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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한국사> 윤관[尹瓘] // 고려의 북경 영토를 개척하다

작성자구송박병수|작성시간26.06.15|조회수31 목록 댓글 0

윤관[ 尹瓘 ]

( ? ~ 1111)

고려의 북경 영토를 개척하다

윤관(尹瓘, ?∼1111)은 1107년(예종 2)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 9성(城) 설치와 함께 고려 영토를 확장한 고려시대 문관이다. 그는 고려 국경에 침입한 여진족을 강력한 군대로 대처하여 두만강 이북 지역의 영토를 개척하는 대업을 이룩하였다. 윤관만큼 [고려사] 열전에 비중있게 실린 인물이 있을까. 윤관이 이룩한 동북 9성의 설치는 그가 살았던 시기 보다 조선 초에 와서 더 조명 받았다. 특히 세종(世宗, 1397~1450)대에는 여진 정벌과 함께 4군 6진이 설치되었는데, 이 시기에 윤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동북 9성이 재조명되었다. [고려사] 윤관전의 방대한 분량은 정인지(鄭麟趾, 1396~1478)를 비롯한 [고려사] 편찬자들이 가진 윤관에 대한 시선을 보여준다.

숙종의 총애를 받다

윤관은 파평 윤씨로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尹莘達, 893∼973)의 후손이다. 고조인 윤신달은 태조 왕건을 보좌한 공으로 삼한공신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며, 부친은 윤집형(尹執衡)이다. 일찍부터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성장한 윤관은 문종(文宗, 1019~1083) 대 문과 급제를 계기로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후로 승진을 거듭, 숙종(肅宗, 1054~1105)대에는 한림학사 승지까지 지냈다. 예종(睿宗, 1079~1122) 즉위 후 정2품 평장사로 있다가 대망의 여진 정벌이 시작되면서 총책임을 맡아 동북 9성을 쌓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장이라는 모함을 받아 말년은 불우했다.

윤관에게는 언인, 언순, 언식, 언이, 언민 등의 아들이 있었는데 윤언순(尹彦純, ?~?)은 예종대에 남원부사를 지낸 인물이며, 윤언식(尹彦植, ?~1149)은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윤언이(尹彦頤, ?~1149)는 인종(仁宗, 1109~1146)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의종(毅宗, 1127~1173)대에 정당문학까지 지냈으며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대각국사(의천) 비문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 외 나머지 두 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개국공신 집안에다가 과거 급제 경력까지 갖춘 윤관이 숙종의 오른팔로 성장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윤관을 절대적으로 신임한 숙종은 조선 세조(世祖, 1417~1468)와 비견되는 왕이다. 숙종은 조카인 헌종(獻宗, 1084~1097)을 밀어 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말하자면, 왕위계승의 정통성에서 약점이 있는 인물이었다. 숙종의 즉위는 부자 혹은 형제간의 세습을 원칙으로 하는 고려의 왕위 계승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요제(遼帝, 요나라의 황제)에게 해명하고,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할 사명을 띠고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 바로 윤관이었다. 윤관은 숙종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 신하로 요제를 설복시킬 만큼의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숙종대에 윤관은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하면서 재추(宰樞)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어린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 찬탈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숙종에게 왕권강화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왕권강화책의 화살은 집권층인 귀족들을 향했다. 남경(한양) 건설이나 화폐 개혁 등 숙종의 왕권강화책에 윤관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화폐 사용은 측근세력으로 부상한 윤관과 숙종의 아우인 대각국사의 건의로 추진되었다. 화폐 통용은 세금 수취 과정에서의 부정부패를 막고 국가가 유통경제를 장악할 수 있게 하는 혁신적인 조처였다. 아울러 윤관은 별무반을 창설하는 등 여진족을 정벌하는 일에 매진하여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더욱 발휘하였다. [고려사] 윤관전에 따르면 평소 윤관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흠모했다고 한다. 그가 여진 정벌에 나설 때, “김유신이 전쟁할 때 6월이었음에도 강물이 결빙되어 군사를 건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여진족의 발흥

고려 태조(太祖, 877~943) 이래로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과 동북면의 동여진은 모두 통일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각기 부족별로 거란이나 고려에 복속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일찍이 고려가 북방에 장성을 쌓은 것이나 동해안의 요해지에 성을 쌓은 것은 이들 여진의 침략 행위와도 관계가 많았다. 문종(文宗, 1019~1083)은 1080년에 3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동북 여진을 정벌, 북방의 여진족을 잠재웠다. 이후 완옌부[完顔部]라는 여진족의 신흥세력이 등장하면서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완안부 추장, 즉 금 태조 아구다[阿骨打, 1068~1123]는 고려 출신이라는 설이 있었다. 당시 금황실의 고려출자설은 널리 회자될 정도였다. 여진족은 고려출자설을 바탕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한편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하곤 했다.

완옌부는 추장 잉게[盈歌, 1053~1103] 때에 이르러 주위의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고 지금의 간도지방을 복속하는 한편, 갈라전 지역까지 남하하는 등 급격히 세력을 뻗어 나갔다. 갈라전은 고려 북방의 장성과 바로 인접한 곳으로 이와 같은 완옌부의 남하는 앞으로 고려와의 충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잉게가 완옌부를 이끌고 있던 시절에는 고려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과 고려의 관계는 매우 원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1103년 잉게가 죽고 그의 조카 우야슈[烏雅束, 1061~1113]가 뒤를 이으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야슈가 완옌부의 새 추장이 되자 부내로를 비롯한 반대파들이 반기를 드는 등 동여진 내부에 또다시 분열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결국 우야슈는 부내로를 공격하기 위해 정주지역에 진을 치게 되었고, 마침 갈라전 지역을 두고 여진족과 신경전을 벌이던 고려는 이 같은 여진족의 움직임을 침공으로 의심하였다. 당시 고려 왕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 ?~?)을 정주로 보내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1105년 2월 공명심에 들뜬 임간은 군사를 이끌고 너무 멀리 쳐들어가는 오판을 자초하였고, 그 바람에 여진과의 첫 전투는 참패로 끝났다. 이 일로 임간은 파직되고 그 후임으로 추밀원사 윤관이 발탁되어 이른바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시작되었다.

윤관, 별무반을 이끌고 출정하다

1104년 3월, 여진 정벌을 위해 출정한 윤관은 적 3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윤관의 패배는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보병만으로 기마부대가 주축인 여진군을 따라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다. 임간에 이어 믿었던 윤관마저 패하고 돌아오자 숙종은 분한 마음에 천지신명께 서약까지 하며 여진 정벌을 천명했다. 하지만 여진족 기마병의 위력을 직접 경험했던 윤관은 숙종에게 별무반이라는 정예부대 양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윤관의 건의에 따라 숙종은 1104년(숙종 9) 12월 별무반을 설치했다.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을 중심으로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그리고 특수병인 도탕군, 경궁군, 정노군, 발화군과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각각 편성된 별무반은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이 입대해야 하는 의무군이었다. 귀족의 자제는 물론이고 아전, 농민, 장사치, 노비, 승려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국민총동원부대였다. 별무반의 양성은 여진을 재정벌하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진행되었으나, 그 이듬해 숙종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 과제는 아들인 예종에게로 넘어갔다.

숙종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2군 6위의 정규군과 함께 그 동안 충실히 군사훈련을 받은 별무반은 마침내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드디어 1107년(예종 2) 윤10월, 예종은 순천관 남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윤관을 원수로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 1055~1116)을 부원수로 삼아 여진 정벌에 나서게 했으니 이 때 총동원된 고려군이 무려 20만에 이르렀다. 윤관과 오연총은 대군을 이끌고 동부 변방으로 진군한 후 일단 군대를 장춘역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 ?~?)과 황군상(黃群相)을 각각 정주와 장주에 파견하여 여진 추장들을 유인하여 섬멸케 했다. 윤관이 이끄는 5만 3천의 군대가 정주 대화문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중군병마사 김한충(金漢忠, 1043~1120)이 이끄는 3만 6천 7백의 병력이 안륙수로 향하였으며 나머지 10만 병력도 각각 정주와 선적진, 도린포 등지로 떠났다.

정주를 출발한 지 반나절, 대내파지촌에 이어 동음성을 함락한 윤관은 군사를 이끌고 석성(石城)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여진군이 일대 항전을 준비하며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여진군은 석성으로 들어가 화살과 돌을 마구 퍼부으며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이에 질세라 고려군도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지만, 여진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는 못했다. 공격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윤관은 용감하기로 이름난 장수 척준경(拓俊京, ?~1144)을 불렀다.

“제가 일찍이 과오로 죄를 범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용서받게 해주셨는데, 오늘이야 말로 저의 한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할 날입이다.”

척준경은 일전에 임간을 따라 여진 토벌에 참여하였는데 그만 실패하여 파직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윤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복직이 되어 이번 전투에 참여한 것이었다. 적진으로 들어간 척준경이 적장 여러 명을 죽이는 활약을 펼치자 덩달아 기세가 오른 고려군은 여진군을 순식간에 궤멸시켜 버렸다. 사로잡은 포로 수가 무려 5천을 넘었고 목이 잘리운 자도 5천이 넘었을 정도로 전투는 대승이었다.

동북 9성의 축조

여진족 1백여 개 촌락을 평정한 윤관은 부하 장수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동북계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획정된 국경선의 범위는 동으로 화곶령까지, 북으로 궁한이령까지, 서로는 몽라골령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경선이 확정되자 윤관은 성곽 건설에 전념하여 몽라골령에 950간에 달하는 성곽을 쌓고 영주성이라 불렀으며 화곶령에는 992간을 짓고 웅주성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오림금촌에는 774간을 지어 복주성이라 이름하고 궁한이촌에는 670간을 지어 길주성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영주성 안에는 호국인왕사와 진동보제사라는 두 개의 절을 세웠고 또한 이 지역에 고려 주민 수천 호를 이주시켜 살게 하기도 했다.

윤관의 대활약에 힘입어 고려는 영주, 복주, 웅주, 길주 4주와 함주, 공험진을 합친 6성을 새로이 쌓게 되었다. 윤관은 6성에 만족하지 않고 같은 해 1108년(예종 3) 3월, 의주와 통태, 평융 세 곳에 더 성을 쌓아서 마침내 9성의 축조를 완성시켰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윤관의 동북 9성이

다.

9성의 반환과 윤관의 불명예 퇴진

윤관 묘역 <출처 : 정성희>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여진의 반격은 이미 1108년 초, 윤관의 9성 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이른 적도 있었다. 맹장 척준경의 도움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여진군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윤관과 척준경의 활약으로 9성을 설치하였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 달이 멀다하고 반격을 계속한 여진군은 1109년(예종 4) 마침내 화친을 청해왔다. 고려와 계속 싸워 봤자 도저히 승산이 없는데다가 그 와중에 북쪽의 거란(요)으로부터 어떤 화를 입을지 몰라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여진은 화친의 조건으로 9성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저 9성만 반환해 준다면 종전처럼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겠노라고 간청하고 나왔다.

예종은 1109년 6월 23일 신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9성의 반환 여부를 논의하게 하였다. 9성의 반환에 찬성한 주화파는 평장사 최홍사 등 28명이나 된 데 반해, 반대한 주전파는 예부낭중 박승중 등 2명에 불과했다. 결국 이 날의 회의는 종전과 같은 군신 관계를 회복하고 9성의 땅을 반환해 주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예종은 9성의 반환을 여진측에 정식으로 통보하였다. 이 때 마침 고려에 와 있던 여진족 사신단이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쏟아내었다고 하니, 이 지역에 대한 여진족들의 마음 고생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9성이 반환되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그 동안 여진 정벌을 탐탁치 않게 여긴 중신들이 여진 정벌의 과오를 문제삼으며 들고 일어났다. 평장사 최홍사를 비롯한 정벌 반대파들은 윤관과 오연총을 겨냥, “무리한 정벌을 일삼아 국력을 소모하게 했다”며 연일 직격탄을 쏘아댔다. 하지만 이들이 정작 겨냥한 것은 여진 정벌의 공을 세운 윤관세력이 조정에 돌아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문책론에 밀린 예종은 윤관의 원수직을 도로 거두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 때문에 개경에 돌아온 윤관과 오연총은 왕에게 보고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굴욕을 당했다. 예종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여진 정벌의 맹장 윤관은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시킨 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입고 불명예 퇴진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공적을 잊지 못한 예종의 배려로 이듬해 1110년(예종 5) 오연총과 함께 다시 복직되어 명예를 회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자존심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윤관은 복직 제의를 정중히 사양하였다. 예종은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파직한 것이니 내 마음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관직에 나오라”고 달랬지만 윤관은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없었던 윤관은 이듬해 허무하게 세찬 풍진의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9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당시 축조된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관찬사서인 [고려사]에는 영주와 웅주는 길주 근방이고, 복주는 뒤의 단주(단천), 공험진은 백두산 동북쪽의 소하강가에 있었다고 전한다. 소위 두만강북설이라 불리는 이 설은 공험진과 윤관이 세웠다는 선춘령비를 근거로 조선 초기까지 널리 믿어져 왔다.

이후 만주족이 세운 청이 들어서자, 청의 봉금령으로 이 지역이 조·청 공동 관리의 무주지로 있게 된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 대한 강역 의식은 희박해 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이 길주이남설을 주장하면서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길주이남설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에 의해 조선초기 관찬사료가 조작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된 점은 아쉬운 일이다.) 이어 일본 학자들은 훨씬 남쪽으로 내려잡아서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 일대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도 일대가 우리 영토라는 의식은 조선 후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조선인의 이주 또한 끊이지 않게 있어왔다. 최근에는 다시 공험진을 경원의 아오지보라고 보는 이른바 두만강 이북설이 지배적이다. 향후 윤관이 축조한 9성의 위치는 간도문제와 더불어 한중 국경문제를 논의할 때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 국경은 일본이 청국에 할양해 준 것을 토대로 간도가 배제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성희, 장선환-

고려사 -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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