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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집 『구석의 힘』_김진희

작성자한내|작성시간26.06.05|조회수25 목록 댓글 0

낙타는 달리고 싶다 / 김진희

 

 

1

날 키운 명자언니 틈만 나면 도망갔다

반세기 전, 내가 울던 골목길을 따라서

사막의 망망대해로

손 닿지 않는 데로

 

2

차례를 기다리던 낙타가 달려간다

한 무리 반란군이 사구를 넘어 간다

저 반기 침묵의 오랏줄에

묶인 줄도 모르고

 

모래바람 휘돌아 낙타가 돌아왔다

부은 발 닳은 뒷굽 거친 호흡 뱉으며

뼈 같은 모래 등 뒤로

저녁 해를 끌고 온다

 

 

 

불온한 잠 / 김진희

 

1

간밤에 불탄 산이 잉걸불로 타는 산이

납작 엎드린 꽃 뿌리마저 다 태우고

산 둘레 흔적 없이 사라진

그 꽃을 생각하는 밤

 

2

바람이 훑고 간 자리 겨우내 마른 밑동

남은 물김치로 해갈하는 어머니

버티는 삶의 계단에서

무릎뼈를 세우시며

 

3

임대 있습니다 세일 90프로

막다른 길목에서 토해내는 절규들

바닥이 거품을 물고

깜박이는 붉은 등

 

 

 

구석의 힘 / 김진희

 

 

제집을 벗어놓고 달아나던 매미도

가을을 벗기려고 안간힘 쓴 귀뚜리도

마지막 남은 생을 위한

몸부림의 울음일까

 

몸 하나 소리뿐인 벌레의 소명처럼

지치고 생기 잃은 노숙의 잠자리

후미진 틈에서 버틴

긴 밤이 뒤척인다

 

햇빛은 그의 등을 얼마나 비추었을까

어둠 속 명멸하는 주름 잡힌 시간들

숨은 듯 보이는 꼬리

한 줌 빛이 새어든다

 

 

 

로프공工*의 일기 / 김진희

 

20mm 꼬인 줄에 저당 잡힌 하루다

마천루 정수리에 밥줄을 묶어놓고

묶인 줄 길이만큼의 아스라한 하늘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나무를 헤집으며

땡볕에 거미처럼 파닥이는 낙엽처럼

여백은 고요로 물들고 그늘 한 점 부린다

 

시간을 버텨내라 흔들리는 목숨 줄아

벼랑 끝 절벽에서도 희망의 싹은 튼다

하늘이 비친 유리창 노을을 색칠한다​

 

*로프공 : 고층 건물의 창문이나 벽을 청소 또는 페인트칠을 위해서 로프로 몸을 묶고 일하는 사람

 

 

 

석작 / 김진희

 

 

남길 건 남겨야지 고리에 걸린 엄마

오동꽃 지는 품에 파고든 가족사진

바람에 날린 미소를 촘촘하게 새겼다

 

갈 때를 눈치챈 듯 길 위에 멈춰 서서

콧줄 이은 바늘귀로 백의 한 벌 지으시나

하얀 밤 소복이 담아 차곡차곡 지운다

 

 

 

밤의 출구 / 김진희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이 슬몃 기운다

보폭을 좁히며 무릎걸음 다가와서

또 다시 물러가는 달 혀 짧은 꽃 핀다

 

발을 헛디딘 별은 제 자리 찾았을까

무작정 가는 길에 가까스로 몸을 기대

어둔 길 발맘발맘 따라 희미하게 떠 있다

 

밤은 놓친 밥을, 무덤 같은 밥을 먹는다

처음처럼 막밥*처럼 욱여넣은 밤을 지나

관 같은 요양원으로 어머니 들어가신다

 

* 마지막 밤

 

 

 

내일은 비 / 김진희

 

이불 펴고 도란도란 속삭이는 풀꽃들

품으로 파고드는 풀잎 냄새 취해서

처마 밑 움츠린 새처럼 게으른 잠 들겠다

 

네 온다는 기별에 새봄이 딸꾹질이다

언 발로 마중 나온 목련꽃은 이미 지고

길 위를 서성이는 꽃, 여린 것들 숨 막힌다

 

실핏줄 드러내며 창백하게 여는 아침

구름장 문을 열면 산 너머 내일은 비

능선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 타고 온다

 

 

 

성화聖畵 / 김진희

 

어머니는 그믐달

망백을 훌쩍 넘어

손톱같이 좁은 길로

잠귀를 열어 놓고

 

아직도 가닿고 싶은

별 하나를 찾고 있다

 

 

 

불티 / 김진희

- 줌 인 3

 

 

잃었던 불씨 하나

덤불에서 타오른다

 

산 너머 넘어 타는 불

잿더미 속 눈 뜬 불티

 

요양원 삭정이 끝에

아흔넷 굽이 어머니

 

 

 

낮달 / 김진희

 

미로 같은 긴 그림자 걸려있는 천 길 벼랑

 

한 술 공양 모시듯 연꽃 위의 저 보리암

 

난간에 살얼음처럼 박힌 날 선 비수 한 자루

 

 

 

입곡 / 김진희

 

 

인생은 지금부터 여기서 시작이라고

떠듬떠듬 소리글을 비추는 저수지

 

‘참 좋다’

아흔 살 할머니

시화가 펄럭인다

 

 

 

전지적 눈물 / 김진희

 

 

설한을 뚫고 온 뿔이 하늘 향해 뻗어있다

진작 잘라야 할 미련이 뻗친 날들

열매에 눈먼 탐욕은 킁킁거리며 솟아있다

 

된서리 견딘 2월, 나무는 단단하다

입춘 넘어 자른 가지 물방울이 돋는다

힘겹게 살아있다고 가지 끝에 고인 눈물

 

얽히고 설킨 삶, 곁가지를 자른다

온전히 얻기 위해 무참히 버린다

버티는 늙은 토르소 가슴이 뜨겁다

 

 

 

사랑한다 / 김진희

 

 

센터에서 글자 배운 어머니의 첫 편지

- 즐거운 추석 연휴 되세요 사랑한다 -

아흔둘 나이에 배운 첫 말

추신처럼 사랑한다

 

서른 살 홀몸 되어 한 번도 듣지 못한 말

깊이 배인 외로움에 텅 비어 울리는 말

가슴에 비수 되어 꽂힌다

유언처럼 사랑한다

 

 

 

돌아오지 않는 강 / 김진희

 

 

식솔 두고 떠난 그가 강 너머 또 펼친 살림

잊은 듯 죽은 듯이 가슴속에 자란 멍울

파랑이 추억하는 파편

반짝이며 흐른다

 

핏빛 한 점 떨구고 훌쩍 가신 그날부터

입안에서 맴돌며 불러보지 못한 말

목구멍 가시 박힌 채

걸려있는 아 버 지

 

 

 

딱 하루만 / 김진희

 

 

딱 하루 한나절만이라도 엄마가 오신다면

미루다 못 차린 밥상 눈물 섞인 밥 짓겠네

군 갈치 된장 보글 끓여서 꽃 상 한번 차리겠네 ​

 

내 고향집, 다 삭은 몸 모락모락 만져주면

주름살 고랑마다 배인 근심 다 씻기겠네

아, 그때 철없이 대든 것

무릎 꿇고 빌겠네

 

하루 중 반나절이라도 엄마가 오신다면

내 품에 잠들 때까지 재잘재잘 속삭이겠네

못다한 사람의 실타래 끝없이 풀어 놓겠네

 

 

 

바람외전外傳 / 김진희

 

 

새의 날개 뒤에 물고 온 바람이다

바다를 거슬러 온 음표가 허공을 돌다

지상에 띄우는 편지 계절을 물고 온다

 

새의 기울기는 바람이 일으킨 파도

물무늬 그리면서 중심이 흔들린다

가야 할 너머의 세계 난기류를 헤치며

 

한 호흡 한 호흡만 더 날자 큰 날개여

오빠가 사온 구두 걸려있는 나뭇가지

갈대밭 숨 고르는 새 떼 푸르륵 깃을 친다

 

 

 

그 후 / 김진희

 

 

당신이 피는 계절

파리한 봄빛이다

 

저 봄이 떠나보낸

어디에도 없는 그대

 

그 날 후 마음 깊숙이

그림자가 자란다

 

- 『구석의 힘』(2026.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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