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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3일 - 아버지의 기도 (심정편 5) / 원리원본(371) / 文鮮明先生말씀選集 (5-14-7)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5.11.03|조회수179 목록 댓글 0
아버지의 기도 - 심정편 - 5.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하는 참아들딸 되길 원하옵니다

잃어버린 참다운 자녀를 찾기 위해
복귀의 서글픈 노정을 헤쳐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형상을
마음으로 몸으로 더듬어 체휼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에 사무친 사랑의 마음으로
아담 해와를 사랑하지 못하시고,

6천 년 기나긴 세월을
사랑에 굶주려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게 해주시고,

서글픈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간곡한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마음과 몸을
아버지의 것으로 바쳐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저희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것으로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제물이 되게 인도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리하여
6천 년 동안
참다운 사랑의 심정으로
붙안고 사랑하지 못하였던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당신의 혈족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땅 위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아버지께서 내 아들딸이라고 사랑하고
사탄 앞에 내 아들딸이라고 변명하며
붙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의 만민을 구하기 위한 싸움의 노정을 걸을 때에도
아버지께서 친히 붙들고 사랑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는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이다.

아버님의 심정에 사무친 예수님이었지만
당신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저희들 알고 있사옵니다.

사랑하지 못한 아버지의 사정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영광의 한날을 세우시고
하늘의 아들딸을 세우시어서
사무친 심정을 푸시옵고,

붙안고 사랑하며
모든 심정을 토로하시옵소서.

그런 하늘의 아들딸이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은 가진 것 없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기어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권능의 손길을 펴 주시어서
저희를 성별시켜 주시옵소서.

악의 요소를 제하여
온전히 아버님의 것이 될 수 있는
저희의 몸과 마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958. 12. 14)

 

원리원본(371) 
[38] 40일 복귀하고자 한 섭리노정의 근본의의

인간세계의 해와로 인하여 타락이 시작되었으니 그때부터 인간세계는 비원리존재(非原理存在)에 속하여 나오는 반면에 하나님은 원리적(原理的) 복귀(復帰)로서 태세(態勢)를 취하여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원리적으로 직계의 혈대(血代)는 지금까지 섭리의 한 소망으로 남게 되고 그 직계적 혈계(血系)는 비원리적으로 시작한 바는 사실이다.

이런 근본 뜻은 다시금 찾아 근본 혈통 계승을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본의(創造本意)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타락된 인간일망정 포기하지 못하고 원리적 복귀 원칙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계속되는 역사를 본 바는 논한 바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자식 중에 가인과 아벨로부터 제물을 받는 근본 뜻도 알 줄 안다. 가인은 사탄의 최초 혈통 계승 표시자요 아벨은 아담의 입장이니 종적으로 해와 대한 표시적 자식이기 때문에 근본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자식이므로 하나님은 다시금 찾고자 할 적에 첫 생산자보다 다음 자식 아벨을 사랑적으로 대한 원인은 알바이다.

 

文鮮明先生말씀選集 5권 

14)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1959년 3월 8일(일), 전 본부교회.

7. 인간 최고의 복된 자리와 안식처

그래서 중간적인 나를 찾아야 할 우리인데, 종교가 오늘날까지 시대 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이 공헌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어요. 왜? 심정의 세계를 대신한 연고로 발전이 없습니다. 몇천년 전이나 몇억만년 후나 발전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심정, 자기 동족과 자기 친척을 사랑하는 심정, 이러한 심정은 발전이 없습니다. 그 심정 하나 붙들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 하나를 가지고 완전성을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 하나가 전체 행복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생 최고의 행복지는 어디며, 최고의 안식처는 어디인고? 하나님이 어떠한 주체로 계시다면 우리가 그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있고, 그를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곳, 또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 정적인 기반 위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지상에 벌어진다 할진대는 그 순간부터 인간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인류가 바라던 최대의 성공의 세계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 이념을 갖고 나온 사람이라도 다 선을 지향하여 선에 대한 감정을 충족시키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 위에 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였고 나는 하나님과 일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노정에 이 이상 위대한 사실을 선포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대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였고, 더 나
아가서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라고도 하였고, 제자라고도 하였습니다.


인간의 전체적인 생활 감정을 움직여 모든 요소를 자극시킬 수 있는 전체 요소를 들어 그의 주체적인 가치를 대신 주장하셨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종교의 교주도 예수와 같은 주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온 만상을 바라볼 때 정적인 심정으로 바라보셨고, 역사적인 인물들을 대할 때에도 평면적으로 대하지 않고 역사적인 심정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모순된 현상은 타락된 세계였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습관적인 인연을 맺고 정적인 관계를 가진 세계 앞에 일대 폭탄선언이었고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건 왜? 예수님은 자신이 느끼고 자신의 마음속에 흐르는 사랑의 심정으로 인간들을 바라볼 때, 하늘땅을 통하고 인류의 모든 심정을 통하고 시작과 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견지에서 바라볼 때, 그때까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한 것은 하늘로부터 본연의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주장하고 나선 예수님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원수였습니다. 전부가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신 걸음은 슬픈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픈 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갈보리산상에서, 원수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실 때의 그의 슬픔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또 그가 소망과 희망을 품고 바라보았던 기쁨의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도 무한대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슬픔이 무한대의 슬픔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한계권 내의 소망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을 탄식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의 슬픔은, 감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몇천만년 생각해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슬픔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반면 하나님의 심정이 무한한 슬픔으로 얼룩지기 전에는 인간을 소망하고 그리는 무한한 기쁨의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한한 슬픔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 아니라 슬픔을 박차고 무한한 기쁨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심정을 붙들고 싸워 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생활을, 요셉가정에서 추방을 당하여도 그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있는 것을 아셨고, 국가로부터 몰림을 당하고 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림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몰림을 당하고 배척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자리에 들어가서도 내가 죽는 자리에서 느끼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에, 원수를 대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자신의 심정보다도 더 큰 슬픔의 심정이, 더 큰 슬픔의 역사가, 더 큰 슬픔의 기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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