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군 후손에게 전라북도 특별자치구에서 2026년 부터 위로금을 지급한다고 한다.
금액이 얼마든 돈 앞에서는 모두가 진심이고 관심 또한 뜨겁다.
정읍시에서는 몇년 전 부터 지급하고 있었고, 도 차원에서 새롭게 관심을 갖겠다는거다.
더불어 교과서에서 동학난으로 가볍게 알고 지나친 동학에 대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시선이 집중 됐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결론 부터 말하면 동학은 1894년 음력 4월 22일 부터 23일 양 이틀 간에
일본군에게 완전 패배로 끝난 우리 근대사의 빅이벤트였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영향도 받지않은 반봉건, 반외세, 보국안민을 기치를 내세운
민중운동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조선 조정이 도움을 요청한 것은 청이었지만 청군에 이어
텐진 조약을 앞세워 일본군이 다음날 인천항에 도착한다.
호위병 400포함 육군 800명과 대포 4문이 일본 공사관의 주둔 병사 전부였는데
그날 일군에 동학군 3만이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도살장에서 순번 기다리는 돼지도 아니고 실로 어이없는 숫자 아닌지.
농민군은 조총, 죽창, 그리고 화승총이 있었지만
진압군은 그 시대로서는 최신 무기인 레밍턴 볼링블럭등 최신 무기와 대포로 무장하고 있어
그날의 패전 원인은 순전히 화력이 열세였다고 말한다.
혹자는 마치 몇십만 떼죽음이 큰 순교인양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런 무모하고 어리석은 죽음이라면 그 시대를 살다간 그들 모두를 모욕하는 처사로 여긴다.
전주성을 함락하고 점령할 때 까지 동학군은 전략적으로 질서 있게 잘 싸웠다.
조정이 파견한 홍계훈의 1000명 경군도 이어 이학승의 1000명 경군도 물리쳤고
조정과 화약 까지 맺는다.
허나 나주성을 공략하는데 실패한다.
나주의 수군 5000명 대장 민병렬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적극적으로 농민군을 물리치지도 않았지만 물러서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이것이 조정에 빌미를 주어 일군을 나주에 파견하게 된다.
혼란과 이상이 되섞인 변화를 꿈꾸는 열망과 약탈과 무력 충돌 이라는 필연적인 갈등
그것이 그 시대를 얼마나 혼란에 빠뜨렸는가는 쉽게 추측 된다.
그리고 그 시절 주류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이들은 나라님에게 대드는 매국노 ,거지떼로
동학군을 성토하는 많은 글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다시 정립하던 박정희 역시도 동학난이라 규정지으며
동학에 대한 접근 금지령을 내린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재조명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때 그 소명을 다 한다.
어쨌든 동학은 순수 토종 근대 민중 운동의 모태로 민중 항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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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설악소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8.13 뒤어어 일군에게도 청군에게도 물러날 것을 요청 했지만 그들은 물러서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일군이 청군을 먼저 습격함으로 청일 전쟁이 시작되고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다. -
작성자설악소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8.13 동학이 하층민들의 움직임 이었다면
그해 여름 한국의 양반 지식인층에서 변화를 유도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그 또한 하루살이로 끝나는 갑오경장이다. -
작성자설악소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8.13 그리고 다음해 을미년 일본 낭인의 의해 조선의 왕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분노한 숨어있던 동학군들이 의병이 되어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
작성자설악소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8.13 언제 어디서나 주류는 나라의 녹을 먹고 그의 순종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 시대 역시 벼슬아치들은 동학군 몰이에 열중하고 하나라도 더 잡아들여야 했다.
그 시대에 황해도 해주의 지방관으로 재직중이던 안중근의 부친이 요즘 화제다.
한발 앞서 나서는 이들이 동학군 무리를 쫓던 그의 집안을 다시 평가 하겠단다.
그 역시 나중에는 동학군으로 쫓기던 김구를 구해주고 독립 운동을 하게 된다. -
작성자설악소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8.13 구데타로 권력을 거머쥔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이 동학 같은 민중 봉기 아니었나 싶다.
자신과는 아주 다른 백의 종군하는 이순신을 최고의 민족 영웅으로 만든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