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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집 『그림자 비행』_문수영

작성자한내|작성시간26.06.10|조회수15 목록 댓글 0

터널 끝 / 문수영

 

일찍이 일어난 새 신호음 보낼 때

어둠을 헤집고 다가오는 빛 하나

기적을 크게 울리며 첫차는 떠났다

 

연골이 마모되어 움직이지 못할 때

잠시라도 기대고 의지하는 보호대

가뭄에 마른 잎사귀 빗소리에 살아나듯

 

한 줄기 빛 따라가면 터널 끝이 있다

터널을 벗어나면 드넓은 정원이다

새소리 넘쳐흐르는 지상의 낙원이다

 

 

 

맛있는 독서 / 문수영

- 계곡에서의 독서

 

 

무더위, 갈바람에 떠밀려 가는 날

여름에 푹 젖었던 옴몸을 추슬러서

소나무 그림자 속에 멈춰선 시간 본다

 

물 위에 떠있는 가을, 음이온 음악소리

바위에 새겨있는 압화처럼 들어앉아

고요 속 빛을 띄운다, 새소리도 곁들여

 

나뭇잎 물결 따라 빠르게 흘러가고

활자마저 커지며 책장도 술술 넘고

오래된 꿈으로 피어난 물속의 자연밥상

 

 

 

따로 또 같이 / 문수영

- 골프

 

잔디 위에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드라마

가족 되고 친구 되고 때로는 원수 되어

네 사람 한 팀이 되어 물결처럼 이동한다

 

기쁠 때 같이 웃고 힘들 때 토닥이며

굽이굽이 넘어가며 인내를 배우면서

같은 곳 바라보지만 곁눈으로 견제한다

 

혼자만 성공해도 먼저 가지 못한다

싹트는 우정 속에 증오도 자라나고

전진만 있을 뿐이다, 후퇴 없는 시간처럼

 

 

 

사랑은 무채색 / 문수영

 

 

너와의 첫 만남에 아무 기대 안 했다

 

막 터널을 지나가던

그 무렵이 있었다

 

사랑은 무채색인데

온몸이 끓어올랐다

 

청춘에 자리 잡고 자신을 불사르며

 

고통을 흡수하는

순수한 네가 있어

 

서서히 멍든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재밖에 없다고 남들이 말했을 때

 

불씨를 보여주던 네가 있어 좋았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마음속의 불꽃들

 

 

 

곡선에 대하여/ 문수영

 

 

들끓는 분노가 턱밑까지 차오를 때

그대로 직진하면 발끝엔 낭떠러지다

체온을 훌쩍 넘기는 폭염의 한가운데

 

고요하던 호수가 한꺼번에 일렁인다

파도치는 물결을 누르고 또 누르고

서로가 해명한다 해도 목소리는 커진다

 

소나기 지나간 뒤 무지개 떠오르듯

열꽃을 가득 싣고 서둘러 가지 말고

둥글게 돌아가는 길, 그 끝엔 꽃 한 송이

 

 

 

왜가리는 어디 갔을까? / 문수영

 

 

긴 장마 지나간 뒤 신천이 출렁인다

 

청둥오리 양지에 오롯이 모여 앉아

 

먹이는 안중에 없이 꿉꿉한 등 말린다

 

곁가지 떠나보낸 버드나무 몸 추스른다

 

잎새에 새겨진 빗금 한 줌 볕에 아물고

 

헛배를 끌어안고서 왜가리는 어디 갔을까?

 

 

 

그림자 비행 / 문수영

 

처음엔 미간에 주름지는 정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자 커가고

 

한순간 외나무다리서 거짓말처럼 만난다

 

방어 자세 갖추고 심장 박동 빨라지지만

 

스스로를 흠집 내는 전갈의 모습일 뿐…

 

벗어날 날개도 없이 그림자 비행 떠날까?

 

 

 

그믐달 / 문수영

 

욱신대는 발목은 내 몸의 가장자리

 

근처에 거미도 집을 짓지 않는다

 

어둠 속 떠도는 구름 어루만지는 조각배

 

 

 

낯 익히기 / 문수영

 

작전 짜는 병사마냥 나와 앉은 가재도구

 

손때 묻은 가구에 내려앉은 먼지들

 

켜켜이 더께 앉은 시간 둘둘 말아 버린다

 

먼 곳에서 유배된 낯선 별의 추억인가

 

낯선 냄새 낯선 리듬 익히기 시작한다

 

낯익은 화분의 꽃잎, 바람에 흔들린다

 

- 『그림자 비행』(2026.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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