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과 극복
1971.03.14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이달 들어 두번째 맞는 안식일 이 아침,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당신께서 이 자리를 살피시옵소서. 백여 명의 심령을 귀히 보시옵소서.
각자의 모든 생활이 당신의 뜻과 언제나 상응하면서 당신께서 소원하시는 복귀노정 위에 자신들의 생활과 생애노정을 일치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높고 귀하신 당신의 뜻 앞에 저희들은 언제나 낮고 천하고 부족한 모습들인 것을 잘 알게 되옵니다. 그 간격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저희들의 수고와 노력보다도 아버지의 수고와 노력이 얼마나 더 컸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내가 외로운 자리에 서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나 이상의 외로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내가 지치고 괴로운 자리에 서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그 이상의 자리에서 극복의 생활과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이 시간 저희들은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가정에서 타락의 한날을 만든 한을 인류역사노정에서 한 순간도 넘지 못한 연고로, 아버지께서 역사과정을 통하여 험난한 노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가인과 아벨이 생활권내에 있어서 아버지를 중심삼고 순응해야 할 극복의 한 장면을 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역사과정에서 피어린 투쟁의 역사가 아직까지 꼬리를 물고 돌아가고 있는 것을 저희들은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그와 같은 운명에 연연하는 저희 생활과정과 생애노정에 이것이 고착되어 하루하루의 인생길을 막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이를 악물고서 이 운명의 악순환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과거의 조상들도 이 한 극복의 장면을 넘기 위하여, 노아 할아버지는 120년 동안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120년의 기간을 통하여 극복의 탕감노정을 넘기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던가를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모세도 역시 80년의 수난길을 걸었사옵고, 또한 예수를 중심삼고 시대적인 극복의 환경을 넘어가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그 환경을 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수천년 피어린 유랑의 민족으로서 수많은 민족의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 극복의 한 장면을 넘기 위해 나왔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전체 역사를 통틀어 보게 될 때, 개인의 극복과 가정의 극복과 종족, 민족, 국가의 극복을 통하여 승리의 천국을 이 땅 위에 건설하시려던 아버지께서 그 소원성취의 한날을 보지 못한 연고로, 세계를 돌고 돌면서 그 한날을 추구해 나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이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극복의 노정이 있고, 가정이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극복의 노정이 있으며, 종족과 민족이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극복의 노정이 있고, 승리의 권한을 가진 그 나라는 천주를 대신하여 극복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게 되옵니다.
이런 모든 인생의 노정, 역사의 노정, 인류의 노정에 수난과 투쟁의 역사가 쌓이고 쌓여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면 알수록 그 모든 배후에는 아버지의 극복의 투쟁역사가 얼룩져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와 눈물의 교차로가 여기에 엉클어져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수난길을 연이어 나오신 아버지의 복귀의 역사는 수많은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아시아의 이 한국땅을 찾아왔던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피의 복귀의 노정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참고 또 참으면서 불쌍한 한민족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그 뜻을 이 민족은 알지 못하였으나, 당신께서는 저희들의 마음을 고이고이 더듬으시면서 얼마나 속아 왔고, 얼마나 간절히 기대해 왔는가 하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정성어린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한다 할 때, 그 정성은 자기 일대에 한한 어떠한 행위나 말로 하는 정성에 지나지 않사오나, 아버지는 복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천추의 심정을 다 기울인 정성으로 역사의 한의 고빗길을 걸어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이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괴로운 길이었겠는가를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족한 자녀들이 오늘 여기에 모였습니다. 아버지께서 걸어오신 수난의 길 앞에, 아버지께서 걸어오신 피어린 투쟁의 노정 앞에, 아버지께서 걸어오신 십자가의 형극 앞에 저희 자신들은 무엇을 찾기 위해 여기에 나와 있사옵니까? 나 자신의 영광과 영달을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옵니다. 오직 당신의 불쌍하고 처량한 그 고빗길에 있어서 하나의 고임돌이 되고 길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저희들은 나가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슬픈 행로에 있어서 저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옵소서. 힘없는 당신의 모습 앞에 사랑하는 아들딸의 모습으로서 희망에 가득찬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불쌍한 자녀로서 머무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한날을 자각하고 내일의 소망을 다짐하면서, 이 아침 아버지 앞에 거룩한 역사적인 터전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의 모습이 되고 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와 나,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상하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전후관계에서 일치점을 찾아 나오신 아버지의 수난길을 생각하게 될 때, 인간은 언제나 가증된 모습이옵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결론을 짓고, 자기로 말미암아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고, 자기로 말미암아 결실의 그 무엇을 찾는, 아버지께서 원치 않는 가증스러운 인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그러했기 때문에 저희 자신들도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이 옵니다. 하오니 아버지께서 이러한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시키시옵고, 선과 일치될 수 있는 하늘의 마음이 저희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자리를 살피시옵소서. 찾아오신 당신의 소망의 뜻 앞에 환희의 얼굴을 가지고 아버지를 맞아들일 수 있는 아들이 있고 딸이 있거든 기쁜 마음으로 그 자식을 품어 주시옵소서. 허락하신 축복으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높고 귀하신 내일의 소망과 더불어 그들에게 환희의 한 시간을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거든 아버지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어서 각자의 마음속 깊이 살아 있는 죄악의 쓴 뿌리를 몽땅 뽑아 주시옵소서. 당신이 심판의 권한으로 제거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온유겸손한 자는 복이 있다 했사오니, 저희는 온유겸손해야 되겠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간절히 사모하는 심정과 같이 저희 마음에도 간절한 흠모의 심정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리워서 몸부림치면서 당신 앞에 부복한 이 자리가 거룩한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통일교회의 역사를 지금까지 당신께서 엮어 오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제단의 스승은 그 누구도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도자는 오로지 아버지밖에 없사옵니다. 당신만이 여기에 중심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다 보면 실망을 하기가 일쑤요 서로 낙망의 요건을 남길 것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와 인간이 화합하는 데 있어서 높고 귀하신 것은 아버지요, 절대적인 권위의 중심도 아버지인 것을 언제나 믿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고, 천하고 외로운 존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신을 느끼면서 아버님을 믿고 따라간다고 하는 마음을 저희들이 생활 환경권내에서 잊지 말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느껴지는 모든 감정을 통하여 보여지는 시야를 통하여서 일체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표시가 되고 상징이 되어서 그 일체가 그의 형용과 간절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들의 생활이 되고 딸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무릎을 꿇은 스스로의 모습을 저희 자신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있어서 나는 이렇게 왔다고 할 때, 현재의 내 마음은 아버지와는 상극적인 자리, 상거적인 자리에 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아버지 앞에 부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원치 않는 자신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에는 자신을 아버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회개의 심정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높고 귀하신 거룩한 뜻 앞에 긍휼과 자비의 손길이 찾아와 생명의 인연으로 연결하여 저희들을 매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며 사무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3월도 이제 중순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1971년도를 맞이하여 '통일기반 확보'라는 표제 밑에서 3월까지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만복을 지니시고 영광을 홀로 지니시어서 사랑하는 아들딸 앞에 찾아오시는 그 걸음이 도리어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후회하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되지 않게 해야 되겠습니다.
1971년도 이해에 있어서 찾고 찾아오신 당신의 발걸음이 여기에 머무르실진대는 영영 떠나고 싶지 않는 마음으로 머무르실 수 있는 발걸음이 되어야 되겠사옵고,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쉬실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로서 아버지께서 영원히 기뻐하시면서 축복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아버지 앞에 저희들은 너무나 거리가 멀고, 너무나 부족한 것을 느끼고 아버지 앞에 용납받기를 고대하면서, 이제 이 시간도 저희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명령과 더불어 결의할 수 있는 이 아침,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아침에 서울 본부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는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향하여 생명의 인연을 찾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이때는 과연 그 누가 붙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가야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는 저희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할 때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미래에 찾아오는 그날들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서게 되고, 당신의 명을 따라 그날을 맞을 수 있는, 망하지 않고 당신이 영광의 자리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일선에 나가 싸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달프게 당신을 부여잡고 호소하는 사정을 들어주시옵소서. 민족을 대신하여 정성을 들이게 하여 주시옵고, 그 정성이 끝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 정성 위에, 한달도 그 정성 위에, 일년도 그 정성 위에 72년도까지 저희들이 해야 할 책임이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을 권고하시옵소서. 그들이 정성들인 보조를 아버지께서 맞추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들딸과 더불어 같은 생활권내에서 아버지께서는 후방을 지키시옵고, 저희들은 당신의 영윈한 터전을 넓히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때를 그저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당신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드릴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을 저희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시아의 모든 운명을 아버지께서 맡으시옵소서. 한국이 가야 할 내일의 소망을 위해 불쌍한 저희들과 같이하시는 아버지께서는 더 불쌍한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생애노정과 더불어 숱한 수난의 길이 이 민족과 저희들 앞에 엇갈려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저희들은 저희에게 맡겨진 바의 책임을 효자로서 감당하여야 할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내일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신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할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악의 권한이 팽창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악을 능가할 수 있는 하늘의 권을 결집하고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갖추어, 악 앞에 강하고 담대한 하나의 보루가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찾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계를 바라보고, 수많은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저희들 앞에 부과된 책임이 가중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고 오는 날들이 슬픔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소원과 소망을 열고 갈 수 있는 날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 당신께서 저희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말 씀
인간들은 좋은 물건이 있다면 그걸 흠없이 만지고 싶어합니다. 혹은 가장 귀한 그 무엇이 있으면 그 가장 귀한 것을 찾아서 보호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건이 그러하다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세계 역사상에 참된 사람이 있다면 그 참된 사람을 찾아서 그분을 모시고, 받들고, 변치 않는 자리에 두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우리 인간이 그렇다 할진대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도 역시 귀하고 거룩한 것은 이 천지간의 귀하고 거룩할 자리에서 보여 주고 싶어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귀하고 참된 것이 있는 그 자리로부터 귀하고 참된 환경이 벌어지기를 우리 인간의 마음이 바라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들은 참된 것, 혹은 귀한 것을 많이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것은 나와 더불어 같이하고 싶고, 나쁜 것은 나와 더불어 격리시키고 분리시키고 싶은 마음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잘 느끼는 바입니다. 좋은 것은 자기와 더불어 길이길이 같이하고 싶어하고, 나쁜 것은 자기에게 있어서 '안 되겠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쁜 것은 거부로 나타내기 쉬운 것이요, 좋은 것은 환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좋은 것은 남아지지 않고 나쁜 것이 내 생활권내에 침범하느냐,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나 자신이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고, 또 나 자체도 물론이지만 내가 처해 있는 자리가 화합하고 혹은 기뻐할 수 있는 이런 환경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귀한 것 혹은 선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터전이 되어 있지 않고 그 환경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머무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귀하면 귀한 것일수록, 좋으면 좋은 것일수록 갖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귀하면 귀할수록, 좋으면 좋을수록 그 안팎의 환경과 터전이 귀하고 좋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그 추구하는 대상으로서 귀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지만 그 대상인 귀한 것과 좋은 것이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보다 귀하고 보다 좋을 수 있는 자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상반된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좋은 것을 그런 자리에 놓았다 하더라도 그 좋은 것은 반감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체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하나의 환경의 터전이 될때, 그러한 나 자체 앞에 백의 가치를 지닌 것을 놓아 둔다 하더라도 그 백의 가치를 지닌 좋은 것이 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십, 혹은 사십, 혹은 그 이하의 가치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가치의 기준마저 세울 수 없는 입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온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고 싶고 귀한 것을 갖다 놓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할 때, 천국은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요, 참된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함과 참이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거룩한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귀한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 신앙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 ;20--2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천국이 거할 수 있는 내 마음이 지극히 높고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귀할 수 있는 내적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그 귀하고 선하고 높으신 하늘이 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 귀하다는 것을 찬양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서 귀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보다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늘이 높다는 것을 알기 전에 나 자신에게서 높은 가치를 스스로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늘의 귀한 것을 알기 전에 하늘이 찾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 자신의 가치를 얼마만큼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하늘을 점령하고 그 하늘을 지배할 수 있는 제일의 여건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크고 귀한 것, 높고 귀한 것 혹은 지극히 선한 것을 찾아 나가는 우리의 인생임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인간은 누구나 그것을 다 원하지만 그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그 원하는 바의 목적을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왜냐? 그것은 선이 나빠서가 아니고, 선이 나를 멀리 해서도 아니고 그 지극히 귀한 것이 나와 상반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귀한 것이 나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싶더라도 나 자체가 그럴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관계맺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선이, 아무리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선과 귀한 것은 어떠한 자리에 머무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알다시피 선은 선한 자리에, 귀한 것은 귀한 자리에, 악은 악한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다 귀한 자리, 선한 자리, 높고 거룩한 자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한 마음을 지속시킬 것인가
여러분 스스로가 내 마음에 귀한 마음이 있느냐, 내 마음에 선한 마음이 있느냐, 내 마음에 거룩한 마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이 있다고 자기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정녕 일년을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느냐? 혹은 그러한 마음을 갖고 일년 이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이 십년을 하루와 같이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느냐, 십년만이 아니라 일생을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 나갈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위에는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운명에 동반하고 싶어하는 본성의 그 마음으로 우리는 하늘을 바라고 나왔고, 또 우리의 본연의 마음이 자신의 생활 가운데 있어서 일시적으로 내 마음을 자극시키고 나 자체에 인식을 시키고 있지만 그 선의 바탕이 과연 며칠 동안 내 마음과 더불어 내 생활권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적인 인연으로 남아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 있다고 자랑할 수 없는 자신들임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선한 그 마음 자체를 발견하였다면, 발견된 그 마음을 내 하루의 생활에서, 한 달의 생활에서, 일년의 생활에서 어떻게 반영시키고 보유할 것이며, 어떻게 여기에 상극되고 상반되는 모든 여건을 제거시키고 그것에 굴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여 나갈 수 있는 자주적인 선의 모체를 나로 말미암아 심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귀하고 선하고 거룩한 그 본성을 지녀 가지고, 나 자체에 품어 가지고 하루의 생활은 물론이요, 일년의 생활은 물론이요, 일생을 산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이 살아 나가는 생활에 있어서 선이 같이하지 말라고 해도 같이하는 것이요, 귀한 자리가 아니라 하여도 그것은 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귀한 것을 악이 점령할 수 있느냐? 점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선한 것을 악이 소화시킬수 있느냐 할 때 아무리 악한 세상이 그 주위를 철옹성같이 에워쌌다 하더라도 그 선한 것과 귀한 것을 소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이 선한 터전에 서 있고 선한 환경과 같이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선한 주체와 선한 대상이 하나되어 절대적인 선의 방향을 갖추어 나가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역사를 빚어낼 수 있는 것이요, 그 사연은 새로운 인간으로 혁신시키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은 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의 바탕을 가진 인간이었으나 타락으로부터 출발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악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바탕은 언제나 악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포위한 악한 환경이 선한 환경 보다도 몇십 배 몇백 배 더 큰환경으로서 엉클어져 있고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그 마음이라는 것은 일시에 내 마음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 환경을 통하여 느껴지는 거예요. 느껴지는 것뿐으로 흘려 버리기가 쉬운 것이지 이 느껴지는 것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고, 선의 실체가 되어 악의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는 표본과 모체로서는 심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외적인 선의 기반을 닦으려면
그러면 하나의 희생의 모체로서 형성되어 가지고 그 악을 제거시키기 위해서는, 내 마음 바탕에 있어서 선과 더불어 짝이 될 수 있고 선과 더불어 터전이 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내적 기반과 외적인 환경의 기반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점령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체에 주어진 환경을 점령하기가 더 어려운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라를 등에 업고 나를 반대하는 사탄이나 사회를 발판으로 하여 반대하는 그 사탄이 무서운 것이 아니요, 그 악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본심, 그런 본바탕을 에워싸고 선 앞에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모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이권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운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쟁의 상대가 되어서 여기에 비례되는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제아무리 선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선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본심으로 기도하는 데서나 혹은 하늘을 향하여 정성들이게 될 때에는 마음속으로 울려오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또는 소망을 갖기도 하지만, 일단 인연되어진 그 환경이 끝나게 되면 그것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그것이 영영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사회의 생활환경에 휩싸여 원치 않는 하루, 한 시간의 생활을 거치고 난 후에 그 본심의 마음 바탕, 자기 소성과 비교해 볼 때 여지없이 유린당하는 일들을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개척해야 할 사명자로서 이처럼 억센 사탄 마귀의 토대를 완전히 분석 비판해 가지고 악의 기반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신앙자의 태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자들이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어디에 있느냐? 마음의 소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갖춰지는 선한 마음을 어떻게 외형적으로 판도를 넓혀 나가느냐 하는 것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선하고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터전을 닦는 문제에 직결되기 때문에, 이것을 하루의 생활철학으로, 하루하루의 생활목표로 세워 투쟁해 나가는 것이 사회나 민족 또는 국가 앞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는 우리의 상대적 세계에서부터 나를 공격하여 점령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환경으로부터 내 마음속을 점령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그 일선에서 내 마음의 선한 사상으로, 반대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을 여지없이 끊어 버릴 수 있는 용단을 내려 계속되는 피어린 정의의 투쟁의 무대를 거치지 않고는 영원한 선, 지극히 높고 귀한 것은 내 마음에 영원히 임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시적으로는 기쁨을 남겨 주고 혹은 소망의 자극적인 터전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생활에서의 터전이 되고, 영생의 기원이 되고, 영원한 행복의 기원이 되고, 선의 누룩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이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심에 호소하고 나오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자리이지만 우리 자신들이 넘어야 할 책임과 의무로써 감당해야 할 이런 분야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분야를 현재의 입장에서 소망의 입장에까지 발전시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오늘이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상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내일의 소망의 터전의 환경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주력이 없게 될 때에는 아무리 내일의 선한 소망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나와 내일의 그 소망과는 상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과 상관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의 환경에 있어서 본심이 요구하는 선하고 귀한 것, 우리가 요구하는 그 무엇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요구에 대응될 수 있고, 상응될 수 있는 환경적인 요건을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세상에서와 같이 총칼을 가지고 싸워서 타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이 소모전쟁을 방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여기에는 수고와 정성이 아니면 안 됩니다. 정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의 도수
그러면 그 정성의 도수가 어느 정도까지 가야 되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좋아할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이 억천 만세까지라도 너와 나의 사이를 끊을 수 없다 하는 그런 좋은 자리의 친구냐는 것입니다. 값비싼 어떤 것보다도, 자기 부인보다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다. 하루의 생활 감정의 말 한마디로 버릴 수 있는 그런 인연의 자리가 아닙니다. 생명 자체를 거두어 가더라도 끊을 수 없는 자리가 이러한 친구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정의 자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선의 모체이기 때문에 오늘날 내 본심에 같이 하던 선과 인연되었던 모든 인연들은 영원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갈래야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연이 내 마음과 더불어 갖추어질 수 있는 환경이 됐느냐? 그 환경에 선 친구가 됐느냐, 그 환경에 선 입장에서 서로 정성을 들일 수 있는 하나의 단체가 됐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것이 하나의 자리에 있어서 선의 주체가 되느냐, 혹은 모체가 되느냐, 그리고 창조적인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에서 판결이 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런 문제를 두고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 아버지를 모셨다 할 때, 그 모시는 데는 말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모셨느냐? 우리의 오관을 통한 모든 느낌은 우리의 감정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오관을 통하여,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촉감을 통하여서 얼마만큼 아버지를 사랑하고, 얼마만큼 아버지의 귀한 가치를 깨닫고, 아버지의 거룩함을 사모하고, 찬양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청중과 더불어 기도하는 시간에, 어마한 은혜로운 시간에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권내에 있어서 시간 시간을 통하여 끊임없는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느껴지는 마음을 중심삼고 내 생활무대에서 일체 내보내질 수 없는 것으로서 하늘과 더불어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결과적인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문제되는 것입니다.
정성은 나를 구해 주는 요소
그러므로 여기에서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될 것은 정성을 가지고 대해 나가지 않는다면 악과 더불어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자리는 극복해야 할 싸움의 고비를 넘고 난 그 자리가 아니라 싸우지 않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오직 정성어린 마음과 행동만이 영원한 자리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는 데는 무슨 기도를 하느냐? 자기를 제어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좀더 편하고 싶어하고 내가 좀더 행복하고 싶어하고 나의 모든 것을 중심삼고 동기를 삼고 싶어하는 이 모든 귀착된 환경의 여건, 그러한 스스로의 모습을 타개하고 이것을 부정하기에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보조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정성을 들였을 때, 그 정성들인 선에 대한 가치가 크면 큰 만큼 그 악한 환경의 여건이 제거될 수 있는 비례적인 자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즉, 선한 동기의 마음이 악을 제거시킬 수 있는 판도를 넓혀가는 그런 입장에 서기 때문에, 그 싸움에서 승리자로 서게 되면 마음이 자연히 기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쁘냐? 내 본성이 이 선의 환경과 더불어 배양되어 가지고 주고받을 수 있는 터전이 벌어지고, 그것이 넓어짐으로 말미암아 지금 까지의 생애에서 느끼지 못하던 희열과 만족과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기도 시간에 따라 그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권내에 얼마나 정성을 투입하느냐 하는 것에 비례해 가지고 그 정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정성이야말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는 제일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리는 여러분을 구해 줄 수 있는 동기나 자극은 될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원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성과 직결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여러분 자체의 구원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정성은 어떻게 들여야 할 것인가
여러분, 타락은 실제로 누가 했습니까? 우리 인간은 타락한 혈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악한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 자신은 거룩하시고 귀하신 하나님 앞에 상응의 존재가 아닌 상반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상반된 인연을 추구하고 나온 잘못된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타락한 인간이 높고 귀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화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다 할진대 그것은 말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냐? 그것을 자기 자신은 아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은 안다는 거예요. 제삼자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면 아무리 환경이 부정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할 수 있는,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고 현재도 이렇게 살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다' 하는 철석같은 마음을 다지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더불어 환경과 일치되었다. 환경은 그 느낌과 일치되었다' 할 수 있는 선의 환경과 선의 터전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여기에는 말과 행동을 한껏 전개시켜서 새로운 부활의 인연을 연결시키고 생애에 있어서의 그 투쟁의 여력을 보강, 보급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이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정성이 없으면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성들이는 것이냐? 뭐 시장 거리에서 약 장수들이 약을 파는 식으로 들이는 것이냐? 반대라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는 자기 자신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반목하고 질시하고 의심하고 서로를 파탄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어 있습니다.
정성은 어떤 자리에서 들여야 되느냐? 아무도 없는 곳, 나만이 아는 곳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자기의 본심이 하늘을 그리워하게 될 때의 그 마음은 누구나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만 아는 그 마음을 중심삼고 나만의 터전을 해결하려니 누구나 아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모르는 자리,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여서 갖추어진 것은 자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 : 2-- 7)"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4년 동안 바울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았느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성들인 은사로써 하늘이 보여준 삼층천의 이념을 두고 볼 때, 그 이념이 나와 더불어 직결되고 내 생활과 더불어 직결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 환경을 다짐하기 위한 실천 과정을 성사시키고 난 후에야 비로소 바울이 그런 사실을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본 것은 본 것으로만 옮겨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 것을 내것으로 순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천국이 크니만큼 큰 활동이 되도록, 그것이 세계적이면 세계적인만큼 세계 인류와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일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어떤 환경도 기쁨으로 삼층천 이론을 중심삼고 모든 여건을 타개하기 위한 싸움을 해나온 여기에서 바울의 고귀한 인격이 형성된 것입니다. 바울이 한 행동을 보면, 바울에게는 고귀한 인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는 누가 알게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가운데 계시는 하늘과 내가 관계를 맺고 선한 것과 관계를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개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존재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은밀한 자리에서 들여진 정성과 더불어 느끼는 기쁨은 대단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포만하여 제삼자 앞에 감화를 주고 영향을 미치게 될 때 여기서부터 하늘의 명령을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이 시작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모시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성을 들여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그 골수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지니고 꾸준히 정성들이며 가는 사람의 가는 길은 올바른 길입니다. 정성은 은밀히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과 더불어 몸 마음으로 맞이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느냐? 그러기에 여기에서 하나님을 보고 싶으면 내가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만나고 싶으면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정성들이며 만나고 싶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늘 아버지의 착함과 귀함이 머무를 수 있는 자기 자체의 내적인 인연을 갖추고 하늘을 위주로 하늘의 가치를 대신한 입장에서 아버지를 얼마만큼 모셔드렸느냐? 여러분이 오관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있겠지만 내가 듣되 얼마만큼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들어 봤느냐? 볼 때는 얼마나 그런 마음으로 보아 봤느냐? 또 내가 느끼되 얼마 만큼 정성을 다하는 자리에서 느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들인 것이 이 정도면 되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지극히 선한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정성의 터전에 의해 되었느냐 할 때에 여러분이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정성의 기준에는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최고의 선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정성을 상대적인 터전으로서 인정할 수 있겠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가해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자리에는 그 자리가 부족한 자리요 천한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 육신의 높고 영광된 자리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지옥에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 가지고 여기가 도리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 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눈물 흘린다면,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이 되어지고 관계가 맺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필히 신앙생활을 통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정성을 들였으니, 아버지, 이제는 나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정성을 들일 만큼 들였는데 하늘은 무심도 하시지 내 사정을 몰라주시네'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시조 아담 해와가 죄를 범한 그날부터 죄를 범한 이것을, 마음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심어진 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온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을 짊어졌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걸어 나오셨으니 나도 어떻게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면서 가는 신앙길에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미남 미녀라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영광의 모습을 갖추고, 세상을 대하고 남을 수 있는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정성을 들이는 데 방해는 될지언정 도움은 못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못나기를 나 이상 못난 사람이 없는 것이요, 세상의 죄인 중에 나 이상 죄인이 없다는, 역사적인 비참함을 느낄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일시에 꺼져 버린다 해도,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하더라도, 하늘이 계시다면 이왕 터트려 버릴 바에는 흔적도 없이 터뜨려 버리고,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모체로 해 가지고 다시 흩어진 것을 빚어낼 수 있는 당신의 은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말하면 죽고 남아진 생을 중심삼고 부활의 혜택을 바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자리에서 생명의 인연이 교차되고 생명의 인연이 결정되는 것이지, 스스로 당당한 입장에서 '내가 이만하면 됐지' 하는 자신을 가지는 거기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깊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만큼 정성을 들였느냐? 내가 아버지를 보고 싶다 할 때 얼마나 정성의 대가를 치르면서 보고 싶어했느냐? 아버지와 같이 가고 싶고, 같이 살고 싶고, 아버지가 원하는 나라와 아버지가 원하는 환경을 맞이하고 싶다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인 마음을 가지고 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정성들여 보았느냐
원수는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 : 13)"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무슨 인연도 없이 목숨을 버린다면 무슨 큰 사랑이 되겠어요? 친구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생명 이상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지옥간다…. 이렇게 사망의 고통을 자신이 느끼며 대신 죽겠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각지도 않으면서 죽어 주는 것이 사랑이예요? 정성을 통하지 않은 희생이라는 것은, 더구나 자기를 위해서였다면, 그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왜 바쳤느냐 할 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러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가 천국가기 위해서 친구를 이용해 먹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 보게 되면 순교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죽어야 예수와 같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이토록 귀하고 높으신 분이 나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나는 응당히 그분의 하나의 몸이요, 하나의 살이요, 하나의 핏줄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야 되고, 그분의 삶과 더불어 부활되어야 된다. 나는 그와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에 그가 걸으신 길은 내가 응당히 걸어야 할 길이다. 그가 만민을 위해 죽은 것처럼 나도 나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응당히 만민을 위해 죽는다' 이러한 생각으로 순교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말라고 해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근본 문제는 여기에서 엇갈리는 것입니다. 사랑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여기에서 엇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를 구해 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그를 대신해서 정성들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생명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 생명을 걸고 정성들이는 사람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 생명을 중심삼고 얼마나 정성을 들여 봤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 세상에 태어나 칠, 팔십 년 동안 영광스럽게 살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외적 내용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너는 사람을 사랑했느냐 할 때 '예 했습니다','어떻게 하였느냐'할 때'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알고, 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고, 그가 흘려야 할 눈물을 내가 흘리고, 그가 당해야 할 고통을 내가 당할 때 나는 부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한 생명을 부여잡고 일년, 이년, 삼년 혹은 그 이상 몇년 동안을 정성들여 봤느냐? 이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사망권내에 머물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 땅 위에 사는 세계 인류 가운데 한 생명을 위해서 얼마만큼 정성들여 봤느냐 이거예요. 내가 그 누구를 위해 얼마만큼 이나 정성들여 봤느냐 이거예요. 그것은 내가 좋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구해 주기 위해서…. 이렇게 내 손길을 거치지 않으면 그는 영락없이 지옥에 간다는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 봤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정성들이고 계신다
개인이면 개인을 대해서, 가정이면 가정, 동네면 동네, 김씨 가문이면 김씨 가문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해 봤느냐? 내가 개인은 구했지만 가문은 못 구했기 때문에 가문을 구해야 된다 하면서 어떤 가문을 위해서 정성들여 봤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복귀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서 얼마만큼 정성들였느냐? 생명을 걸어 놓고 정성들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는 면목이 없는 것이요,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이요, 어떠한 반발이나 반문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였느냐, 하나님이 정성을 들였느냐 할 때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들여 나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귀한 것입니다. 내가 정성들이니 내가 귀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보다 더 정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정성들여 만든 물건은 귀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내 일생에 있어서 귀한 물건이 뭐냐고 할 때는 정성을 들인 물건인 것입니다. 몇 시간이면 만들 수 있는 것이지만 일년 십년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다 할 때는 아무리 내용적으로는 나쁠지 모르지만 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은 귀하나 기계로 만든 것은 귀하지 않다고 하지 않아요? 흔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건 왜 그러냐 이거예요. 모양은 더 좋은데 말이예요. 미국 같은데 가 보면 손으로 만든 물건은 비싸고 기계로 만든 물건은 쌉니다. 사실 모양이나 모든 면에서 기계로 만든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이 없는 거예요, 정성에 비례해서 참된 가치는 드러납니다. 그것이 양심의 발로라는 거예요. 그것은 사람이 간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천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들보다 더 정성을 들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아들딸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그 다음에는 그런 아들딸들이 찾아 나가는 가정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그 가정이 찾아 나가는 종족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계십니다. 가정을 찾아 주면 후손이 잘 되어야지요? 그러니 그 후손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의 가문을 이루었으면 그 가문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그들이 합하여 한 민족이 되었으면 그 민족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이렇게 앞놓아가며 정성들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가 망하지 않고 넘어가고 또 넘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앞놓아나가면서 정성들이셨고, 참된 주체와 실체적인 권한이 하나님의 노정에 남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발전의 일로를 거듭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성 들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정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세계의 사탄을 대해 싸워 가지고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 졸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한 마음을 갖고 나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므로 우리가 정성들이지 않고는 그런 마음의 바탕을 이어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도상에 있는 아들딸들로 하여금 해방된 자유로운 안식의 터전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가정을 세울 뿐만 아니라 하나의 종족을 세우고, 종족뿐만 아니라 하나의 민족을 세우고, 민족뿐만 아니라 하나의 주권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수고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고해 나오셨지만, 숙원이던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가지고 해원성사할 수 있고, 하나의 세계를 찾을 수 있게 정성들여 주었지만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없었고,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가정이 없었고,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종족이 없었고, 민족이 없었고, 국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어받게 하려고 했지만 들여야 할 정성을 못 들였다는 것입니다.
정성으로만 극복이 가능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자기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제패하여 영광을 누리려 했다는 거예요. 자기들의 행락만을 꿈꾸었다는 거예요. 비운의 역사에 있어서 슬픔과 더불어 사라질 수많은 인류를 생각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노정에 있어서도 극복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극복은 무엇을 가지고 하느냐? 그것은 수단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슨 재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오직 정성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모셔 봤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해 봤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감동을 통해서 느끼려고 했느냐, 또 그러한 체휼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체휼을 가졌으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체휼을 하게 하느냐, 그 사람이 나를 대해 하나의 은사의 주체로서 믿을 수 있고, 그 사람이 나를 대하여 생명의 기원으로 느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전도를 하러 나간다 할 때 그냥 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가지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는 데 있어서 일주일이나 한 달, 혹은 일 년 이 년 삼 년은 걸릴 것이다 하면 그 기간 동안 정성들여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먹으나, 자나 깨나, 오나 가나, 혹은 쉬나 어떠한 행동을 하나, 일체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 앞에 완전히 전부 주어 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면 완전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에 가서 인격이 되는 것이요, 영광의 터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부에 있는 교인들 중에 오래 되었다는 사람 '내가 먼저 교회에 들어왔는데'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생님도 그러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식은 평등하게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사람은 잠 잘 때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지 않습니다. 제일 나쁜 자리에 가서 자는 것입니다. 정성은 세상에서의 좋은 것과 비례가 아니라 반비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정성이 안 들여지는 것이요, 나쁘다고 하는 자리일수록 정성이 잘 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성은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이 민족을 위해 정성들일 수 있는 단체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민족의 운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민족을 대표한 비운의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가 되면 민족이 망하더라도 그 단체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천륜입니다. 이게 틀리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 수난의 종교라는 거예요. 그 수난의 배후에는 죽음의 교차로가 연결된 정성의 터전만이 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과 제단은 피어린 정성의 터전과 더불어 상속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라고 할 때 이 말은 무서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제단이 연결되어 공의의 심판권을 가지고 심판할 수 있는 거룩한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선열들의 정성의 터전을 상속 받으려면
이것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교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조들이 들인 그 정성에 꽃을 놓고 무늬를 놓아 주기 위해서…. 여러분은 다른 의미에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았지만, 나는 이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정성은 내적 가치에 있어서 미달되어 있기에 나로 말미암아 보강되고, 나로 말미암아 완비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사실이 그렇다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승자는 뜻을 절대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와 선생님에 대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러분이 이러고 저러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을 세우기 위해 그 배후의 모든 정성어린 터전이 어떻게 상속되어 왔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 선생님에 대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다가는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계승자는 뜻을 절대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선생님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백 프로 잘한 것으로 소화시키며, 또 용서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중심삼고 정성들이며 깊은 자리에서의 기도의 한 제목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생님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함을 평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 잘못함을 놓고 자기의 뼛골이 녹아나게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선생님이 인계해 나오던 그 뜻을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입을 벌려서 종알종알 하는 사람은 전부다 폐품들 입니다. 이게 원수라는 것입니다.
정성어린 터전을 상속받았을 때는 그것을 절대시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수가 안 돼. 그들이 피흘려 이루어 놓은 터전을 그들이 이루어 놓은 가치 이하의 것에 옮겨 주고 싶을 것이냐? 그렇겠어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절대시하는 사람한테 옮겨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남이 정성들인 물건에는 절대 함부로 손대지 않아요. 여기 본부에 있는 사람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정성들여 가지고 보내준 예물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정성들인 물건은 독약같이 무섭다는 겁니다. 무서운 물건이라는 거예요. 그런 예물에 함부로 손댔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정성들인 것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본부에서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 먹으면 병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다 곯아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을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팔아먹는 거라구요. 뼈다귀를 깎아 먹는 거예요. 여러분이 있는 본부교회 이 자리가 바로 정성들인 자리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다가는 자기의 선조들이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놓은 복을 전부다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참은 악과 싸워 가지고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참이라는 것은 악과 싸워 가지고 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악과 싸울 때 처음에는 빼앗기니까 진 것 같지요? 처음에 이겼다고 날뛰는 사람은 이미 자기의 선조로부터 쌓아 놓은 공을 남에게 옮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내 손이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봤느냐? 그렇게 정성들이다 상처가 생긴다면 그것은 영광의 훈장이 되고 뜻과 더불어 하늘이 함께하는 훈장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얼마나 민족을 위해서 이 눈으로 눈물을 흘려 봤으며, 이 가슴으로 가슴이 녹아나는 그런 근심을 품고 얼마나 밤을 새워 가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몸부림쳐 봤느냐? 나는 이렇게 민족을 사랑했다 할 수 있고, 그랬기 때문에 이 민족은 나와 더불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민족도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사랑 하는 사람은 민족과 더불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렇게 사랑하는 곳에 민족도 허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막아 놓는다 하더라도 그 권력은 어차피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가까와 오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와 오면 거기에 따른 책임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고 걱정해야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 비례하여 그 이상의 정성을 어떻게 들여 가지고 그 때를 맞을 것이냐, 더 큰 때가 오면 여기에 비례될 수 있는 정성의 환경적인 여건과 그 바탕의 터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와 오는 때를 웃음으로 맞이하는 것보다도 조급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미숙한 것을 다짐하고 하늘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이 앞서야만 다가오는 그때와 시운은 나를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맞이하려는 사람은 자기 것으로 이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때를 대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버림받고 쫓겨다닐 때는 기도하지 않아도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는 내가 무관심하더라도 하나님이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날이 찾아오게 될 때에, 더 큰 것을 갖출 수 있는 환경과 터전을 못 만들게 되면 그 영광은 나에게 왔다가도 옮겨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발판 삼아서 지나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글프고 무서운 일이 우리 신앙노정에 있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는 데는 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위해 얼마나 눈물을 흘려 보았느냐
여러분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개인복귀, 가정복귀를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내 개인을 중심삼고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 내 아들과 딸을 위해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자기 친족과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와 세계 인류, 하늘땅 만민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권에 삼켜져 있는 이 원한의 터전을 막아내고 소화시키기 위해서, 나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정성의 소모를 가져 가지고, 그 소모의 결과가 영광의 터전으로서 남아지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주체적인 내용을 얼마나 제시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찾아오는 때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그 나라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나라가 나타나고 찾아왔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자리가 된다면 이것은 비통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살아왔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진짜 지옥 가고, 천당 간다 하는 것을 느껴 봤습니까? 형제 들이 그렇다는 것을 진짜 느껴 봤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붙들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대신하여 소망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책임을 다했느냐 할 때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를 남의 길거리로 보지 않았습니다. 삼천리 산야를 바라볼 때도 남의 산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내 손이 거쳐갈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라…. 눈물어린 마음을 가져가지고 네가 주인을 얼마나 고대했느냐'하면서 뼛골에서 울어나오는 마음으로 산하를 바라보고, 그것을 품고 싶어했고 서글픈 심정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했습니다. 삼천리반도에 깃들 수 있는 운세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과 더불어 엉클어지고 이 민족은 하나님의 새로운 민족으로서 등장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단을 형성한 모체적인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정성들인 이 모든 터전을 여러분 자신이 유린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걸 느낀다면 이 청파동 골목에 들어올 때…. 통일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6천년 역사를 거쳐온, 하늘의 뜻을 대해 온 교회요, 그런 청파동 골목이라면, 이 길을 거쳐오면서 흐느껴 가지고 눈물로 얼룩질 수 있는 걸음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마루바닥에서 눈물짓고, 이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게 될 때,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천년만년 고대하던 소원의 한 터전이란 것을 느껴 봤느냐? 뼛골이 울려나고 피살이 인연된 심정으로 자기 일신의 모든 의식을 잊어버리고 눈물만으로 시작하여 눈물만으로 끝낼 수없는 슬픔과 서글픔이 나를 점령해 봤느냐? 자기의 환경을 잊어버리고 호소한 때가 있었느냐? 그런 것이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이 그 이상의 자리를 통해서 기반을 닦아 놓은 터전이 있다면 그 터전의 정성이 여러분을 참소할 것이 아니냐? 여기 이 문이라는 사람도 하나님이 억천만세의 수난길을 걸어오시면서 뜻을 위해 들인 정성이 나를 심판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정성을 중심삼고 내가 심판의 자리에 서는 것이니 이게 제일 무섭다는 거예요. 정성들인 아버지 앞에 어떻게 동정의 한 시간을 내 환경에 남기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지극히 몸부림치는 생활이 여러분이 믿고 따라나가는 선생님의 생활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이 변화를 일으킬 때, 이것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동삼삭 절기보다도 더 잔인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알면 알수록, 가면 갈수록 가중된 책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와올수록 하나님 앞에 책임을 새로이 다짐하는 이러한 길을 가야 할 것이 정상적인 하늘 길을 가는 사람의 길이 아니냐? 그 길이 하늘이 가는 길이요, 아버지가 가는 길입니다.
남보다 더 정성들여야 할 사람이 예배에 늦어서야 되겠느냐
효자가 가려고 하는 길을 막고 나서면서 '아들아 이젠 좀 그만 하라'고 걱정하시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내가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한 마음을 중심삼고 행동을 개시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야 좀 쉬어서 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두터운 사랑이, 그런 아버지의 깊으신 후정이 남겨질 수 있는 터전을 어떻게 이 땅 위에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일생에 있어서 누구에게 그 무엇을 주고 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것은 내 일생의 최후의 종착점에서 남겨 줄 예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곳에 두고 싶고, 귀한 것은 귀한 곳에 두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느끼는 사실임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극히 좋은 곳에 머무를 수 있는 환경과 터전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타락한 내가 이것을 남기고 가기 위해서는 이 시련 고통을 극복해 가야 합니다. 극복을 제시하고 또 극복을 가중시키기 위해서는 거기에 비례되는 정성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으며 민족의 운명을 중심삼고, 하나님 뜻을 중심삼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철렁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고 딸이 죽고 부인이 죽었더라도 그것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자식이야 죽겠으면 죽고, 집안이야 망하겠으면 망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망하더라도 그것은 나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냐, 국민으로서 소망의 터전을 잃는 것이 아니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세계가 망해서는 안 되겠기에 세계를 붙들고 호소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원수들의 터전도 말없이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정성들이는 이러한 자리에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을 생활에서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느끼는 기쁨과 선한 것은 그 사람의 것으로서, 오늘 현실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민족과 더불어 같이했으면 틀림없이 이 민족을 상속을 받을 것이요, 세계와 더불어 같이했으면 세계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사일에 관계없이 그 결과는 기필코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정성이 아니고는 복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정성들여야 할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늦게 오면 되겠어요? 그런 사람은 부끄러워서 얼굴도 숙일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간을 잘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남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시간도 안 지키면서 '오 하늘이시여' 할 수 있어요? 정성은 남이 알게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정성을 들이려면 차를 타고 올 것이 아니라 걸어야 합니다. 여기 와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한참하고 여기 와서 더 간절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정정은 이렇게 들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환경과 그들이 추구하는 욕망과는 반비례하는 데에서 정성은 쌓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과 극복은 상극적인 개념입니다. 이것은 서로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을 들이지 않고는 극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극복을 하려면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통일교회란 이름은 불쌍한 이름인 것을 아옵니다. 또한 통일교회 책임자는 비참한 죽음의 자리를 넘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민족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하늘의 때는 저희의 목전에 다가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을 아버지께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은혜에 배은망덕한 불쌍한 무리들이 되지 말고 그 때가 오거든 자신의 있는 정성을 다 퍼부어, 영광의 자리에 있어서 만민에게 칭송을 받고, 누구보다도 죽음으로써 또다시 아버지 앞에 그 터전을 닦아 놓고 가겠다고 하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사람은 아버지께서도 무서워하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남아졌다는 사실…. 통일교회 사람들은 비판의 눈이 높아가고 있사옵니다. 통일교회 간부에게 있어서는 자기 권한이 높아지는 것에 대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볼 줄 알면서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선은 선한 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귀한 것은 귀한 곳에 머무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귀한 것이냐고 할 때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스며들고, 말없이 그늘에서, 말없이 스스로를 망각하는…. 이것은 전체를 너무 위하기 때문에, 전체를 너무 아끼기 때문에 안 그럴 수 없다는, 전체가 상처를 입을까봐 내가 안 그럴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께서는 역사의 뒷면까지도 점령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통일가에 허락하신 혜택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인류가 흠모해 가야 할 놀라운 역사는 엮어지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그 깊은 사연을, 그 누구도 모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부디부디 여기에 모인 자녀들의 마음에 연결시키시옵소서. 가을이 지나고 봄날이 오면 모든 초목이 푸른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통일가에 있어서도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원 높은 한날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탕감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서글픈 인연을 남겨 놓고 소원의 해원성사의 때가 오면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를 중심삼고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교회를 붙들고 기뻐하지 않고는 안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이것을 몰랐던 저희들이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싫다, 아버지는 싫다고 하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탄의 고차적인 시련권내에 말려들어가 있는 것을 알고, 아버지와 더불어, 교회의 운명과 더불어, 뜻의 운명과 더불어 내가 먹고 산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철석같이 자리잡힌 자리는 아무리 미운 자리라 하더라도 망하지 않을 것이오나 그 반대의 자리는 저희가 원하지 않는 자리이오니, 아버지, 만약 그 자리가 우리에게 있다면 제거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어느 한때 정성을 들여 기도를 해 봤으며, 어느 한때 정성을 들여 당신의 말씀을 엮어 봤으며, 어느 한때 정성어린 마음으로 골수에 사무친 당신의 마음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습니까? 어느 한때 친구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피눈물 나는 자세를 갖추어 자기의 몸을 목석과 같은 자리에 넣고 아버님만이 꽃 피고 민족만이 해방받게 해 달라고 몸부림쳐 봤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였던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이 부끄러운 모습을 어떻게 감추겠느냐고 하면서 백주에 나타나지 말고 스스로 밀실에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또 쓰고,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판결의 시간이 우리의 생애노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선한 환경, 귀한 환경을 거쳐 가기 위한 노정에는 정성이 절대적인 요인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정성들여야 할 몸, 정성의 내용을 갖추어야 할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생활을 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여기에 서 있는 아들도 이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신 아버지, 남아 있는 수난길도 아버지 앞에 짐으로 지워 드려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통일교회는 당신의 교회이기 때문에, 통일의 무리들은 당신의 아들딸이기 때문에 해야 할 책임을 다시 하시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교회와 이 무리가 아버지 앞에 짐이 될까봐 두렵사오니, 아버님,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제단을 위해 아버지께서는 피어린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 나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애절한, 뜻과 더불어 억천 만세의 울음을 가할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아니 아버지의 눈물이 여기에 사무쳐 있는 것을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눈물의 줄기를 타고 저희들은, 대한의 눈물 줄기와 세계의 눈물 줄기가 합해져 온 지구성에 눈물바다를 이루고, 회개의 바다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오니, 그 눈물과 더불어 심정을 끓여 가면서 아버지의 아들딸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통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사랑하는 딸들을 일선에 내보내서라도 이 일을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시옵니다. 이렇듯 순회를 할때마다 느끼는 이 심정을 아버지께서는 아실 것이옵니다. 죄가 많기는 저에게 있는 죄가 많은 것을 느끼옵니다. 제가 죄가 많은 것을 느낌과 동시에 이 민족이 죄가 더 많은 것을 느끼오며, 이 세계가 죄가 더 많은 것을 느끼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보다 더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축복받은 무리, 당신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은 불쌍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 길을 가기 싫어하는 무리는 가다 말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늘을 울리고, 하늘이 아니었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에 저는 이 시간도 제가 서글픔을 당하는 것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선을 넘을 때까지 당하게 해달라고…. 그런 사람을 저주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그래서 통일가는 망하지 않을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길을 걸어 나오면서도 망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이요, 세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입증한 공의의 법도로써 세워졌기 때문에 남아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세상의 부정을 받는 입장에 선 아들이라 하더라도 네 집안의 식구가 원수라 하였던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지극히 착한 아들딸로 하여금 부정을 받는 자리에서도 아버지께서 한하시는 불효자식이 되지 않기를 아버지앞에 기도한 것임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저희들 중에는 불효자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효자도 있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발견하실 것이옵니다.
죽음으로 마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염려되는 마당마다 새로운 소망의 새싹의 터전은 줄기차게 뻗어 나가는 사실을 다른 면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틀리게 되면 새로운 것을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발전시켜 나오신 것을 아옵니다. 그러한 고비를 넘을 적마다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역사를 엮어 오늘날 통일의 제단을 형성해 나오셨사옵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당신 앞에 맡기오니, 당신이 해야 할 책임으로 맡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서 남길 수 있는 전통과 사명을 완수하게 해주시고, 천만 번 부정을 받고 욕을 먹을지라도 동원된 천 사람 가운데 그 뜻을 받들어 남길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찾고 계신 걸 알고 있사옵니다. 금번 동원된 당신의 딸들 가운데 당신이 개체적으로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복을 주시옵고, 수많은 딸들이 책임하지 못한 것을 그로 말미암아 용서받았다 할 수 있는 그런 중심의 딸이 누가 되겠느냐고 할 때, 오래 전에 축복받은 가정이 아닌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말없이 책임지고 가는 그런 무리를 통하여,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체를 감추고, 자기 스스로 한 것이 나타날까봐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런 무리를 통하여 하늘은 말없이 일보 가일보 전진해 나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의 신도들은 이러한 자리를 스스로 지키고 찬양하고 정성에 정성을 가하여서 이 민족 앞에, 이 인류 앞에 없어서는 안 될 무리가 되게 당신께서 역사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1년도 3월 중반기를 넘어가고 있사옵니다. 앞으로 이 해에 계획하고 계시는 그 뜻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눈물에 비례되는 대가가 요구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피어린 투쟁의 대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받고 먼저 책임자 된 자들이 이 대가를 치르기 위해 앞을 다투어 싸울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남이 알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통일교회 위에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재창조의 인연을 찾아 나가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십년의 일을 일년으로 단축시키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과 같이 저희도 그런 마음으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지금까지의 걸음을 아버지께서 지켜 보시면서 인도하여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며, 금후의 모든 일체를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맡아 주실 것을 바라옵니다.
아버지를 모셔야만이 효자의 도리와 충신의 도리를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요구하신 바를 반드시 남겨 드리기 위해 맡기신 사명과 책임 앞에 자신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하며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