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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證言)

김성모 (金成模) - 레바론의 백향목을 옮겨 심어라 - 18.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서울로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5.04.20|조회수405 목록 댓글 0
증언(證言) - [42]
김성모 (金成模) - 레바론의 백향목을 옮겨 심어라
18.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서울로
 
1 난감한 일이었다. 수련회에 참석하려면 당장 떠나야 했다. 교회 헌당 예배를 못하게 된 것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식구님께 말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서울까지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체험해 보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2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할 때부터 마음을 단단히 가졌다. 장항을 출발해서 서천읍을 지나 부여로 향했다. 지금같이 도로가 잘 포장된 길이 아니었다. 부여읍과 공주를 지나 천안까지 가는 길은 자갈을 깔아놓은 신작로 돌밭 길이었다. 타이어 펑크가 나고 페달이 부러져 수리를 해야 했다. 고장 난 자전거를 끌고 몇십 리 길을 가서 고치기도 했다. 천안에서부터는 포장된 국도를 따라 달렸다.  
  
3 밤이었다. 다음날 서울까지 가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 같아 평택의 집에 들어가서 편히 쉬고 다음날 아침 좀 늦게 출발했다. 수원을 지나 안양의 지지대 고개에서 한번 자전거에서 내린 다음 청파동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한양까지 5백 리 길을 자전거로 이틀 만에 도착한 것이다. 
 
4 협회 11회 특별수련은 20일간이었고 72가정 약혼을 위한 수련회였다. 수련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개척지에서 활동하다가 갑자기 부름을 받고 온 인물들이라 누구 하나 단장을 제대로 할 처지가 못 되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똑같은 형편이었기에 평소 생활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에 분 바르고 머리에 기름 바를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 
  
5 그러나 축복 대상을 만나는 자리는 엄숙한 자리였다. 본부교회 1층 강당에는 남녀 수련생들이 마음을 조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2층으로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한 사람씩 불려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것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그리고 김성모를 부르는 소리에 2층으로 올라갔다. 
  
6 나는 참아버님과 유효원 협회장님 사이에 앉았다. 참어머님과 최원복 선생님이 전면에 앉아 계셨다. 네 분이 앉아계신 자리라 긴장이 되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아버님께서 이놈의 자식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어 하시며 호통을 치시는데 얼떨떨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7 나는 누구를 마음에 둔 적이 없었지만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너 최옥분이 알아?” 하시며 참아버님께서 물으시는데 옆에 있던 유 협회장님께서 옥분씨가 성모씨를 1번으로 지명을 했다는 말을 하셨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앉아 있자 아버님께서 넌 내려가고 최옥분이 올라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8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부르셔서 올라갔을 때 “너 이 색시 한번 보라.”라고 하시며 아버님께서 앞서와는 달리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다음의 말씀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서로 손을 잡게 하고 최옥분씨를 향해 내조 잘 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9 우리는 이렇게 일찍 약혼이 결정되어 수련회 기간 중간에 임지로 내려가게 되었다. 우리 부부의 인연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원주교회부터였다. 가끔 원주교회에 가면 눈과 얼굴이 동그랗고 마치 동남아에서 온 여인 같던 사람이 있었다.

10 식구들과 함께 둘러앉아 뻥튀기를 먹은 적도 있었고 일주일간 금식을 마치고 죽을 먹으며 건강을 회복할 때도 서로 살펴주었던 식구였다. 그런 사람을 참부모님께서 영원한 나의 반려자로 맺어 주셨다. 

 

証言- [42]
金成模 - レバロンスギを移植しろ
18. 自転車のペダルをこいでソウルへ


困ったことになった。修練会に参加するには、直ぐに出発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教会の献堂式ができなくなったこと、次に延期するしかない私の立場を食口に説明した。そして自転車に乗ってソウルまで行こうと決心した。自ら多くのことを体験してみようという単純な考えからだった。

翌朝早く出発する時から気を引き締めた。長項を出発して舒川邑を経、扶余に向かった。今のように道路がちゃんと舗装されていなかった。扶余邑と公州を過ぎて天安まで行く道は砂利を敷いた新作路の石ころ畑の道だった。タイヤがパンクし、ペダルが折れて修理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数里の道を、故障した自転車を引っ張って行って直したりもした。天安からは舗装された国道に沿って走った。

夜だった。翌日ソウルまで行くのに時間的余裕がありそうで、平沢の家に帰ってゆっくり休み、翌朝少し遅く出発した。水原を過ぎて安養の遲遲臺峠で一度自転車から降りてからは、清波洞まで休まず走った。自転車で、漢陽まで50里の道を2日で到着した。

協会11回の特別修練は20日間で、72家庭の婚約のための修練会だった。修練会に参加した人たちは開拓地で活動していて、突然呼ばれてきた人達なので、誰一人として端正に装って来れなかった。誰もみな同じ状況だったので、普段の生活の姿そのままだった。顔におしろいを塗って髪に油を塗る必要がない状態だった。

しかし、祝福の対象に会う場は厳粛だった。本部教会1階の講堂には、男女の修練生たちが気をもんで座っていた。そして皆の関心は2階に集中していた。一人ずつ呼び上げられ、降りて来る度に皆の視線がそっちに集中した。それが幾度も繰り返された。金成模が呼ばれて2階に上がった。

私は真のお父様と劉孝元協会長の間に座った。真のお母様と崔元福先生が前に座っていらした。4人が座っておられる席なので緊張した。じっと座っていると、お父様がこいつ、誰を心に留めていると怒鳴りつけられたが、面くらって何も言えなかった。

私は誰かを心に留めたことはなかったが、頭を下げたまま何も言えずにいた。「お前、チェ·オクブンって知ってる?」と、真のお父様が尋ねられると、隣にいた劉協会長がオクブン氏が成模氏を1番に指名したという話をされた。それでも何も言えずに座っていると、お父様がお前は降りて、チェ·オクブンが上がってくるように言われた。

そしてしばらくして再び呼び出されて上がった時、「お前、この娘を一度見てみろ」と、お父様が前とは違って小さな声でおっしゃった。その次の言葉はよく思い出せないが、お互いに手を握らせ、チェ·オクブン氏に話された。よく内助し、お互いに愛し合って生きろと。

私たちはこのように婚約が早く決まり、修練会期間中に任地に帰ることになった。私たち夫婦の縁は私の軍隊時代の原州教会からだった。たまに原州教会に行けば、目と顔が丸く、まるで東南アジアから来た女性のような人がいた。

食口と一緒に座ってポン菓子を食べたこともあり、1週間の断食を終えてお粥を食べながら健康を回復する時も、お互いに気を配っていた食口だった。そんな人を真の御父母様が私の永遠な伴侶として結んで下さった。

注1 遲遲臺峠: この峠の名前が「遲遲台」になった理由は、正祖が父親の思悼世子の陵がある顕隆院(隆陵)に参拝に行く時、峠の頂上で父親の墓がよく見えるのに到着するまで時間がとてもかかる(遅い)と嘆いて漢城の宮に戻る時は「この峠を越えると父親の墓が見えなくて悲しい」と涙を流して足を遅らせたことに由来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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