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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집 『예문에 대한 예의』_김제숙

작성자한내|작성시간26.06.20|조회수27 목록 댓글 0

나물을 무치며 / 김제숙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욕을 세워두고

텃밭에 자라고 있는 시간을 훑어다가

날것의 숨을 죽여서 저녁 찬을 만든다

 

잎사귀로 위장한 모호한 욕망이나

웃자란 가지 끝의 잡념을 떼어내고

한 자밤 생의 자락을 오늘도 데쳐낸다

 

한 술의 허기를 묵묵히 다독이는

하루치 노동으로 또 하루를 덧대며

온전한 직립을 향해 무릎을 일으킨다

 

 

 

행복 / 김제숙

 

한 사날 죽을 듯한 몸살이 사윌 때쯤

아직은 당기는 뒷목 쑤시는 뼈마디

분방한 온갖 잡음들

다 데리고 집을 나선다

 

바른 걸음에 딴죽 걸듯 어깨 건들거리며

건강할 땐 안 보이던 여린 것들과 눈 맞추며

헐렁한 차림새에도

늘 다정한 도서관으로 간다

 

익어가는 말들의 노련한 어루만짐

세포마다 스며들어 다시 삶을 점화한다

몸과 맘 어우러지는

선물 같은 어느 날

 

 

 

툰드라의 꿈 / 김제숙

- 하당에르 고원

 

 

시원(始原)이 들려주는 불멸의 노래 들으러

오래 품은 피안의 땅, 여기까지 나는 왔네

함께 온 소란한 마음 가만히 내려놓네

 

한생을 끝낸 말[言]들이 돌아와 눕는 곳

갓 태어난 말들이 먼 길을 떠나는 곳

고원은 생멸을 거듭하며 세대를 이어왔네

 

북방한계선 너머에서 영역을 넓혀가는

발굴 안 된 질문들이 신비를 간직한 곳

내 생의 숱한 의문들 어디쯤 묻혀 있나

 

수직의 욕심 버리고 수평으로 살고 싶네

뜬구름 흘려보내고 키 작은 소녀로 돌아가

석기의 유목민 사내 만나 낮게 낮게 흐르고 싶네

 

 

 

늦게라도 오는 것 / 김제숙

 

 

아들이 어렸을 때 즐겨보던 만화 영화

아기공룡 둘리를 전집으로 주문했다

아직은 다섯 달이나 남은 손주의 생일 선물

 

두 아이의 아비가 된 아들을 키울 때는

날마다 들이닥치는 하루가 버거워서

애틋한 마음 자락을 쓰다듬지 못했다

 

글자 익힌 손주가 만화책을 펼치며

세상 환한 웃음을 지을 걸 상상한다

하마나 기다리다 보면 늦게라도 오는 것

 

 

 

예문에 대한 예의 / 김제숙

 

 

의도하지 않았지만 길을 헤매곤 하는데요

사람 숲에 갇혀서 허둥대곤 하는데요

난해한 말의 바다에서 덤벙대곤 하는데요

 

한 생을 산다는 건 하루를 사는 거죠

청춘의 성급한 걸음 중년의 맹렬한 걸음

잠시만 멈춰주세요 호흡을 다독여요

 

오늘은 내일의 전조, 친절한 예문이죠

건성 대충 말아요 다정하게 대해줘요

예문에 정성을 쏟아요 본문이 잘 읽혀요

 

 

 

그믐에서 보름 사이 / 김제숙

 

순식간에 딸깍, 스위치가 꺼졌다

구백 톤 파편 속에 일상이 묻혀버렸다*

막장이 막장이 되어버린 밥을 캐던 일터다

 

두 눈을 감고도 훤히 알던 길인데

더 깊은 어둠으로 어둠을 덮어야 할지

한 모금 단맛 커피로 두려움을 속인다

 

생의 빛나는 함의에 내 몫은 없는가

죽음이 차라리 풀기 쉬운 방정식일까

매몰된 생존의 거처를 묻고 또 묻는다

 

그믐이 지나면 어김없이 보름이 온다

위대한 우주의 순환에 온몸을 맡기자

저만치 빛이 보인다, 스위치가 켜진다​

 

*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 사고(2022.10.26.)

 

 

 

시의 온도 / 김제숙

 

 

1

자판기 고치는 지하철 역사 앳된 청년

환히 열린 기계 내장 곱은 손이 분주하다

따뜻한 한 잔의 위로 마침내 작동한다

 

2

메마른 내 시는 누구의 등 토닥일까

미지근한 미사여구 칼바람으로 쳐내고

마음속 뜨겁게 데울 깨끗한 연료 같은 시

 

 

 

늑간통을 읽는 방법 / 김제숙

 

 

바람 부는 거리에 온몸을 세워두고

 

옆구리 하나만 데리고 들어와서

 

한바탕 우여곡절을 말없이 듣는다

 

 

소실점 저 너머로 사라진 꿈들은

 

완전범죄 비밀처럼 잊히길 원하는데

 

통증은 주기적으로 미련을 부추긴다

 

 

다 늦은 저녁답엔 우단 의자에 앉아

 

젖은 발 말리며 등 기대도 좋으련만

 

여전히 미망을 안고 흔들리며 가는 먼길

 

 

 

또다시 봄 / 김제숙

 

겨우내 눈이 나빠졌나 눈앞 어른거린다

 

심장을 부풀리는 이 기운은 또 뭔가

 

통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아물지 않고 있는데

 

 

당신의 침묵이 재산인 양 쌓이는 동안

 

나는 다음 책장을 넘기지도 못하고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가슴 덜컹거리는데

 

 

초점이 맞지 않은 우리의 슬픈 서사

 

인제는 두부처럼 순한 사람 되고 싶네

 

저기 저 무릎이 예쁜 봄은 오고 있으니

 

 

 

받아쓰기 / 김제숙

 

 

선생님이 불러주면 그대로 받아쓰던

열 줄 공책 위에서 처음 깨친 글의 세계

먼 훗날

숲을 꿈꾸며

말의 씨앗 심었지

 

난해한 지문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써야 할 사연들은 아직도 많은데

어느덧

채워져 가는

내 생의 공책 한 권

 

몸으로 써 내려온 행간의 거친 삶을

내 작은 뜰에서 말의 꽃으로 피워내어

저물녘

참 잘했어요

호명 한번 받고 싶네

 

 

 

빅뱅 체험 / 김제숙

 

 

우주의 별 하나가 심장에 와 박혔다

 

무심하던 풍경이 일시에 출렁거렸다

 

지구가 살짝 무거워졌다,

첫 손주 오던 날

 

 

 

조각보 / 김제숙

 

 

손톱만 한 작은 천들 어깨를 맞댄다

행여 건너뛸세라 촘촘히 손박음질

조각들 어우러져서 완성된 삶의 무늬

 

조각천 잇대듯 상형문자 난해한 길

신이 숨겨 놓은 깊은 뜻을 찾느라

한 생애 숨이 가빴던 날들이 지고 있다

 

으깨지고 기다려야 짙은 향 와인 되듯

돌아보니 상처들은 길목마다 이정표

왔던 곳 돌아가는 지금 낯익은 길 환하다

 

 

 

신화(神話) / 김제숙

 

산사 뒤 댓돌 위에

낡은 고무신 한 짝

 

그 안에 뿌리내린

가녀린 풀꽃들

 

누군가

 

내밀한 언약

이어가는

 

이는

 

 

 

끙 / 김제숙

 

온몸을 바닥으로 내려놓는 소리

 

온몸을 바닥에서 일으키는 소리

 

한 생애 비밀병기였다

 

저 찬란한

 

안간힘

 

- 『예문에 대한 예의』(2026. 여우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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