 원수 사탄에 의하여 악이용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일꾼들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서를 암호로 기록하신 이유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중심 인물들은 그 비밀을 판독할 수 있게 하고 사탄세계의 악한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를 돌아볼 때에 의인(義人)들은 지상에서 언제나 고통만 당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수의 나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번영하는 것을 방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의 대신자들을 발견할 때마다 멸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암호로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서는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서는 의도적으로 수수께끼와 같이 기록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이와 같은 성서의 비유와 상징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본부로부터 지시를 받고 파송된 정보원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암호지시를 판독(判讀)하여야 합니다. 그때에 당신은 암호해독서(暗號解讀書)를 가지고 있든가 직접 본부와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나타나 있는 상징과 비유의 뜻은 본부와 같은 하나님과 통해야만이 명확해집니다. 이것만이 성서의 궁극적인 의미로 알아내는 유일한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2천년전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천국의 청사진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계획을 자기 제자들에게까지도 명백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와 상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처해 있는 어려운 환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압력과 어떠한 변화도 반대하는 군주체제(君主體制), 나아가서 전통에 얽매인 완고한 유대 교단(敎團) 등이 가로놓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장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킴으로써 인류가 나아갈 길을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계획을 그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신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14 : 3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비유와 상징으로 가르쳐 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성서에 기록된 암호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여러분들은 크나큰 실수를 범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오늘날 기독교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계획표(計劃表)와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명령을 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고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뜻을 일러줄 약속을 하셨습니다. 

오늘 저녁 나는 나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여 여기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시어서 현대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게 하시고 주님의 날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들을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나는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메시아의 재림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집중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의 상황을 잘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들 앞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하나의 역사적인 수수께끼가 놓여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 전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가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메시아를 위하여 이스라엘 선민을 준비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를 해야 된다고 선민들에게 미리 경고를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정하셨던 바의 준비를 위하여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내에는 사실상 위대한 메시아적인 정열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한 때에 그의 약속의 말씀(言約)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택하셨던 선민들 속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 때에 어떠한 일이 생겼습니까? 역사가 그 증거입니다. 선민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기독교의 교회들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거야. 십자가의 죽음은 당초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뜻에 의한 것이었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할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다시 돌아온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틀림없이 ‘우리들은 그를 받아들이지요. 그를 환영합니다. 그와 하나가 되고 그를 따를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는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 당신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겠습니까? ’ 그들은 틀림없이 ‘노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선민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요?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은 분명히 선민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데 있었습니다. 

무지가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선민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그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보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잘못이란 무엇이었겠습니까 ? 

유대 사람들은 나사렛의 예수가 어떠한 분이었던가 하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라보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십자가상에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들은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의 증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만일 그들이 예수께서 누구였는지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무지와 맹목에서였습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때에 현실적으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진정한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신 유일한 목적이 그를 십자가상에 못박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민을 준비하는 데 그렇게도 오랜 기간을 소요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불신자들 속이나 야만인 가운데에 보내는 것이 훨씬 손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보다 빨리 예수님을 죽일 수가 있어서 구원이 보다 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에게는 죽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되풀이 되풀이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영광을 받으리라고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온 후로 선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을 받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망했고, 그 민족은 온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선민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할 때에 그들은 그 뜻의 결실체인 메시아를 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였던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이 왜 몰랐던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구약의 문자에만 묶여 있었던 성구의 노예들 

여러분들이 믿든 안 믿든,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가 하는 첫째의 이유는 구약(舊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들이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스라엘 선민들은 구약성서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암호같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한마디 한마디와 한 글자 한 글자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구약(舊約)의 성구 (聖句)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한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구약 안에 있는 말라기서는 신약성서 안에 있는 계시록(啓示錄)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시간표를 제시하고 있는 데 그 최후의 기록에는 메시아가 장차 어떻게 오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 4장 5절에서부터 6절까지에서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네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

엘리야는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9백년 전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의할 것 같으면 그는 땅에서 살다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선민들은 구약에 기록된 그대로 언젠가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민들이 고대하고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왔었습니까?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기(豫期)하고 있었던 그러한 방법으로 엘리야가 돌아오지 않았던 데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은 엘리야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되돌아왔다고 하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어느날, 그들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선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나사렛에서 온 한 청년이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왔다고 온 세상에 선포했던 선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성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선민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사렛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가? 우리들은 엘리야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들은 일이 없지 않은가…. 이것은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메시아가 올 리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오리라고 했던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님의 사명성수(使命成遂)에 대한 큰 장해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하려고 온 이스라엘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신민들은 한결같이 ‘만일 당신들의 선생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엘리야는 어디에 있는 가? 구약성서에는 메시아가 나타나기 이전에 엘리야가 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말을 부인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구약성서를 배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하층(下層)에 속하는 갈릴리 지방의 어부들이거나 세리 혹은 매춘부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질문에 크게 당황하게 된 제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 광경이 마태복음 17장 10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대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실 제자들에게 큰 쇼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예수님의 대답이 성서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과연 엘리야였던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민들에게는 그것이 납득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어도단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건을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에다 갖다 놓고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세례 요한은 오늘날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인 ‘빌리 그레함’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 위대한 예언자로서, 전 이스라엘에 명성을 떨치고, 비상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알 수 없는 한 청년이 돌연히 나타나서 전세계를 향하여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은 그에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약속했던 엘리야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젊은이가 ‘빌리 그레함이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까? ’ 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어떻겠습니까?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 빌리 그레함이 엘리야가 될 수가 있습니까? 그는 푸른 하늘에서 오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다 그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당신들도 역시 그리한 대답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아주 똑같은 불신이 우리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단순히 그가 푸른 하늘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스라엘 선민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선민들은 엘리야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대로 푸른 하늘로부터 되돌아온다고 하는 신앙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문자에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세례 요한 

당시의 세론(世論)은 아주 무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있게, 그리고 권위있게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선민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민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직접 세례 요한을 찾아가서 물어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 광경을 우리들은 요한복음 1장 19절에서 21절에 걸쳐 읽을 수가 있습니다.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 답하되 아니라…” 

세례 요한은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또 그는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는 것조차 부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예언자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본인은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는 당시의 정황(情況)을 보고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의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패자(敗者)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결국 일대 사기꾼같이 생각되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부인한 후 예수님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찌하여 십자가상에서 죽게 되었습니까?

첫째로 그는 구약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 때문에 그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세례 요한이 그 사명에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인당했고 드디어는 십자가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1장 1절부터 3절까지에서 목이 잘리기 위하여 감옥 안에 들어 있던 세례 요한이 그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사람의 질문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을 일찌기 요단 강 가에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 1:34)” 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었고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뒤에 와서는 예수님에게 ‘진정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십니까, 그렇지 앉으면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듣고 예수님은 얼마나 낙담하셨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얼마나 신앙이 약한 사람이었습니까?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리고 선민들로 하여금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특별히 이 땅위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 와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그 사명을 다해 줄 것을 얼마나 크게 기대했는 지 모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을 시켜 예수님에게로 찾아와서 ‘진정으로 당신이 메시아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칼로 찔림을 당 하는 이상으로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느꼈는 가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는 무서운 쇼크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분노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그렇지 않다’하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대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실패했을 때에 그에게 보여준 예수님의 위안이었습니다. 

불쌍한 요한, 실패한 자, 그대는 이미 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실족했지. 참 안 되었어 요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보다는 큰, 그러한 자리에 세례 요한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은 지금까지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사명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밤에 우리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 필요한 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했다는 그의 사명을 놓고서는 여인이 낳은 사람들 중에 서 가장 위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도 똑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보다도 먼저 있던 모든 예언자들은 그들과 주님 사이의 시간적인 거리를 놓고 메시아를 위한 증거자로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으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으로 나타나신,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자로서의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중심삼고 볼 때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시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세례 요한은 가장 낮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가장 비참한 실패자였던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태어났던 모든 예언자들은 영계(靈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의심했었습니다.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으며 예수님의 신분에 캄캄한 장님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그 자신의 증거를 끝까지 들고 나서는 데 있어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패자가 되어버렸고 천국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낮은 사람이 되어 마침내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선포하고 증거하는 ,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목베임을 당하였던들 그는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왕의 개인적인 사랑의 스캔들에 휘말리고 관련되어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일은 세례 요한의 사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시봉(侍奉)하는 일만이 그의 유일한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천적(天的)인 사명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의미없는 고통을 받았고 마침내 의미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생겼을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이 되었다고 한다면 세례 요한은 총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놓고 예정하셨던 위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정대로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택하셨던 12사도(使徒)와 70문도(門徒)와 120문도(門徒)들은 모두가 다 세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되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선민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가 될 수 있고 또 그들을 융합시킬 수 있는 조절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와 같은 환경에서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문목사여, 당신은 대체 어떤 근거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오? ’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러한 말을 할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진리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 자신도 나에게 이러한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영계(靈界)에서 나는 세례 요한도 만났는 데 그 자신도 나의 이러한 증언의 진리성에 대해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특이한 영적(靈的)인 체험을 한 후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내가 한상 읽어왔던 그 동일한 성경이 전체적인 새로운 뜻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지금은 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에 대한 판단은 미루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진리가 해같이 빛나는 영계(靈界)에 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으며 그 때에 가서 우리는 그 전체적인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생활(地上生活)을 할 때에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이 있으며, 이 지상생활에서 여러분이 가질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국은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구름 타고 오시는 것으로 예상됐던 예수님 

예수님이 메시아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정적인 세번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다니엘의 예언(엘 7:13)을 따라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기적처럼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현현(現顯)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셉의 아내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예수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 그이는 당신이나 나와 같은 한낱 인간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니,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게 한 또 하나의 중대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예수님의 사명 수행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겨줬습니다. 우리는 요한 2서 1장 7절에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 ”라고 사도 요한이 경고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2천년 전에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한 말인데, 그것은 단지 예수가 육신(肉身)을 썼다는 그 하나만의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름을 타고 현현하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을 가리켜 ‘적 그리스도’라고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숨겨져 왔으며 오늘날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진리가 특별히 이 시대에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웠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찬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명확한 진리의 계시만이 모든 기독교회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하나되게 하며 우리가 진리를 알 때에 그 진리는 우리를 그릇된 신앙이나 분열로부터 구원해 줄 것입니다. 여기에 뚜렷한 하나님의 진리가 이제 계시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제2차적인 사명 

십자가상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래적인 노정이 아니라 예정된 코오스의 변경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그 분의 제 2차적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변화산상(變化山上)에서 결정됐던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한 말씀이 누가복음 9장 30절에서 31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예수께서 ‘장차 인자(人子)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의 수제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만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 : 22). ”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 16 :23)”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증거로 이 특이한 성구를 곧잘 이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라. 그 말은 죽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십자가로 나가시려는 당신을 반대한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그를 사탄이라고 하시지 않았는 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시고 또한 예수님의 사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을 안 연후에 베드로를 꾸짖으셨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예수께서 가지고 오셨던 지상천국의 건설이라는 본래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사명의 최종단계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적구원(靈的救援)이라는 제한된 사명이라도 해주기를 예수님에게 당부하셨던 것이며, 가련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감의 변동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언뜻 보아 예수를 위로하는 듯한 베드로의 말이 그 점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러한 2차적인 사명을 외면할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을 피하는 것은 예수님의 강림을 완전히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였더라면 

이제 예수님이 유대 민족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더라면 무엇이 이루어졌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십시다. 만일 그렇게 됐더라면.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제자들을 하나로 묶고, 야곱과 아랍족속들의 12지파를 포함한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합했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의 가정이 됐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하신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하고 하늘의 주권을 확립하셨을 것이며, 그의 당대에 하늘나라의 법도가 마련됐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주권이 실체(實體)를 이뤄 대적할 자 없는 국가가 수립됐을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그 나라는 첫아담을 통해서 이룩하시려던 것이 후 아담 예수 그리스도, 즉 왕을 통해서 이룩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도 하나님 나라에 굴복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정사(政事)와 평강(平康)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自今)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은 온갖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면서 맨손으로 로마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결국 4백년이 못 가서 로마제국은 이 맨손의 무리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이 신성한 무리들을 거느리셨더라면 그 때, 즉 예수님 당대에 전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주권 앞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당시의 대 로마제국은 온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전체 세계의 복귀(復歸)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로마를 만방(萬邦)의 중심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로마에 천국(天國)이 도래(到來)만 한다면 그것은 용이하게 전 세계로 퍼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로마제국에 그의 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면 로마의 힘과 영향으로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 생전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예수께서는 전세계에 걸쳐 실체적인 천국을 건설하셨을 것이며,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니 감리교니 그리스도교회니 장로교니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파의 그 어느 하나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목적지에 이미 당도한 여러분에게는 차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천국시민이 됐을 것이고, 기독교사는 피를 보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순교자도 없었을 것이고, 교회당에 십자가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다면, 물론 메시아의 사명이 종결됐기 때문에 재림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신을 당하셨던 것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해와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이상을 이루지 못하셨고, 택함받은 백성들의 비협조로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이룩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 2차적인 사명인 영적인 구원을 생각하시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선민 이스라엘의 몽매와 죄악으로 인해서 필요하게 된 제물의 길을 용납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이 지니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치르는 속량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것을 허락하셨으며, 그 대가로 예수님을 부활케 하시어 육신은 구원해 주시지 못하셨으나 영적인 구원을 위한 기대는 마련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승리는 십자가상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져다 준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기독교도 역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제자들도 배신하고 수제자 베드로마저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독교도 다시 살았으며, 그때 40일 동안 예수님은 함께 기독교의 기반을 굳히셨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의 시초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승리적인 부활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여기에는 사탄의 영향력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肉身)은 구속물과 제물로 드려졌으며, 예수께서 그 육신을 제물로 바칠 때 인류의 육신도 제물로 함께 드려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2천년 전 그때 육신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영적구원(靈的救援)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세계는 사탄의 귄세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온 세계에 있는 우리의 육신 안에시 세차게 판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민하여 로마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아직도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즉, 그의 육신은 아직도 속량되지 못하여 죄 가운데서 신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 때에만 한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영적인 구원만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의 몸을 죄악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실 때까지는 사탄의 주관(主管)에 얽매어 우리의 몸은 죄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만이 우리의 영적, 육적 구원을 완결지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영적 구원만을 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는 달리 육적(실체적)인 기반을 갖지 못한 기독교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왕국밖에 주관 못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큰 소망은 주의 재림일 것이며 이것은 미국의 소망이자 세계의 소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인 미국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메시아 강림의 날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는 2천년 전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위치와 맞먹는 것이며, 미국은 20세기의 메시아 상륙지점으로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에 임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에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역할은 2천년전 로마제국의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세계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미국은 현대 세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계 구원을 위해 로마를 착안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는 미국을 착안하실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의 의미 

위에서 말한 이 모든 것 때문에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참된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 :38)” 하시고,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願)대로 하시옵소서(마 26 : 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한 번만이 아니라 3차에 걸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괴로워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그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실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정 속에서도 수십만의 기독교인들은 당당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에 형리(刑吏)들에게 ‘나는 나의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을 가치가 없다. 원컨대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죽이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도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 기록하기를 . 스데반은 평화스럽게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죽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서를 떠나서도, 미국 독립 때의 청년 장교였던 나단 헤일(NATHAN HALE)도 체포되어 사형당할 때 말하기를 , ‘나는 내 조국을 위하여 바칠 내 생명이 하나뿐인 것이 유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물며 그의 오신 목적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전세계를 구원하는 데 있었다면 그런 기도를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올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자격이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어떤 이기적인 입장에서 하신 것도 아니요, 죽음이 두려워서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만약 십자가에 달리시는 길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의 길이었다면 언제든지 몇 천번이라도 죽으려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로서의 사명 때문에 초조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 때문에 번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 후의 비참한 결과를 예견하시고 비통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이 천국을 실현하는 대업(大業)을 또 다시 2천년간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동안 인간들은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자기를 따르는 수백 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며 순교를 당하는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버림당하고 황폐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승리와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셨지, 결코 십자가에 처형되어 홀로 가시기를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비참하게 하늘에 돌아가기를 원한 게 아니라 승리의 왕자로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절망적인 때라도 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지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 하고 하나님께 최후의 담판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가롯 유다야말로 영웅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상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아들을 원수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롯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 : 24)”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46)”라고 부르짖으셨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님은 그때 참으로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영예롭습니다. ’라고 외치셨을 것입니다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의 참뜻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고수(固守)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구름’을 타고 강림하신다는 비유의 참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성서가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심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구름’이란 것은 문자대로 물질적인 구름이란 뜻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列國)과 방언이니라(계 17:1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물’을 타락한 인간들의 무리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름은 무엇이겠습니까? 구름은 물이 증발되어 형성되는 것을 여러분은 다 아십니다. 그런데 물은 많은 불순물이 섞여서 오염될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물이 증발되어 구름이 될 때는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성별(聖別)된 사람들, 곧 하늘의 뜻을 옳게 아는 기독성도들이 바로 하늘의 구름이란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생(重生)된 기독성도들, 죄와는 상관이 없는 선한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실 때 천국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림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논리적이 아니면 어떠한 것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진리는 논리적입니다. 무지하고서는 완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재림역사의 성취 방법 

크리스찬들의 기도만으로는 닐 암스트롱을 달에 착륙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여기에는 과학적인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도 한때는 과학도였으며 하나님은 과학의 하나님이심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20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 말씀의 초점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 재강림의 성취 방식’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마태복음 24장 30절에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기록된 내용과 계시록 1장 7절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기록된 내용을 보게 되며, 한편으로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에서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기록된 말씀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예언은 서로 상치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도둑 같이 온다면 동일한 시간에 구름을 타고 나타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려야 합니까? 

2천년 전의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징으로 돼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커다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찬들이 신약성경을 읽을 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며 성경을 신령으로 읽어 비유와 상징의 참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천년 전에 사람들은 엘리야가 파란 하늘로부터 내려오기를 기대했고 메시아도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었으나 그런 식으로는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재림하시는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당도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기대가 이 시대에 실망으로 바뀌지 않으리라는 어떠한 보장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이 두 예언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여러분이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자(人子)는 육신을 쓰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2천년 전의 독실한 유대교인들이 범했던 것과 똑같은 범죄를 여러분은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겸손한 마음으로 육신을 쓰고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일 수 있다면―그것이 도둑같이 오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겠습니다만―여러분은 길을 잃지 않을 것이며, 주께서 어느 길로 오시든지 여러분은 메시아를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모든 사람이 주를 볼 것이며, 텔레비전 방송망들이 그 사실을 보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문자 그대로 당신의 아들을 구름에 실려 보내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나는 성경의 중요한 예언을 읽으면서 그것을 증거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오…….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구름을 쳐다볼 것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이 임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믿는 유대교인들이 메시아의 강림을 보았습니까? 인자(人子)가 육신을 쓰고 오셨기 때문에 그들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께서 주신 각별하신 말씀을 상고(詳考)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그런 것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5절에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찌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능력과 큰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누가 감히 그 분을 부인하며 고통을 주겠습니까? 여러분입니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인자는 육신으로 오시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인정을 못 받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분을 그리스도로 맞이하는 데 큰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육신 쓰고 오시기에 박해 받으실 재림주님 

모든 크리스찬들과 교회는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들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초림 때처럼 예수께서 육신 쓰고 오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먼저 사람들은 그를 부인하며 그에게 고난을 가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돌을 집어 그에게 던질 것이며 이단자로 또는 하나님을 참담하게 하는 자니 귀신들린 자니 하고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2천년 전에 예수님에게 가해졌던 것과 똑같은 비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다시 십자가에 죽으러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영광의 주님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하늘나라를 건설하시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악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온 땅을 채우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6절에서 27절을 보면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라고 돼 있습니다. 

이것은 인자(人子)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묘사한 것이며 주께서 육신을 쓰고 인자로 오실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는 천국을 발표하실 것이나 이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사실 사람들은 그 분을 비웃고 조소하며 박해를 가하며 온갖 악한 짓을 할 것입니다. 동시에 세상은 그전과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주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오르시는 그 날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그 분을 심판주로 맞아들일 때는 벌써 늦을 것입니다. 방주는 닫힐 것이고 심판은 이미 임박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리라(눅 18:8)”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다시 오실 때에 믿음이 있겠느냐고 의심하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는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민족은 신앙열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아침과 낮과 밤에 회당에서 기도했으며 노상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암송했습니다. 그들은 십계명과 그 밖의 모든 율법을 지켰습니다. 십일조를 바쳤으며 끊임없이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현현했을 때 그들은 메시아를 믿지 못하고 십자가상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믿음을 보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땅 위에 믿음이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육신 쓰고 인간의 아들로 다시 오실 때에도 땅에는 믿음이 없을 것입니다. 수억의 그리스도인들과 수천 수만의 교회는 인자가 오시는 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23절을 읽어 보십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열성적인 크리스찬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핀잔을 들어야 하는 지요? 그들은 무슨 종류의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까? 

긴긴 역사를 통해서 볼 때에 많은 큰 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범해졌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일 모의를 한 것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육신 쓰고 인간의 아들로 다시 오신다면, 처음에는 2천년 전에 오셨을 때와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의 고난을 반복하시려고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재림시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것이며, 재림하시는 주께서 심판의 보좌에 오르시어 심판주로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심판의 보좌로 들려 올라가실 때에는 각 사람이 그 분을 볼 것이며, 그들 앞에 그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불을 보는 것보다도 더 환할 것입니다. 그 분을 이미 비난하거나 부인했던 사람들은 그 분에 대한 자기들의 행악(行惡)으로 인하여 탄식하고 통곡하게 될 것이며, 이 때 주님께서는 ‘나는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인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오고 계시며,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니 오직 온유한 자만이 복을 받을 것이며, 교만한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애당초부터 땅 위에 당신의 왕국을 세우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즉, 아담과 해와를 통해서 그 뜻을 이루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 순종했더라면 그때 그들은 완성했을 것이며, 하나님은 완성한 이들에게 혼인잔치를 베풀어 지상에 최초의 가정을 이룩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이 가정은 지상에 세워진 하늘나라의 머릿돌이 됐을 것이고, 아담과 해와는 전인류의 참 아버지와 참 어머니가 됐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이러한 천국의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세계가 됐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국적인 최고의 정점이 계시록에 예언돼 있으며, 이것이 곧 어린양 잔치입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바로 그 어린 양이며, 완성된 아담입니다. 주님은 완성된 아담으로 오시어서 완성된 해와를 복귀할 것입니다. 이 때에 그들은 인류의 최초의 부모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기쁨도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첫아담과 첫해와는 실패했으며, 하나님의 이상은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연의 천국을 세우시어 기쁨의 세계를 완성시키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4천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완성된 아담을 통해서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려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완성된 아담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후아담 또는 제2 아담이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완성한 아담으로 오셔서 실패한 첫아담의 대신자 역할을 하셨던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만의 복귀로는 천국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부, 곧 한 여자가 있어야 했으며 그것은 또 다른 해와를 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완성한 아담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신부, 즉 완성된 해와를 복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됐더라면 이 가정은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최초의 아담 가정을 복귀했을 것입니다. 

제2의 아담 해와의 완성은 선민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운명하신지 약 2천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3의 아담으로 아들을 보내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3차에 걸친 시도로 목적을 성취해 나오셨습니다. 3수가 완성수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만은 완성된 아담과 해와를 축복하사 혼인잔치를 베푸시어 지상천국의 기틀을 놓으심으로써 긴긴 역사의 목적을 이룩하시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고난을 목전에 놓고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잘못은 바로 이 곳 땅에서 저질러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과오와 죄악의 청산도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땅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지상으로 돌아오셔아 하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이 기독교의 최고의 소망 

많은 크리스찬들은 세상 끝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멸하실 것이고, 해가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지며 땅의 체질이 불타버릴 것이며, 몇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신다면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실패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승리하고 하나님은 패배자가 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글은 그의 천국을 의미해 왔으며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뉴욕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오시는 메시아를 맞아들이면 천국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여러분의 소망이자 나의 소망이오, 미국과 전 세계의 단 하나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쇠퇴할 것이며 그 영적인 불은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들은 유물의 무덤으로 화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오늘 저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곳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왔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는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상한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새 시대의 도래(到來)를 목전(目前)에 두고 있습니다. 하늘의 시대가 가까워옵니다. 여러분이 간곡히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급히 ‘하나님, 문목사가 진리를 얘기하고 있는 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그것은 나나 다른 누구에게 대답하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대답하여 주시도록 하십시오. 

가서 고요히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하나님과 담판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 해답을 제시하실 것입니다.

인류의 새로운 소망은 메시아입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은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그 날이 크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냐의 여부도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메시아를 모시게 되면 큰 날이 될 것이요, 그 분을 못 만나면 그 날이 여러분에게는 두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경청에 대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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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호덕 | 작성시간 21.04.0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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