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항구를 차(茶)로 채워라'
미국의 독립 선언(1775년 ~ 1783년)
요약 1773년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의 재정난 해결을 위해 차의 세법을 제정했고 그해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착취를 당했고 이에 식민지 대표들이 대륙회의를 열었다. 1776년 ‘독립 선언서’가 공포되었고 이후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쟁취했다.
차의 세법 제정,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다
1773년,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의 재정난 해결을 위해 이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차(茶) 재고품을 북미 식민지에서 세금 없이 독점 판매하는 것을 인정하는 차의 세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의 제정은 세금이 없기 때문에 정규로 수입된 차보다 값싸고 어떤 면에서는 식민지 주민에게 오히려 유리하였다.
그러나 세법은 차의 밀수입에 종사하고 있던 식민지 상인들을 자극하여 끝내 사건이 벌어졌다. 그해 12월 16일 밤, 차를 실은 동인도 회사의 차가 보스턴 항구에 도착하자 급진파 사람들이 그 배를 습격하여 이른바 '보스턴 티 파티 사건(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다.
보스턴 차 사건
차 밀수업자들이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영국 배에 올라 차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
그들은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차를 실은 3척의 배를 습격하여 배에 실린 차들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러면서 "조지 3세의 티 파티다" 또는 "보스턴 항구를 찻주전자가 되게 하라" 하고 외쳤다. 그들은 그날 총 342상자의 차를 바다에 던져 넣었다.
인지 조례로 식민지 전토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나다
당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본국의 호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공장제 수공업 운동의 결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에게 신대륙으로 식민하도록 장려하였다. 본국 산업에 필요한 원료를 식민지에서 생산하게 하고, 또한 본국의 제품을 팔려는 속셈에서였다. 식민지의 산업이 발달하게 되자 식민지 산업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조례(條例)를 강요하였다.
특히 1763년의 '인지조례'는 너무나 가혹한 내용이었다. 모든 신문과 광고에서부터 심지어는 졸업장에까지 인지를 붙이도록 강요한 것이다. 인지를 붙인다는 것은 바로 과세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식민지 전토에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 아래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식민지 아메리카와 본국 사이에 험악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보스턴의 차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영국 수입 인지 / 영국은 미국 식민지의 모든 출판물에 인지를 붙이고 과세를 부여하였다.
영국의 탄압, 식민지 대표들이 권리를 선언하다
이에 대해 영국은 보복적인 탄압책을 써서 보스턴을 봉쇄하고, 보스턴이 속해 있는 매사추세츠 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 정책으로 매사추세츠 주뿐 아니라 식민지 전체 백성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에 다음해인 1774년 9월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1회 대륙 회의를 열고, 식민지 주민의 권리를 선언하였다. 본국에서는 그와 같은 움직임을 무시하였다. 결국 1775년 4월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에서 본국 주둔군과 식민지의 민병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곧바로 독립전쟁의 방아쇠가 되었다.
무르익은 독립의 기운, ‘독립 선언서’가 공포되다
13주 식민지 대표들은 제2회 대륙 회의에서 조지 워싱턴(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 전부가 궐기했던 것은 아니다. 당초에는 독립파와 영국파 및 중립파가 각기 3분의 1씩이었다.
조지 워싱턴 /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립군 총사령관이자 미국의 초대 대통령.
그러나 패트릭 헨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다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다오'하는 명문구로 독립을 선동하고, 또 본국에서 온 토마스 페인이 《상식(Common sense)》을 1776년에 출판하여 독립의 정당성과 유리함을 선동하면서 급속히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었다.
마침내 1776년 7월 4일, 제퍼슨(1742~1826)이 기초하고, 플랭클린(1706~1790)을 포함한 기초 위원회에서 결정된 '독립 선언서'가 공포되었다. '독립 선언서'는 서문에서 인류의 생명 · 자유 · 행복의 추구와 그 일을 위한 정부의 수립을 인간의 자연권이라 주장하고, 본문에서는 조지 3세의 압제를 열거하며, 독립의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 / 미국 독립의 당위성, 자유와 혁명의 정신을 밝힌 명문.
농민과 시민으로 구성된 독립군, 영국 정규군에 맞서다
그러나 전황은 불리해져 워싱턴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름은 독립군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훈련받은 정규군일 리 없었다. 독립군의 병사는 농민과 시민으로 구성되었고, '미니트 맨'이라 불렸다. 생업에 종사하다가 동원령에 따라 1분 안에 재빨리 군인이 된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 워싱턴이 거느리는 1만 2천 명에 이르는 독립군 중 소총과 모포를 가진 사람은 3분의 1, 장화를 신은 사람은 불과 900명뿐이었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워싱턴의 군대는 영국의 당당한 정규군을 보고 진지 탈환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겨울에 텐트나 허름한 오두막에서 야영했기 때문에 6개월 동안에 전사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천 명을 잃었다. 워싱턴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때로 하루 한 끼로 때웠다. 허름한 옷을 입고 봉급도 받지 못하고, 때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이 8년 동안에 걸쳐 영국 정규군에 의한 진압 계획에 맞섰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다."
독립군의 승리,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은 독립군은 드디어 1778년에 필라델피아를 탈환하였다. 또한 영국과 대립 관계에 있던 프랑스가 식민지 편을 들어 영국에 선전포고하였고 에스파냐, 네덜란드도 그 뒤를 따랐다. 독립군은 1781년 요크타운 격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고, 프랑스의 중재로 파리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독립 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워싱턴은 1789년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키고, 국내 정비에 전력을 다하였다. 3선에 즈음하여 워싱턴은 대통령을 세 번 연임하는 것은 민주 정치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판단에서 '결별사'를 발표하고 은퇴하였다.
제퍼슨 대통령, 민주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다
한편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표로서 처음부터 대륙 회의에 참가하여 활약했고, 1776년의 제2회 대륙 회의에서 '독립 선언서' 기초 위원에 임명되었다. 제퍼슨은 존 로크 등이 체계를 세운 혁명 사상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키워진 자유정신을 결합하여 기본적 인권, 인민 주권, 저항권을 명확하게 밝힌 명문으로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였다.
180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은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적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역사가들은 제퍼슨의 새 정권 탄생을 '1800년의 혁명'이라 말하고 있다. 그는 대외 정책에서도 나폴레옹으로부터 서부의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구입하여(1803), 미국 영토를 2배나 확대하는 성과를 올렸다.
대통령을 중임한 후 제퍼슨은 1809년에 은퇴하여, 종교와 관계없는 대학인 버지니아 대학을 창설하고, 스스로 그 총장이 되어 민주적 교육의 터를 이룩하였다. 그는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자신이 기초한 '독립 선언서'가 채택된 날, 곧 미국 독립 기념 제50주년에 해당하는 1826년 7월 4일, 83세로 사망하였다. 링컨은 제퍼슨을 가리켜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극찬하였다.
제2회 대륙 회의 / 제2회 대륙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를 제출하고 있다.
미국 헌법, 세계 최초의 민주적 성문 헌법으로 의의를 갖다
미국 헌법은 세계 최초의 민주적인 성문 헌법으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그 주요 특색은 첫째로 각 주를 단위로 하여 구성되는 연방 제도라는 점, 둘째로 입법 · 행정 · 사법의 삼권분립 제도라는 점, 셋째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확립에 공헌한 점 등에 있다.
-김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