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의 재해석 / 황삼연
매듭을 만지는 게 역류 꼭 아니어서
훗날쯤 피리라는 꽃말이 기억날까
서둘러 치닫는다고 붉은색을 띠려나
다급한 자드락에 이랑을 탄다 해도
애꿎은 산비둘기 비장한 구애 소리
한때만 자닝하던가, 메아리로 숨기는
삼켜야 견뎌낼 말 목줄에 매달린 날
애저녁 소금꽃이 어스름을 막아섰다
무모한 서슬 아래로 콧날 세우는 야행성들
사모곡 / 황삼연
서리에 잎이 질 때도
미소로 가득했지요
병상의 가는 볕살
눈으로 모아 담아
한마디
않으신대도
알 수 있는 떨림입니다
꽃다운 기운들을
아끼지 않으신 게
골배질* 다름 아닌 줄
이제사 사무칩니다
풀리는
삼동길 따라
봄을 부르고 가신 당신
* 나루터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하거나 풀릴 때, 얼음을 깨고 뱃길을 만들어 배를 건너게 하는 일
벌레와 버러지의 차이 / 황삼연
고향에선 벌레를 버러지로도 불렀다
답잖은 짓을 할 때 더욱 그리 불렀다
말 속엔 짜릿한 맛도 신통하게 들어 있다
너! / 황삼연
달빛이 서성대도
소리 없는 대밭입니다
열차가 흔들어도
조용한 마을입니다
바람만
가리산지리산*
뒤집어 놓는 속입니다
* 갈팡질팡.
라트비아의 농부 / 황삼연
이곳에서도 농부는 뜨거운 밭에 든다
힘겹게 작물 사이 매달려 있다지만
아이들 뒷배 걱정에 그을린 얼굴 아니다
들은 깊어 아득토록 곡식은 여무는데
드문드문 웅크린 집들 고즈넉이 들앉으니
품앗이 챙긴다 해도 감당할 일 느긋한
계절은 어김없이 하루를 몰아가지만
일손들 여유 아래 햇살도 한가한데
비좁아 아등거리는 반 토막의 조국아
잘 사는 바램들이 한참이나 다르다며
가죠소 호사로운 건 즐거움이 아니라는
유채꽃 만발한 속에 이가 드러난 저 웃음
바람의 무게 / 황삼연
첨부터 안답니다
가벼워야 한다는 걸
수천 번 지나고도
수만 번 지르밟고도
이냥껏
홀로 스치듯
자국 없는 써레질
어디든 순순해서
가야 할 데 두지 않고
먼지도 다독이고
파도도 아우르며
풀꽃에
입을 맞추는
딱 고만큼의 무게로
어느 날의 일기 / 황삼연
길마저 꾸부정해진
우중충 무거운 날
고요는 살을 메겨
벼랑으로 몰아치고
관통된
바람에 쓸려
속절없는 한나절
무심결 뱉어진 말
푸념으로 뒹굴 때
화면은 멍하도록
제멋대로 내달리고
기억은
구겨진 폐지
만질수록 쌓인다
쌍분 / 황삼연
산자락 섬벅 잘라
볕살로 가지런하니
함초롬 감국의 향
정갈한 주변이다
행인도 숙연한 맘에
옷매무새 고치고
내닫는 시선 따라
기억은 거침없어
고운 정 미운 정이
살갑던 그날처럼
오롯한 외길뿐인 양
영원을 가는 동행
져야 꽃 / 황삼연
더러는 지는 꽃이 부러울 때가 있다
피다가 한껏 피다가
까무룩 지고 마는
못다 한
그리움 고것
지질 않는 딱 한 치
모티브의 전향 / 황삼연
이마에 조표를 달고
어길 수 없는 보폭에도
변조에 변박까지
가끔은 발버둥 쳐도
구전 속
한 편의 기적
부질없는 바라기
둘 모여 소절 되고
번듯한 듯 갖추지만
쉼 없이 쪼개지는
음표를 놓칠세라
악짓손
숨 가뿐 질주에도
겹세로줄 단호하다
블랙커피로 쓴 수필 / 황삼연
꽃잎을 타고 오던 그 빗물 멎은 날엔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를 기다린다
먼저 와 자릴 정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촉촉하던 빗소리가 기대앉은 의자로
보란 듯 혀 내미는 원두를 볶는 진동
빈자리 생긋이 웃는 얼굴 하나 선하다
계절이 분주하게 자꾸만 다그쳐도
두 손을 고이 모아 음미하는 한 여인
고 자태 보듬어보는 기다림이 참 좋다
비 온 뒤 걷는 길은 꽃들도 화사해서
함께라는 따스함이 물컹거려 정겨워서
커피 향 입술을 돌며 예쁜 그림 그린다
얼굴 한번 비추려고 물가에 앉았더니 / 황삼연
쉰 목을 축이려는
고라니 주춤대고
몸 담글 산새 한 쌍
꽁지깃 쫑긋거리자
송골매 맴도는 경계
얼핏얼핏 비친다
무언의 아우성이
새파랗게 뛰어들어도
수면은 태연하게
잎 하나 띄워놓고
늦봄이 물수제비에
속절없이 갇힌다
- 『모티브의 전향』(2026. 책만드는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