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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상 - 제1장 원상론 (原相論) - [1] 원상(原相)의 내용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2.10.02|조회수1,97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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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원상론(原相論)

( Theory of the Original Image )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통일사상은 인류의 모든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인류를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서 출현한 사상이다.

 

그런데 그러한 난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정확히 또 충분히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관한 이론이 원상론이다. 여기서 원상(原相)이란 원인적 존재인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꼴의 측면과 성질, 성품, 능력 등의 기능적 측면이 있다. 전자(前者)를 신상(神相)이라 하고 후자를 신성(神性)이라고 한다.


종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여러가지로 표현해 왔다. 즉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성(遍在性), 지선지선(至高至善), 지미(至美), 지진(至眞), 정의(正義), 사랑, 창조주(創造主), 심판주(審判主), 유일무이(唯一無二, 唯一神), 영원불변, 무소부재 등으로 하나님을 표현해 왔다.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성품은 하나님의 속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만 파악해서는 현실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한 것이다.


통일사상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신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신성 외에 보다 더 중요한 속성이 있으니 그것이 신상(神相)이다. 통일원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이 신상과 신성을 함께, 그리고 정확히 이해함으로써만 현실문제(인생문제, 사회문제, 역사문제, 세계문제 등)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게 된다.


통일사상에서 다루는 하나님의 신상이란 두 종류의 이성성상(性相, 形狀)과 양성(陽性) 음성(陰性))과 개별상(個別相)을 말한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이란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을 말하는 바, 본 원상론에서는 원상(原相)의 내용이라는 제목하에 신상(神相)과 신성(神性)의 하나하나의 내용을 설명하고, 원상(原相)의 구조(構造)라는 제목하에 神相중 특히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1] 원상(原相)의 내용


원상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속성(屬性) 하나하나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제목 하에 신상인 성상·형상, 양성·음성, 개별상 등과 신성(神性)인 심정, 로고스, 창조성 등의 각각의 내용을 상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신상을 다루고 다음에 신성(神性)을 다룬다.

 

 

1. 신상(神相)


신상은 하나님의 속성(屬性) 중의 꼴의 측면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정한 꼴 또는 꼴이 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 규정성(規定性)을 갖고 있다. 이것이 곧 신상이다.

 

이 신상에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의 두 종류의 이성성상과 개별상이 있는 바, 먼저 성상과 형상을 다루고자 한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은 본성상(本性相), 본형상(本形狀)이라고도 하며 이 양자를 합하여 이성성상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만물(萬物, 자연)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지만, 이 관계를 원인(原因)과 결과(結果)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성상(本性相)은 피조물의 무형성(無形的), 기능성(機能的) 측면의 근본원인이며, 본형상(本形狀)은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 물질적 측면(質料的側面)의 근본원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로서 서로 닮고 있기 때문에 본성상(本性相)은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며 본형상(本形狀)은 인간의 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양자는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속성이 아니며, 서로 상대적 및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에서 중화(中和, 調和)를 이루어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원리강론에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신다(원리강론, 1987, p. 35)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 신상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중화를 이룬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본체론(本體論)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신상관(神相觀)은 유심론(唯心論)도 유물론(唯物論)도 아니며, 유일론(唯一論) 또는 통일론(統一論)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심론(唯心論)은 본성상만이 우주의 근본이라고 보는 입장에 해당하며, 유물론(唯物論)은 본형상만이 우주의 실체라고 보는 입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각각의 내용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성상(性相) 

 

① 본성상(本性相)과 피조물(被造物)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며,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무형적, 기능적 측면의 궁극적 원인이 된다.

 

즉 인간의 마음, 동물의 본능(本能), 식물의 생명, 광물의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작용성의 근본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시간, 공간의 세계에 전개된 것이 광물의 물리 화학적 작용성이며, 식물의 생명, 동물의 본능, 인간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이 광물과 같은 무기물에도 비록 극히 낮은 차원에 있어서나마 깃들어 있음을 뜻한다.

 

식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마음이 생명의 형태를 취한, 보다 더 높은 심적기능(心的機能)으로서 나타낸다.

 

최근, 인간의 마음에 반응하는 심적 작용이 식물에도 있음이 실험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

 

동물의 단계에 있어서는 육심(肉心, 본능(本能))의 형태를 취한 한층 더 높은 심적기능으로 나타남을 뜻한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동물에도 인간에서와 똑같은 지정의(知情意)의 기능 즉 의식(意識)이 있음이 밝혀졌다.

 

다만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동물에는 인간에서와 같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없다는 점이다.


② 본성상(本性相)의 내부구조(內部構造)


그런데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은 다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바, 내적 성상 및 내적 형상이 그것이다. 내적 성상은 기능적부분(따라서 주체적부분)을 말하며, 내적 형상은 대상적 부분(對象的部分)을 말한다.

 

하나님의 내적 성상과 내적 형상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다.

 

i) 내적 성상(內的性相)


기능적 부분이라 함은 지·정·의의 기능을 말하는 바, 이중에서 지적기능(知的機能)은 인식(認識)의 능력으로서 감성(感性)·오성(悟性)·이성(理性) 등의 능력을 말하고, 정적 기능(情的機能)은 정감성(情感性) 즉 희로애락 등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며, 의적기능(意的機能)은 의욕성 즉 욕구하거나 결심·결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기능은 내적 형상(內的形狀)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내적 성상(內的性相)은 내적 형상(內的形狀)에 대하여 주체적 부문(主體的部分)이 되고 있다.

 

지적기능에 있어서 감성이란 오관(五官)에 비치는 대로 아는 능력, 즉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뜻하며, 오성(悟性)이란 논리적으로 원인(原因)이나 이유(理由)를 따져서 아는 능력이다. 이성(理性)이란 보편적 진리를 구하는 능력 또는 개념화(槪念化)의 능력을 말한다.

 

이 3기능(機能)을 뉴턴이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함에 있어서 먼저 사과가 낙하(落下)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인식(認識)하였으며, 다음에 사과가 낙하(落下)하는 원인을 생각하여 대지(大地)와 사과가 서로 인역(引力)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후에 여러 가지 실험 관찰 등의 연구를 통해서, 지구나 사과뿐 아니라 우주내의 질량(質量)을 갖고 있는 모든 물체(物體)가 인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 처음 단계의 인식이 감성적 인식(感性的認識)이며, 두번째 단계의 인식이 오성적 인식(悟性的認識)이며, 세번째 단계의 인식이 이성적 인식(理性的認識) 즉 보편적 인식인 것이다.

 


ii) 내적 형상(內的形狀)


이것은 본성상(本性相) 내의 대상적 부분을 말하며, 몇 개의 꼴의 요소로써 이루어져 있다. 그 꼴의 요소중 주요한 것은 관념(觀念), 개념(槪念), 원칙(原則), 수리(數理) 등이다.


ㄱ) 관념(觀念)...... 관념(觀念)은 마음 [성상(性相)] 속에 있는 피조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표상(表象), 즉 영상(映像)을 말한다. 인간들은 경험을 통해서 객관세계의 사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을 영상으로서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바, 이 영상(映像)이 바로 관념(觀念)이다.

 

인간의 경우는 경험(선험적)을 통해서 관념을 얻지만 하나님은 절대자(絶對者)이시기 때문에 본래부터 무수한 관념(觀念)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ㄴ) 개념(槪念)...... 개념(槪念)은 추상적인 영상을 말하며, 일군(一群, 한 무리)의 관념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요소가 영상화(映像化)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개, 닭, 소, 말, 돼지 등의 관념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는 감각(感覺)을 가지고 운동하는 성질인 바, 이것을 영상화시키면 동물(動物)이라는 추상적인 꼴을 얻게 된다. 이것이 개념(槪念)이다. 이 개념에는 종개념(種槪念), 유개념(類槪念)이 있다.


ㄷ) 원칙(原則)...... 원칙(原則)은 피조세계의 자연법칙(예:물리학적 법칙, 화학적 법칙 등) 및 규범법칙(當爲의 법칙) 또는 가치법칙(價値法則)의 근본원인이 되는 법칙을 말한다.

 

수많은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은 이 원칙이 각각 자연현상(물리적 및 화학적현상)과 인간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형태인 것이다.

 

마치 식물(예:나무)에 있어서 한 알의 씨앗이 발아하여 줄기가 되고 수많은 잎(葉)들이 무성하게 되듯이, 하나의 원칙에서 수많은 법칙(法則, 자연법칙, 규범법칙)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본다.


ㄹ) 수리(數理)...... 수리(數理)는 수적 원리(數的原理)라는 뜻으로 자연계의 수적(數的) 현상(現象)의 궁극적 원인을 말한다.

 

즉 내적 형상속에는 수적 현상의 근원이 되는 무수한 수(數), 수치(數値), 계산법(計算法)이 관념으로서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수리(數理)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as)가 만물(萬物, 자연)의 근본(根本)은 수(數)이다라고 말할 때의 數의 개념(槪念), 또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대성에 공헌한 영국의 물리학자 디락(P. Dirac, 1902- )이 하나님은 고도의 수학자(數學者)이며, 우주를 구성할 때 극히 고급한 수학을 사용했다.'라고 했을 때의 數의 개념은 모두 통일사상의 원리(數理)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i) 내적 형상(內的形狀)의 원리적(原理的) 및 성서적(聖書的) 근거(根據)

 

다음은 이상(以上)의 내적 형상에 관한 이론이 통일원리 및 성서의 어디에 그 근거가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ㄱ) 내적 형상(內的形狀)...... 내성[內性, 성상(性相)]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그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난 그 외형(外形)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전자(前者)를 성상(性相)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형상(形狀))이라 한다(원리강론,1987.p. 33). 이것은 눈에 보이는 꼴 이전에 성상(性相) 속에 이미 꼴이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 성상(性相)속의 꼴이 바로 내적 형상(內的形狀)이다.

 

ㄴ) 관념(觀念)·개념(槪念)......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하나님이 6일간에 걸쳐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 매일(每日)의 창조를 마치시고는 그대로 된지라(창세기 1:7, 9, 11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4, 10, 12, 18, 21, 25절)고 하셨는데 이것은 마음속에 지녔던 관념(觀念), 개념(槪念)대로 피조물이 닮아 났음을 뜻한다.


ㄷ) 원칙(原則)·원리(原理)... ... 하나님은 원리(原理)에 의해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원칙에 따라서 攝理를 하심(원리강론, 1987, p. 108), 하나님은 원리(原理)의 주관자로 계시다(同上 p. 64),

 

원리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同上 p. 103), 하나님은 원리(原理)로써 창조된 인간을 사랑으로 주관하셔야 하므로(同上 p. 92)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원칙(원리)을 세운 후,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ㄹ) 수리(數理)...... 피조세계(被造世界)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수리적인 원칙에 의해서 실체적으로 전개된 것이다(同上 p. 62).

 

하나님은 수리성(數理性)을 갖고 계시고(同上), 하나님은 수리적(數理的)으로도 존재하시는 분이시다(同上 p. 376)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적 형상(內的形狀)을 이루고 있는 꼴의 요소들은 모두 統一原理(원리강론)와 聖書에 그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以上)은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 내의 기능적 부분(내적 性相)과 대상적 부분[對象的部分, 내적 형상(內的形狀)]을 인간의 마음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다. 본성상을 이와 같이 상세히 다루는 것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이다.

 

예컨대 내적 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그것이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작용할 때, 사랑을 터로 하는 진(眞)·미(美)·선(善)의 가치관이 성립되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내적 형상(內的形狀)은 지(知)·정(情)·의(意)의 대상적 부분(對象的部分)인 동시에 본형상과 더불어 피조물의 유형적 부분(有形的部分)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과, 지(知)·정(情)·의(意) 즉, 주체부분(主體部分)에 대응하는 가치가 진(眞)·미(美)·선(善)이라는 사실에서, 현실생활에 있어서 의식주(衣食住)의 물질적 생활보다도 진(眞)·미(美)·선(善)의 가치생활을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이것도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

 

2) 형상(形狀) 


다음은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① 본형상(本形狀)과 피조물(被造物)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의 몸에 해당하며,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인 요소(要素) 측면의 근본원인이 된다.

 

즉 인간의 몸(肉體), 동물의 肉, 식물의 조직세포(組織細胞), 광물의 分子 原子 등의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시간· 공간의 세계에 전개(展開)된 것이 광물의 분자 원자이며, 식물의 조직세포이며, 동물의 肉이며, 인간의 몸인 것이다.


이와 같이 피조물의 유형적 요소(有形的要素)의 근본원인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피조물의 유형적요소의 근본원인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소재(素材; 質料)적 요소(要素)요, 또 하나는 무한(無限)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無限應形性)이다(만물의 형태 자체의 근본원인은 내적 형상(內的形狀)이다).


여기서 무한(無限)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無限應形性)을 비유적으로 예를 든다면 물(水)과 같다 하겠다.

 

물 자체는 다른 만물과 달라서 일정(一定)한 형태가 없다. 그러나 용기(容器)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낸다. 삼각형(三角形) 용기에서는 삼각형(三角形)으로, 사각형 용기에서는 사각형으로, 원형의 용기에서는 원형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물이 무형(無形)인 것은 실은 어떠한 용기의 형태에도 응변(應變)하는 무한(無限)한 응형성(應形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이 무형(無形)인 것은 실은 무한형(無限形)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도 그것 자체는 일정(一定)한 형태가 없지만, 어떠한 형태의 영상에도 응변(應變)할 수 있는 응형성(應形性) 즉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을 소재적(素材的) 요소외(要素外)에 또한 갖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피조물의 유형적 요소(有形的要素)의 근본원인에는 소재적 요소와 무한응형성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경우, 창작(創作)이란 마음이 구상한 무형의 꼴의 틀에 일치(一致)하도록 가시적(可視的)인 소재(조각의 경우:石膏 또는 大理石)를 변형시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창작이란, 구상한 꼴의 틀(形式)에다가 소재(내용)를 맞추어 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본성상내의 내적 형상(각종 觀念)이 틀(용기) 또는 주형(鑄型)이 되어서, 이  틀에 무한응형성을 지닌 소재적 요소를 부어 넣은 후 일정하고도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하는 작업을 창조(創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본형상(本形狀)과 과학(科學)


본형상(本形狀)에 있어서,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 측면의 두 근본원인 중의 하나인 소재적 요소는 요컨대 과학의 대상인 만물(물질)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에, 소재적 요소와 과학자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오늘의 과학은 물질의 근본원인을 소립자(素粒子)의 전단계(前段階)인 에너지(物理的에너지)라고 보고 있으며, 그 에너지는 파동성(波動性)과 입자성(粒子性)을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결과의 세계, 현상의 세계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 원인이 에너지라 하더라도 궁극적인 제1 원인(第一原因)에는 과학이 도달할 수 없다. 본원상론(本原相論)은 그 궁극적 원인을 바로 본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형상을 과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에너지의 前단계. 즉 前단계 에너지'(Prior-stage Energy) 또는 간단하게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Pre-Energy)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③ 본형상(本形狀)과 힘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는 본형상(本形狀; Pre-Energy)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먼저 두 가지의 힘(에너지)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 하나는 형성(形成) 에너지(Forming-Energy)요, 다른 하나는 작용(作用) 에너지(Acting- Energy)이다.

 

전자(前者)인 형성(形成)에너지는 곧바로 입자(粒子)로 화하여 현실적인 물질적 소재가 되어서 만물(피조물)을 형성하고, 후자(後者)인 작용(作用)에너지는 만물에 작용하여 만물(萬物, 자연) 상호간에 주고 받는 힘(例:求心力, 遠心力 등)을 일으킨다.

 

이것을 통일사상에서는 원력(原力 ; Prime-Force)이라고 부르며, 이 원력(原力)이 만물을 통해서 작용력으로 나타날 때 이 작용력을 만유원력(萬有原力 ; Universal Prime-Forc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본형상(本形狀)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형성(形成)에너지 및 작용(作用)에너지가 발생함에 있어서, 사랑의 근원인 심정(心情)이 수수작용의 터전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 두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인 에너지만이 아니며, 물리적 에너지와 사랑의 힘과의 복합물(複合物)인 것이다. 

 

따라서 원력(原力)에도, 만유원력(萬有原力)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文鮮明 先生은 1975년 5월의 희망(希望)의 날 만찬(晩餐) 대강연회(大講演會)이후, 자주 만유원력(萬有原力)에도 사랑의 힘이 작용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동성(異同性)


다음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 本質的으로 동질적(同質的)인가 이질적(異質的)인가, 즉 성상과 형상의 이동성(異同性)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二性性相)론(論)이, 일반 철학상의 본체론(本體論)으로 볼 때 어떠한 입장이 될 것인가, 즉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이성성상(二性性相)론(論)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또는 유물론(唯物論)인가 유심론(唯心論, 觀念論)인가.

 

여기의 일원론(一元論)이란 우주의 시원(始元)이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물론(唯物論)이거나, 우주의 시원(始元)이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심론(唯心論, 觀念論)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전자(前者)에 속하고 헤겔의 관념론은 후자(後者)에 속한다. 그리고 이원론(二元論)은 물질과 정신이 각각 별개이면서 우주생성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사유(思惟; 精神)와 연장(延長; 물질)의 두 실체를 인정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유심이원론(物心二元論)이 그 예이다.


그러면 통일사상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이성성상(二性性相)론(論)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즉 원상(原相)의 성상과 형상이 본래 동질적인 것인가 이질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만일 성상과 형상이 이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원적 존재(二元的 存在)가 되어 버린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상(마음)과 형상[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이 이질적(異質的)인 두 요소인가, 동질적(同質的)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인가를 알아보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질적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이다. 이것은 마치 수증기와 얼음(氷)이 물(水:H₂O)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인 것과 같다.

 

물은 물의 분자(分子)인 H₂O의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 균형을 이룰 때이며, 열을 가하여 척력(斥力) 이 우세해지면 기화(氣化)하여 수증기(水蒸氣)가 되고, 기온(氣溫)이 하강(下降)하여 빙점 이하로 떨어져서 인력(引力)이 우세해지면 얼음이 된다.

 

수증기나 얼음은 모두 물의 표현태, 즉 물분자의 引力과 斥力의 상호관계의 표현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전혀 이질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이성성상도 하나님의 절대속성의, 즉 동질적 요소의 두 가지 표현태(表現態)인 것이다.

 

절대속성이란 에너지적 심(心)이요, 심적(心的) 에너지이다. 에너지와 마음은 별개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이 절대속성이 창조과정에서 분화(分化)된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서의 성상(性相)과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형상(形狀)이다.


성상과 형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상은 심적 요소(心的要素)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에너지적 요소도 갖고 있으며, 단지 심적요소(心的要素)가 에너지적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또 형상은 에너지적 요소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심적 요소도 갖춰져 있으며 에너지적 요소가 심적 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그와 같이 성상과 형상은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심적 요소와 에너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정신(마음)과 물질로서 서로 이질(異質)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역시 거기에도 공통된 점이 있다. 그것을 표시하는 例로서 마음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개구리 등에서 채취한, 신경이 달린 골격근(骨格筋ː신경근표본)에 대하여 신경(神經)에 전기적 자극을 주면 근육은 수축(收縮)한다.

 

한편 우리들은 마음으로써 손이나 발의 근육을 움직인다. 이것은 마음이 신경을 자극하여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다.

 

즉 마음에도 물질적인 에너지(전기에너지)와 같은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면술(催眠術)로 타인의 몸, 예컨대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에너지가 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에너지에도 성상적 요소가 깃들어 있다. 최근의 과학에 의하면, 물리적(物理的) 진공상태(眞空狀態)에서 에너지가 진동(振動)하여 소립자(素粒子)가 형성되는데, 이 때의 에너지의 진동은 연속적이 아니고 단계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마치 음악에 음계(音階)가 있듯이 同에너지가 단계적으로 진동해서 그 결과 그 단계에 따라서 규격(規格)이 다른 소립자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마치 음악에 있어서 음계(音階)의 차가 마음에 의해서 나타나듯이 에너지의 배후에도 마음(성상)이 있어서 진동단계를 나타낸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성상(性相) 속에도 형상적 요소가 있고 형상(形狀)속에도 성상적 요소가 있지만 원상에 있어서의 성상과 형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절대속성에서 성상과 형상의 차이가 생기고, 창조를 통하여 그 속성이 피조물이 되어서 피조세계에 나타날때 이질의 두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점에서 두 방향으로 두 개의 직선(直線)이 그어지는 것과 같다. 그 때 하나의 직선은 성상(精神)에 대응(對應)하고, 다른 직선은 형상(物質)에 대응하는 것이다(그림 1-1).

 

 

성서에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질을 알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1:20). 피조물을 보면 마음(정신)과 육신, 본능과 육(肉), 생명과 세포조직 등의 양면성(兩面性)이 있기 때문에 귀납적(歸納的)으로 볼 때, 절대원인자인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이성성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있어서 이성성상은 실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원리강론에서는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을 본체론(本體論)에서 볼 때는 통일론(統一論)이 되게 된다. 그리고 창조를 구상하기 전의, 절대속성 그 자체만을 표현할 때의 본체론은 유일론(唯一論)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 C.)에 의하면 실체(實體)는 형상(形相ːeidos)과 질료(質料ːhyle)로 되어 있다. 형상(形相)이란 실체로 하여금 바로 그것이 되게 하는 본질을 말하며, 질료는 실체를 이루고 있는 소재를 말한다.

 

서양철학의 기본적인 개념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는 통일사상에서 말하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를 구극(究極)에까지 소급(遡及)해 올라가면 순수형상(純粹形相ː第一形相)과 제1질료(第一質料)에 도달한다.

 

여기의 순수형상이 곧 하나님이지만 그것은 질료가 없는 순수한 활동이며, 사유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순수한 사유(思惟) 또는 사유의 사유(노에시스, 노에세오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1질료(第一質料)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체론(本體論)은 이원론(二元論)이다.

 

또 제1질료(第一質料)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본체론은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 보고 있는 기독교의 신관(神觀)과도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思惟)를 근거로 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순수형상 또는 사유의 사유를 하나님으로 보았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354~430)와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이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질료를 포함한 일체의 창조주시며 게다가 하나님에게는 질료적 요소가 없으므로 그는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無에서 물질이 생긴다는 교의(敎義)는, 우주가 에너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하나님과 정신과 물질(物體)를 세 가지의 실체라고 하였다. 구극적(究極的)으로는 신이 유일(唯一)한 실체이나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정신과 물체는 각각 하나님에 의존하면서도 상호간에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실체라고 하여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다.

 

그 결과, 정신과 물체는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그 설명이 곤란(困難)하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을 이어받은 게엘링크스(A. Geulincx, 1624~1669)는, 서로 독립한 이질적인 정신과 신체 사이에 어떻게 해서 상호작용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양자 사이를 매개(媒介)한다고 설명했다.

 

즉 정신이나 신체의 한편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에 대응하는 운동을 신(神)이 다른 한편에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ːoccasionalism)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방편적(方便的)인 설명에 불과할 뿐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것을 거들떠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라고 본 데카르트의 관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서양사상이 포착한 형상(形相)과 질료(質料) 혹은 정신과 물질의 개념에는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난점을 해결한 것이 통일사상의 성상과 형상의 개념, 즉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일한 본질적 요소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이다라는 이론이다.

 

이상으로 신상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또 하나의 신상인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1)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이성성상이다.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다. 그러나 같은 이성성상인 성상과 형상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성상과 형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속성이지만 양성과 음성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속성이며, 직접적으로는 성상과 형상의 속성(屬性)이다. 즉 양성과 음성은 모두 성상(性相)의 속성인 동시에 형상(形狀)의 속성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도 양성과 음성을 그 속성으로서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도 양성과 음성을 그 속성으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양성과 음성도 이성성상과 마찬가지로 중화(中和)를 이루고 있다. 원리강론에 하나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주체로 계시다(1987, p. 35)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뜻한다.

 

이 중화(中和)의 개념도 성상과 형상의 중화와 마찬가지로 조화(調和), 통일(統一)을 의미하며 창조가 구상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 하나가 창조에 있어서 양적 속성(陽的屬性), 음적 속성(陰的屬性)으로 분화(分化)되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인 역학(易學)의 태극생량의(太極生兩儀)(太極에서 음양이 생겨났다)는 맞는 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양성 음성의 개념은 역학(易學)의 양(陽)·음(陰)의 개념과 비슷하나 반드시 일치(一致)하지는 않는다. 동양적인 개념으로는 陽은 빛(光), 밝음(明)을 뜻하며 陰은 그늘(蔭), 어두움(暗)을 뜻한다.

 

이 기본적인 개념(槪念)이 확대적용되어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즉 陽은太陽 ,山, 天, 낮, 경(硬; 단단함), 열(熱), 高 등의 뜻으로, 그리고 陰은 이에 대응하여 月, 谷, 地, 밤, 연(軟; 연함), 냉(冷), 저(低) 등의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은 모두 성상 형상의 속성이기 때문에 피조세계에 있어서 성상 형상은 개체(個體) 또는 실체(實體)를 이루고 있으며, 양성·음성(陽性·陰性)은 이 실체(피조물)의 속성으로 나타나 있다.

 

예컨대 태양과 밝음(明)에 있어서 태양(個體)은 성상 형상의 통일체(統一體); 實體)이며 태양빛의 밝음만이 陽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달(月) 그 자체는 개체(實體)이며 달의 반사광의 밝음의 희미함만이 陰인 것이다.


여기서 통일사상의 실체(實體)의 개념을 잠깐 다루고자 한다. 통일사상의 실체는 물론 통일원리의 實體의 뜻에서 유래한다.

 

통일원리에는 실체기대(實體基臺), 실체헌제(實體獻祭), 실체성전(實體聖殿), 실체세계(實體世界), 실체상(實體相), 실체대상(實體對象), 실체노정(實體路程) 등 실체와 관련된 용어가 자주 쓰여지고 있는데, 여기의 실체(實體)는 피조물, 개체, 육신을 쓴 인간, 물질적 존재 등의 뜻을 지닌 용어이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성상 형상의 합성체(合性體; 통일체(統一體))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피조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각각 개체(個體)의 구성부분이 되고 있어서, 성상이나 형상 그 자체도 또한 실체(피조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마치 자동차도 제작물(제작물(製作物); 實體)이며, 자동차의 구성부분인 부품(예:타이어, 트랜스미션 등)도 제작물(실체)인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의 성상과 형상도 통일사상에 있어서는 각각 실체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데 원상(原相)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을 각각 본양성·본음성(本陽性·本陰性)이라고 한다(원리강론 1987, p. 35).

 

원상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 및 본양성(本陽性)과 본음성(本陰性)을 닮아난 것이 인간의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이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성상도 형상도 모두 실체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양성과 음성은 모두 실체로서의 성상·형상(또는 그 합성체(合性體)인 개체)의 속성이 되고 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2와 같다.

 

 

따라서 원상에 있어서의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의 관계를 정확히 알려면, 인간에 있어서의 실체로서의 성상·형상과 그 속성으로서의 양성·음성의 관계를 알아보면 된다. 다음에 도표로써 인간의 경우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의 관계를 밝히면 그림 1-3과 같다. 

 

 


이 도표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성상(性相)(마음)의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에도 각각 그 속성으로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이 있다.

 

예컨대 지적(知的)기능에는 명석(明晳), 판명(判明) 등의 양적 측면과 모호(模糊), 혼동(混同) 등의 음적 측면이 있고, 의적(意的)기능에도 적극적, 창조적 등의 양적 측면과 소극적, 보수적 등의 음적 측면이 있다. 그리고 형상(形狀)(육신)에 양적 측면(隆起部, 突出部 등)과 음적 측면(陷沒部, 孔穴部 등)이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이 도표에서 열거(例擧)한 것은 인간의 경우일 뿐이며, 하나님의 경우는 이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정 중심한 원인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창조 전의 하나님의 성상(知情意)과 형상의 속성인 陽性·陰性은 다만 조화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며, 일단 창조가 개시되면 그 가능성으로서의 양성·음성이 표면화되어서,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에 조화있는 변화를 일으키고 형상에도 조화로운 변화를 가져 온다.

 

2) 陽性-陰性과 男子-女子와의 관계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陽性-陰性과 男子-女子의 관계이다. 동양에서는 고래(古來)로 남자를 양(陽), 여자를 음(陰)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통일사상(통일원리)에서는, 남자를 양성실체(陽性實體), 여자를 음성실체(陰性實體)라고 말한다. 얼핏보면 동양의 남녀관(男女觀)과 통일사상의 남녀관(男女觀)이 같은 것 같으나 사실은 전연 다르다.


상기(上記)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남녀의 성상과 형상이 다 함께 양성-음성을 갖고 있으나, 성상에 한해서는 남자의 성상의 陽陰과 여자의 성상의 양음이 질적으로 다르다(후술(後述)).

 

이를테면 남자의 陽性-陰性은 남성적인 陽陰, 여자의 陽性-陰性은  여성적인 陽陰이라고 할 수 있다(후술(後述)).

 

이러한 양성과 음성을 가진 남자를, 양성을 지닌 성상(性相)-형상(形狀)의 통일체라고 하며, 이러한 양성과 음성을 지닌 여자를 陰性을 지닌 성상-형상의 통일체라고 한다. 이것을 간단히 말해서, 남자를 양성의 실체, 여자를 음성의 실체라고 표현한다(원리강론 1987, p. 37).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를 양성(陽性)의 실체(實體)라고 할 때의 양성과, 여자를 陰性의 실체라고 할 때의 음성이 상기(上記) 도표에서 밝혀진 양성-음성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성상에 있어서 男女間의 양성과 음성이 다르고, 형상(形狀)에 있어서 男女間의 양성-음성이 다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형상(形狀)(육신)에 있어서의 남녀간의 양성-음성의 차이를 설명한다. 형상 즉 몸에 있어서는 陽性인 융기부(隆起部)나 돌출부(突出部)도, 또 음성인 함몰부(陷沒部)나 공혈부(孔穴部)도, 남녀가 똑같이 갖고 있으나 남녀간에 차이가 있다.

 

남자는 突出部(陽性)가 하나 더 있고 여자는 孔穴部(陰性)가 하나 더 있다. 따라서 형상(形狀)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양성에도, 음성에도 모두 양적차이(量的差異)가 있음을 알게 된다. 즉 형상(形狀)에 있어서 남녀간의 양성-음성의 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이다.


그러면 성상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성상에 있어서의 남녀간의 陽性-陰性의 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가 아니라 질적차이(質的差異)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상 즉 마음에 있어서 陽性인 명석(明晳)의 경우, 남녀가 다 함께 명석(明晳(陽))을 갖고 있으나 그 명석의 質이 남녀간에 차이가 있다.

 

남자의 명석은 포괄적(包括的)인 경우가 많고 여자의 명석은 축소지향적(縮小指向的인 )경우가 많다. 재치(才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성상(性相)(마음)의 감정상의 슬픔(陰)이 과도(過度)할 경우, 남자의 슬픔은 비통(悲痛(억센 슬픔))으로 변하기 쉽고, 여자의 슬픔은 비애(悲哀(가냘픈 슬픔))로 변하기 쉽다.

 

성상의 의욕(意欲)에 있어서 적극성(陽)의 경우, 남자의 적극성은 상대방에게 경성감촉(硬性感觸)을 주기 쉽지만 여자의 적극성은 상대방에게 연성감촉(軟性感觸)을 주기 쉽다.

 

남녀간의 이러한 차이가 질적차이(質的差異)이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1-4와 같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마음)에 있어서는, 남녀간에 陽性에도 질적 차이가 있고, 陰性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 이것을 음악(聲樂)에 비유하면 고음(高音)에 男子(tenor)와 여자(soprano)의 차이가 있고, 저음(低音)에도 남자(bass)와 여자(alto)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이 남녀간에 질적 차이(質的差異)가 보일 때, 남자의 양성-음성을 통틀어서 남성적이라 하고, 여자의 양성-음성을 통틀어서 여성적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여기에 남성적(男性的)인 양성-음성과 여성적(女性的)인 양성-음성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여기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형상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차이가 양적 차이(量的差異)이기 때문에, 즉 남자는 양성이 量的으로 더 많고 여자는 陰性이 量的으로 더 많기 때문에, 남자를 陽性의 실체로 여자를 음성의 실체로 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성상(性相)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이가 질적 차이일 뿐, 남녀가 量的으로는 똑같이 陽-陰을 갖고 있는데 왜 남자를 양성의 실체, 여자를 음성의 실체라고 하느냐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男女間의 陽的 및 陰的 차이가 量的이건 質的이건 간에, 양성과 음성의 관계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관계(후술(後述))이기 때문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적극성(積極性)과 소극성(消極性)의 관계요, 능동성(能動性)과 피동성(被動性)의 관계요, 외향성과 내향성의 관계이다.

 

그런데 상술한 성상(性相)(지(知) 정(情) 의(意))의 속성인 陽陰의 남녀간의 질적 차이를 살펴볼 때, 그 질적 차이에 있어서도 남성의 陽과 여성의 陽의 관계 및 남성의 陰과 여성의 陰의 관계가 모두 주체와 대상의 관계임을 알게된다.


즉 상기한 例로 볼 때, 지적 기능(知的機能)인 陽에 있어서 남성의 명석의 포괄성(包括性)과 여성의 축소지향성(縮小指向性)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며, 정적기능(情的機能)인 陰에 있어서 남성의 悲痛(억센 슬픔)과 여성의 悲哀(가냘픈 슬픔)의 관계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또 의적 기능(意的機能)의 陽에 있어서 남성의 적극성(積極性)의 경성(硬性)과 여성의 적극성(積極性)의 연성(軟性)의 관계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이같은 남녀간의 陽과 陰의 질적 차이는 양적 차이(量的差異)때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양과 음의 관계임을 뜻한다. 이상으로 男子을 양성실체(陽性實體), 女子를 음성실체(陰性實體)라고 부르는 이유를 밝혔다.

 

3)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속성으로서의 양성-음성과 현실문제의 해결


이상에서 양성-음성은 성상-형상의 속성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것이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의 현실문제란 남녀문제를 말한다. 남녀간의 성도덕(性道德)의 퇴폐문제(頹廢問題), 부부(夫婦)간의 불화문제, 가정파탄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양성-음성이 성상-형상의 속성이라는 말은, 성상(性相)-형상(形狀)과 陽性-陰性의 관계가 실체와 속성과의 관계임을 뜻하는 것이다.

 

실체와 속성에 있어서 선차적(先次的)으로 중요한 것은 실체이다. 속성이 의거하는 근거가 실체이기 때문이다. 실체없는 속성은 무의미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상-형상은 양성-음성이 의거(依據)하는 근거로서의 실체이며, 이 성상-형상이 없는 양성-음성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에 있어서의 성상-형상이란, 현실적으로는 성상-형상의 통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과 몸의 통일, 생심(生心)과 肉心의 통일을 말하며, 인격(人格)의 완성을 뜻한다.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뜻한다. 여기서 인격(人格)의 완성(完成)과 男女間의 結合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즉 남녀의 결혼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이라는 조건이 왜 필요한가 하는 문제이다. 陽性-陰性이 性相-形狀의 속성이다라는 命題에 따른다면 남녀는 결혼하기 전에 먼저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통일원리(統一原理)의 삼대축복(個性完成, 家庭完成, 主管性完成)에 있어서 개성완성(人格完成)이 가정완성(부부의 결합)보다 앞에 놓인 것은, 그 근거가 바로 이 陽性-陰性은 性相-形狀의 속성이다라는 명제에 있었던 것이며,

 

대학(大學)의 8조목(條目)中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平천하에 있어서 수신을 제가보다 앞에 놓은 것도, 大學의 저자가 무의식중에 이 명제(命題)를 감지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남녀관계에 관련된 각종 사회문제(性道德의 퇴폐, 가정불화, 이혼, 가정파탄, 부녀자 가출, 부녀자 인신매매 등)가 속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가정완성전에 개성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이요, 齊家전에 修身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그 해결이 가장 어려운 현실문제의 하나인 남녀문제(男女問題)는 가정완성(家庭完成)전에 즉 결혼전에, 먼저 남녀가 함께 인격을 완성(個體完成)함으로써, 또는 제가(齊家)하기 전에 먼저 수신(修身)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陽性-陰性이 性相-形狀의 속성이다라는 명제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원상(原相)중의 양성-음성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또 하나의 꼴로서의 속성(屬性)인 개별상(個別相)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3) 개별상(個別相)

 

1) 개별상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말한 성상(性相)-형상(形狀) 및 양성(陽性)-음성(陰性)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으로서, 이 두 종류의 상대적 속성은 모두 피조세계에 전개되어서 보편적으로 모든 개체속에 일일이 나타나고 있다.

 

성경(聖經)에 창세로부터 그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永遠)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신상)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로마서 1:20)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이 모두 보편적으로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보편상(普遍相)이라고 한다.

 

한편 만물은 개체마다 독특한 성질을 또한 지니고 있다. 광물, 식물, 동물 등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체(天體)도 항성이거나 유성이거나 모두 특성을 갖고 있으며, 특히 인간은 개인(個人)마다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체격(體格), 체질(體質), 용모(容貌), 성격(性格), 기질(氣質) 등이 개인마다 다르다.

 

만물과 인간의 개별적(個別的)인, 이와 같은 특성의 원인의 소재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의 내부, 특히 내적 형상의 내부인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 형상의 내부에 있는 이같은 개별적 특성의 원인을 개별상(個別相)이라고 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屬性)속에 있는 개별상이 피조물의 개체 또는 종류마다 나타난 것을 피조물의 개별상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은 개인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개별상을 개인별(個人別) 개별상(個別相)이라 하고, 만물은 종류에 따라서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만물의 개별상을 종류별(種類別) 개별상(個別相)이라고 한다.

 

2) 개별상(個別相)과 보편상(普遍相)

 

그런데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물의 개별상(個別相)과 인간의 개별상이 그 범위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있어서의 개별상은 個人의 특성을 말하지만, 인간 이외의 만물(동물, 식물, 광물 등)의 개별상은 일정(一定)한 종류의 특성 즉 種差(특히 最下의 종차)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 및 하나님의 子女로 지음받았고,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對象)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조물의 보편상과 개별상과의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개별상이 아무리 개체의 특성이라 하더라도, 보편상과 별개의 특성이 아니며 보편상 그 자체가 개별화된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얼굴(容貌)이 각각 다른 것은 얼굴이라고 하는 형상(形狀)(보편상)이 개별화되고 특수화된 것이며, 인간의 개성이 각각 다른 것은 성격(性格), 기질(氣質)이라고 하는 성상(性相)(보편상)이 개별화되고 특수화된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에 있어서의 개별상이란 個人의 보편상이 개별화된 것이며, 이외의 피조물에 있어서는 종류의 보편상이 개별화된 것이다.

 

피조물에 있어서 이와 같이 보편상의 개별화가 개별상인 것은, 하나님의 내적 형상(內的形狀) 속에 있는, 피조물에 대한 개별화의 요인(要因)이 하나님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개별화시키는 요인(要因)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보편상을 원보편상(原普遍相)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 속에 있는 개별상을 원개별상(原個別相)이라고도 부른다. 그리하여 피조물의 보편상과 개별상은 원보편상 및 원개별상에 각각 대응(對應)하고 있는 것이다.

 

3) 개별상(個別相)과 돌연변이(突然變異)

 

다음은 개별상(個別相)과 유전인자(遺傳因子)와의 관계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즉 일반 생물의 종차(種差) 및 인간의 개성과 유전인자(遺傳因子)와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진화론(進化論)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생물의 종차(種差)로서의 개별상의 출현은 돌연변이(突然變異)에 의한 신형질(新形質)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개성으로서의 개별상의 출현은 父의 DNA(遺傳情報)와 母의 DNA의 단편(斷片)들의 다양한 혼합(混合), 또는 조합(組合)에 의한 유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진화론(進化論)은 창조과정의 현상론적(現象論的) 파악(把握)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생물(生物)에 있어서 돌연변이(突然變異)에 의한 신형질(新形質)의 출현이 실은 돌연변이의 방식을 취한 신개별상(新個別相)의 창조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부모(父母)의 DNA의 혼합(조합(組合))에 의한 신형질의 출현도 실은 유전정보(遺傳情報; DNA)의 혼합(조합(組合))의 방식을 통한 인간의 신개별상(新個別相)의 창조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물이나 인간의 신개별상(新個別相)의 창조란 하나님의 내적 형상(內的形狀)에 있는 일정한 원개별상을 이에 대응하는 피조물(被造物)에게 신개별상(新個別相)으로서 부여(賦與)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4) 개별상(個別相)과 환경

 

다음으로 개별상과 환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개별상을 지닌 개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환경과의 사이에 부단한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즉 개별상을 지닌 개체는 환경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변화하면서 성장, 발전한다. 이것은 수수작용의 결과로서 반드시 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 변화체)가 형성된다는 수수법(授受法)의 원칙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한 개체의 특성(個別相)은 원칙적으로 선천적(先天的)인 것이지만, 그 개별상의 일부는 환경요인에 의해 변화되어서 마치 후천적(後天的)으로 형성된 특성인 것처럼 느껴진다(예:일란성쌍생아(一卵性雙生兒)의 경우).

 

그러나 동일한 환경요인에 의해서 나타나는 특성에도 개인별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수수작용의 방식)에도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개인차는 바로 개별상에 기인하는 개인차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개별상의 일부가 변형되어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특성처럼 나타난 것을 개별변상(個別變相; Individual Changed Image)이라고 한다.

 

5) 인간 개성의 존귀성

 

끝으로 인간의 개성의 존귀성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무릇 피조물의 특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屬性)중의 개별상(個別相)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모두 귀한 것이지만 특히 인간의 개성은 더욱 존엄하고 신성하고 귀중한 것이다.

 

인간은 만물에 대한 주관주(主管主)인 동시에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으로 구성된 이중체(二重體)이며 육신의 사후에도 영인체가 영생(永生)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 그 개성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實踐)하면서 창조이상을 실현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연의 개성은 그만큼 존귀하고 신성한 것이다.

 

흔히 인도주의(人道主義)가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의 존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개인의 특성의 신래성(神來性)이 인정되지 않는 한, 인간을 동물시하는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관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상(個別相)에 관한 이론도 또 하나의 인간의 개성(個性)이 왜 존중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以上으로 신상(성상(性相)-형상(形狀), 陽性-陰性, 個別相)에 관한 설명 전부를 마친다. 다음은 신성(神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신성(神性)


하나님의 속성(屬性) 즉, 원상(原相)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꼴의 측면뿐만 아니라 기능, 성질, 능력의 측면도 있다. 이것이 신성(神性)이다.

 

종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성(遍在性), 지선(至善), 지진(至眞), 지미(至美), 공의(公義), 사랑, 창조주(創造主), 심판주(審判主), 로고스 등은 그대로가 신성(神性)에 관한 개념들이며 통일사상도 물론 이러한 개념(槪念)들을 신성(神性)의 표현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문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창조와 직접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는 현실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일사상은 현실문제 해결에 직접 관련되는 신성(神性)으로서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의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심정(心情)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은 이때까지 어느 종교도 다루지 않았던 신성(神性)이다.

 

다음에 이들의 신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1) 심정(心情)


1) 심정(心情)이란 무엇인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속성 특히 성상(性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의 이와 같은 개념(槪念)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경우를 例로 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래적(生來的ː태어나면서부터)으로 기쁨을 추구한다. 즉 기뻐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제나 기쁨을 얻고자 하는 충동(衝動), 또는 기쁘고자 하는 충동(衝動)을 갖고 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참 기쁨, 영원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대부분 기쁨을 금전이나 권력, 지위나 학식속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은 사랑(참사랑)의 생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생활이란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 애타적(愛他的)인 봉사생활, 즉 남에게 온정을 베풀어서 남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생활을 말한다.


2) 심정(心情)은 정적 충동(情的衝動)이다.


여기서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에 대해서 설명한다.

 

정적인 충동이란,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소원 또는 욕망을 뜻한다.

 

보통의 소원이나 욕망은 의지(意志)로써 억제할 수 있으나, 정적(情的)인 충동은 인간의 의지로써 억제할 수 없는 원망(願望)이요, 욕망(欲望)이다.


우리들은 기쁘고자 하는 충동이 이와 같이 억제하기 어려운 것임을 일상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돈을 벌려 하고, 지위를 얻으려 하고, 학식을 넓히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어린 아이들이 무엇이든지 호기심(好奇心)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심지어 범죄행위(犯罪行爲)마저도 다만 방향이 그릇되었을 뿐, 그 동기는 역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은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달성되어야만 충족(充足)이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에 있어서 기쁘고자 하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은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 기쁨의 근거(根據)가 하나님에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심정(心情)이시다


하나님은 심정(心情)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지니고 있는 바, 이같은 하나님의 충동은 인간에 있어서의 충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은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이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비록 타락(墮落)하여 사랑은 상실(喪失)되었지만 기쁘고자 하는 충동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정적(情的)인 충동을 억제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에 있어서 이 기쁘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즉 참 기쁨은 참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에,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충동은,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욕망(欲望)을 뜻하게 된다.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함은 사랑의 대상을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음을 또한 뜻한다.


이러한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이 촉발(觸發)된다. 따라서 사랑의 충동이 1차적인 것이요, 기쁨의 충동은 2차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쁨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며, 다만 무조건적인 충동일 뿐이다. 그 사랑의 필연적(必然的)인 결과가 기쁨이다.

 

따라서 사랑과 기쁨은 표리(表裏; 겉과 속)관계에 있으며, 기쁘고자 하는 충동도 실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표면화(表面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心情)은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정적(情的)인 충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그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상이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창조는 필연적(必然的), 불가피적(不可避的)이었으며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4) 우주(宇宙) 창조(創造)와 심정(心情)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되어,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直接的)인 사랑의 대상으로, 만물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만물이 간접적인 대상이라 함은, 직접적으로는 만물이 인간의 사랑의 대상임을 뜻한다. 그리고 창조의 동기로 볼 때의 인간과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결과로 볼 때의 인간이나 만물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된 우주 창조의 이론 즉 창조의 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창조설(創造說)이 참이냐, 생성설(生成說)이 참이냐의 문제]를 해결한 결과가 되었다.

 

즉 우주의 발생에 관한 종래의 창조설과 생성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결과가 된 것이다.

 

그것은 생성설〔예:플로티노스의 유출설(流出說),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설(自己展開說), 가모브(Gamov)의 대폭발(Big Bang)설, 유교의 천생만물설(天生萬物說) 등〕로서는 현실의 죄악이나 혼란 등의 부정적 측면까지도 자연발생에 의한 것으로 다루어져서 해결할 길이 막혀 있었으나, 정확한 창조설(創造說)로서는 그러한 부정적 측면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심정(心情)과 문화(文化)


다음은 심정(心情)이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이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심정과 문화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다.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은 내적 성상과 내적 형상으로 되어있는 바, 내적 성상이 내적 형상보다 더 내적이며, 심정은 그 내적 성상보다도 더 내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창조 본연의 인간의 성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이것을 圖表로 나타내면 그림 1-5와 같다.

 

 
이 사실은 심정(心情)이 인간의 지적 활동(知的活動), 정적 활동(情的活動),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됨을 뜻한다.

 

심정은 정적인 충동력으로서 이 충동력이 지적 기능, 정적 기능, 의적 기능을 부단히 자극하여 나타나는 활동이 바로 지적 활동, 정적 활동, 의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 활동(知的活動)에 의해서 철학, 과학을 위시한 여러 학문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정적 활동(情的活動)에 의해서 회화(繪畵), 음악(音樂), 조각(彫刻), 건축(建築) 등의 예술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의적 활동(意的活動)에 의해서 종교, 윤리, 도덕, 교육 등의 규범분야(規範分野; 當爲의 分野)가 발달하게 된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인간들로 구성되는 사회에 있어서는 지적 활동(知的活動), 정적 활동(情的活動),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심정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학문도 예술도 규범도 모두 심정이 그 동기가 되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표가 된다.

 

 

그런데 학문분야, 예술분야, 규범분야의 총화(總和) 즉 인간의 지적 활동(知的活動), 정적 활동(情的活動),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성과의 총화가 바로 문화(文化) · 문명(文明)인 것이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문화는 심정을 동기로 하여 사랑의 실현(實踐)을 목표로 하고 성립하며, 이러한 문화는 영원히 계속된다. 이러한 문화를 통일사상은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 또는 중화문화(中和文化)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인류문화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비원리적(非原理的)인 문화로서, 흥망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상의 핵심인 심정이 이기심(利己心)에 의해서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심정(心情)의 충동력이 이기심을 위한 충동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혼란(混亂)이 거듭되는 문화를 바로잡는 길은, 이기심을 추방하고 성상의 핵심의 자리에 심정의 충동력을 다시 활성화(活性化)시킴으로써, 전문화분야를 심정을 동기로 하고 사랑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문화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즉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를 창건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核心)이라는 명제가, 오늘날의 위기(危機)에서 문화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6) 심정(心情)과 원력(原力)


끝으로 심정(心情)과 원력(原力)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주 만물은 일단 창조된 뒤에도 부단히 하나님으로부터 일정한 힘을 받고있다. 피조물(被造物)은 이 힘을 받아 가지고 개체간에도 힘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전자(前者)는 종적(縱的)인 힘이요, 후자(後者)는 횡적(橫的)인 힘이다. 통일사상은 전자를 원력(原力)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원력(原力)도 실은 원상내의 수수작용(授受作用), 즉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신생체(新生體)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상내의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형상내의 전에너지(Pre-Energy)와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새로운 힘이 원력(原力; Prime Force)이다.

 

이것이 만물에 작용하여 횡적(橫的)인 만유원력(萬有原力)(Universal Prime Force)으로 나타나면 만물(萬物, 자연) 상호간의 수수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만유원력(萬有原力)은 하나님의 원력의 연장인 것이다.


만유원력(萬有原力)이란, 물리학에서 말하는 만유인력(萬有引力)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인 바, 만유원력이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에 의해서 형성된 원력의 연장이란 말은, 우주내의 만물 상호간에 물리학적인 힘 뿐아니라, 사랑의 힘도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인 것이다.


이리하여 심정(心情)과 원력(原力)과의 관계에 관한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알게 된다.

 

즉 인간은 남을 반드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때에 따라서는 투쟁(폭력)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는가, 적을 사랑할 것인가, 타도(打倒)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 이론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으로 심정(心情)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로고스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로고스


1)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Logos)란, 統一原理에 의하면 말씀 또는 이법(理法)을 뜻한다(원리강론, 1987, p. 222).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1~3)


통일사상에서 보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할 때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고(思考), 구상(構想), 계획(計劃)을 뜻하며, 또 로고스를 이법(理法)이라고 할 때의 그 이법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의 이성은 본성상 내의 내적 성상의 지적 기능(知的機能)에 속하는 이성을 뜻함은 물론이지만, 만물을 창조한 로고스의 일부인 이성은 인간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이성은 자유성을 지닌 지적 능력(知的能力)인 동시에 개념화(槪念化)의 능력 또는 보편적 진리 추구의 능력이지만, 로고스內의 이성은 단순한 자유성, 사고력, 지적 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의 또 하나의 측면인 법칙은 자유성이나 목적성이 배제된 순수한 기능성(機械性), 필연성(必然性)만을 지닌 규칙을 뜻함은 물론이다.

 

즉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이 법칙이다.

 

마치 기계장치인 시계의 시침(時針)이나 분침(分針)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일치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이 법칙의 규칙성(規則性), 기능성(機械性)인 것이다.


2)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다.


이법(理法)이란, 이러한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을 뜻한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이러한 이법으로서의 로고스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로고스에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의 해결의 기준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이다.

 

그 현실문제란, 오늘날 사회의 대혼란(大混亂)의 원인이 되고 있는 가치관(價値觀)의 붕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원리강론에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대상인 동시에 이성성상을 지닌 것(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원리강론, 1966, p. 229. 同 1987, p. 222).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일종의 피조물이며 신생체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성상과 형상의 합성체(合性體)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상(構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로고스 그 자체가 만물과 똑같은 피조물일 수는 없다.

 

실제의 피조물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상은 사고(思考)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완성(完成)된 구상(構想)을 뜻하는 것이며, 마음[본성상(本性相)]에 그려진 일종의 설계도인 것이다.

 

건물을 세울 때 먼저 그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듯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도 만물 하나 하나의 창조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靑寫眞) 또는 계획안(計劃案)이 먼저 세워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그런데 설계도는 비록 건물은 아닐지라도, 설계도 그 자체는 제작물(製作物) 즉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로고스도 구상(構想)이요 설계도인 이상 그것 역시 결과물이며 따라서 신생체요 일종의 피조물(被造物)인 것이다.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존재한다. 그러면 신생체로서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무엇을 닮았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본성상(本性相)안의 내적 성상(內的性相)과 내적 형상(內的形狀)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적 성상(內的性相)과 내적 형상(內的形狀)이 일정한 목적을 중심하고 통일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로고스의 이성성상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에 있어서, 본성상과 본형상이 중화(中和)를 이룬 상태가 신상인 것과 같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씀인 동시에 이법(理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로고스를 이법(理法)으로만 이해할 때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성과 법칙(法則)이다.

 

따라서 이성과 법칙의 관계는 바로 내적 성상과 내적 형상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내적 성상과 내적 형상의 상호관계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것이다.


3)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체(統一體)


이와 같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의 통일로서의 로고스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는 모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와 법칙적요소(法則的要素)가 통일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만물이 존재하거나 운동함에 있어서 반드시 이 양자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단 저차원의 만물일수록 법칙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고, 고차원의 만물 일수록 이성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한다.


그리하여 가장 저차원인 광물에는 법칙적 요소만이 작용하고 이성적 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고, 가장 고차원인 인간에는 이성적 요소만이 작용하고 법칙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지만, 양자의 모두에 이성적 요소(理性的要素) 및 법칙(法則的 요소(要素)가 함께 통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만물의 존재와 운동은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며, 목적성(目的性)과 기능성(機械性)의 통일인 것이다. 즉 필연성속에 자유성이 작용하고, 기능성속에 목적성이 작용한다.

 

필연(必然)과 자유의 관계가 종래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마치 구속(拘束) 과 해방(解放)이 정반대의 개념인 것처럼, 필연과 자유도 정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사상은 로고스의 개념(槪念)에 관한 한, 이성과 법칙을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로 보지 않고 도리어 통일의 관계로 본다. 이것은 비유컨대 기차가 레일(rail) 위를 달리는 현상과 같다할 것이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法則)이며, 만일 그 레일을 벗어나면 기차 자체의 파괴뿐 아니라 인근(隣近)의 인명이나 건물에 피해를 준다. 기차는 반드시 레일 위만을 달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차의 운행은 준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레일 위를 달린다 하더라도, 빨리 달리고 천천히 달리는 것은 기관차(기관사)의 자유이다.

 

따라서 기차의 운행은 전적으로 필연적(必然的)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인 것이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보자. 교통신호를 지키는 자동차 운전자의 예가 그것이다. 운전자는 청신호 때에는 전진하고, 적신호 때에는 정지한다. 이것은 교통법규로서 누구나 지켜야 할 필연성이다.

 

그러나 일단 청신호가 켜진 뒤에는 교통안전에 지장이 되지 않는 한 속도는 자유로이 조정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동차 운전도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다.


이상(以上)으로 기차의 운행이나 자동차의 운전에 있어서 필연성과 자유성의 관계가 통일의 관계임을 밝혔는데, 로고스에 있어서의 이성과 법칙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통일의 관계이다.

 

이로써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서의 이성과 법칙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아니라 통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로고스가 이성과 법칙의 통일이기 때문에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된 만물은 크게는 천체(天體)로부터 작게는 원자(原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외없이 이성과 법칙의 통일적 존재이다.

 

즉 만물은 반드시 그 내부에 이성과 법칙, 자유성과 필연성, 목적성과 기계성의 통일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동하고 발전한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일부 과학자의 이론과도 일치한다. 예컨대 검류계(檢流計; 폴리그라프)의 부착실험에 의한 식물심리의 확인(Backster 效果)과 샤론(Geun E. Charon)博士의 복합상대론(複素相對論; Complex Relativity)에 있어서의 전자(電子), 광자(光子)內의 기억과 사고의 메카니즘의 확인 등이 그것이다.

 

즉 식물에 마음이 있고, 전자에 사고(思考)의 메카니즘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피조물 속에 이성과 법칙, 자유성과 필연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4) 로고스 및 자유와 방종


다음은 로고스와 관련해서 자유와 방종의 참 뜻을 밝히고자 한다. 자유와 방종에 관한 바른 인식(認識)에 의해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의 이름 밑에 자행되는 갖가지의 질서파괴(秩序破壞) 행위와 이에 따르는 사회혼란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와 방종(放縱)의 참 뜻이 밝혀져야 한다.


原理(원리강론)에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으며(1987, p. 103), 책임없는 자유는 없으며(同上), 실적없는 자유는 없다(同上)라고 적혀 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유의 조건은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의 세 가지가 된다.

 

여기서 원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原則 즉 법칙을 벗어난다는 뜻이며, 책임이란 각자의 책임분담 완수를 뜻하는 동시에 창조목적의 완성을 의미하며, 실적이란 창조목적을 완성하여 선의 결과를 가져옴을 뜻한다.

 

그런데 책임분담의 완수나 창조목적의 완성이나 선(善)의 결과를 가져옴은 모두 넓은 의미의 원리요, 인간이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이며, 법칙(法則; 가치법칙, 규범법칙)이다.


따라서 자유에 관한 세 가지 요건 즉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 등은 한마디로 '자유는 원리안에서의 자유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참 자유는 결국 법칙성(法則性), 필연성(必然性)과의 통일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서 법칙이란, 자연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이요,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가치법칙(규범법칙)이다. 가치니 규범이니 하는 것은 질서 하에서만 성립된다. 규범을 무시하거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본연의 세계에서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選擇)의 자유이며, 이 선택은 이성에 의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유는 이성에서 출발하여 실천으로 옮겨진다.

 

이때 자유를 실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자유의지이며, 이 의지(意志)에 의해서 자유가 일단 실천되면 그 실천행위가 자유행동이 된다. 이것이 원리강론에 보이는 자유의지, 자유행동 등의 개념(槪念)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나, 자유의지나, 자유행동은 모두 자의적(恣意的)인 것이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원리 안에서 즉 법칙(法則)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필연성과 통일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래 자유는 이성의 자유이며, 이성은 법칙과의 통일하에서만 작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연의 자유는 '이법(理法)' 즉 '로고스'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로고스를 떠난 자유는 존립(存立)할 수 없다.

 

흔히 법칙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법칙과 자유의 원리적인 의미를 모르는 데서 오는 착각인 것이다.

 

본연의 법칙이나 자유는 모두 사랑의 실현을 위한 것이며, 사랑 안에서의 법칙이며 자유이다. 참사랑은 생명(生命)과 기쁨의 원천(源泉)이다.

 

따라서 본연의 세계에서는 기쁨 속에서 법칙을 따라서 자유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형성(形成)되기 때문이다.


로고스를 떠난 자의적(恣意的) 사고(思考)나 자의적 행동은 사이비(似而非) 자유로서 이것이 바로 방종(放縱)이다.

 

따라서 자유와 방종은 그 뜻이 전연 다르다. 자유는 선(善)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설적인 개념(槪念)이지만, 방종은 악(惡)의 결과를 가져오는 파괴적(破壞的)인 개념이다.

 

이와 같이 자유와 방종은 엄격히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혼동되거나 착각되고 있다. 이것은 자유의 참 근거(根據)로서의 로고스에 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로고스의 뜻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자유의 참 뜻을 알게 되고, 따라서 자유라는 이름 하의 온갖 방종이 방지(防止)될 수 있으며, 마침내는 사회혼란의 수습도 가능해 질 것이다. 이것으로 로고스에 관한 이론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5) 로고스 및 심정(心情)과 사랑


마지막으로 로고스와 심정 및 사랑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말씀, 구상(構想)인 동시에 이법(理法)이었다.

 

그런데 말씀(構想)과 이법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말씀 속에 그 말씀의 일부로서 이법(理法)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생물을 다루는 생물학 속에 그 일분과로서, 생물의 생리학(生理學)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다.

 

생물학에는 해부학(解剖學), 생화학(生化學), 생태학(生態學), 발생학(發生學), 분석학(分析學), 생리학(生理學) 등 여러 분과로 분류되지만 그 중의 일분과(一分科)가 생리학인 것처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대한 양과 종류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 중의 적은 일부분이 이법(理法)(로고스)으로서, 말씀중의 만물의 상호작용(相互作用) 또는 상호관계(相互關係)의 기준에 관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과 이법(理法)은 별개의 것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말씀의 터전이 되고 있는 심정은 동시에 이법(理法), 로고스의 터전도 되는 것이다.

 

마치 유기체(有機體)의 생활현상의 연구가 생물학의 모든 분과의 공통항목인 것처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구상과 이법의 공통기반이 되고 있다.


심정(心情)은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이었다.

 

이와 같은 심정이 창조에 있어서 구상과 이법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 전체의 구조(構造), 존재(存在), 변화(變化), 발전(發展) 등 모든 우주현상이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理法)도 자연법칙이건 가치법칙이건 간에 그 배후에 사랑이 반드시 작용하고 있고 또 작용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일반적으로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법칙(法則)으로만 이해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완전한 이해이며 비록 차원은 다를망정 거기에 반드시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가치법칙(價値法則), 규범법칙(規範法則)에는 이 사랑이 더욱 더 현저하게 작용해야 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로고스 즉 이법의 해설에 있어서 이성과 법칙(法則), 따라서 자유성과 필연성에 관해서만 주로 다루었지만, 이법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법 그 자체 못지않게 사랑이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도에 있어서 사랑은 이법을 능가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이법(理法)만의 생활은 규율(規律) 속에서만 사는 병영(兵營)처럼 냉랭해지기 쉽고,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시들기 쉬운 것이다.

 

따뜻한 사랑 속에 지켜지는 이법의 생활에서만 비로소 백화가 만발하고, 봉접(蜂蝶; 벌과 나비) 이 군무(群舞; 무리지어 춤추는)하는 봄동산의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정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참된 방안(方案)이 무엇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基準)이 된다.

 

즉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로고스[이법(理法)]의 이론은 가정에의 참된 평화 수립의 방안(方案)도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로고스에 관한 설명을 모두 마치고 다음은 창조성(創造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3) 창조성(創造性)


1) 창조성(創造性)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은 일반적으로 새 것을 만드는 성질(性質)이라고 정의(定義)되고 있다. 통일원리에서도 창조성을 일반적인 뜻으로도 해석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창조의 능력(能力)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원리강론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能力)과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처럼 창조의 성질이나 창조의 능력(能力)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목적은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해(理解)가 정확하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창조에 관한 상식적인 이해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特性) 또는 요건(要件)이 밝혀질 필요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발적(偶發的)인 것이 아니며, 자연발생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억제불능(抑制不能)의 필연적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명백한 합목적적인 의도(意圖)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가 이른바 심정(心情)을 동기(動機)로 한 창조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로서 이 창조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 또는 수수작용(授受作用)이 반드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구체적으로는 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 정의(定義)하게 된다.

 

이것을 인간의 창조(新品目의 製造)의 경우를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내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구상(構想)하는 것, 또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발(따라서 청사진(靑寫眞)의 작성)을 뜻하며,

 

외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그 청사진에 따라서 인간(主體)이 기계와 원료(對象)를 적절히 사용(수수작용)해서, 청사진대로의 신제품[신생체(新生體)]을 만들어 냄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은 각각 성상과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있어서 내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상기(上記)한 목적중심의 로고스를 형성하는 것이며,

 

외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목적 중심한 성상(性相)(주체)과 형상(形狀)(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만물)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갖춘 내적 및 외적 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로고스 형성에 이어서 신생체를 형성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의 개념(槪念)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는 것은 창조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현실적 문제, 예컨대 공해문제(公害問題), 군비제한(軍備制限) 내지 철폐문제(撤廢問題), 과학과 예술의 방향성(方向性) 문제 등의 해결의 근본적 기준을 정립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다음은 인간의 창조성에 관하여 설명코자 한다. 인간에게도 새것을 만드는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닮기의 법칙(法則)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성도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기로, 또는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불완전하게밖에 닮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사실상 인간의 창조성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성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성을 인간에게 부여(賦與)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부여하시고자 하였을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세계(萬物世界)에 대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하여서, 만물에 대한 주관(主管) 자격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기서 만물주관이란 만물을 아끼고 소중히 하면서, 그 만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의 사물을 다루는 것을 만물주관(萬物主管)이라 하며, 여기에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領域)이 포함된다.

 

예컨대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이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된다. 지상의 인간은 육신을 쓰고 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물질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생활 전체가 만물주관의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본연(本然)의 만물주관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본연의 주관(主管)이란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사물을 다루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행하는 행위, 예컨대 경작, 제작, 생산, 개조, 건설, 발명, 보관, 운송, 저장, 예술창작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의 활동 뿐 아니라 심지어 종교생활, 정치생활도 그것이 사랑을 가지고 물건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본연의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본연의 인간에 있어서 사물을 다루는 데는, 사랑과 함께 새로운 구상(構想)이 부단히 요구되기 때문에, 본연의 주관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을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본연의 만물주관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 이어받은 창조성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만물주관도 불완전하고 비원리적(非原理的)인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하나님이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날 때부터 본연의 창조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타락과는 관계없이 그 창조성은 지속되었을 것 아닌가?

 

실지로 오늘날 과학기술자들은 훌륭한 창조(創造)의 능력, 즉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의문이다.


3) 닮기의 창조(創造)


여기서 잠깐 닮기의 창조(創造)가 시공(時空)의 세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창조란 요컨대 피조물 즉 하나 하나의 만물이, 시공의 세계을 포함한 4차원의 세계에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의 구상(構想)의 단계에서는 초시간(超時間), 초공간(超空間的)으로 이루어졌더라도, 그 피조물이 시공세계에 출현하는데 있어서는 소형(小形), 미숙(未熟) 또는 유소(幼少)의 단계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정한 시간적 경과를 거쳐서 일정한 크기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일정한 크기의 단계에까지 완성한 후에야 하나님의 구상(構想) 또는 속성(屬性)을 완전히 닮게 된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미완성단계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적 기간으로서, 통일원리는 이 기간을 성장기간(成長期間)이라고 하여 소생기(蘇生期), 장성기(長成期), 완성기(完成期)의 3단계의 기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인 장성기의 완성급 단계에서 타락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음에 있어서도 본연의 창조성의 2/3정도만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천재적(天才的)인 창조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창조성에 비하면 크게 못 미쳐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피조물 중에서 타락한 것은 인간뿐이다. 만물은 타락하지 않고 모두 완성하여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각자의 차원에서 닮고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또 생길 것이다. 즉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이 왜 영장(靈長)답지 않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만물이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해서만 성장하게 되어 있는데 대하여, 인간은 성장(成長)에 있어서 이 원리의 자율성(自律性), 주관성(主管性) 외에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4) 창조성(創造性)과 책임분담(責任分擔)


여기서 원리 자체의 자율성이란 유기체(有機體)의 생명력을 말하며, 주관성은 같은 생명력(生命力)의 환경에 대한 영향성을 말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은 그 내부의 생명력 때문이며, 주관성은 그 나무(生命力)가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影響力)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의 경우에도 이 원리 자체의 자율성과 주관성이 작용(作用)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육신만이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인체는 그렇지 않다. 영인체의 성장에는 다른 차원의 조건(條件)이 요구된다. 그것이 책임분담 즉 분담(分擔)책임의 완수인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영인체(靈人體)의 성장이란 육신처럼 영인체의 신장이 커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인체는 육신에 밀착(密着)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성장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다.

 

여기의 영인체의 성장이란 영인체의 영성의 성숙과 인격의 향상을 뜻한다. 또한 심정 수준의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 자세의 성장이 바로 영인체의 성장인 것이다.


이러한 영인체의 성장은 다만 책임분담의 완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의 책임분담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견지(堅持 ; 굳건히 지키면서)하고 계명(誡命)을 준수(遵守)하는 가운데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내적 외적으로 가해지는 수많은 시련을, 스스로의 판단(判斷)과 결정하(決定下)에 극복해 나아가면서, 사랑의 실천을 계속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상황(狀況)에서, 육신의 부모마저 없는 여건하에 이같은 책임분담을 다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담은 그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와 같은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고 결국,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타락(墮落)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실패할 수도 있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아담에게 메웠을까? 만물처럼 쉽게 성장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것은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主管位)에 세우기 위해서였으며 만물에 대한 주관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주관은 자기의 소유물(所有物)이나 자기가 창조한 것만을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며, 타인의 소유나 타인의 창조물은 주관(主管)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한 아담은 만물보다 뒤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의 소유자도 창조자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자신의 창조주(創造主)의 자격을 물려주어서 주관주(主管主)로 세우고 싶었기 때문에(창 1:28), 일정한 조건을 세우게 하여 그것으로 아담도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인정해 주려했다.


5) 인간의 완성과 책임분담(責任分擔)


그 조건(條件)은 아담이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즉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자기를 완성시키면, 그것으로써 우주를 창조한 것과 같은 자격(資格)으로 쳐주려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로 볼 때, 인간 하나의 가치는 전체 우주의 가치와 같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우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며, 소우주(小宇宙)이기 때문이요, 또 인간의 완성으로써만 우주 창조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태 16:26)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스스로 자신을 완성시키면, 가치로 보아서 아담이 우주를 창조한 것과 동등한 입장에 서는 셈이 된다.


그런데 창조는 창조자(創造者) 자신의 자기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책임 하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창조(創造))도 아담 자신의 책임분담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메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100% 책임을 아담에게 메운 것은 아니다. 인간 성장의 대부분의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아담-해와에게는 극히 적은 부분의 5% 책임분담을 메워, 그 5%의 책임분담을 다하기만 하면 100% 책임 전체를 아담이 다 해낸 것으로 쳐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특혜에도 불구하고 아담-해와는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墮落)하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았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되었을 것인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먼저 하나님의 심정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은 사랑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주관활동(主管活動)이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사랑 중심의 활동이 되게 됨을 뜻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산업, 과학, 예술, 종교 등이 물질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모두 주관활동(主管活動)인데, 이러한 활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어받은 창조성(創造性)을 터로 한 사랑의 주관활동으로 변모(變貌)하게 된다.


6) 본연(本然)의 창조성(創造性)과 문화활동


상기(上記)의 심정(心情)의 항목에서, 심정의 충동력을 동기로 하는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총화가 문화(心情文化)라고 했는데,

 

여기의 지적 활동, 정적 활동, 의적 활동이 모두 물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이기 때문에 이 문화활동도 따지고 보면 본연(本然)의 창조성에 의한 주관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화(文化)라는 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문화는 급속히 몰락(沒落)되어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교육, 언론, 윤리, 도덕, 종교 등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혼란의 와중(渦中)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획기적인 어떠한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 한, 이 몰락해 가는 문화를 다시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혹자는 다년간 철의 장막으로 가린 채 강력한 기반을 유지해 온 공산독재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대결하다가 오늘날 개방을 계기로 하여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와 과학기술의 우월성(優越性)을 자랑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근시안적 인식착오(認識錯誤)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노사분규(勞使紛糾) 및 빈부(貧富)의 격차의 심화와 이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과 사회적 범죄의 범람,

 

그리고 과학기술의 첨단화(尖端化)에 따르는 범죄기술의 첨단화, 산업의 발달에 따르는 공해의 증대 등은 자본주의의 고질적(痼疾的)인 병폐로서 미구에 반드시 자본주의를 쇠망시키는 요인이 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주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문화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멀리 인류역사(人類歷史)의 시발에까지 소급(遡及)하여 거기서 찾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사랑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이기주의(利己主義)가 팽배하게 된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를 위기(危機)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중심주의(中心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청산하고 모든 창조활동, 주관활동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전개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행동하게 될 때,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종교, 사상, 예술, 언론 등 여러 문화영역(文化領域)의 얽히고 설킨 난문제(難問題)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로 해결되어, 여기에 새로운 참된 평화의 문화가 꽃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문화도 아니요, 자본주의문화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문화이니 그것이 바로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라고도 불리우는 중화문화(中和文化)인 것이다.


이상으로 하나님의 창조성에 관한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창조성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神性), 더 나아가서 원상(原相)의 내용에 관한 설명도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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