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夏省中作(초하성중작)
/ 許筠(허균)
田園蕪沒幾時歸(전원무몰기시귀) 전원이 묵었는데 언제 돌아가지?
頭白人間官念微(두백인간관념미) 하얀 머리의 인간 벼슬 생각 적어지네.
寂寞上林春事盡(적막상림춘사진) 적막한 상림원에 봄빛이 다하려 하기에,
更看疎雨濕薔薇(갱간소우습장미) 다시 성긴 비에 젖은 장미를 보노라.
懕懕晝睡雨來初(염염주수우래초) 몽롱한 낮잠 비가 막 내리는데,
一枕薰風殿閣餘(일침훈풍전각여) 머리맡의 따뜻한 바람 전각에 남아도네.
小吏莫催嘗午飯(소리막최상오반) 서리(胥吏)여, 점심밥 어서 들라 재촉 마소,
夢中方食武昌魚(몽중방식무창어) 꿈속에 한참 무창 물고기 먹고 있는데.
〈감상〉
이 시는 1603년 사복시정으로 있을 때 초여름 관아에서 지은 시이다.
전원(田園)이 거칠어졌는데, 언제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른밖에 안 되었지만 머리가 허연 백발인 자신은 벼슬에 뜻이 없다.
(당시 허균(許筠)은 서울에서의 벼슬살이에 지겨운 듯,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어 금강산으로 떠난다).
대궐에 봄이 가려 하니, 빨리 전원으로 돌아가 봄을 감상하고 싶은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슬비에 젖은 장미를 보는 것이다.
빗방울이 내릴 때 낮잠에서 깨었는데, 전각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잠에서 깨니 서리가 점심을 내오고 있다. 그런데 꿈속에서 무창의 물고기를 먹었으니,
그렇게 일찍 밥을 내오지 않아도 될 것을.
허균의 『성소부부고』 「교산억기시(蛟山臆記詩)」에 자신의 시학(詩學)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젊었을 적에 시를 할 줄 알아서 이손곡(李蓀谷)에게 이백(李白)을 배웠고,
당(唐) 및 한유(韓愈)·소식(蘇軾)을 중씨(仲氏)에게서 배웠었다.
그리고 난리 속에서 비로소 두보(杜甫)를 익혀 부질없이 소기(小技)에다 공력을 허비한 지도 이미 일기(一紀)가 지났다
. 그사이 소득으로 말하면 비록 옛사람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성정을 읊조리고 물상을 아로새김에 있어서는 마음을 괴롭히고 힘을 쓴 것이 역시 얕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장정(章程)에 발로됨에 있어서는 혹 조려(藻麗)가 볼만한 것도 있으니 비교하면
연석(燕石, 연산(燕山)에서 나는 돌. 옥(玉) 같으면서도 옥이 아닌 돌을 말한 것으로,
진가(眞價)가 없는 것을 비유한 말임)을 깊이 감추고,
서박(鼠璞, 무용지물(無用之物)의 비유. 정(鄭)나라 사람은 다듬지 않은 옥(玉)을 박(璞)이라 하고,
주(周)나라 사람은 포 뜨지 않은 쥐를 박(璞)이라 하였는데, 주나라 사람이 정나라 장사꾼에게 박(璞)을 사겠느냐고 하자,
정나라 장사꾼이 그러겠다고 했는데, 박(璞)을 내놓고 보니 옥박이 아니고 서박이었으므로, 정나라 사람은 사양하고 사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 「응소전(應劭傳)」을 남몰래 보배로 여김과 같아서 끝내는 식자의 한번 웃음거리에도 차지 않을 것이다.
승평(昇平)한 때에 『북리집(北里集)』·『섬궁뢰창록(蟾宮酹唱錄)』이 있었는데,
난리통에 소실되어 버리고 관동에 와서 『감호집(鑑湖集)』을 지었는데,
친구들이 돌려보다 잃어버리고 『금문잡고(金門雜稿)』 한 책은 아이들이 보다가 망가뜨려 버렸으니,
수염을 꼬부려 가며 애를 무진 쓴 것들이 거의 다 유실된 셈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어찌 아까운 생각이 없을 수 있으랴.
접때 낙가사(洛迦寺)에 있으면서 우연히 기억난 것이 있었는데 이미 열에 일곱 여덟은 잊어버린 나머지였다.
세월이 오래가면 기억난 것마저도 차츰 잊게 될 것이므로, 책자에 써서 파한(破閑)거리로 삼으며 이름을 억기시(臆記詩)라 했다.
기억나는 대로 따라 썼기 때문에 일월(日月)의 선후로 써 서차하지 않았으니,
보는 자는 눌러 짐작함과 동시에 이로써 장항아리나 덮지 말아 주었으면 다행일 따름이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이 시를 싣고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태사 주지번(朱之藩)이 ‘단보는 중국 사람으로 태어났다 해도
뛰어난 문인 8·9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단보는 바로 허균의 자이다.
그런데 단보는 형벌을 받아 죽었기 때문에 문집이 세상에 유통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에 특별히 시 몇 수를 가려 싣는다. ·
·····평자들이 말하길, ‘동악 이안눌의 시는 유연의 소년배들(중국 유주(幽州)는 전국시대의 연조(燕趙)의 땅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슬픈 노래를 부르고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협객(俠客)을 우대하는 것으로 이름 높다)과 같아서
벌써 침울한 기상을 짊어지고 있고, 석주 권필은 낙신이 파도를 타면서 가벼운 걸음을 내디디며 눈길을 이리저리 둘 때
그 눈빛이 기상을 토해 내는 것과 같고, 허균의 시는 페르시아 장사꾼이 저자에 보물을 진열해 놓고 있는 것과 같은데
비록 하품의 물건이라도 목난이나 화제(목난과 화제는 모두 보물) 정도는 된다.’라 하였다.
(朱太史之藩嘗稱(주태사지번상칭) 端甫雖在中朝(단보수재중조) 亦居八九人中(역거팔구인중) 端甫許筠字也(단보허균자야)
第以刑死(제이형사) 文集不行(문집불행) 人罕知之(인한지지) 特揀數首(특간수수)
······評者謂東岳詩如幽燕少年(평자위동악시여유연소년) 已負沈鬱之氣(이부침울지기)
石洲詩如洛神凌波(석주시여낙신릉파) 微步轉眄(미보전면) 流光吐氣(유광토기)
許筠詩如波斯胡陳寶列肆(허균시여파사호진보열사) 下者乃木難火齊(하자내목난화제).”
〈주석〉
〖上林(상림)〗 상림원(上林苑)으로 한(漢)나라 때 천자(天子)의 원(苑)의 이름.
〖懕懕(염염)〗 혼몽한 모습.
〖薰風(훈풍)〗 따뜻한 바람.
〖武昌魚(무창어)〗 무창 지역에서 생산된 물고기로, 삼국시대 오(吳)의 손호(孫皓)가 도읍을 건업(建業)으로 옮길 때에
백성들도 무창에 머물러 살고 싶어 하여 ‘건업의 물을 마시고 무창의 고기를 먹겠다.’는 동요(童謠)가 있었음.
-원주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