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시조집 『앉혀놓은 도돌이표』_김숙희

작성자한내|작성시간26.06.21|조회수23 목록 댓글 0

노가리 / 김숙희

 

 

말의 뼈로 들이치는 겨울비 내리는 날

 

텅 빈 A4용지 책상 앞에 펼쳐놓고

 

시 한 줄 쓰다 지우며 질겅질겅 씹어 보는

 

 

 

장기 요양원 / 김숙희

 

바람이 흔드는 문 일제히 바라본다

 

수저 놓는 소리에도 두 눈 반짝 귀를 여는

 

문 열고

들어서려나

 

사무치는 얼굴들

 

 

 

앞뒤 / 김숙희

 

 

십 원짜리 동전을

팽개치고

다시 보니

 

국보 제20호

다보탑이

우뚝하다

 

하잖다

생각을 마라

우리 곁의 모든 것

 

 

 

낮달 / 김숙희

 

 

코스모스 피어 선 길 사뿐히 밟으시며

 

먼 하늘 오르실 때 흘려놓은 버선 한 짝

 

맨발로 달려 나가서 가만 신어 봅니다

 

 

 

반딧불이 / 김숙희

 

 

어둠을 호명하며

흩뿌리는 별꽃이네

 

한 무리 떼 지어와

다가가면 멀어지는

 

우리만

알던 사잇길

저리, 잠시 빛났었지

 

 

 

유머레스크 / 김숙희

 

 

누가 가을 하늘에 비행운을 긋고 있나

마음결 닦아가며 시월을 지휘하는

가까이 들리는 말씀 음표로 날아든다

 

바람을 등에 업고 봉싯대는 저 흰 구름

한 음씩 올라가다 빙그르르 내려온다

입술에 열 손가락에 앉혀놓은 도돌이표

 

 

 

아날로그 이력 / 김숙희

 

이제와 돌아보니 내 몸은 386 컴퓨터

신종의 데이터는 접속되지 않는다

해체도

조립조차도

쉽지않은 업데이트

 

돌고 도는 아날로그 재생되는 지난 이력

날고뛰는 정보에는 아직도 속수무책

가끔씩

무중력 상태로

백업되다 풀리고

 

 

 

한밤중 / 김숙희

 

가끔씩 잠꼬대가 불면을 불러오고

 

인사 대신 기침 소리 심음 같은 하루 안부

 

가려진 커튼 자락에 어둠의 결이 진다

 

 

 

찔레순 / 김숙희

 

 

보리밥 빈 도시락

놀빛 아래 달각대고

시오리 하굣길은

허기로 헛헛할 때

 

저 찔레

긴 목 늘이고

우리를 맞곤 했지

 

보리누름 산과 들에

멋모르고 돋아나서

아낌없이 내어주는

친정 언니 같던 나무

 

널 보면

왠지 서러워

돌아보고 돌아보는!

 

 

 

새벽, 모슬포 항구 / 김숙희

 

일출보다 먼저 눈 뜬 등불을 내다 걸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가격표를 매기는 곳

날렵한 시간의 물결, 은갈치가 퍼덕인다

 

고단한 어제 일은 썰물에 던져 놓고

정겨운 사투리로 어둠을 물리치면

등 뒤로 울컥거리는 트럭의 엔진 소리

 

스티로폼 상자마다 수면처럼 출렁이는

은빛 비늘 춤사위가 켜켜이 쌓여간다

잠이 깬 서귀포 하늘 하루치 생존이다

 

 

 

비를 몰고 오는 구름 / 김숙희

 

 

양미간 모은 하늘 저녁 굶은 시어미라

 

오만 인상 쓰고 있네 따귀라도 갈길 듯이

 

국 대접 던지는 소리, 천둥이 다가간다

 

건너편 10층 옥상 무겁게 깔고 앉아

 

아파트 창 속사정을 힐끔대는 본새를 봐

 

한바탕 울고 갈 기세, 너나없는 세상살이

 

 

 

광복 / 김숙희

 

어둠의 굴레를 뚫고 팔십 년 전, 그날이여

여름날 초록으로 여기 다시 돌아온 빛

한반도 그늘을 지우고 우리 품에 안겼다

 

휘날리는 태극기가 눈물처럼 출렁일 때

유관순 열사가 온다, 간절한 눈빛으로

햇살이 춤추는 광화문, 맨발로 달려온다

 

짓밟힌 역사를 일으켜 빼앗긴 국어를 찾자,

한글이 앞장서며 숨을 쉬던 시조 삼 장

평범한 오늘의 자유는 선진들의 피였다

 

과거에서 돌아온 너 그 이름, 광복이여

오늘은 우리 함께 크게 한번 웃어보자

남은 건 뜨거운 입김 창문 밖이 푸르다

 

 

 

거짓말 / 김숙희

 

 

학교에서 돌아와 허겁지겁 밥 먹을 때

 

슬그머니 수저 놓고 배 아프다 하셨지요

 

다시 또 어버이날에 새싹으로 돋습니다

 

 

 

우리, 별리 / 김숙희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서로가 숨고르기

하오의 남은 볕살 창문 너머 스며들 때

말 없는 긴 이야기만 입안 가득 고인다

 

갈 길 잠시 잊었다며 되돌아온 바람처럼

손끝에 남은 온기 조심스레 놓아주고

환했던 웃음 자락을 뉘 몰래 접어둔다

 

- 『앉혀놓은 도돌이표』(2026. 고요아침)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