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교체
심재숙
1. 초여름의 아스팔트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이글거린다, 그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붉고 푸른 바람이 골목마다 요란하게 몰아친다. 또다시 지방선거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저마다 가슴팍에 커다란 기호를 달고 자신이 이 고을을 이끌어갈 유일한 적임자라 외치는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공중으로 부서진다. 뙤약볕 아래서 연신 길 가는 이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그들의 모습은 간절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해 보인다.
2. 문득 신호등 건너편으로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후보가 땀을 흘리며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윗옷 뒤쪽에 ‘선수교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지금의 판을 바꾸고 새로운 주자가 나서야 할 때라는 선언일 것이다. 그 바쁜 몸짓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옛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온 동네를 들썩이게 하던 청백전의 마지막 순서 이어달리기 경주다.
3. 이어달리기는 단지 한 사람이 특출나게 잘 달린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경기가 아니다. 첫 주자가 바람처럼 질주하여 압도적인 차이로 선두를 지키더라도 다음 주자가 그 속도를 받아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특히 바통을 넘겨주는 그 찰나의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된다. 서두르다 바통을 놓쳐 땅바닥에 떨어뜨리거나 서로의 호흡이 맞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이 선두는 순식간에 꼴찌로 추락하고 만다. 교체라는 말속에는 짜릿한 도약과 허망한 추락의 가능성이 동시에 숨 쉬고 있다.
4. 지금 눈앞에서 땀을 흘리며 달리는 저 선거의 주자들은 과연 어떤 바통을 쥐고 있는 것일까. 참된 책임감과 진심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권력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빈 껍데기일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목격하는 선거판의 풍경은 종종 이 이어달리기의 엄숙함을 잊은 채 흘러간다.
5. 바통을 넘겨받기 전에는 세상을 다 바꿀 것처럼 호언장담하던 이들이 막상 바통을 손에 쥐는 순간 걸음을 멈추거나 딴청을 피우기 일쑤다. 어떤 주자는 바통을 마치 개인의 소유물인 양 품에 꼭 껴안은 채 트랙 밖으로 도망치려는 이도 있다. 주자가 바뀌는 ‘교체’ 그 자체에만 눈이 멀어 정작 교체 이후에 어떻게 달릴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이들이 마음을 허탈하게 만든다.
6. 새로운 인물로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달리는 폼을 보니 이전 주자와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역주행하는 기막힌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시민들은 목이 터지라 응원을 보내지만, 정작 트랙 위의 주자들은 그 박수갈채가 제 잘난 것인 줄 착각하며 오만에 빠지곤 한다. 환호성이 깊어질수록 풍자의 그늘도 짙어지는 꼴이다.
7.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길목을 빠져나와 조용한 가로수 그늘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경주가 생각난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누구나 주자가 되어 달리고 또 언젠가는 뒤따라오는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바통을 이어받고 사는 셈이다. 부모 세대가 평생 지켜온 땀과 눈물의 바통을 넘겨받았고, 다시 자식들에게 건네기 위해 숨 가쁘게 달리는 게 인생 아니던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건네는 매일 보이지 않는 선수교체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꼴이다.
8. 이 삶의 경주가 흥미로운 것은 처음에 조금 뒤처졌다고 해서 영원한 낙오자가 되지 않으며 초반의 기세가 끝까지 보장되지 않는다. 인생의 초년에 일찍 화려한 성공을 한 주자는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 중도에 허탈하게 주저앉기도 한다. 반면, 출발선에서 발이 엉켜 한참을 뒤처졌던 이가 자신만의 단단한 호흡을 지키며 묵묵히 걸어간 끝에 인생의 황혼 무렵에 가장 눈부신 완주를 하는 기적을 삶의 길목에서 종종 마주하게 된다.
9. 이형기 시인의 명시 <낙화>의 구절이 떠 오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물러남’의 순간이라 하겠다. 역할을 끝내고 교체되는 자체가 중요한 일이리라.
10. 붙잡아 둘 수 없는 청춘을 붙잡으려 바둥거리고 내려놓아야 할 집착과 미련의 바통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버티는 이의 뒷모습은 애처롭고 씁쓸하다. 반면, 제 몫의 트랙을 끝까지 달린 뒤 기쁜 마음으로 다음 이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트랙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가는 이의 뒷모습에는 형언할 수 없는 평안과 품격이 깃들어 있다.
11. 우리는 누구나 시간이라는 거대한 섭리 앞에서 결국 선수교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봄의 찬란함은 여름의 울창함에 자리를 내어주고 붉은 단풍은 흰 눈에 자리를 양보한다. 자연이 이토록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는 비결은 때가 되면 군말 없이 스스로 주자를 교체하기 때문이다. 만약 가을이 겨울에, 겨울이 다시 봄에 바통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대지는 영원히 죽음의 침묵 속에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
12. 일평생 쥐고 달릴 진짜 바통은 권력이나 명예가 아닐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이웃을 향한 따스한 눈길, 정직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이 중요한 법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나누는 마음의 바통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은은하고 깊은 빛을 발하는 법이다. 고개를 들어 뙤약볕 속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후보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그 몸짓이 야망 대신 지역을 위해 온몸을 희생하겠다는 진심 어린 책임이기를 기도해 본다. 부디 목이 터지게 외치는 ‘선수교체’가 단순히 자리를 탐하는 탐욕이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약속이기를 믿고 싶다.
13. 시끄러운 로고송이 멀어진다. 온 힘을 다해 쥐고 달릴 나만의 바통을 생각해 본다. 조급해하지 말고 가장 정직한 보폭으로 트랙을 달려야겠다. 삶의 다음 주자에게 웃으며 바통을 넘겨줄 아름다운 선수교체의 순간을 떠올리니 슬그머니 웃음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