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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5일 - 아버지의 기도 (통일편 24) / 원리원본 (437) / 文鮮明先生말씀選集 (1-19-2)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4.04.25|조회수113 목록 댓글 0
아버지의 기도 (통일편 24)

이 민족 위에 그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이제 우리 교회가
개인적으로는 승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정적으로도
어떠한 승리의 기준을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교회적으로도
승리적인 기반을 닦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저희들의 목적이 아니옵니다.
저희들은 나라를 구하고 남북을 통일하기 위해서
제물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제단을 갖추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불쌍한 이 한민족을 지켜 주시옵고,
사랑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들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남한과 북한을 갈라 놓으신
당신의 경륜하심 가운데는
역사적인 슬픔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저희의 선조들과 저희의 선배들이
책임진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수십 년 고난의 역사가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요나가 회개하던 것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책임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민족 전체를
아버지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당신의 권한을 펼 수 있는 승리의 나라를 찾을 때까지
가야만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오로지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고,
세계를 위하는 마음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고
또 저희의 후손들이 가더라도
그 나라와 아버지의 사랑만은 남겨 놓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명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천번 만번 망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이 소원하시는 창조이상의 나라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바라셨던 예수님이기에 저희에게 권고하시기를
‘너희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 사람이 원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친 그 나라를 남겨야 할 사명에 대한
불타는 소원과 애달픈 사정을 통고하시던
그 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효자효녀의 충절과 절개를 가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970. 11. 1)

 

원리원본 (原理原本) - 437쪽

이렇게 儒敎의 思想은 鄭鑑錄을 中心하고 基本 目的인 儒敎의 道德觀念보다도 鄭鑑錄 支待(持)思想으로 儒敎人들은 立場을 세울 수 있는 路線을 取하여 나타난 바가 外政을 相對로하여 同學이라는 名稱으로 하여 民族運動을 일으킨 것이, 卽 三日運動 己未年 事件인 바이다.

이리하여 東學黨은 한 敎派를 세워 宗敎 모양으로 理想을 잡아 世界에 없는 天國理想을 中心하고 天道敎라는 名稱으로 나타나 至今까지 나오고 있다. 그 모든 中心은 韓國을 中心한 豫言書 鄭鑑錄을 中心하고 그 目的 完成 標準을 定하여 나오고 있다.

儒敎는 韓國의 新(새로운) 形體를 가진 한 敎를 成(이루어) 놓게 되었다. 그런고로 儒敎的 한 結實한 存在를 天道敎는 그 位(위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韓國人은 信仰을 끝까지 變하지 않고 나오고 있으니 新敎理는 天理를 通하여 내게 된다. 


또 佛敎를 두고 韓國을 살펴보면 亦是 佛敎도 李朝時代를 中心하고 많은 發達을 하여 왔지만 外政下에서도 佛敎는 많은 長成을 보아 왔다. 그리하여 佛敎 亦是 全盛을 본 곳은 韓國이다. 그리하여 佛敎는 韓國에 있어서, 特히 한 末來에 대한 極樂思想으로 나오면서 韓國에 對한 豫言的 宣言을 많이 하여 왔다. 그리하여 韓國 豫言書를 記錄한 바도 佛敎에서 始作한 바도 事實이다. 

원리원본 (原理原本) - 437쪽

이렇게 유교의 사상은 정감록을 중심하고 기본 목적인 도덕관념보다도 정감록 지지 사상으로 유교인들은 입장을 세울 수 있는 노선을 취하여 나타난 바가 외정을 상대로하여 동학이라는 명칭으로 하여 민족운동을 일으킨 것이, 즉 삼일운동 기미년 사건인 바이다.

이리하여 동학당은 한 교파를 세워 종교 모양으로 이상을 잡아 세계에 없는 천국이상을 중심하고 천도교라는 명칭으로 나타나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 그 모든 중심은 한국을 중심한 예언서 정감록을 중심하고 그 목적 완성 표준을 정하여 나오고 있다.

유교는 한국의 새로운 형체를 가진 한 교(敎)를 이루어 놓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교적 한 결실한 존재를 천도교는 그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인은 신앙을 끝까지 변하지 않고 나오고 있으니 신교리는 천리를 통하여 내게 된다. 


또 불교를 두고 한국을 살펴보면 역시 불교도 이조시대를 중심하고 많은 발달을 하여 왔지만 외정하(外政下)에서도 불교는 많은 장성을 보아 왔다. 그리하여 불교 역시 전성을 본 곳은 한국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한국에 있어서, 특히 한 미래에 대한 극락사상으로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예언적 선언을 많이 하여 왔다. 그리하여 한국 예언서를 기록한 바도 불교에서 시작한 바도 사실이다. 

 

文鮮明先生말씀選集 1권

19) 만민을 위하여 오신 주를 모시는 자가 되자
1956년 12월 23일(日), 전 본부교회.

2. 예수의 강림 목적과 유대 백성의 불신

그러면 이제 무형의 아버지께서 인간과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기쁨과 영광을 누리시려던 창조이상, 만물 앞에 인간을 내세우시고 모두가 선의 이상에 취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며 동고동락하기를 소망하셨던 하나님의 창조이념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속에 한으로서 남아졌는데, 이것을 풀어 드릴 사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4천년 수고의 역사를 대신하여, 인류를 대신하여, 만물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원한의 핵심을 실체적으로 풀어 드리기 위하여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모셔야 했던 존재, 예수를 대망하였던 존재, 예수와 영원히 동락할 수 있었던 존재는 어디에 있었던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 사무친 원한의 심정을 대신한 분이요, 무형의 실존체로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실체상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원한을 실체적으로 풀어 드릴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당시의 유대 백성들이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 받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내적인 섭리의 뜻을 알아서 이 분은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서러워 하셨던 그 마음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분이요, 아버지가 찾으시던 영원한 소망의 존재라고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소망의 심정과 동감할 수 있고 그 예수를 모실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형의 하나님의 서러움은 유형의 인간을 통해서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서러움과 만민의 서러움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이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평생 동안 기쁨의 날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4천년 동안 흘리신 하나님의 서러움의 눈물이 그의 마음에 사무쳐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만민들이 예수와 하나되어 하나님의 서러움을 풀어드려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예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여 예수 앞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의 일생을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살펴볼 때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한의 자국이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연장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메시아를 바라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로 태어나신 예수가 이렇듯 서럽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을 모실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찾으시되,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서러움에 동참하고,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수고를 대신하고,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소망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찾으셨으나, 마구간에서 태어나 30여 평생을 거쳐 십자가의 고개를 넘으실 때까지 그런 존재를 하나도 찾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만민이 모시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갖고 오셔서 인간들에게 그 사랑을 옮겨 줄 수 있는 살아 계신 예수는 어찌하여 아무도 모시지 않았던가? 그 책임은 인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수고의 노정을 제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였는데도 불구하고, 소망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의 소망의 실체로 오셨던 예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예수의 서러움을 붙안고, 그의 고난을 자기 일신에 지니고 그의 소망을 느끼어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우리 선조들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오늘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나님의 모든 원한을 예수의 일신을 통하여 풀려고 하던 일이 우리의 선조들이 책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연장된 연고로, 하나님의 서러움은 예수님의 서러움으로, 하나님의 수고는 예수의 수고로, 하나님의 소망은 예수의 소망으로 남아졌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성신에게까지 미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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