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미드
[ Margaret Mead ]
(1901 ~ 1978)
현대 사회의 문제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인류학의 대모
“집을 떠나 여행을 다녀본 사람이 집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것처럼,
다른 문화에 대해 알게 되면 자신의 문화를 보다 더 자세히 살펴 볼 수 있고,
더욱 큰 애정을 가지고 그 진가를 음미할 수 있다.”-마거릿 미드
마거릿 미드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로 사모아ㆍ뉴기니ㆍ발리섬 등에 현장조사를 나가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을 관찰하면서 청소년기에 있어서의 문제와 성(性)행동에 대한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육아와 교육, 여성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드는 미국 문화인류학에 심리학적 방법을 도입하고 발전시켰으며,
2차 대전 당시에는 세계의 식생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학자로서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20세기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지식인으로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많은 주장과 이론을 펼쳤다.
사모아의 백인 여성
1925년 한 백인 여성이 카메라와 타자기를 가지고 사모아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명화된 사회가 아닌 여전히 원주민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20세기 초,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기, 변변한 교통수단도 없었던 때에, 24세의 이 여성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안락한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대학의 상아탑을 벗어나 멀리 뉴질랜드 인근의 폴리네시아로 연구여행을 온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연구주제인 사모아의 청소년과 서구의 청소년의 성장 과정에서의 동질성과 차이성을 찾으려 했다.
수개월동안 사모아섬에 머문 그녀는 서구의 청소년과는 상당히 다른, 비교적 갈등없는 성장기를 겪는 사모아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사춘기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의 조사와 결론을 바탕으로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와 [사모아의 성년(Coming of Age in Samoa)]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당시 미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 사회가 이전까지 고수해왔던 육아와 교육 방법이 재고되었고, 성 역할이 본능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가 가진 이데올로기 교육에 의한 것이란 이론은 여성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류학자를 넘어 미국 사회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바로 20세기 문화인류학의 대모이자, 교육 사회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1901~197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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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을 만나다
마거릿 미드는 필라델피아의 비교적 유복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정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제학자로 유명한 와튼스쿨의 교수였고, 어머니도 석사학위를 가진 학구파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을 하고 다섯 아이를 낳으면서 중도에 공부를 포기했는데 그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고, 마거릿 미드를 비롯한 자신의 딸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미국 여성의 삶과는 다르게 살기를 바랬다고 한다. 마거릿 미드의 정서적인 부분을 채워준 사람은 그녀의 친할머니였다. 평생을 교사로 살았던 할머니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지만, 의지가 강하고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마거릿 미드는 이렇듯 학구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나 대학에 진학했다.
그녀가 처음 진학한 대학은 아버지의 모교였던 명문 사립 드포 대학(DePauw University)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좀 더 깊은 차원의 학문 탐구를 꿈꿨던 마거릿 미드에게 당시 드포 대학의 분위기는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남학생들은 공부보다는 사회진출을 위한 인맥쌓기에 더 골몰했고, 여학생들은 예쁘게 차려입고 괜찮은 남자들을 만날 생각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과에서 성적은 톱이었지만 마거릿 미드는 학교 전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요즘말로 하면 왕따를 당했다. 이때의 경험이 마거릿 미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나 따돌리는 사람 모두에게 이러한 행위는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고 삶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 마거릿 미드는, 훗날 사회적 발언권에 강해졌을 때 특히 교육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드포 대학에 적응하지 못한 마거릿 미드는 뉴욕에 있는 명문여자대학인 버나드 대학(Barnard College)으로 옮겨갔고 거기서 운명적으로 자신이 몰두할 학문을 찾았다. 본래 작가가 되고 싶어 영문학과에 들어갔던 마거릿 미드는 자신의 글쓰기가 그다지 문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연구로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이때 버나드 대학과 학점 교환을 하던 인근 콜롬비아 대학에서 당시 미국 문화인류학의 창시자였던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 1858~1942)와 그 조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를 만난 마거릿 미드는 자신의 관심과 신념, 당시 학자로서 사회적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학문으로 인류학을 선택했고 거기에 매료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마거릿 미드는 콜롬비아 대학원에 진학했고, 프란츠 보아스의 지도 하에 석사학위를 땄다. 학문에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인류학 공부를 통해 사라져가는 세계 각 지역의 문화를 기록할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지도교수였던 프란츠 보아스는 여성이며, 당시 이미 결혼했던 그녀의 입장을 고려해 미국에서 인디언 문화를 연구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여건은 학문적 열정을 이기지 못했다. 1920년대 당시에 여성이 미지의 세계로 현장 조사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거릿 미드는 사모아로의 연구여행을 감행했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사회활동가로서의 활동
현장조서를 하던 시절의 마거릿 미드 <출처: (cc) Edward Lynch at en.wikipedia.org>
사모아에서 수개월을 보내는 동안 마거릿 미드는 사모아섬의 청소년들을 관찰하면서 사춘기의 심리적 갈등이 특정한 문화 상황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으며, 성장단계의 육체적 변화와의 관련은 어느 정도인가를 연구하였다. 이 연구에 연장하여 마거릿 미드는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형식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갈등하며 이를 체화하는가를 연구했는데, 이 테마는 마거릿 미드 평생의 연구 주제가 되었다.
사모아에서의 연구는 앞서 말한 한권의 책으로 나왔고 이는 미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론적으로 문화와 인간의 관계를 백번 떠드는 것보다 마거릿 미드가 현지에서 조사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문화와 인간의 인성 형성에 대한 연구는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박사학위를 딴 마거릿 미드는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미국 국립 역사박물관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이외에는 최초의 사모아 현지 답사 이후 14년간 거의 대부분을 해외의 문화를 찾아다니며 현장 연구에 몰두했다. 그녀는 5차례 긴 연구여행을 통해 사모아, 뉴기니아, 발리에서 원주민 부족을 관찰ㆍ연구하고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연구를 보태 총 8개의 종족을 연구하였다. 이 연구들은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1928년에 나온 첫 저서 [사모아의 성년]을 비롯하여 교육을 비교 연구한 [뉴기니아에서의 성장(Growing Up In New Guinea)](1930), 남녀의 성 기질 비교연구서인 [세 원시 부족 사회의 성과 기질(Sex and Temperament in Three Primitive Societies)](1935)과 [발리인의 성격: 사진을 통한 분석](1942)이 그것이다. 이 책들은 모두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8년에 출판된 [사모아의 성년]. 마거릿 미드는 사모아섬의 청소년 연구를 통해 인성과 성 역할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밝혔다.
이 책들의 주요한 문제의식은 문화의 학습과 교육에 대한 것이었다. 마거릿 미드는 어느 종족이나 어린이의 인성형성에는 부모와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발견했고, 아이가 편견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에서 벗어나 성장하려면 부모나 가르치는 사람, 즉 교사부터 그 가치관을 바르게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알지만 확연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었던 이런 주장들은 단출한 원시 부족사회의 사회적 특성을 통해 그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었다.
더불어 마거릿 미드는 자신이 관찰한 각 부족들에게서 발견되는 성 역할에 대한 관찰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과 지위는 생물학적인 것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서 결정되며 세계 어디서나 남녀가 모두 같은 성 역할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 연구 결과는 당시 남녀의 고정적인 성 역할에 대한 인식을 깨뜨렸으며, 여성해방론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마거릿 미드는 문화상대주의를 통해 최선이나 최고의 문화는 있을 수 없으며 세계의 모든 문화들은 서로 존중받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마거릿 미드의 문화상대주의는 이후 인류학에 있어서 기본전제가 되었다.
마거릿 미드는 현장 조사 기간 동안 세 차례 결혼하고 이혼을 했다. 당시 미국의 보수적 관점에서 세 차례의 이혼은 그야말로 악명이었다. 책을 출판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마거릿 미드에게 기자들이 ‘왜 세 번이나 이혼했냐’고 묻자 ‘당신들은 왜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사실은 잊었냐’고 항변했다는 에피소드가 말해주듯이, 마거릿 미드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매우 용감했으며, 당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훗날 회고를 통해 사회운동에 참여할 때에 자신의 이혼 경력이 혹여 그녀가 몸담은 사회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가십거리로 이용되어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현장 답사 이후, 마거릿 미드는 세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을 키우며 이후 인류학 연구와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14년간의 현장 답사 경험을 미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적용해 연구를 이어갔다. 특히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소수민족이나 이주민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그간의 연구경험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학문간 통합과 유대를 주장했으며, 학문이 학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소수집단과 다수집단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세대간의 격차, 남녀간의 차이와 차별의 문제, 인종간 관계 개선, 환경 보호, 과학의 자유, 정신 건강문제, 교육 등등 수많은 분야에 다양한 관심을 보였고 이를 인류학적 해법을 통해 풀어 보려 했다.
그 결과, 그녀는 콜럼비아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수많은 박물관의 고문직을 수락했으며, 방송에 출연해 강의를 하고, 강연회를 열었고, 책을 출판하는 등 사회적 운동을 펴나갔다. 이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풀어보려는 시도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인류학을 접하면서 개인과 사회가 가진 문제와 그 해결법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찾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거릿 미드가 미친 영향은 학문 사회나 서구 사회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1978년 마거릿 미드가 췌장암으로 죽었을 때, 그녀가 현지조사를 위해 머물렀던 파푸아뉴기니의 마누스 섬에서는 그녀를 위한 장례식을 치르고 애도를 표했다. 그것은 대추장이 서거했을 때 치르는 5일장이었다.
데릭 프리먼과의 논쟁
마거릿 미드가 죽은지 5년 후인 1983년, 뉴질랜드의 인류학자 데릭 프리먼(Derek Freeman, 1916~2001)은 마거릿 미드의 연구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마거릿 미드와 사모아]라는 책을 출판했다. 데릭 프리먼은 사모아 문화에 흥미를 가지고 오랫동안 연구를 한 학자로, 폴리네시아의 섬에서 실제로 오랫동안 거주한 경험도 있었다. 데릭 프리먼은 그의 책에서 마거릿 미드가 사모아의 청소년들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으며, 짧은 연구 기간 동안 그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그 풍습도 잘 몰랐던 관계로 자신이 보고 싶은 사실이나 듣고 싶은 말만 따서 연구를 진행했다고 비판했다. 그 증거로 그는 마거릿 미드가 인터뷰했다는 사람들을 만나 재인터뷰했고, 그들은 자신이 농담으로 한 말을 마거릿 미드가 그대로 믿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데릭 프리먼은 인성이나 성 역할의 형성은 마거릿 미드가 주장하듯 문화 때문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이유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데릭 프리먼의 주장은 1983년 <뉴욕타임즈>에 대서특필되었고, 이로 인해 살아 생전 뛰어난 학자로, 또 사회지도자로 존경받던 마거릿 미드는 죽은 후 한순간에 사기꾼 학자로 전락하였다. 근 50여년 간 마거릿 미드의 이론을 따랐던 인류학계 역시 혼란에 빠졌다. 갑론을박이 오가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마거릿 미드의 학설을 따르던 사람들은 데릭 프리먼을 공격했고, 그 자신이 40여 년간 인류학자였던 데릭 프리먼도 만만히 물러나지 않았다. 마거릿 미드 생전에 그녀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 했을 때, 마거릿 미드도 자신의 연구에 일부 결함이 있었음을 인정했다고 데릭 프리먼은 주장했다.
이로 인해 마거릿 미드의 연구는 전면적으로 검토되었다. 마거릿 미드의 연구자료는 모두 재검토 되었고 인류학자들은 그녀가 방문했던 사모아 섬에 재방문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또 다시 반전이었다. 인류학자들은 데릭 프리먼의 사모아섬 연구는 마거릿 미드보다 20년 후의 일로 이미 사모아섬이 많은 부분 서구화 된 다음의 일이며, 그 연구 장소도 마거릿 미드가 연구한 섬이 아니라 다른 섬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사모아섬의 여성들은 남자 인류학자들과는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을 꺼렸으며 오히려 여자학자들에게 자신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놓았다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데릭 프리먼이 제시한 근거나 데이터가 일부 날조 혹은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 논쟁은 연구자의 성별이 남성과 여성으로 다르다는 문제, 학문의 본령과 변방이라는 심정적인 갈등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현재 인류학계는 데릭 프리먼의 주장보다 마거릿 미드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 편이다. 그것은 마거릿 미드의 연구가 사모아섬이 서구문화에 물들기 전, 그러니까 그들의 전통을 지켜나가던 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데릭 프리먼의 몇가지 연구오류와 사모아 문화에 대한 단순한 해석 등으로 인해 그를 지지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여전히 심심찮게 회자되며, 어떤 경우에는 이후 인류학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 오해가 풀렸음에도 마거릿 미드를 여전히 사기꾼으로 알고 있는 분위기도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는 그녀가 생전에 얻었던 명성을 깎아 내리고 싶은 마음과 그녀가 우려했던 세 번의 이혼경력을 비롯해 루스 베네딕트와의 우정과 사랑을 오가는 관계에 대한 선입견도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에 대한 평가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연구하고 우려했으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랬던 현대 문화라는 굴레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하다.
마거릿 미드는 인류학이 그저 상아탑 속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인류학을 통해 대중과 교감하기를 원했고, 대중 자체가 자신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한 것도 모두 이러한 개인적 신념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마거릿 미드가 남긴 말을 인용해본다.
지금 내가 스물 한 살이라면, 나는 인류학자로서 우리들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혁을 절실히 느끼는 젊은이들간의 통신망을 세계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녀가 생각한 세계적인 통신망의 형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인터넷이라는 것으로 구현되고 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그녀가 생각하듯이 이 세계적인 통신망을 통해 서로의 문화에 대한 좀 더 깊이있는 이해와 소통으로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키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김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