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퀴 / 김남규
꽃 하나 문 열고 인사하는 아침이야
나무가 새를 붙잡듯 모든 말에 붙잡힌 우린
시 첫 행
손에 쥐고 입에 물고
한 바퀴
돌기로 해
*
무늬는 무늬끼리 고달픈 법이래
창문의 감시 받으며 착하게 밤을 지키자
하루를
필사하는 마음으로
한 바퀴
더 돌까
복수 / 김남규
매번, 시 앞에서
창피당한 나는 말이죠
세상 모든 시집을 샀어요
복수를 다짐했으니까요
시집을
다 찢어발기고 나서
몇 개의 부사만
간직합니다
버려진 시들 모으고 꼬아
세상 튼튼한 밧줄 만들어
영원 가까이 내려갑니다
혹시 보면, 끊어주세요
오래전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날 잡아먹을
겁니다
그렇게 했을 것이다 / 김남규
- 용사 힘멜의 죽음으로부터 28년 후*
터무니없이 아름다웠지
산과 길 등에 업고
밤에는 별 낮에는 꽃
무담武談을 이어갔지
시간은
신의 도끼였는데
나만 피했어
나만 남았어
못다 한 오늘의 은유
내일이라는 상자에 넣고
하나씩 열어보는 슬픔
다시 넣는 일상이라는 슬픔
결말은
정해졌지만 용감하게
나만 앞으로
앞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葬送のフリーレン)>.
스테들러STAEDTLER / 김남규
봐라, 이만큼이다
손에 쥘 수 없을 때까지
당신을 쓰고, 쓸 것이다
그것은 애를 쓰는 것
마음도
몽땅해진 것
감탄사처럼
작아지는
봐라, 이만큼 남았다
영원히 쓸 수 있도록
행간에 누워 있는
당신을 밑줄 칠 것이다
언젠가
연필에 묻어난 밤들이
내 얼굴을
지우더라도
젤다의 전설 / 김남규
하늘 위 하늘
땅 아래 땅
살아가는 것도 일이라지
외눈박이든
반인반수든
눈을 피하면 안 되는 곳
공주는
또 언제 납치당했는지
보스전이
눈앞인데
곧 부서질
칼과 활 들고
하루씩 버티는 씩씩함
두 발 달린
이야기는
월드맵 저 먼 곳까지
먼 훗날
필사본으로 남을 거다
그것이 바로
시집이지
* 닌텐도 큰솔 게임.
반의반의 반에 반의반의 반 / 김남규
시침이 숫자에 떨어지기 직전이었어
나는
저기까지만
너를
생각할 거야
분침은
손 흔드는 일 같아서
쉬지 않고
손짓했는데
*
시침은 숫자를 형식상으로 지나칠 거야
반의반
또 반의반
비극은
거짓처럼 오고
이제야
돌아온 것은
돌아오지
않은 것
나는 시월의 왕이로소이다 / 김남규
맨 처음 어머니께
받은 건 울음뿐인데
나 역시 어머니께
울음만 드리고 가요
사월에
시월의 곡조를 더해
섧고 길게
우시겠죠
가난한 어머니는
외아들 왕을 잃었습니다
하늘이 사라지고
꽃과 새는 등을 돌렸대요
눈물을
먹고 자란 나무들이
낙엽을
흘립니다
말 없는 어머니는
얼굴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긴
왕의 나라 왕의 땅
모두가
어머니의 얼굴을
닮아가요
어머니
*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싱크대 / 김남규
그들은 말없이 오늘 식기만 문지릅니다
기도하듯 손 모으고 우는 듯 물을 틀고
창문에
얼굴 뺏깁니다
먼 숲에게
눈까지
엎어놓은 국그릇과 세워둔 슬픔 몇 쌍
하루내 마를 것이고 곧 다시 젖을 겁니다
등 뒤로
건성으로 듣는 외로움
그렇게 오래
서 있겠죠
공부가주 / 김남규
부사副詞는 앞에 두고 제祭를 올립니다
문장을 미신 삼아 사계절을 다 씁니다
우리가 애써 그은 밑줄마다 꽃은 피고 또 지고
종이의 흉터에 목적 없이 골몰하면서
얼토하고 당토하게 여기서만 울 것입니다
모든 게 詩라고 우기는 씩씩함을 믿습니다
- 『그렇게 했을 것이다』(2026. 헤겔의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