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리 / 김숙희
말의 뼈로 들이치는 겨울비 내리는 날
텅 빈 A4용지 책상 앞에 펼쳐놓고
시 한 줄 쓰다 지우며 질겅질겅 씹어 보는
장기 요양원 / 김숙희
바람이 흔드는 문 일제히 바라본다
수저 놓는 소리에도 두 눈 반짝 귀를 여는
문 열고
들어서려나
사무치는 얼굴들
앞뒤 / 김숙희
십 원짜리 동전을
팽개치고
다시 보니
국보 제20호
다보탑이
우뚝하다
하잖다
생각을 마라
우리 곁의 모든 것
낮달 / 김숙희
코스모스 피어 선 길 사뿐히 밟으시며
먼 하늘 오르실 때 흘려놓은 버선 한 짝
맨발로 달려 나가서 가만 신어 봅니다
반딧불이 / 김숙희
어둠을 호명하며
흩뿌리는 별꽃이네
한 무리 떼 지어와
다가가면 멀어지는
우리만
알던 사잇길
저리, 잠시 빛났었지
유머레스크 / 김숙희
누가 가을 하늘에 비행운을 긋고 있나
마음결 닦아가며 시월을 지휘하는
가까이 들리는 말씀 음표로 날아든다
바람을 등에 업고 봉싯대는 저 흰 구름
한 음씩 올라가다 빙그르르 내려온다
입술에 열 손가락에 앉혀놓은 도돌이표
아날로그 이력 / 김숙희
이제와 돌아보니 내 몸은 386 컴퓨터
신종의 데이터는 접속되지 않는다
해체도
조립조차도
쉽지않은 업데이트
돌고 도는 아날로그 재생되는 지난 이력
날고뛰는 정보에는 아직도 속수무책
가끔씩
무중력 상태로
백업되다 풀리고
한밤중 / 김숙희
가끔씩 잠꼬대가 불면을 불러오고
인사 대신 기침 소리 심음 같은 하루 안부
가려진 커튼 자락에 어둠의 결이 진다
찔레순 / 김숙희
보리밥 빈 도시락
놀빛 아래 달각대고
시오리 하굣길은
허기로 헛헛할 때
저 찔레
긴 목 늘이고
우리를 맞곤 했지
보리누름 산과 들에
멋모르고 돋아나서
아낌없이 내어주는
친정 언니 같던 나무
널 보면
왠지 서러워
돌아보고 돌아보는!
새벽, 모슬포 항구 / 김숙희
일출보다 먼저 눈 뜬 등불을 내다 걸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가격표를 매기는 곳
날렵한 시간의 물결, 은갈치가 퍼덕인다
고단한 어제 일은 썰물에 던져 놓고
정겨운 사투리로 어둠을 물리치면
등 뒤로 울컥거리는 트럭의 엔진 소리
스티로폼 상자마다 수면처럼 출렁이는
은빛 비늘 춤사위가 켜켜이 쌓여간다
잠이 깬 서귀포 하늘 하루치 생존이다
비를 몰고 오는 구름 / 김숙희
양미간 모은 하늘 저녁 굶은 시어미라
오만 인상 쓰고 있네 따귀라도 갈길 듯이
국 대접 던지는 소리, 천둥이 다가간다
건너편 10층 옥상 무겁게 깔고 앉아
아파트 창 속사정을 힐끔대는 본새를 봐
한바탕 울고 갈 기세, 너나없는 세상살이
광복 / 김숙희
어둠의 굴레를 뚫고 팔십 년 전, 그날이여
여름날 초록으로 여기 다시 돌아온 빛
한반도 그늘을 지우고 우리 품에 안겼다
휘날리는 태극기가 눈물처럼 출렁일 때
유관순 열사가 온다, 간절한 눈빛으로
햇살이 춤추는 광화문, 맨발로 달려온다
짓밟힌 역사를 일으켜 빼앗긴 국어를 찾자,
한글이 앞장서며 숨을 쉬던 시조 삼 장
평범한 오늘의 자유는 선진들의 피였다
과거에서 돌아온 너 그 이름, 광복이여
오늘은 우리 함께 크게 한번 웃어보자
남은 건 뜨거운 입김 창문 밖이 푸르다
거짓말 / 김숙희
학교에서 돌아와 허겁지겁 밥 먹을 때
슬그머니 수저 놓고 배 아프다 하셨지요
다시 또 어버이날에 새싹으로 돋습니다
우리, 별리 / 김숙희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서로가 숨고르기
하오의 남은 볕살 창문 너머 스며들 때
말 없는 긴 이야기만 입안 가득 고인다
갈 길 잠시 잊었다며 되돌아온 바람처럼
손끝에 남은 온기 조심스레 놓아주고
환했던 웃음 자락을 뉘 몰래 접어둔다
- 『앉혀놓은 도돌이표』(2026. 고요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