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고통하면서도 이제는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자기를 속여가며 스스로 위로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오늘까지의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니었던가. 이제 이 아담의 후손의 몸마저 물에서 건져 육지로 다시 끌어올려야할 구원자가 다시 오셔야할 것이니 이 분이 바로 재림예수님이시다.
이렇듯이 십자가에 달리러 오셨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천륜의 비밀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각도로 복음서를 읽어보기로 하자.
こうして苦しみながらも、今では完全に救われたと自分を欺き、自分を慰め、自分を満足させているのが今日までの私たちの信仰生活ではなかっただろうか。 今、このアダムの子孫の体さえも水から救い上げ、陸に引き上げなければならない救い主が再び来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この方がまさに再臨のイエス様である。
このように、十字架にかけられたイエス様ではなかったという天倫の秘密を念頭に置いて、新しい角度から福音書を読み直してみよう。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기정적 경륜이었다면 「할만하면 이 잔을 면케 하옵소서」(마 26/39)하고 세 번씩이나 올리신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는 미약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스데반도 그 처참한 최후의 운명을 웃으면서 끝마쳤고 바울 베드로 그 이후의 많은 성도들도 꼭같은 순교의 길을 걸었거든 하물며 인류의 구주로 오신 예수께서 아무래도 걸어야할 십자가를 앞두고 이것을 피하기를 원하는 그러한 기도를 올렸을 것인가 실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은 천륜을 배역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의 행동에서 야기된 억울한 길이었다.
もしイエスの十字架の苦難の道が既成の経綸であったなら、「できる限りこの杯を免れさせてください」(マタイ26/39)と三度も捧げられたイエスの最後の祈りは、弱い人間性の表れとしか見られないだろう。 ステパノもその悲惨な最期の運命を笑いながら終え、パウロやペテロ以降の多くの聖徒たちも同じ殉教の道を歩んだ。ましてや人類の救い主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が、歩むべき十字架を前にしてこれを避けたいと願うような祈りを捧げたのだろうか。実際、キリストの死の道は、天倫を裏切るイスラエルの不信の行動から生じた不当な道であ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