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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집 『그렇게 했을 것이다』_김남규

작성자한내|작성시간26.06.19|조회수26 목록 댓글 0

한 바퀴 / 김남규

 

 

꽃 하나 문 열고 인사하는 아침이야

나무가 새를 붙잡듯 모든 말에 붙잡힌 우린

시 첫 행

손에 쥐고 입에 물고

한 바퀴

돌기로 해

 

*

 

무늬는 무늬끼리 고달픈 법이래

창문의 감시 받으며 착하게 밤을 지키자

하루를

필사하는 마음으로

한 바퀴

더 돌까

 

 

 

복수 / 김남규

 

 

매번, 시 앞에서

창피당한 나는 말이죠

세상 모든 시집을 샀어요

복수를 다짐했으니까요

시집을

다 찢어발기고 나서

몇 개의 부사만

간직합니다

 

버려진 시들 모으고 꼬아

세상 튼튼한 밧줄 만들어

영원 가까이 내려갑니다

혹시 보면, 끊어주세요

오래전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날 잡아먹을

겁니다

 

 

 

그렇게 했을 것이다 / 김남규

- 용사 힘멜의 죽음으로부터 28년 후*

 

터무니없이 아름다웠지

 

산과 길 등에 업고

 

밤에는 별 낮에는 꽃

 

무담武談을 이어갔지

 

시간은

 

신의 도끼였는데

 

나만 피했어

 

나만 남았어

 

못다 한 오늘의 은유

 

내일이라는 상자에 넣고

 

하나씩 열어보는 슬픔

 

다시 넣는 일상이라는 슬픔

 

결말은

 

정해졌지만 용감하게

 

나만 앞으로

 

앞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葬送のフリーレン)>.

 

 

 

스테들러STAEDTLER / 김남규

 

봐라, 이만큼이다

손에 쥘 수 없을 때까지

당신을 쓰고, 쓸 것이다

그것은 애를 쓰는 것

마음도

몽땅해진 것

감탄사처럼

작아지는

 

봐라, 이만큼 남았다

영원히 쓸 수 있도록

행간에 누워 있는

당신을 밑줄 칠 것이다

언젠가

연필에 묻어난 밤들이

내 얼굴을

지우더라도

 

 

 

젤다의 전설 / 김남규

 

 

하늘 위 하늘

땅 아래 땅

살아가는 것도 일이라지

외눈박이든

반인반수든

눈을 피하면 안 되는 곳

공주는

또 언제 납치당했는지

보스전이

눈앞인데

 

곧 부서질

칼과 활 들고

하루씩 버티는 씩씩함

두 발 달린

이야기는

월드맵 저 먼 곳까지

먼 훗날

필사본으로 남을 거다

그것이 바로

시집이지

 

* 닌텐도 큰솔 게임.

 

 

 

반의반의 반에 반의반의 반 / 김남규

 

 

시침이 숫자에 떨어지기 직전이었어

나는

저기까지만

너를

생각할 거야

분침은

손 흔드는 일 같아서

쉬지 않고

손짓했는데

 

*

 

시침은 숫자를 형식상으로 지나칠 거야

반의반

또 반의반

비극은

거짓처럼 오고

이제야

돌아온 것은

돌아오지

않은 것

 

 

 

나는 시월의 왕이로소이다 / 김남규

 

 

맨 처음 어머니께

받은 건 울음뿐인데

나 역시 어머니께

울음만 드리고 가요

사월에

시월의 곡조를 더해

섧고 길게

우시겠죠

 

가난한 어머니는

외아들 왕을 잃었습니다

하늘이 사라지고

꽃과 새는 등을 돌렸대요

눈물을

먹고 자란 나무들이

낙엽을

흘립니다

 

말 없는 어머니는

얼굴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긴

왕의 나라 왕의 땅

모두가

어머니의 얼굴을

닮아가요

어머니

 

*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싱크대 / 김남규

 

 

그들은 말없이 오늘 식기만 문지릅니다

 

기도하듯 손 모으고 우는 듯 물을 틀고

 

창문에

얼굴 뺏깁니다

먼 숲에게

눈까지

 

엎어놓은 국그릇과 세워둔 슬픔 몇 쌍

 

하루내 마를 것이고 곧 다시 젖을 겁니다

 

등 뒤로

건성으로 듣는 외로움

그렇게 오래

서 있겠죠

 

 

 

공부가주 / 김남규

 

 

부사副詞는 앞에 두고 제祭를 올립니다

 

문장을 미신 삼아 사계절을 다 씁니다

 

우리가 애써 그은 밑줄마다 꽃은 피고 또 지고

 

종이의 흉터에 목적 없이 골몰하면서

 

얼토하고 당토하게 여기서만 울 것입니다

 

모든 게 詩라고 우기는 씩씩함을 믿습니다

 

- 『그렇게 했을 것이다』(2026. 헤겔의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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