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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집주(論語集注) - 6 - 옹야(雍也) - ⑤ - 子曰 回也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4.11.29|조회수161 목록 댓글 0
논어(論語) - 6 - 옹야(雍也) - ⑤
1子曰 回也는 其心이 三月不違仁이오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니라
2자왈 회야는 기심이 삼월불위인이오 기여칙일월지언이이의니라
3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는 그 마음이 3개월 동안 인(仁)에서 떠나지 않았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仁)에 이를 뿐이다.”라고 하셨다.  
4子曰く、回や、其の心三月仁に違わず。其の余は則ち日に月に至るのみ。
5The Master said, “Such was Hûi that for three months there would be nothing in his mind contrary to perfect virtue. The others may attain to this on some days or in some months, but nothing more.”  

 

논어집주(論語集注) - 6 - 옹야(雍也) - ⑤
1子曰 回也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는 그 마음이 3개월 동안 인(仁)에서 떠나지 않았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仁)에 이를 뿐이다.”라고 하셨다.   

三月 言其久 仁者 心之德 心不違仁者 無私欲而有其德也 日月至焉者 或日一至焉 或月一至焉 能造其域而不能久也
3월은 그것이 오래됨을 말한 것이다. 인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니, 마음이 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욕이 없고 그 덕이 있는 것이다. 하루나 한 달에 여기에 이른다는 것은 혹 하루에 한 번 이르거나 혹은 한 달에 한 번 여기에 이르러서 그 경지에 이를 수는 있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朱子曰 三月只是言其久爾 非謂三月後必違也 古人三月無君則弔 去國三月則復 詩人以一日不見如三月兮 夫子聞昭三月不知肉味 皆久之意
주자가 말하길, “三月은 그저 그것이 오랜 기간이라고 말한 것일 뿐이지, 3개월 이후에 반드시 어긴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옛사람은 3개월 동안 임금이 없으면 조문하였고, 나라를 떠난 지 3개월이면 되돌아갔다고 하고, 시경에서 ‘사람이 하루를 보지 못하면 마치 3개월을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거나, 공자께서 昭樂을 들으시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르셨다고 하신 것은 모두 다 오랜 기간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造仁之域 如云入聖域
신안진씨가 말하길, “仁의 영역에 나아간다는 말은 성인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仁與心本是一物 被私欲一隔心 便違仁去却爲二物 若私欲旣無則心與仁便不相違 合成一物 心猶鏡仁猶鏡之明 鏡本來明 被塵垢一蔽遂不明 若塵垢一去則鏡明矣 顔子三箇月之久 無塵垢 其餘人 或日一次無塵垢少間又暗 或月一次無塵垢二十九日暗 亦不可知
주자가 말하길, “仁과 마음은 본래 한 사물이지만, 사욕에 의해 마음이 격리되면, 곧바로 仁과 어긋나서 도리어 2개의 사물이 되고 만다. 만약 사욕이 이미 사라졌다면, 마음과 仁은 곧 서로 어긋남이 없게 되어, 합쳐져서 하나의 사물을 이룬다. 마음은 거울과 같고, 仁은 거울의 밝음과 같으니, 거울은 본래 밝지만, 티끌과 때에 의해 한번 가려지면, 마침내 밝지 않게 된다. 만약 티끌과 때가 한번 제거되면, 거울이 밝아지는 것이다. 안자는 3개월이나 오랫동안 티끌과 때가 없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혹은 하루에 한 번 티끌과 때가 없다가 잠깐 사이에 다시 어두워졌거나, 혹은 한달에 한 번 티끌과 때가 없다가 29일동안 어두웠는지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或問顔子三月不違仁是無纖毫私欲 則自如門弟子日至月至者 常爲私欲所汨乎 西山眞氏曰 欲自有輕重 常人之心 無非私欲汨亂之時 若孔門弟子日至月至者 雖未到無纖毫私欲之地 然亦必皆寡欲矣 孟子敎人只云養心莫善於寡欲 朱子又進一步敎人曰 由寡以至於無 顔子三月不違者 已到無欲之地 自餘則寡慾而已 所以未如顔子也
혹자가 묻기를, “안자가 3개월이나 仁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터럭 하나만큼의 사욕도 없었다는 것인즉, 그 밖의 나머지 공문 제자들은 하루에 한 번 (仁에) 이르거나 한 달에 한 번 이르는 사람으로서, 항상 사욕에 빠져있었던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서산진씨가 말하길, “욕심에는 저절로 경중이 있으니, 보통 사람의 마음은 사욕에 빠져 혼란스러운 때가 아님이 없다. 만약 孔門 제자들 중에서 하루에 한 번 이르거나 한 달에 한 번 이르는 사람이라면, 비록 실오라기 하나만큼이라도 사욕이 없는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그러나 또한 반드시 모두 욕심이 적을 것이다. 맹자가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말하길, 마음을 기름에 있어 욕심이 적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하였고, 주자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길, 적은 상태를 말미암아 없는 상태(無)에 이른다고 말하였다. 안자가 3개월 동안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무욕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욕심이 적을 따름이었으니, 이 때문에 아직 안자와 같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趙氏曰 三月姑借以言其久 日月亦借以言其暫
조씨가 말하길, “三月은 잠시 이를 빌려서 그것이 오랜 시간임을 말한 것이고, 日月은 역시 이를 빌려서 그것이 잠깐 동안임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2○ 程子曰 三月 天道小變之節 言其久也 過此則聖人矣 不違仁 只是無纖毫私欲 少有私欲 便是不仁 尹氏曰 此顔子於聖人 未達一間者也 若聖人則渾然無間斷矣 張子曰 始學之要 當知三月不違 與日月至焉 內外賓主之辨 使心意勉勉循循而不能已 過此 幾非在我者
정자가 말하길, “3월은 천도가 작게 변하는 절기이므로, 그 오래됨을 말한 것이니, 이를 지나면 곧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실이나 터럭 하나의 사욕도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사욕이 있다면 곧 불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씨가 말하길, “이는 안자가 성인에 비하여 한 칸을 못 미친 것이니, 만약 성인이라면 혼연하여 조금도 끊어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길, “배움을 시작하는 요체는 마땅히 ‘3월 불위’와 ‘일월지언’의 내외빈주의 분별을 알아서, 마음과 뜻으로 하여금 힘써 따라서 그만둘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니, 이를 넘어선다면, 거의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顔子經天道之變而爲仁如此 其能久於仁也 過此則從心不踰矩 聖人也 故孔子惜其未止
정자가 말하길, “안자는 천도의 변화를 겪으면서까지 仁을 행함이 이와 같았으니, 그가 능히 仁에 오래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넘어서면 곧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으니, 곧 성인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그가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顔子三月不違 只是此心常存無少間斷 自三月後却未免有毫髮私意間斷 在顔子念慮之間 間有不善處 却能知之而未嘗復行也
주자가 말하길, “안자가 3개월 동안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저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중간에 끊어짐이 없다는 것이다. 3개월 후로부터는 도리어 터럭 같은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 중간에 끊어짐을 면하지 못하니, 안자가 염려하는 사이에도, 간혹 不善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도리어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었기에, 일찍이 다시 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顔子豈直恁虛空湛然 常閉門合眼正坐不應事不接物 然後爲不違仁也 顔子有事亦須應須飮食須接賓客 但只是無一毫私欲耳
안자가 어찌 곧장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침잠하여 항상 문을 닫아걸고 눈을 감으며 바르게 앉아서 일에 응하지 않고 외물에 접하지 않은 연후에 仁에 어긋나지 않음을 행하였겠는가? 안자도 일이 있으면 역시 반드시 응해야 했고, 반드시 마시고 먹어야 했으며, 반드시 손님을 접대해야 했지만, 다만 그저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사욕이 없었을 따름이다.

新安陳氏曰 間平聲 際也 如孟子其間不能以寸 此語本揚子問神篇 顔淵亦潛心於仲尼矣 未達一間爾
신안진씨가 말하길, “未達一間의 間은 평성이고, 사이라는 뜻이다. 마치 맹자의 ‘그 사이는 촌으로써 잴 수 없다’는 말과 같으니, 이 말은 양자의 問神편의 ‘안연 역시 중니에게 마음을 침잠하였지만, 단지 한 칸 이르지 못하였을 뿐이다.’라는 구절을 본받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間去聖 斷徒玩反 後凡言間斷 音同
間斷의 間은 거성이고, 斷의 발음은 도완반이며, 나중에 말하는 모든 間斷은 발음이 이와 같다.

朱子曰 顔子猶不能無違於三月之後 不是三月後一向差去 但只於道理久後略斷 一斷便接續去 若無這些子間斷 便是聖人 所以與聖人未達一間者以此
주자가 말하길, “안자가 그래도 삼개월 이후에는 仁에 어긋남이 없는 것을 해낼 수 없었다는 것은 3개월 이후로는 줄곧 어긋났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리에 오래 머무르다가 잠깐 끊어질 따름이며, 일단 끊어지면 곧바로 다시 이어갔다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잠깐 끊어짐조차 없다면, 곧바로 성인인 것이니, 따라서 성인과 더불어 한 칸 미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心本仁也 心而違仁 私欲間斷之耳 日月至焉者 私欲間斷之時多 天理純全之時少 顔子克去己私爲仁漸熟 故能三月之久 心不違仁 然猶未免三月之後 或至於違仁也 使過此而能渾然無間斷 則與聖人之純亦不已者 一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마음은 본래 仁인데, 마음이 仁에 어긋나는 것은 사욕이 그것을 중간에 끊어버리기 때문일 따름이다.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仁에 이르는 자는 사욕이 仁을 중간에서 끊어버리는 시간이 많고, 천리가 순수하게 온전한 시간은 적다. 안자는 자기의 사사로움을 극복하여 仁을 행함이 점차 익숙해졌기 때문에, 능히 3개월이나 오랫동안 마음이 仁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3개월 후에 간혹 仁에 어긋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 경지를 넘어서서 혼연하여 중간에 끊어짐이 없을 수 있다면, 성인의 ‘순수하고 또한 그침이 없는 것’과 더불어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三月不違者 仁在內而我爲主也 日月至焉者 仁在外而我爲客也 誠知辨此 則不安於客而求爲主於內 必矣
주자가 말하길, “3개월 동안 어긋나지 않는 사람은 仁이 안에 있으면서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고,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이르는 자는 仁이 밖에 있으면서 나는 손님이 되는 것이다. 진실로 이러한 것을 변별할 줄 안다면, 손님이 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고 仁이 안에 있기를 추구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月不違底 是仁爲主私欲爲客 日月至焉者 是私欲爲主仁却爲客 然那客亦是主人 只是以其多在外 故謂之客 敬則常不要出外 久之亦是主人 旣是主人 自是出去時少也 又曰 日月至焉底 便是我被那私欲挨出在外 是我勝那私欲不得
3개월이나 어긋나지 않은 것은 仁이 주인이고 사욕이 손님인 것이고,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이르는 것은 사욕이 주인이고 仁은 도리어 손님인 것이다. 그러나 저 손님 또한 역시 주인이지만, 단지 그가 대부분 밖에 있기 때문에 그를 일컬어 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敬의 경우, 항상 밖으로 나가고자 하지 않으니, 이렇게 오래되면 역시 주인인 것이다. 이미 주인이라면. 저절로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적을 것이다. 또 말하길,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이르는 사람은 곧 내가 저 사욕에 의해 떠밀려 나와서 밖에 있는 것이니, 이는 내가 저 사욕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以屋喩之 三月不違者 心常在內 雖間或有出時 然終是在外不穩 纔出便入 蓋心安於內 所以爲主 日月至焉者 心常在外 雖間或有入時 然終是在內不安 纔入便出 蓋心安於外 所以爲賓 日至者一日一至此 月至者 一月一至此 自外而至也 不違者 心常存 日月至焉者 有時而存 此無他 知有至未至 意有誠未誠 知至矣 雖驅使爲不善亦不爲 知未至 雖軋勒不爲 此意終迸出來 故於見得透 則心意勉勉循循 自不能已矣 過此 幾非在我者 猶言過此以往 未之或知 言過此 則自家著力不得待他自長進去 又曰 三月不違 主有時而出 日月至焉 賓有時而入
집을 가지고 비유하자면, 三月不違者는 마음이 항상 안에 머물러 있으니, 비록 간혹 나갈 때가 있을지라도, 끝내는 밖에 있으면 평온하지 않아서, 잠깐이라도 나가기만 하면 곧바로 들어오는 것이다. 대체로 마음이 안에 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니, 이 때문에 주인이 되는 것이다. 日月至焉者는 마음이 항상 밖에 있으니, 비록 간혹 들어올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끝내는 안에 있으면 불안하여, 잠깐이라도 들어오기만 하면, 곧바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대체로 마음이 밖에 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니, 이 때문에 손님이 되는 것이다. 日至者는 하루에 한 번 여기에 이르고, 月至者는 한 달에 한 번 여기에 이르는데, 밖으로부터 이른다는 것이다. 不違者는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있고, 日月至焉者는 어떤 때에만 보존되는 것이니, 여기엔 다른 이유가 없이, 그저 앎에 지극함과 지극하지 못함이 있고, 뜻에 정성스럽고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 앎이 지극하다면, 비록 몰아가서 不善을 행하도록 시킬지라도, 역시 하지 않을 것이고, 앎이 미처 지극하지 못하다면, 비록 하지 말라고 형벌을 줄지라도, 그 뜻이 끝내는 마구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투철하게 보아서 터득한 것에 대하여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따른다면, 저절로 그만둘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경지를 넘어서면, 거의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은 ‘이를 넘어서 쭉 가보면, 혹시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거나, ‘이를 넘어서면 자신은 달리 힘을 쓸 수 없고, 그저 그것 스스로 커나갈 것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 말하길, “三月不違는 주인이 어떤 경우에 가끔 나가는 것이고, 日月至言은 손님이 어떤 때에 가끔 들어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過此幾非在我者 曰 這只說循循勉勉 便自住不得 便自不由己 只是這箇關難過 纔過得自要住不得 所謂欲罷不能 如水漲船行更無著力處
누군가 ‘이를 넘어서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에 관하여 물었다. 말하길, “이것은 그저 순서대로 차근차근 열심히 행하면, 곧바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게 되고, 곧바로 저절로 자기를 말미암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니, 그저 이 관문이 넘어서기 어려울 뿐이지, 조금이라도 넘어선다면, 스스로 멈추고자 해도 할 수 없다. 이른바 그만두고자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니, 마치 물이 불으면, 배가 감에 있어 더이상 힘을 쓸 곳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幾非在我 如種樹一般 初間栽培灌漑 及旣成樹了 自然抽枝長葉 何用人力 問莫是過此則聖人之意否 曰 不然 蓋謂工夫到此 則非我所能用其力而自然不能已 如車已推而勢自去 如船已發而纜自行 若不能辨內外賓主 不能循循不已 則有時而間斷矣 孟子所謂 夫仁亦在乎 熟之而已矣 此語說得盡了 又云 學者無他 只是要理會這道理此心原初自具 萬物萬事之理 須是理會得分明
거의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은 마치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심고 북돋우고 물을 주다가, 이미 큰 나무가 됨에 이르면, 자연히 가지가 나오고 잎이 자랄 것이니, 사람의 힘을 어디에 쓰겠는가? 누군가 묻기를, “혹시 이것을 넘어서면 성인이라는 뜻인가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지 않다. 대체로 공부가 여기에 이르면, 내가 내 힘을 쓸 수 있는 바가 아니어서, 자연히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수레를 이미 밀었다면, 그 기세로 저절로 가는 것과 같고, 예컨대 배가 이미 출발하였다면, 닻줄도 저절로 끌려가는 것과 같다. 만약 내외와 빈주를 분별하지 못하고, 순서대로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음을 해낼 수 없다면, 중간에 끊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한 이른바 ‘저 仁은 또한 익숙하게 함에 달려있을 뿐이다.’는 이 말이 전부 다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길, “배우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그저 이 도리를 이 마음이 원래 처음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물과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仁人之安宅也 以宅譬之 三月不違 則心爲主在仁之內 如身爲主而在宅之內也 日月至焉 則心爲賓在仁之外 如身爲賓在宅之外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다. 집으로 비유하자면, 三月不違의 경우, 마음은 주인이 되어 仁의 안에 있으니, 이는 몸이 주인이 되어서 집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日月至焉의 경우는 마음이 손님이 되어 仁의 밖에 있으니, 이는 몸이 손님이 되어서 집의 밖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北溪陳氏曰 張子內外賓主之辨 蓋起於夫子至之一辭 知內外賓主之辨 常在天理內而爲主 不逐人欲於外而爲賓 非眞知而足目俱到者 不能到此田地 主勢日伸 賓勢日屈 其進進自不能已 過此如車輪運轉 自然不停 非吾力所能與此 卽日進無疆地位也
북계진씨가 말하길, “장자의 ‘내외빈주의 분별’이라는 말은 아마도 공자님의 ‘至’라는 한마디 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외와 빈주의 분별을 안다면, 항상 天理 안에 있어서 주인이 되고, 밖에서 인욕을 쫓아서 손님이 되지 않는다. 진짜로 알아서 눈과 발이 함께 이른 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가 없다. 주인의 기세는 날로 펼쳐지고 손님의 기세는 날로 굽어질 것이니, 그 나아가고 나아감은 저절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지나면, 마치 수레바퀴가 운행하여 돌아가듯이 자연히 멈춰서지 못하므로, 이는 내 힘이 능히 이에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곧 날로 나아감이 끝이 없는 경지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潛室陳氏曰 提出張子此語 正欲學者於此猛省 若是爲客乍入復出 則爲無家之人 後來必大可哀
잠실진씨가 말하길, “장자의 이 말을 거론한 것은 바로 배우는 사람이 여기에서 깊이 성찰하기를 바란 것이다. 만약 손님이 되어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면, 곧 집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나중에 반드시 애통해할 만함이 클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倪氏曰 內外賓主之辨 朱子有二說 定宇陳氏嘗論此以後說爲優 北溪謂內外賓主之辨 起於夫子至之一辭 的是如此 所謂至焉者 至於仁也 勉齋仁宅之說 尤精到 以此觀之 朱子或問初說也 語錄乃後來定說也 故今編存或問之說于前而列語錄及黃陳之說在後 俾觀者卽見優劣 一遵先師之意云
신안예씨가 말하길, “내외와 빈주의 분별에 대하여, 주자에게는 두 가지 설이 있었는데, 정우진씨는 일찍이 이를 논하면서 후설이 더 낫다고 여겼다. 북계진씨는 내외와 빈주의 분별이 공자님의 ‘至’라는 한마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였는데, 확실히 이러하였다. 이른바 ‘여기에 이른다’는 것은 仁에 이른다는 것이다. 면재황씨의 ‘仁과 宅’의 학설은 더욱 정교한 곳에 이르렀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주자의 혹문이 처음 학설이고, 어록은 곧 나중에 정해진 학설이다. 그러므로 지금 편재하면서, 혹문의 설을 앞에다 보존하였고, 어록 및 황씨와 진씨의 설을 뒤에 나열하였으니, 이는 살펴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열을 알아보는 데에 나아가서, 줄곧 선사들의 뜻을 따르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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