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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3일 - 아버지의 기도 (승리편 24) / 원리원본 (196) / 文鮮明先生말씀選集 (4-15-1)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5.05.13|조회수275 목록 댓글 0
아버지의 기도 - 승리편 - 24. 아버지의 승리의 나라를 세우는 개척자 되게 하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당신이 찾으시는 승리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 몸을 극복하여 끌고 
모든 것을 바치고 나갈 각오를 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찾아 나오시던 승리의 한 날을 
저희들은 기필코 보고 죽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이 바라시던 승리의 나라를 
저희들이 기필코 건국하고 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저희들은 
그 나라를 세우는 
승리의 민족이 되기를 바라고 나가야 되겠고, 
저희들이 그런 민족을 창건할 수 있는 
하나의 종족의 모습을 대신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소수의 무리로써 
전체의 가치를 대신하려는 아버지의 뜻 앞에 있어서는 
수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사옵고, 
연단과 시련과 수난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역사과정의 실상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이 길을 
정당하게 걸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에게 분부하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의 마음은 초조해야 되겠고, 
몸은 한 곳을 향하여 바삐 뛰어야 되겠습니다. 
스스로 각오하고 
가고 또 가야 할 모습임을 깨닫고 
내일의 먼 길을 향하여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가야 할 길을 가는 것만이 저희의 책임이 아니라 
개척자의 행로를 더듬어 가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이 서글픈 사정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 앞에 
기쁨과 영광과 환성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싸움과 비탄의 곡절과 개척해야 할 미개지가 
전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참아 온 과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참아야 할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면 
이 길을 극복할 수 없고, 
용사로서 내일의 승리를 다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그 나라를 주관하시고, 
그 나라를 사랑하시고, 
그 나라에서 권한을 펴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날을 바라며 나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그런 환경은 갖지 못할지라도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넘고 
마음의 세계에서는 아버지를 모시고 
그 나라를 소망하여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생활무대에서 
개척자의 사명을 
더디 하는 무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이 시간 다시 한 번 각오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까지 저희들은 연약한 무리였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은 
손을 잡고 몸과 몸을 합하고, 
마음과 마음을 합하고,
심정과 심정을 가다듬어 
당신이 운행하실 수 있는 
하나의 공고한 터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는 천리 만리까지 날릴 수 있는 
하나의 유도탄 기지와 같은 
모습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연약한 모습들을 
동정의 마음으로 품어 키우시옵소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목적 앞에 가담할 수 있는 
가치적인 내용을 
저희에게 부여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970. 11. 1)

 

 원리원본 (196)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전체 목적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써 즉 메시아 한 분이 그의 생명의 대신이며 희망과 소망의 전부의 중심 존재이었을 것이었다. 또 자기 자신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의 광야생활이라는 전체 목적은 여기에 완성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예수보다 6개월 전에 사가랴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 자체는 하늘에 무한한 기대로서 보낸 자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존재이었다. 그 시대를 대표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30여 년 생애 모두가 예수(메시아) 한 존재가 목적인데 그 메시아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영광이 그대의 목적이었다.
 
세례요한의 뜻을 따라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세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세례는 예수의 그 근본 뜻을 성사할 수 있는 한 터의 자격을 부여하여 주는 약속 표시의 예였다(요한복음 1장 31~34).

세례요한이 이 예식을 하게 함은 자기 뜻 성사를 하기 위하여서가 아니고 예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라는 것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당시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이 보내신 한 선지자로 알고 있었다.

 

文鮮明先生말씀選集 4권

15) 변화산상의 예수와 세 제자
1958년 5월 11일(일) 삼청공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심정을 부둥켜안고 이스라엘 민족과 영계의 영인들을 대신하여 안타까움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때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한 사람은 많았으나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그 당시의 유대교단과 유대민족이 바라는 소망은 컸었으나 그 소망을 이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과 먼 거리에 있었고,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말할 수 없이 서글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흉금을 터놓고 의논할 수 있는 동지와 제자들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 한적한 곳을 찾아 다니셨던 주님

그래서 남모르게 겟세마네 동산이나 감람산이나 변화산상과 같은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산상에 올라,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느끼신 슬픔과 염려의 마음을 같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상에 올라간 것은 영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담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멀지 않아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을 놓고 모세와 엘리야와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제자들은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한없이 슬픈 자리에 계시리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황홀한 영광에 취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이만한 환경을 가지게 된 것도 하늘이 이런 환경을 이루기 위하여 수천년 동안 수고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적인 환경권 내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하늘과 먼 거리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좋은 환경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그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나타날 때까지에는 하나님의 염려와 수고의 심정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도된 사람이 진정으로 주목해야 될 것은, 변화산상에서 벌어진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주적인 담판의 기로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무친 서글픈 심정입니다. 우리들은 외적 환경에서 기뻐했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민족적인 판도에서 하늘의 선봉자로서 사탄과 싸워야 할 하늘의 정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졌던 그 결심과 각오를 우리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세 제자는 몰랐으나 엘리야와 모세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결심하게 될 때 하늘에서 󰡒이는 나의 아들.󰡓(눅 9:35)이라는 음성이 들렸고, 하늘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할 때에 예수님은 황공한 심정으로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세 제자가 예수의 심정과 하늘의 내적 심정을 느꼈던들, 골고다의 길을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상의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같은 그런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과 생활을 계승하는 후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결심을 다시 가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자기를 나타내기 쉬우나 예수님은 기쁨이나 슬픔을 자기를 중심하여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하늘로 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사셨으며, 역대의 선조들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하늘 앞에 면목없음을 느끼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되 자기 일신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보다 하늘을 더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자기를 중심삼고 영광을 취하려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는 자리에서는 하늘과 분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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