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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證言)

김성모 (金成模) - 레바론의 백향목을 옮겨 심어라 - 23. 파주지역장 생활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5.04.24|조회수395 목록 댓글 0
증언(證言) - [42]
김성모 (金成模) - 레바론의 백향목을 옮겨 심어라
23. 파주지역장 생활

1 8월 10일까지 파주지역장으로 가라는 지구 본부의 인사 통보를 받고 참으로 난감했다. 이영배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목회자란 오로지 순종하며 오고 가야만 했다. 송산을 떠나 8월 12일에 파주지역 금촌교회로 찾아갔다. 그리고 오명우 전임자와 인수인계를 했다. 
  
2 수없이 많은 인사이동을 하면서 생소한 개척지로만 다녔는데 이 지역은 내가 아는 곳이었다. 처음으로 인수인계장에 도장도 찍었다. 종이 한 장을 주고받는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미 1기갑 사단 의장대를 떠난 후 6년 만에 다시 파주에 오게 된 것이었다. 
  
3 일주일 뒤에 아내가 아직 열 달도 되지 않은 영범이를 안고 금촌으로 왔다. 아내는 금촌을 찾아오면서 서울에서 연탄 한 장을 사서 신문지에 싸 들고 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요즘은 가정에서 연탄을 별로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는 연탄 한 장이 그만큼 귀하던 때였다.

4 생활 형편이 너무나 궁핍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 아내는 요즘 가끔 먹을 것이 많아서 행복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다가 옛날 축복 기념 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찾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영영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5 당시 파주에는 금촌교회 외에 적성면에 임길재 교회장이 잘 지은 샘내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미 1기갑 사단에 근무할 때 있던 봉일천교회는 없어졌다. 파주지역은 거의가 미군 주둔 지역이었다. 미 1기갑 사단에서 18개월간 군대 생활을 해서 나는 파주지역을 훤히 알고 있었다.

6 지금은 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문산 방면으로 가면 임진강 다리까지 단숨에 갈 수 있지만 50년 전에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문산역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문산행 열차를 한번 타자면 반나절이나 걸렸다. 
  
7 임길재 교회장은 지금 파주원전을 관리하고 있어 통일교회 식구 중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당시에는 샘내 교회장으로 있으면서 식구들과는 주일 저녁 예배만 보고 주일 낮 예배는 항상 서울 본부교회로 혼자 가서 예배에 참석했다.

8 그래서 언제나 토요일 저녁이면 금촌교회로 와서 자고 새벽에 통금이 해제되면 곧바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70리 길을 걸어서 본부교회까지 갔다. 본부교회에는 식구들이 1시간 전부터 미리 와서 예배 준비를 하기 때문에 일찍 출발해도 교회 안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9 예배는 참아버님께서 직접 주관하셨는데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1시나 2시가 돼야 예배가 끝났다. 성전 안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한 식구들은 문밖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늦게 온 식구가 생각 없이 좁은 틈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당장 참아버님의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10 파주에는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미 1기갑 사단의 예하 부대만 있었다. 그런 관계로 많은 일반 주민들이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별의별 사람들이 미군과 함께 살아가는 지역이라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것이 흔했다.

11 반면에 문산읍은 비교적 조용한 곳이라 전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고 공기총 판매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문산읍에 가게를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얼마 후에는 금촌교회를 단독 집으로 옮겼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식구들도 차츰 늘어났다. 

 

証言 - [42]
金成模 - レバロンスギを移植しろ
23. 坡州地域長生活


8月10日までに坡州地域長に行くようにと地区本部の人事通知を受け、実に困った。イ·ヨンベ先生と生徒たちに申し訳なかった。しかし、牧会者たる者は、ただ従順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松山を離れ、8月12日に坡州地域の金村教会を訪ねた。そしてオ·ミョンウ前任者と引き継ぎをした。


数えきれないほど多くの人事移動になりながら、何処も見しらぬ開拓地だったが、この地域は私が知っている所だった。初めて引き継ぎ帳にハンコも押した。紙一枚のやり取りがなんとなくしっくりこなかった。米第1機甲師団の儀仗隊を発ってから、6年ぶりにまた坡州に来たのだ。


一週間後に妻がまだ10ヶ月にもならないヨンボムを抱いて金村に来た。妻は金村に来る時、ソウルで練炭1枚を買って新聞紙に包んで持ってきた。そんな妻の姿が実に労しかった。最近は家庭で練炭をあまり使わないが、当時は練炭1枚がとても貴重だった。

生活状況があまりにも貧しい時代を生きてきた人なので、妻は最近たまに食べ物が多くて幸せだと言う。そして、昔の祝福記念指輪を質屋に預けたのを、取り戻せなかったのがとても残念で、未だに心から消せないという。

当時、坡州には金村教会以外にイム·ギルジェ教会長が積城面に立派に建てたセムネ教会があった。私が米第1機甲師団に勤めていた時にあった奉日川教会はなくなった。坡州地域はほとんどが米軍駐留地域だった。

米第1機甲師団で18ヵ月間軍隊生活をしたので、私は坡州地域をよく知っていた。今はソウルから自由路で文山方面に行けば臨津江橋まで一気に行けるが、50年前には京義線列車に乗って文山駅まで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ソウル駅から文山行きの列車に一度乗るには、半日もかかった。

イム·ギルジェ教会長は現在、坡州原殿を管理していて、統一教会の食口なら知らない人がいないほどだ。当時はセムネ教会長として在任しながら、食口とは日曜日の夕方の礼拝だけを捧げた。

日曜日の昼は、いつも一人でソウル本部教会に行って礼拝に参加した。だから、いつも土曜日の夕方には金村教会に来て寝て、夜明けに門限が解除されれば直ぐにソウルに向かって出発した。

7里の道を歩いて本部教会まで行った。本部教会には食口が1時間前からもう来て礼拝準備をするので、早く出発しても教会の中には空席がなかった。

礼拝は真のお父様が直接主管されたが、10時に始まって午後1時か2時に終わった。聖殿の中に席がなくて入れなかった食口は、門の外に立って礼拝を捧げ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遅く来た食口が何も考えずに狭い隙間をかき分けて中に入ろうとすると、すぐにお父様の雷のような怒鳴り声が落ちたものだ。

坡州には西部戦線を防御する米1機甲師団の隷下部隊だけがあった。そんな関係で、一般住民の多くが米軍部隊に勤務した。ありとあらゆる人々が米軍と共に暮らしている地域なので、他の地域では見られない異色なことが多かった。

反面、文山邑は比較的静かな所なので、伝道の足場を築け、空気銃も販売できそうだと思って、文山邑に店を借りて事業を始めた。その結果、暫く経って金村教会を一軒家に替えた。ある程度生活が安定すると、食口も次第に増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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