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생애노정 - 048. 미정착 피난민 생활 / 哀歓が秘められた避難民生活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25.08.22|조회수265 목록 댓글 0
참부모님 생애노정 - 2권
한국 해방과 섭리출발
제5절 부산 피난시절 (1951.1.27.~1953.9.17)

1. 미정착 피난민 생활

1951.1.27. ~ 8월

부산 도착 때의 행색

만약에 선생님이 평양에서 부산까지 곧장 내려왔더라면 10일밖에 안 걸렸을 겁니다. 선생님의 그 노정은 네 달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게 되었는데, 여러분은 선생님의 그 옷이 그 동안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는 내가 이북의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왔기 때문에 머리도 짧고 형편없었어요. 명주 바지 저고리가 너무 새까맣기 때문에, 껍데기는 벗겨 버리고 국방색으로 물들인 속이 겉으로 나오도록 뒤집어 입은 거라구요. 뒤집어 입으니까 그거 뭐 홑챙이 퍼런 바지지요. 그걸 입고…. 명주 저고리는 뭐 두 달 동안 입었으니 될 대로 다 됐지요. 기름때가 배어 가지고 비가 오면 빗방울이 뚜루룩 굴러간다구요. 이래서 상거지가 다 되어 가지고 형편없이 부산에 도착하게 되었어요.

작업화나 운동화가 뚜껑만 있고 바닥은 없을 때까지 신었습니다. 밥을 얻어 먹으러 다니는 입장인데 신발을 사 신을 수 있겠어요? 발가락에 흙이 끼이지만 신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피난시대에 옷 한 벌 가지고 1년 동안 입어 봤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누더기 옷을 입고 있더라도, 그럴 때에는 이 누더기 옷이 앞으로의 소망의 날에 있어서 천만인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은 이러이러한 길이요, 내가 역사적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이 땅 위에 그 시대를 맞아 가지고 그것이 전체화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될 때는 오늘 이와 같은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연극을 꾸밀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실극을 하는 주연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더기 옷을 입고 쓱 행차하는 거라구요. 밥을 얻어 먹으러 가는 겁니다. 역사를 창건하는 주연의 심정을 갖고 가는 겁니다.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라구요. 생각 하나에 의해 천태만상이 다 달라지는 겁니다.

배고픈 피난생활

내가 김원필을 만났을 때, 그는 더벅머리 총각으로 19살이었습니다. 그 뒤로 4년이 지나서 23살이 되었는데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식당 보이도 시키고 별의별 일을 다 시켰습니다. 얻어다 주는 밥도 먹어 보고, 점심 대신 누룽지도 먹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밥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극적이고 인상적이고 재미있었습니다. 

추울 때는 사람들이 전부 다 양지로 모여듭니다. 그러면 얼굴을 찡그리며 가서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겠으니 사람 못살게 굴지 말고 제발 비켜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아침도 먹고, 점심도 다 먹지 않소? 우리는 아침도 못 먹었으니 아침 먹는 사람 박대하지 말고 저리 비키시오’ 이렇게 해놓고는 양지쪽에 삥 둘러 앉아서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밥을 먹는 재미가 아주 좋습니다. 거기에는 남모르는 철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내 친구들입니다. 감정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거지노릇도 했다구요, 거지 노릇. 밥 얻어먹고, 밥얻어 오는 데는 나 못 당합니다. 눈치가 빨라야 얻어먹는다구요. 사람을 보는 거예요. 돈을 안 주면 ‘야, 이 녀석아! 너 배포가 이런 거야?’하고 기합을 주고는 ‘우리같이 지나가는 사람을 후원해 주면 좋을 거야’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환드레이징 조상입니다.

도움을 준 고향 친구

부산의 길은 외통길이라구요. 팔도강산 사람을 다 만날 수 있습니다. 통길이기 때문에 일주일만 왔다갔다하면 다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 부산에 가서 적적하니까 그 통길을 다니다가 고향의 친구를 만났어요. 그 이름도 안 잊었어요. 우리 동네에서 먼 데 있는 나를 아는 사람인데 길거리에서 나를 만나 가지고 그때 돈으로 만 원을 주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 나는 이걸 몇백 배로 갚아 주겠다, 내가 한때에 가서는 몇백 배, 몇천 배로 갚아 줄 것이다…. 이렇게 떡 생각하고 있는데, 그 몇해 후에 그 사람의 아내가 여기 통일교회를 찾아왔어요. 와가지고 ‘아무 때에 우리가 문선생을 이만큼 도와주었으니까, 이제는 우리를 도와주어야지요’ 하는 거예요. 내가 아주 기분 나빴다구요. 요사스럽게 여자가…. 나는 너희들의 아들딸을 먹여 살리겠다는, 후덕하게 갚아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 앞에 기도하며 만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요사스럽게 나타나느냐 이거예요.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모릅니다. 

그때에 만 원을 받았으니 그 이자를 계산해서 얼른 주어서 쫓아 버리라고 했어요. 일년에 얼마씩 고리대금으로 계산해서 주라고 했어요. 내가 일생 동안 그리워하고 선하다고 찬양하던 그 기준이, 피난시절에 있어서 제일 자극적인, 생애에 있어서 기념할 수 있는 그 표적이 몽창 꺾어지니까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모른다구요.

부두 노동과 초야 은신

부산에 내려가니 인산인해가 돼 가지고 어디 뭐 구멍 있는 데는 다 들어가 박혔고 어디 뭐 있을 만한 데는, 처마끝까지 전부 다 만원이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밤에는 밤일을 나가는 거예요, 낮에는 자고. 거 밤에 떨던 생각이 지금도 아득해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런 때도 선생님은 ‘아버지 걱정 마시옵소서. 아버지의 가신 발자국을 내가 기쁨으로써, 탄식으로 걸어가신 아버지의 발자국을 소망으로써 이을 수 있는 내가 되겠습니다.’그랬어요.

밤에는 나가서 돈벌이 하고 낮에는 열 시부터 두시까지 자는 거예요. 그때는 양지쪽에 가서 가만히 앉아 가지고 꿩새끼처럼 딱 자리잡고 들어가 자면 좋아요. 떡 자고 일어나서 옷을 척 입었을 때에는 김삿갓 노래가 생각나는 거예요. 선생님은 자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만 있으면 뜰에 가다가도 뜰에서 자고, 바위에 앉아서도 자고, 그런 생활을 참 많이 했다구요. 왜 그러냐? 내가 이렇게 있다가 떠나려 하면, 그게 서러워하는 것을 안다구요. 거기서 자면 그것이 바위가 아닙니다. 자기 집 보다도 더 귀한 거예요.

낮에는 산에 올라가서 숲속에 잠자리를 정하고 잠도 자고 혼자의 시간을 갖기도 했어요. 선생님은 그런 것을 즐겨 했습니다. 밤에 다시 일터로 가면 선생님은 선풍적인 모습이 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였습니다. 선생님이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면 그들은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나눠 먹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눈 오는 날 혹은 진눈깨비 내리는 날에 길가에 있는 노동자의 그 처량한 신세를 보게 되면 그가 선생인 것을 연상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아버님께서 저런 일을 하셨어!’하면서 말이예요.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운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돼요.

팥죽 장사 아주머니

내가 피난을 내려와 가지고 여기 초량 부산진 4부두에 일하러 다니고, 그 다음에 팥죽 팔아먹는 아줌마들, 그다음에 시루떡 파는 아줌마들, 그때 생각이 나요. 그렇게 일해 가지고 돈을 받아 가지고 나오는데, 어디를 가나 춥거든요. 그러니까 팥죽 파는 아주머니한테 가는 거예요. 초량역으로 쓱 나오면 팥죽 장사 하는 아주머니들이 많아요. 누더기 이불을 싸 가지고 통이 식지 않게 해 가지고 와서 파는데 그 팥죽통을 끌어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그 아주머니가 뭐라고 안해요. 30분만 얘기하면 팥죽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팥죽 장수 아줌마한테 사흘만, 일주일만 가게 되면 말이예요, 팥죽 판 돈을 나에게 맡기게 되는데 뭐.

요즘에도 그걸 먹고 싶을 때가 있다구요. 그때에 얼마나 그게 맛이 있던지 말이예요, 그 당시에는 굶주리고 다 그러니까 뭐 세상에서 제일 맛있던 것이었어요. 그 때묻은 아주머니, 그저 한 가지밖에 모르던, 죽 팔기 위해 열심인 그 아주머니 얼굴과 모습이 그립고, 그 손으로 퍼주던 죽이 얼마나 맛있는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때는 말이예요, 피난 때에는 내가 방공호에 가서 자고 그랬다구요. 피난시대에 집이나 있나요. 저 산등성이에 올라가 가지고 오바를 덮고 자던 것이 엊그제 같다구요. 그때 그 아주머니집이 하꼬방집이었어요. 남편하고 애기들하고 살았는데, 애기들을 보게 되면 불쌍하고 처량하고 처량한 그런 환경인데 거기에 발이라도 하나 집어넣고 살았다면 그게 얼마나 자랑이예요? 그래 죽을 퍼 놓고 남은 누룽지라도 줘서 맛있게 먹었던 것이, 얼마나 추억이겠어요. 그럴 수 있는 일도 있다구요.

생활 체험과 원리원본(原理原本) 집필 시작 

1951.5.11.

몇몇 식구를 중심삼고 사선을 넘어 남한 땅에 1951년에 내려와 가지고 원리원본을 만든 것입니다. 초량에 노무자 수용소가 있어 가지고 그 조그만 방에서 내가 원리원본을 쓰던 것이 생각난다구요. 요만한 방에서 바로는 못 누워요. 그렇기 때문에 엑스(X)로 누워야 하는데, 엑스로 누웠댔자 발이 닿습니다. 그런 방에서 지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빠르다구요.

그 기간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자립하여 살기 위해서 경제적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해야 했기 때문에 별의별 일을 다 했다 이거예요. 임기응변이다 이거예요. 임기응변과 같이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소질을 많이 갖고 있다구요. 자연적 소질보다도 훈련시킨 소질이다 이거예요. 자신이 훈련해 가지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립할 수 있는 주체자가 되지 않고는 이러한 엄청난 큰 뜻을 성사시킬 수 없다구요.

내 이 거룩한 인생행로, 남아일언의 행로에 있어서 인생들이 가지 못하던 그런 곡절의 노정을 갈 수 있는, 한 기록을 남기는 인간철학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인간철학. 인생철학이 아니예요. 인간철학이니 생활과 모든 쓰레기 구덩이도 다 파는 거예요. 생활분야의 특별한 그런 면에서 곡절의 모든 것을 풀어 나가는 이게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월남한 피난민들의 애환

부산에 오게 되면 내가 언제나 자갈치시장을 생각해요. 피난시절에, 처량한 시절에 그 동네를 많이 다녔어요. 그 당시에 피난 와 가지고 부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이었겠어요? 환고향 안 바라던 사람이 있었겠어요?

기반 없이 기반이 있는 남한 사람들에게 와 가지고 여기에 붙어서 자기들의 생계를 위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남한에 사는 어떠한 사람보다 어려운 자리에 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난민의 생활입니다. 그렇게 출발해서 정착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하나의 피난민으로 와서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그 과정의 곡절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어느정도 비참하냐? 그것은 기반을 가진 남한에 사는 어떤 노동자보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보다도 더 비참한 것입니다. 

더구나 고향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 후손들 앞에 고향을 보여 줄 수 없고 고향을 소개할 수 없는 자리에 섰다면 그게 얼마나 비참하겠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 와서 경제적 기반도 많이 가졌지만, 스스로 북한 땅 고향으로 자기 자신이 돌아가게 될 때는 패자가 아니고 승자와 같이, 성공한 사람과 같이 권위를 갖추어 가지고 나타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고향 돌아가서 자기의 위신을 세우고 그 고향 땅에 모든 정성 들인 값진 것을 심을 수 있고 남길 수 있는 것이 있다 할 때, 피난살이 과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오직 그 한날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 것이 피난 온 동포들의 사정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真の御父母様の生涯路程 2
韓国解放と摂理の出発
第五節 釜山避難時代 (一九五一・一・二七~一九五三・九・一七)

一 哀歓が秘められた避難民生活
(一九五一・一・二七~八月)


釜山到着時のいでたち

 もし、先生が平壌から釜山までまっすぐに下ってきたならば、十日しか、かからなかったことでしょう。先生のその路程は四ヵ月の長い時間がかかりましたが、皆さんは先生のその服がその間にどんなに汚くなったか想像できないでしょう。

 その時は、先生は北韓の監獄から出てきたばかりで、頭も短くひどい姿でした。絹織りのズボンと上着があまりに黒くなり、表ははげてしまったので、カーキ色に染まった内側を表に出して、裏返して着たのです。絹織りの上着は二カ月間着ていたので、すっかりなるようになっていました。体の脂や垢が染み着いて、雨が降れば雨の滴がころころと転がっていくのです。こうしてほとんどみじめな乞食の姿になって、ひどい格好で釜山に到着しました。

 作業靴や運動靴は、くつ底がなくなるまで履きました。御飯をもらって食べる立場なのに、靴を買って履くことができますか。足の指の間に土が入るのですが、それを履いて歩く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ながら、避難時代、一着の服で一年間暮らしました。

 しかし、たとえぼろぼろの服を着ていたとしても、そのような時には、「このぼろぼろの服が、将来の希望の日において、千万の人が仰ぎ見るものではないか」と考えるのです。「私が行く道はこうこうこのような道であり、私は歴史的な使命を担っている。そして、この地上にその時代を迎え、それが全体化される環境が整うようになる時には、今日のこのような場面を再現し、演劇を作ることだろう」と、そのように考えるのです。そうすれば、実際の劇の主演になるのです。それで、ぽろぼろの服を着て、さっそうとお出ましして、御飯をもらいに行くのです。歴史を創建する主演者の心情をもって行くのです。それが不幸だとは思わないのです。考え方一つにより、千態万状がみな異なるのです。

ひもじい避難生活

 私が金元弼に会った時、彼はまだ頭がばさぱさの青年で、十九歳でした。それから四年が過ぎて二十三歳になったのですが、何かすることがありますか。それで食堂のボーイもさせたり、あらゆる仕事をさせました。御飯ももらって食べてみて、昼食の代わりに釜の底のお焦げも食べたりしました。そうかと言って私が御飯のためにそうしたのではありません。あらゆる仕事をほとんど経験してみたのです。とても劇的で印象的であり楽しいことでした。

 寒い時は、人々がみな日なたに集まります。そうすると、顔をしかめて行って、「腹が減って御飯を食べなくてはならない。我々をいじめるようなことはしないで、どうか入れてくれ」と言います。「皆さんは朝飯も昼飯も食べたではないか。我々は朝飯も食べられなかったのだから、朝食をする人を冷たくあしらわないでくれ」と言って、日なたにぐるっと輪になって座って御飯を食べたりもしました。そのようにして御飯を食べるととても楽しいのです。そこには、他人の分からない哲学があるのです。人々がみな、私の友人です。感情が通じるのです。

 先生は、乞食稼業もしたのです。御飯をもらってくることにおいては誰も私にかないません。機転が利いてこそ、もらって食べられるのです。人を見るのです。お金をくれなければ、「やい、こいつめ! お前の度量はこれくらいか」と気合いを入れて、「我々のような通りすがりの人を援助してあげると、いいことがあるものだ」と言うのです。それで、私がファンダレイジングの先祖です。

援助してくれた故郷の友達

 釜山の道は、一方にだけに通じた道です。韓国全土の人に、みな会うことができます。一つしかない道なので、一週間も行ったり来たりすれば、みな会うのです。そう、釜山に来て寂しいので、その一つしかない道を歩いていたところ故郷の友達に会いました。

 その名前も忘れません。私の村から遠い所にいて私を知っている人ですが、私に会って、その時のお金で一万ウォンをくれたことが思い出されます。

 それで、私は、「これを何百倍にして返してあげよう、私がいつの日か何百倍、何千倍にもして返してあげよう」と、そのように固く思っていたのに、その何年かのち、その人の妻が、この統一教会を訪ねてきました。訪ねてきて、「いつだか、私たちが文先生をこれくらい援助してあげたのだから、今は私たちを助けてくれるべきでしょう」と言うのです。私はそれを聞いてとても気分が悪かったのです。

 私は、お前たちの息子、娘が食べていけるようにしてあげよう、厚徳をもって報いてあげようという心情で天の前に祈祷し、会うことを願っていたのに、このように妖しげに現れるのかというのです。どんなに気分が悪かったか知れません。

 「その時、一万ウォンもらったから、その利子を計算してすぐにあげて追い出してしまえ」と言いました。「一年でいくらずつの高い利子で計算して払ってあげろ」と言ったのです。私がずっと懐かしく思い出しながら、善良であると褒めたたえていたその基準が、避難時代において一番刺激的な、生涯において記念することができるその目印が、すべてくじかれてしまい、どんなに気分が悪かったか知れないのです。

埠頭労働と草野潜伏

 釜山に下ってくると、そこは黒山の人だかりになっていました。穴のある所はすべて人が入って占められており、どこでも住めるようなところは、軒先まですべて満員なのです。ですからどうしますか。夜は夜の仕事に出て、昼寝るのです。そこで足をどんどんと踏みならしながら、夜に震えた思い出が今も遠くかすかに思い出されます。そのような時でも先生は、「天の父よ心配しないでください。嘆息されながら歩んで行かれた父のみ跡を喜びと希望で、つなぐことができる私になります」と、祈りました。

 夜には出ていってお金を稼ぎ、昼は十時から二時まで寝るのです。その時は日なたの所に行って、雉みたいに場所をとって入って行き、寝ればいいのです。寝て起きて、服をさっと着た時には、金サッカ(注:朝鮮王朝末期の放浪詩人)の歌が思い出されるのです。

 先生は自然的な人です。そのような心をもちながら、庭に行っても庭で寝て、岩に座ってもそこで寝るというような生活を、本当にたくさんしたのです。なぜそうなのでしょうか。私が岩に座っていて、去ろうとすれば、岩が悲しむのが分かるのです。そこで寝ればそれが岩ではないのです。自分の家よりも貴いのです。

 昼は山に登って林の中に寝床を定めて寝たり、一人の時間をもったりもしました。先生は、そのようなことを好んでしました。夜、再び仕事場に行けば、先生は旋風的な姿になりました。すべての人々が、私の周囲に集まりました。先生が興味深い話をしてあげれば、彼らは食べ物を持ってきて、分けて食べるのです。

 それゆえに、皆さんが雪の降る日、あるいはみぞれの降る日に、道端にいる労働者の、その物悲しく哀れな身の上を見るようになれば、その人が先生であることを連想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私たちのお父様が、あんな仕事をされた!」というようにです。先生が軒下で夜を明かしたことが、どんなに多かったか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あずき粥売りのおばさん

 私が避難してきて、ここ草梁の釜山鎮四埠頭に仕事をしに通ったこと、それからあずき粥を売るおぱさんたち、それから蒸し餅を売るおばさんたちのことが思い出されます。

 仕事をして、お金をもらってくるのですが、どこに行っても寒いのです。ですから、あずき粥を売るおばさんのところに行くのです。草梁駅に行くと、あずき粥の商売をするおばさんたちがたくさんいます。ぽろ布団でくるんで、おけが冷めないようにして来て売りますが、そのあずき粥のおけを抱き抱えるのです。そうしたからと言って、そのおばさんが何か言うのではありません。

 三十分も話せば、「あずき粥を食べなさい」と言うのです。そして、あずき粥売りのおばさんのところに三日か一週間も行けば、あずき粥を売ったお金を、私に任せるようになるのです。

 最近も、それを食べたい時があるのです。その時、どんなにそれがおいしかったことか、その当時は誰もが飢えていたから、世の中で一番おいしい物でした。その垢だらけのおばさん、ただ粥を売るために回生懸命なそのおばさんの顔と姿が懐かしく、その手でよそってくれたお粥がどんなにおいしかったことか、今も忘れられません。そのころ、避難していたころは、防空壕に行って寝たりしました。避難時代に家がありますか。あの山の尾根に登っていき、オーバーを掛けて寝たのが、きのうのことのようです。その時、そのおばさんの家は、小さな家でした。夫と子供たちと住んでいましたが、子供たちを見れば、かわいそうで、わびしくて、そのような環境でしたが、そこに足でも一つ入れて住んだならば、それがどれほど誇りですか。そう、粥を移し換えて釜の底に残ったお焦げでももらっておいしく食べたことが、どんなに思い出されること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こともあったのです。

生活体験と原理原本執筆開始(一九五一・五・一一)

 数人の食口を中心として、死線を越え韓国の地に一九五一年に下ってきて、原理原本を作ったのです。

 草梁に労務者収容所があって、そこの小さな部屋で私が原理原本を書いたのが思い出されるのです。これくらいの部屋で、まっすぐに横になることができません。それゆえ、「く」の字になって横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く」の字で横になっても壁に足がつきます。そのような部屋で過ごしたのがつい先日のことのようなのに、歳月のたつのは早いものです。

 その期間において、人間として自立して生きるために、経済的問題だとか様々な解決すべきことを自ら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らゆることをしたのです。先生は臨機応変だというのです。臨機応変にその環境に適応できる素質を多くもっているのです。自然に備わった素質よりも、訓練させた素質なのです。自分を訓練して、どんな環境であっても自立できる主体者にならなくては、このような途方もなく大きなみ旨を成就させ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私は、この聖なる人生行路、男児一言(男児一言重千金:男子の一言は千金のごとし)の行路において、人が行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そのような曲折の路程を行くことができる、一つの記録を残すという、人間哲学をもっているのです。人生哲学ではありません。人間哲学だから、生活と、すべてのごみの穴も全部掘るのです。生活分野の特別なそのような面で、曲折のすべてのことを解決していく、それはどんなにすてきなことでしょうか。

韓国に避難してきた避難民たちの哀歓

 釜山に来ると、私はいつもチャガルチ市場のことを考えます。避難時代に、そのわびしい時代に、その界隈に何度も通いました。その当時に避難してきて、釜山に集まった人々の願いが何だったでしょうか。故郷に遣ることを願わなかった人がいたでしょうか。

 何の基盤もなくて、基盤をもっている南側の人々のところに来て、そこにくっつきながら自分たちの生計のための基盤を築くには、南側に住んでいるどんな人より困難な立場に身を置か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す。それが避難民の生活です。そのようにして、定着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先生も一人の避難民として、避難生活をしました。その過程の曲折というのは本当に悲惨なのです。どのくらい悲惨か。それは基盤をもったどんな労働者よりも、監獄に入っている人よりも悲惨なのです。

 しかも故郷を離れ、故郷に帰ることができず、その後孫たちの前に故郷を見せてあげることができず、故郷を紹介できない立場に立ったならば、それがどんなに悲惨かというのです。それゆえに北韓から来た人々がこちらに来て経済的基盤ももちましたが、自分が北韓の地の故郷に帰る時には、敗者ではなく勝者のように、成功した人のように、権威を身につけて登場したいのです。

 そうして、故郷に帰って自分の威信を立て、すべての精誠を込めた価値あるものを、その故郷の地に植えることができ、残すことができるならば、避難暮らしの過程がどんなに困難であっても、構うことなく、ひたすらその日を望んで生きているのが、避難してきた同胞たちの事情であること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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