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을 무치며 / 김제숙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욕을 세워두고
텃밭에 자라고 있는 시간을 훑어다가
날것의 숨을 죽여서 저녁 찬을 만든다
잎사귀로 위장한 모호한 욕망이나
웃자란 가지 끝의 잡념을 떼어내고
한 자밤 생의 자락을 오늘도 데쳐낸다
한 술의 허기를 묵묵히 다독이는
하루치 노동으로 또 하루를 덧대며
온전한 직립을 향해 무릎을 일으킨다
행복 / 김제숙
한 사날 죽을 듯한 몸살이 사윌 때쯤
아직은 당기는 뒷목 쑤시는 뼈마디
분방한 온갖 잡음들
다 데리고 집을 나선다
바른 걸음에 딴죽 걸듯 어깨 건들거리며
건강할 땐 안 보이던 여린 것들과 눈 맞추며
헐렁한 차림새에도
늘 다정한 도서관으로 간다
익어가는 말들의 노련한 어루만짐
세포마다 스며들어 다시 삶을 점화한다
몸과 맘 어우러지는
선물 같은 어느 날
툰드라의 꿈 / 김제숙
- 하당에르 고원
시원(始原)이 들려주는 불멸의 노래 들으러
오래 품은 피안의 땅, 여기까지 나는 왔네
함께 온 소란한 마음 가만히 내려놓네
한생을 끝낸 말[言]들이 돌아와 눕는 곳
갓 태어난 말들이 먼 길을 떠나는 곳
고원은 생멸을 거듭하며 세대를 이어왔네
북방한계선 너머에서 영역을 넓혀가는
발굴 안 된 질문들이 신비를 간직한 곳
내 생의 숱한 의문들 어디쯤 묻혀 있나
수직의 욕심 버리고 수평으로 살고 싶네
뜬구름 흘려보내고 키 작은 소녀로 돌아가
석기의 유목민 사내 만나 낮게 낮게 흐르고 싶네
늦게라도 오는 것 / 김제숙
아들이 어렸을 때 즐겨보던 만화 영화
아기공룡 둘리를 전집으로 주문했다
아직은 다섯 달이나 남은 손주의 생일 선물
두 아이의 아비가 된 아들을 키울 때는
날마다 들이닥치는 하루가 버거워서
애틋한 마음 자락을 쓰다듬지 못했다
글자 익힌 손주가 만화책을 펼치며
세상 환한 웃음을 지을 걸 상상한다
하마나 기다리다 보면 늦게라도 오는 것
예문에 대한 예의 / 김제숙
의도하지 않았지만 길을 헤매곤 하는데요
사람 숲에 갇혀서 허둥대곤 하는데요
난해한 말의 바다에서 덤벙대곤 하는데요
한 생을 산다는 건 하루를 사는 거죠
청춘의 성급한 걸음 중년의 맹렬한 걸음
잠시만 멈춰주세요 호흡을 다독여요
오늘은 내일의 전조, 친절한 예문이죠
건성 대충 말아요 다정하게 대해줘요
예문에 정성을 쏟아요 본문이 잘 읽혀요
그믐에서 보름 사이 / 김제숙
순식간에 딸깍, 스위치가 꺼졌다
구백 톤 파편 속에 일상이 묻혀버렸다*
막장이 막장이 되어버린 밥을 캐던 일터다
두 눈을 감고도 훤히 알던 길인데
더 깊은 어둠으로 어둠을 덮어야 할지
한 모금 단맛 커피로 두려움을 속인다
생의 빛나는 함의에 내 몫은 없는가
죽음이 차라리 풀기 쉬운 방정식일까
매몰된 생존의 거처를 묻고 또 묻는다
그믐이 지나면 어김없이 보름이 온다
위대한 우주의 순환에 온몸을 맡기자
저만치 빛이 보인다, 스위치가 켜진다
*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 사고(2022.10.26.)
시의 온도 / 김제숙
1
자판기 고치는 지하철 역사 앳된 청년
환히 열린 기계 내장 곱은 손이 분주하다
따뜻한 한 잔의 위로 마침내 작동한다
2
메마른 내 시는 누구의 등 토닥일까
미지근한 미사여구 칼바람으로 쳐내고
마음속 뜨겁게 데울 깨끗한 연료 같은 시
늑간통을 읽는 방법 / 김제숙
바람 부는 거리에 온몸을 세워두고
옆구리 하나만 데리고 들어와서
한바탕 우여곡절을 말없이 듣는다
소실점 저 너머로 사라진 꿈들은
완전범죄 비밀처럼 잊히길 원하는데
통증은 주기적으로 미련을 부추긴다
다 늦은 저녁답엔 우단 의자에 앉아
젖은 발 말리며 등 기대도 좋으련만
여전히 미망을 안고 흔들리며 가는 먼길
또다시 봄 / 김제숙
겨우내 눈이 나빠졌나 눈앞 어른거린다
심장을 부풀리는 이 기운은 또 뭔가
통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아물지 않고 있는데
당신의 침묵이 재산인 양 쌓이는 동안
나는 다음 책장을 넘기지도 못하고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가슴 덜컹거리는데
초점이 맞지 않은 우리의 슬픈 서사
인제는 두부처럼 순한 사람 되고 싶네
저기 저 무릎이 예쁜 봄은 오고 있으니
받아쓰기 / 김제숙
선생님이 불러주면 그대로 받아쓰던
열 줄 공책 위에서 처음 깨친 글의 세계
먼 훗날
숲을 꿈꾸며
말의 씨앗 심었지
난해한 지문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써야 할 사연들은 아직도 많은데
어느덧
채워져 가는
내 생의 공책 한 권
몸으로 써 내려온 행간의 거친 삶을
내 작은 뜰에서 말의 꽃으로 피워내어
저물녘
참 잘했어요
호명 한번 받고 싶네
빅뱅 체험 / 김제숙
우주의 별 하나가 심장에 와 박혔다
무심하던 풍경이 일시에 출렁거렸다
지구가 살짝 무거워졌다,
첫 손주 오던 날
조각보 / 김제숙
손톱만 한 작은 천들 어깨를 맞댄다
행여 건너뛸세라 촘촘히 손박음질
조각들 어우러져서 완성된 삶의 무늬
조각천 잇대듯 상형문자 난해한 길
신이 숨겨 놓은 깊은 뜻을 찾느라
한 생애 숨이 가빴던 날들이 지고 있다
으깨지고 기다려야 짙은 향 와인 되듯
돌아보니 상처들은 길목마다 이정표
왔던 곳 돌아가는 지금 낯익은 길 환하다
신화(神話) / 김제숙
산사 뒤 댓돌 위에
낡은 고무신 한 짝
그 안에 뿌리내린
가녀린 풀꽃들
누군가
내밀한 언약
이어가는
이는
끙 / 김제숙
온몸을 바닥으로 내려놓는 소리
온몸을 바닥에서 일으키는 소리
한 생애 비밀병기였다
저 찬란한
안간힘
- 『예문에 대한 예의』(2026. 여우난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