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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선,기독 문화의 뿌리 대한민국

작성자아름드리|작성시간26.06.16|조회수45 목록 댓글 0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조술요순(祖述堯舜)하시고 헌장문무(憲章文武)하시니라.’(「중용中庸」30장)라고 하여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상, 법통을 근본으로 하고 문왕과 무왕의 국가통치 제도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이 요순임금의 국가 경영 지침서, 그것이 바로 단군왕검의 맏아들이었던 부루 태자가 전한『홍범구주洪範九疇』다. 공자가 표본으로 삼은 요순 역사의 진실은 9년 홍수를 다스린 법도가 전해진 『홍범구주洪範九疇』속에 담겨 있다. 이에 공자가 밝히려 한 원형을 알려면『서경』과『홍범구주』를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단군왕검 시절 동방 조선(고조선,단군조선) 땅과 서방 중국 지나 땅에는 대홍수가 있었고, 이때 물을 다스리는 치수법(治水法)을 가진 종통 국가는 동방조선(고조선)이었다. 이는 중국 지나支那의『오월춘추(吳越春秋)』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비교하면 대의를 파악할 수 있다.

 

 

 

 

 

 

공자가 살던 때에 노나라 남쪽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기록은 9년 홍수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중국의 사학자들은 9년 홍수 사건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였다.

 

사공 우禹가 금간옥첩을 받아간 것과 관련된 기록은 [오월춘추]와 [역대신선통감], 그리고  [응제시주]와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묵자] 등에서 확인된다. 중국이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 사관으로 쓴 [오월춘추]에는 창수사자가 우의 꿈에 나타나 비법을 알려준 것으로 기록하여 우禹가 순전히 자신의 현몽으로 국난을 해결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왜곡하였다.

 

 

 


▶禹乃東巡, 登衡嶽, 血白馬以祭, 不幸所求.... 因夢見赤繡衣男子, 自稱玄夷蒼水使者... 東顧謂禹曰 欲得我山神書者, 齋於黃帝巖嶽之下三月 ... 禹退又齋三月, 庚子登宛委山, 發金簡之書, 案金簡玉字, 得通水之理. (<오월춘추> 월왕무여외전)    

9년 홍수를 다스리던 우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형산에 이르러 백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하여 성공을 빌었다. 그랬더니 꿈에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스스로 ‘현이의 창수사자’ 라 칭하면서 우에게 ​“신서(神書)가 있으니 목욕 재계하고 이를 내어 보라” 하므로 우가 그렇게 하여 금간(金簡)의 신서神書를 얻어 오행통수의 이치를 알았다 (<오월춘추> 월왕무여외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현이의 창수사자> 부분을 이렇게 말했다. 

 

현이(玄夷)는 당시 단군조선(고조선)의 동 ·남 ·서 ·북 ·중 오부를 남(藍) ·적(未) ·백(白) ·현(玄: 黑 ) ·황(黃 ) 으로 별칭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玄部) 이니 중국인들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玄夷)라고 한 것이요, 창수(蒼水)는 곧 창수(擔水)이고, 주신(州愼) ·숙신(肅愼 ) ·직신(稷愼 ) 혹은 식신(息愼 ) 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州愼)은 곧 단군조선(고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 (吳越春秋)의 창수사자이니, 이때 중국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가지 옛 역사 기록이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왕검이 그 수재水災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도산에 보내 하夏나라 우禹에게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法)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禹)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중국에 퍼뜨렸으며, 정전(井田)과 율도량형(律度量衡) 또한 중국의 창작이 아니라 단군조선(고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고 하였는가? 

중국의 기록인 <오월춘추>는 부루 태자를 ‘현이의 창수사자(玄夷蒼水使者)’ 라고 바꾸어서 말할 뿐 나머지는 <단군세기> 내용과  다른 데가 없다. 우가 현이의 창수사자에게 오행통수의 이치를  전해받아서 치수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꿈이라고 했지만 이정도의 변형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을 유추하는데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다. 물론 중국 문헌에는 이보다 더 추상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놓은 기록이 많다.

 

▶<서경(書經)>‘홍범’ 에서는 “하늘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를 주셨다(天乃錫禹洪範九疇)” 라고 하여 부루 태자를 ‘하늘(天)’로 바꿔 말하고 있다. 꿈 속 창수사자 이야기나 하늘로 표현한 것이나 모두 단군조선(고조선)을 숨기려는 기도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미자세가 홍범구주편에는, "하늘(天)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등을 내리어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라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箕子ㅣ 乃言曰 我聞호니 在昔鯀이 陻洪水하야 汨陳其五行한대 帝乃震怒하샤 不畀洪範九疇하시니 彛倫의 攸斁니라. 鯀則殛死ㅣ어늘 禹乃嗣興하신대 天乃錫禹洪範九疇하시니 彛倫의 攸叙ㅣ니라. 

 

기자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옛적에 곤(鯀,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아버지)이 홍수를 막으면서 오행(五行)을 어지러이 펼치니 帝(임금)가 진노하여 곤鯀에게 홍범구주를 주지 않으시니 이륜이 무너졌다. 곤鯀이 귀양가서 죽자 아들 우禹가 이어서 일어나시니 하늘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를 주시어 이륜이 펼쳐지게 되었느니라.

 

 

 

 

 

 

 

 



9년 홍수 사건을 중화 사대주의에 찌든 국내 문헌들의 왜곡이다.

 

 

 

 

 

 

 

 

 

 

 

 


조선시대의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禹가 도산에서 제후들과 회동할 때 태자 부루를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라고 하여 단군조선(고조선)이 오히려 중국의 속국이었던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게 기록하였다. 

▶『응제시주應製詩註』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고려 말 안향(安珦)이 지은 시詩에 <충선왕을 시종하여 연경에 가는 감회>에도 태자 부루가 도산에서 우禹 임금에게 옥을 폐백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 홍만종,동국역대총목 단군조선): 갑술년(하우 18년) 아들 부루를 하夏나라에 보내 조회하게 했다.

▶ 이종휘,수산집 동사본기): 9년 홍수를 당해서 팽오에게는 높은 산과 큰 강을 정하게 하고 우수에 이르러 백성들이 살 터전을 정했다. 단군은 수천년을 살다가 마쳤고 아들 부루가 섰는데 갑술년에 도산에서 하우씨와 회맹했다. 부루 이후에는 세계와 연보를 잃어서 전하지 않는다. 

 

 

 

 

 

당시 대륙의 당요, 우순, 하우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대표적 문구가 서경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순임금이) 동쪽 지역을 순수하여 태산泰山에 이르러 시柴 제사를 지내고, 산천을 바라보며 차례대로 제사한 뒤 동방의 천자를 찾아뵈었다[東巡守至于岱宗, 柴, 望秩于山川, 肆覲東后].” (서경 우서(虞書)의 순전), 그런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결같이 동후東后를 ‘동방의 제후(東方之諸侯也)’라 해석해 왔다.

 

 

 

 

『강희자전』은 “천자가 즉위하면 제후들이 북면하여 천자께 알현하는 것을 일러 근이라 한다[天子當依而立, 諸侯北面, 而見天子曰覲]”라고 하였다. 그래서 ‘근覲’ 자는 ‘하현상(下見上),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문안드린다’는 말이다. ‘제후인 순舜임금이 그 종주국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알현하였다’는 것이 ‘사근동후’의 본뜻이다.

 

 

 

 

 

 

 

 

 

 

 

 

 

 

 

우임금 “나를 회계산에 묻어다오‘

우임금이 “내가 죽은 뒤에 나를 회계산에 묻어다오.”  吾百世之後에 葬我會稽之山하라.  (『오월춘추』「월왕무여외전越王無余外傳」)

하夏나라의 창업자는 바로 회계산에서 단군조선의 부루태자로부터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을 받아 치수에 성공한 사공 우禹다. 9년 홍수를 해결한 덕에 인심을 얻어 하夏나라를 연 우임금은 단군조선(고조선)의 은혜를 잊지 못해 죽을 때 회계산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현재 우(禹)임금의 대우릉(大禹陵)은 회계산에 있다. 대우릉 풍경구의 진입로 입구에 회계산이란 큰 표지석이 서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에는 及九年洪水(급구년홍수)하야 害及萬民故(해급만민고)로 檀君王儉(단군왕검)이 遣太子扶婁(견태자부루)하사 約與虞舜(역여우순)으로 招會于塗山(초회우도산)하실새, 舜(순)이 遣司空禹(견사공우)하야 受我五行治水之法(수아오행치수지법)하고 而功乃成也(이공내성야)라

 

9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 우나라 순임금舜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 회의를 소집하셨다. 순임금이 사공司空 우禹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之法을 받아 치수에 성공하였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오월춘추(吳越春秋)』와『태백일사(太白逸史)』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분명 중국에 대홍수가 발생했고, 붕괴 직전의 왕조를 도운 창수사자를 만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임금의 명을 받고 치수 방안을 찾아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리고도 방책을 얻지 못해 울부짖는 우禹 앞에 나타난 동방의 창수사자, 그의 도움 없이는 중원 왕조가 몰락할 위기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동방 천자국 단군조선(조선,고조선)의 도움을 받은 것을 꿈에서 받은 것으로 왜곡해 놓았다.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후대의 공자와 사마천을 비롯한 기록자들은 순임금이 동방 조선의 천자인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 태자의 도움을 받았음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이는 역사 기록자의 벗을 수 없는 멍에이자 원죄라 할 것이다.

 

 

 

 

 

 

 

 

 

 

 

 

 

 

 

 

 

 

 

 

 

 

둘째,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했지만 동방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을 폄하한 잘못된 기록도 남겼다

공자와 제자들의 기록인『논어』를 보면 우리 스승님인 공자의 말씀은 한마디로 ‘술이부작(述而不作) 신이호고(信而好古)’라고 했다.

 

공자는 “정리해서 기록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덧붙이고 만든 것이 아니며 옛것을 믿고 좋아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공자가 믿고 좋아한 그 과거의 것, 옛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요순의 도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요순의 도를 전해 준 단군조선의 도이다.

 

 

동방 천자국, 종주국의 천도(天道)를 배워 온 요순의 옛 가르침을 갈구한 것이다. 공자의 인仁 사상도, 동방 조선(단군조선,고조선)에 내려온 환국의 인仁사상, 경당(扃堂)의 오상지도(五常之道)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우리가『논어』11편,「선진」을 보면 공자가 문화의 종주인 동방 조선(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구절을 만날 수 있다.

子曰(자왈) 先進於禮樂(선진어예악)은 野人也(야인야)요, 後進於禮樂(후진어예악)은 君子也(군자야)라 하나니
如用之(여용지)면 則吾從先進(즉오종선진)하리라

공자가 말하였다. “예악문화의 선진은 야인이요, 예악문화의 후진은 군자라 하나니, 만약 쓴다면 나는 선진(종주국)의 예와 악을 따르리라.”(『논어』「선진」)

공자는 예악문화의 고향인 선진문화를 야인野人이라 칭하고, 후진 문화를 군자의 도라 칭했다. 그러면서도 ‘오종선진(吾從先進)’, 자신은 야인의 예악문화를 따르리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공자는 ‘순박한 문화를 높이고 싶다’, ‘먼저 나온 원형문화를 높인다. 나는 그 원형 예악을 따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뿌리인 은나라 문화, 그리고 그 이전의 우禹임금의 하夏나라와 요순堯舜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해 내지 못했다. 나아가 요순문화의 핵심인 상제, 제천문화를 전해 준 배달과 단군조선의 문화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한마디로 선진先進은 야인野人이 아니라, 공자가 찾으려 한 동방 원형문화의 종주였던 단군조선 문화였다. 공자는 순임금과 우임금이 대홍수로부터 백성들을 구할 치수법을 전해 준 동방 조선의 선진문화를 야인으로 폄하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 춘추필법으로 동방 조선(단군조선)의 국호와 원 역사를 전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자의 필법은 큰 문제를 낳는다.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 역사는 크게 휘둘리게 된다. 그런데 공자에서 비롯된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후세의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 주장한다. 정당한 역사 기록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민족의 문화를 폄하하며 자신들만 문명국가이며, 주변 국가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 오랑캐의 역사로 규정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공자의 춘추필법에 따라 중국 사서는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부풀리면서 중국에 수치스러운 일은 감추고〔위국휘치爲國諱恥,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어〔상내약외詳內略外〕왔다. 그 결과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것없는 역사로 전락되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별명이나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듯이 국가 간의 정식 국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단군조선의 말엽이었다. 그런데도 요순의 역사를 찾고, 단군조선의 영향권에 있었던 하·은·주를 찾은 공자가 동방 천자국(天子國)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역사의 준엄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공자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구야丘也 은인야殷人也라’(『예기』 단궁檀弓) 공자 이름이 구丘 아닌가. 자기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은나라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다. 그러면서도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우리 조상들도 그분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나쁘게 규정짓고 싶지 않다. 그러나 도성덕립(道成德立)이 되면 그때는 사실대로 평가가 될 것이다.


공자는 지금의 산동성 곡부 사람인데, 원래 단군조선의 삼한(후後에 삼조선), 진한(진조선), 번한(번조선), 마한(마조선) 가운데 번한(번조선) 사람이다.

 

 

『가례家禮』라는 공자의 일기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구丘는 은인야殷人也라”라는 구절이 있다. ‘구는 은나라 사람’이란 뜻이다. 공자 이름이 구이고, 은나라는 바로 우리나라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면서 우리나라를 배척해 버렸다.

한마디로 공자는 천자문화의 고향, 가르침을 편 부루 태자가 9년 홍수 때 전한 경당扃堂문화의 원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상·주 3왕조의 문화 고향인 단군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 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노년에 뗏목을 타고 동방 바다 건너 ‘군자가 살았던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며, 동방 조선(단군조선)의 선진문화를 동경했던 것이다.

子欲居九夷(자욕거구이) 或曰(혹왈) 陋(루) 如之何(여지하) 子曰(자왈) 君子居之(군자거지) 何陋之有(하루지유)
공자께서 여러 동쪽 오랑캐의 나라에 살고 싶어 하시자 어떤 사람이 “거기는 누추할 터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살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논어』 「자한」)


공자는 역사의 큰 획을 남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인이자 철인이다. 그러나 공자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실제로『춘추』를 지은 후 공언한 것처럼 ‘『춘추』때문에 알아주거나 비난받을 것’이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이 기록한『논어』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또 사마천의『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진나라에 있을 때 멀리서 날아와 궁정에 떨어져 죽은 송골매에 막힌 화살이 부여국 동북쪽에 있는 숙신의 화살임을 단박에 알 정도로 해박했다. 그러나 태산이 있는 산동반도에 퍼진 동방의 원형문화 역사의 맥脈,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 태자가 전한 경당과 오상지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누락시켰다. 결국 공자 때문에 천자국 동방조선(단군조선,고조선) 역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공자 시대 이후 2,50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유교는 동방문화의 중심이 되어 한 시대를 굽이쳤다. 특히 조선 시대에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소중화를 자청했다. 단군보다는 이 땅에 오지도 않은 기자箕子를 칭송하며, 평양에 무덤까지 만들고 모셨다. 중국의 속국이 거의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근원에 사마천과 공자가 있다.

 

 

 

 

 

 

 

 

 

 

 

 

 

 

공자와 사마천의 의도적인 누락으로 동방 원형문화는 감춰졌고, 유교가 통치 이념이 된 한나라 때에 이르러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은 동이, 오랑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예기禮記』「왕제王制」편을 보면 중국 지나족은 자신을 제외한 주변 국가를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라 칭하며, 본격적으로 오랑캐로 매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중화사관을 충실히 따라서 작금에도 동이(東夷)를 ‘동방의 야만인(the Eastern Barbarians)’이라 번역한 역사서가 미국 학계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는 세계인들은 동방의 한민족을 중국보다 열등한 민족, 천자 나라 중국으로부터 문물을 수입한 제후 국가로 착각하게 된다. 잘못된 역사 왜곡의 실핏줄이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온 세상으로 퍼지고 있다.

 

동이東夷는 ‘동’과 ‘이’가 합쳐진 말로 ‘동방의 뿌리 되는 민족, 동방의 어진 민족’을 뜻한다. 공자도 『논어』 「자한 편」에서 ‘어진 군자가 사는 나라’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동이東夷는 동방의 오랑캐로 얕잡아 불릴 호칭이 아니었다. 춘추사관으로 중앙의 중국이 바라본 동방의 오랑캐 문화가 아니었다. 『설문해자』를 보면 동이는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종대종궁從大從弓’이라 했다. 즉, 동방의 사람들은 큰 대大 자, 활 궁弓 자로 상징될 정도로 큰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또 큰 대인, 깊고 단단한 뿌리, 근본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알고 보면 구한말까지 우리 조상들이 중국을 부른 ‘지나支那’라는 호칭 그대로 그들의 뿌리인 황제헌원을 비롯하여 오제五帝로 꼽히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과 그 뒤를 이은 하상주 3왕조의 개국조인 하나라 우, 상나라 탕,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까지 모두 동이족 혈통이었다. 황제헌원은 환웅천황의 가르침을 받은 웅족의 후예였다. 이렇듯 지나족은 동방배달의 가지가 되는 혈통이었다. 한 형제였던 것이다.

舜生於諸風(순생어제풍) 移於負荷(이어부하) 卒於鳴條(졸어명조) 諸風負荷鳴條(제풍부하명조)

東夷之地(동이지지) 舜東夷之人也(순동이지인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돌아가셨는데, 제풍, 부하, 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 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

 

특히 상(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제도와 풍습이 당시 그들의 상국上國이던 단군조선의 것과 아주 유사했다. 따라서 공자가 추구한 원형 예법, 은나라의 뿌리 문화는 결국 동이족의 예법이었다. 그 실례로 공자가 칭송한 소련과 대련의 3년 상을 보면 알 수 있다.

 
孔子曰(공자왈) 少連大連善居喪(소련대련선거상) 三日不怠(삼일불태) 三月不解(삼월불해)
期悲哀(기비애) 三年憂(삼년우) 東夷之子也(동이지자야)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 (『예기禮記』 「잡기하雜記下)

 

동방문화의 심장이자 천자문화의 출처는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 문화권이었다. 또 천자사상의 상징은 용봉, 중국인들이 높이 칭송하는 중화제일용과 중화제일봉이 모두 중국 문화의 담장 밖 동이족의 중심지였던 홍산유적에서 나왔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도 공자가 말한 예악의 고향은 동이東夷인 것이 자명하다.


지나支那의 선조들은 우리나라를 ‘태평지인太平之人’(중국 고대 백과사전 『이아』)이 사는 나라, 불사지국不死之國, 동방의 큰 활 쏘는 사람의 나라, 신선이 사는 나라,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仁方〕등으로 불렀다. 또 후한 시대에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서 동방 천자제도의 근원이 동이족에서 왔음을 전하였다.

 
天子(천자) 夷狄之所稱(이적지소칭) 父天母地故(부천모지고) 稱天子(칭천자)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 (채옹蔡邕 『독단獨斷』)

 

한마디로 동방에는 하늘과 땅을 부모로 모신 천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봐도 동방 조선 문화는 매우 뛰어났다는 것이다. 『용봉문화원류』의 저자, 왕대유王大有는 배달 동이족의 제왕인 태호 복희와 염제 신농이 용봉龍鳳문화의 뿌리라 말한다. 한마디로 중국이 자랑하는 용봉문화의 원형은 동이족, 동방 조선의 문화라는 것이다. 용봉은 천지와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신 상제님의 영물이자, 동방 제왕의 상징이었다.


공자의 아버지는 춘추시대 송나라 숙량흘叔梁紇이다. 숙량흘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예다. 『논어』에서 미자는 기자箕子, 비간比干과 더불어 은나라의 세 현인으로 칭송받았다고 전한다.

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작모여몽좌전양주지간) 予始殷人也(여시은인야)

어젯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내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는 자신이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자신의 뿌리를 자각하게 된다. 또 다른 기록인 『예기禮記』 「단궁檀弓」에서도 ‘구야은인야丘也殷人也’라고 했다. 즉 공자의 혈통은 은인殷人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죽기 전에 자신의 뿌리를 찾은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새로운 학설을 지은 것이 아니라 ‘옛 것(배달과 단군조선의 동이족 예악문화)을 믿고 좋아해서 정리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자는 신교(神敎)문화의 풍토 속에서 동방 배달 조선의 동이문화를 수집, 정리하여 유교의 사상으로 정립한 인물이다.

 

 

 

 

 

 

 

 

 

 

 

 

 

 

 

 

 

 

 

 

 

 

 

 

 

 


『예기禮記』를 보면 ‘공자는 은殷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공자는 본래 은나라의 제후국이던 송나라의 왕 미자의 후손으로 미자의 조상은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이다. 또 공자의 손자 자사는 ‘대동大同 세계를 궁극의 이상으로 삼은 유교 도덕의 원 시조’를 ‘요, 순과 문왕, 무왕’이라고 하였다. 요堯는 동이족 유웅씨 후손인 황제헌원의 5세 손(『사기史記』)이고, 순임금 또한 동이 사람(『맹자孟子』)이다.  
 

유교의 주요 경전인 『주역』, 『시경』, 『서경』 등을 보면 모두 천天, 천명天命 사상의 근원인 ‘상제님의 가르침’을 노래하고 있다. 한 예로 『시경』에 ‘상제님께서 네게 임하시니, 마음을 둘로 하지 말라(上帝臨汝, 無貳爾心).”는 가르침이 있다.  
 
공자가 이상 사회의 모델로 삼은 3천 년 전, 주周나라의 왕들은 하늘을 인격적인 상제천上帝天으로 인식하였다. 공자또한 『주역』 「설괘전」에서 “상제님이 동방에서 출세하신다(帝出乎震).”라고 하여 상제님을 인간에게 천명(天命)을 내리고 인간이 덕을 잃으면 천명天命을 거두고 재앙을 내리는 존재로 여겼다. 임진왜란 때 유학자인 서애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전했다.  
 
● 깊은 밤 어둠 속에 상제님께서 내게 임하시네. 방안 깊숙이 홀로 있는 곳에도 천지신명이 살피고 계신다. …삼가하고 두려워하여 ‘상제님의 법칙’대로 따를지어다. 
 
또한 유교 경전 『서경』에는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에 요임금과 순임금이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에서는 하늘을 인격적인 상제천보다는 자연천自然天과 도덕천道德天의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상제님을 잃어버리면서 유교는 송대宋代의 성리학으로 흘렀으며, 삼신상제님을 받드는 제천문화를 상실하고 고답적인 이기론理氣論으로 빠져 버렸다. 이후 유교에서는 신교인 상제 신앙의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燑傳] 「신지비사(神誌祕詞)」는 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로 달문단군의 재위 35년 임자(壬子,BCE 2049)년에 여러 제후국 왕들을 상춘(常春, 지금의 만주 장춘長春 구월산九月山)에 모아 구월산에서 천제를 올릴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짓게 한 제천문이다. 

 

 

 

 

 


「신지비사(神誌祕詞)」를 보면 단군조선(고조선)이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식민사학계는 삼한관경제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처음 만들어낸 이론으로 왜곡하고 있지만,『고려사』를 보면 고려 고종 때(13세기) 김위제가 [신지비사]를 인용하며 단군조선의 삼경(세 수도)을 언급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지비사

 


<삼국유사>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서문이 인용되어 있다. 

 

 

 

 

 

 



<삼국유사>나 <고려사>에 <신지비사>가 인용된 것을 보면, 적어도 고려때까지는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신지비사(神誌秘詞)」소각 사건이다.

 

 

 

 

 

 

 

 

道典 4:124) 죽은 아이를 살려 주심


1 구릿골에서 술장사하는 김사명(金士明)의 아들 성옥(成玉)이 어느 날 급증에 걸려서 나흘 만에 죽거늘
2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백방으로 주선하여도 회생할 여망(餘望)이 없는지라
3 할 수 없이 그 어머니가 숨이 끊어진 아이를 안고 구릿골 약방으로 찾아오니

 

4 상제님께서 미리 아시고 문득 말씀하시기를 “약방이 안 되려니 송장을 안고 오는 자가 있도다.” 하시니라.
5 성옥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상제님 앞에 눕혀 놓고 애처로이 울면서 살려 주시기를 애걸하니
6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법인데 나라고 어찌 살리겠는가?” 하시거늘

 

7 아이의 어머니가 더욱 슬피 울부짖으며 “이 아이는 외아들입니다. 아이가 살아날 수 없다면 저도 아들을 따라 죽어 버리렵니다.
8 가련한 이 모자의 형편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고 애원하니 그 애절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을 듯하더라.

 

 


미수야, 우암을 잡아 오너라


9 상제님께서 차마 보지 못하시고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혀 배를 만져 내리시며
10 허공을 향하여 큰 소리로 “미수(眉叟)야, 우암(尤庵)을 잡아 오너라.” 하고 외치신 뒤에
11 모과를 씹어 그 즙과 함께 침을 흘려서 죽은 아이의 입에 넣으시니 아이가 문득 항문으로 추깃물을 쏟거늘


12 상제님께서 “나가서 회초리 하나 끊어 오라.” 하시어 회초리로 아이의 종아리를 탁탁 때리시매 죽었던 아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홀연히 살아나더라.
13 이에 아이의 어머니가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 술 취한 듯이 말하기를
14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이시여! 죽은 자식을 살려 주시니 이 큰 은혜 호천망극(昊天罔極)하옵니다.” 하니라.


15 상제님께서 아이에게 미음을 쑤어 먹이게 하신 후 그 어머니에게 이르시기를 “요 모퉁이에 가면 걸인이 하나 죽어 있으리니 옷 입혀서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주라.” 하시고
16 또 말씀하시기를 “죽은 아이가 다행히 살아났으니 잘 가르쳐서 어진 사람을 만들라.” 하시며 아이를 걸려서 돌아가게 하시니라.

 

 

미수(眉叟)와 우암(尤庵). 허목(許穆, 1595~ 1682)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주자를 통해서만 유학이 이해되던 시대에, 우암은 주자를 절대적으로 존숭한 반면, 미수는 성인에 뜻을 두고 선진유학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공부했다. 둘의 2차에 걸친 예송논쟁으로 인해, 결국 우암의 서인 정권은 축출되고 미수의 남인 정권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우암이 가식적인 북벌론을 주장하는 등 이상주의적인 의리론을 폈다면, 미수는 북벌론을 반대하고 농민부흥 정책을 도모하는 등의 현실적인 의리론을 펴 나갔다.

 

 

 

 

 

 

 

 

 

 

道典 5:136)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에 꽂으심


1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꾼이 콩밭(太田)에서 낮잠을 자며 때를 넘보고 있느니라.” 하시고
2 “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太田)에 꽂았느니라.” 하시니라.

 


작은 서울이 큰 서울 되리니
3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새 세상이 오면 서울이 바뀌게 되느니라. 큰 서울이 작은 서울 되고, 작은 서울이 큰 서울이 되리니 서울은 서운해지느니라.
4 허미수(許眉叟)는 하루 만에 강선루(降仙樓)를 지었다 하나 나는 하루 만에 36만 칸 옥경대(玉京臺)를 짓느니라.
5 금강산 구룡폭포의 금(金)이 서해바다에 와 묻혔나니 장차 36만 칸 옥경대의 상량이 되리라.” 하시니라.

 

허미수(許眉叟)는 하루 만에 강선루(降仙樓)를 지었다 하나, 강선루: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 비류강 기슭에 있던 고려시대의 누각. 성천 객사의 부속 건물이었다.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혔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道典 5:184) 금강산 부처 기운을 거두심


1 상제님께서 순창 농바우에 계실 때 조선 국운 심판 공사를 마치시고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2 “허미수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의 일만 이천 고물에는 녹(祿)줄이 붙어 있고
3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는 겁살(劫煞)이 끼어 있나니 이제 그 겁살을 벗겨야 하리라.” 하시고

 


4 “너는 광찬과 원일을 데리고 구릿골로 돌아가 열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청수 한 동이씩을 길어서 스물네 그릇에 나누어 놓고
5 밤에는 칠성경을 스물한 번씩 읽으며 백지를 사방 한 치씩 오려 그 종이에 한 사람이 모실 시(侍) 자 사백 자씩 써서 네 벽에 돌려 붙이고 나를 기다리라.” 하시고
6 엄히 경계하시기를 “붙일 때는 종이가 포개져서도 안 되고 요만치 틈이 있어도 안 되나니 끝이 딱 맞아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7 원일이 형렬로부터 이 말씀을 전해 듣고 싫은 기색을 띠거늘 형렬이 상제님께 아뢰니 상제님께서 “이도삼(李道三)을 데려가 행하라.” 하시매
8 형렬이 도삼, 광찬과 함께 구릿골로 돌아가 명하신 대로 행하여 열흘에 마치니 글자의 총수 일만 이천 자요, 종이도 틈 하나 없이 정확하게 붙었더라.

 

모실 시(侍) 자는 절(寺) 사람(人), 곧 부처를 말한다. 이 공사는 도운과 세운의 도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대표적인 공사로, 남조선 도수가 전개되면서 금강산 부처 기운이 걷히고, 그 일만 이천 봉의 정기에 응하여 후천 새 시대 일만 이천 도통군자가 나오는 개벽공사이다.

 

이도삼(李道三, 1865∼1943): 본관 전주. 비교적 학식이 있는 성도로 주로 천문과 관련된 공사에 참여하였다. 상제님께서 자신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는 등 강렬한 체험을 함으로써 상제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였다.

 

 

 

 

道典 5:185) “사기(邪氣)는 김제(金堤)로 옮겨야 하리라


1 상제님께서 구릿골에 이르시어 갑칠에게 염소 한 마리를 사 오라 하시거늘
2 갑칠이 염소를 사서 지고 오매 말씀하시기를 “너 소 한 마리 메고 오느라고 욕봤다.” 하시고
3 염소를 잡아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벽에 돌려 붙인 일만 이천 모실 시 자 위에 일일이 점을 치신 뒤에

 


4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이 형상이 무엇과 같으냐?” 하시니 갑칠이 아뢰기를 “아라사 병정 같습니다.” 하거늘
5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라사 병사가 내 병사니라.” 하시고 “모든 일을 잘 알아서 하라.” 하시니라.


6 상제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사기(邪氣)는 김제(金堤)로 옮겨야 하리라.” 하시더니 마침 김제 수각(水閣)에 사는 임상옥(林相玉)이 이르거늘
7 청수 담던 사기그릇을 개장국에 씻어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인부(人夫)를 많이 부릴 때 쓰라.” 하시고
8 “다 쓴 뒤에는 김제장에 가서 매각하라.” 하시니라.

 

 “이 형상이 무엇과 같으냐?” 하시니 갑칠이 아뢰기를 “아라사 병정 같습니다.”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라사 병사가 내 병사니라.”: 아라사, 러시아에 의한 북한의 공산화, 금강산 8만 9암자에 도통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금강산의 겁살, 살기(煞氣)를 거둬내는 공사(公事)로 종교는 껍데기가 되었다. 

 

앞으로 2,3년 과정에서 금강산 12,000봉의 정기를 받은 지구촌 인류를 구원하는 12,000명의 도통군자가 나온다. 

 

 

 


금강산의 정경을 읊어 주심


9 하루는 상제님께서 옛시 한 수를 외워 주시니 이러하니라.
10 步拾金剛景하니 靑山皆骨餘라
보습금강경 청산개골여
其後騎驢客이 無興但躊躇라
기후기려객 무흥단주저
걸어서 금강산의 정경을 둘러보니
푸른 산이 모두 뼈만 남아 있구나.
저 뒤의 나귀 탄 나그네
흥이 없어 주저만 하는구나.

 

 

 

 

 

道典 5:7)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리라


1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현하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애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뒤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리라.” 하시고
2 종이에 태극 형상의 선을 그리시며 “이것이 삼팔선이니라.” 하시니라.
3 또 말씀하시기를 “씨름판대는 조선의 삼팔선에 두고 세계 상씨름판을 붙이리라.


4 만국재판소를 조선에 두노니 씨름판에 소가 나가면 판을 걷게 되리라.
5 세속에 가구(假九)라는 노름판이 있어서 열다섯 수(數)가 차면 판몰이를 하는 것이 곧 후천에 이루어질 비밀을 세간에 누설(漏泄)한 것이니
6 내가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이것을 취하여 쓰노라.” 하시니라.

 

애기판: 조선을 두고 일러전쟁을 붙여(영국·프랑스가 훈수)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신 공사이다. 이 공사에 의해 조화정부의 제1차 발현인 국제연맹이 1920년에 창설되었다.


총각판: 일본과 중국이 주역이 되고, 독일과 소련이 훈수한 중일전쟁(1937)으로 총각판의 서막이 올랐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고 국제연합(1945)이 발족되었다.


상씨름: 남조선 도수에 의해 전개되는 남북한 대결 구도를 말한다. 남북한의 상씨름은 인류사의 상극의 모든 문제를 가름하는 최후·최상의 대결구도라는 의미와 역사성을 갖는다. 인류사의 총체적인 문제가 남조선 도수에 얽혀 있다.

 

소가 나가면: 1998년 6월 16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1,501마리의 소가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 세계 상씨름의 무대인 삼팔선에 소가 나간 것은 상씨름판을 걷게 될 최후의 대결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개벽의 신호탄이다.

 

열다섯 수가 차면: 우주1년을 지속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천지조화의 본원은 중앙 ‘5·10土’이다. 음양 ‘5·10土’의 5수와 10수가 변화를 일으킬 가장 큰 수는 50(5와 10의 곱)이다. 즉, 열다섯 수가 찬다는 것은 그 도수가 일으킬 수 있는 변화의 가장 큰 수인 50이 되면 판몰이 곧, 도세를 만회한다는 뜻이다.

 

 

 

 

道典 5:406) 상씨름 종결 공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란지하(大亂之下)에 대병(大病)이 오느니라. 아동방(我東方) 삼일 전쟁은 있어도 동적강(銅赤江)은 못 넘으리라.

삼일 전쟁은 있어도 동적강(銅赤江)은, 동적강: 한강의 여러 이름 중 하나. 동작동 국립묘지 앞의 한강을 말한다.


서울은 사문방(死門方)이요, 충청도는 생문방(生門方)이요, 전라도는 둔문방(遁門方)이니 태전으로 내려서야 살리라. 서울은 불바다요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무명악질이 돌면 미군은 가지 말라고 해도 돌아가느니라... 신이 떠난 미국 땅은 물방죽이 되리라.” 하시고, “일본은 불로 치리니 종자도 못 찾는다.” 하시니라.

 

 

道典 5:415) 상제님께서 9년 천지공사(1901~1909)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기를 “상씨름으로 종어간(終於艮)이니라. 전쟁으로 세상 끝을 맺나니 개벽시대에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난의 시작은 삼팔선에 있으나 큰 전쟁은 중국에서 일어나리니 중국은 세계의 오고 가는 발길에 채여 녹으리라.” 하시고, “장차 병란(兵亂)과 병란(病亂)이 동시에 터지느니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바로 병이 온다. 전쟁은 병이라야 막아 내느니라. 

 

난의 시작은 삼팔선에 있으나 큰 전쟁은 중국에서 일어나리니: 미중 3차 세계대전

 

 

道典 11:264) “앞으로 세상이 병란(病亂)으로 한번 뒤집어지느니라.” 하시고, “장차 이름 모를 온갖 병이 다 들어오는데, 병겁(病劫)이 돌기 전에 단독(丹毒)과 시두(時痘)가 먼저 들어오느니라. 시두의 때를 당하면 태을주를 읽어야 살 수 있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병겁이 들어오면 시체를 쇠스랑으로 찍어내게 되리니, 그 때는 송장을 밟고 다니며 태을주를 읽어 죽은 자를 살리느니라.” 하시고, “앞으로 만병이 들어오면 조선의 세상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2:139) 다가오는 가을 대개벽의 총체적 상황


장차 서양은 큰 방죽이 되리라. 일본은 불로 치고 서양은 물로 치리라. 세상을 불로 칠 때는 산도 붉어지고 들도 붉어져 자식이 지중하지만 손목 잡아 끌어낼 겨를이 없으리라. 앞으로 세계전쟁이 일어난다. 그 때에는 인력으로 말리지 못하고 오직 병이라야 말리느니라. 동서양의 전쟁은 병으로 판을 고르리라. 난은 병란(病亂)이 크니라.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오려면 병으로 병을 씻어 내야 한다. 병겁이라야 천하통일을 하느니라.

 

일본은 불로 치고: 일본은 80여 개의 활화산이 열도의 척추 부위에 늘어서 있다. 동경대 다찌바나 교수는 후지산이 폭발하면, 막대한 용암과 지하수의 분출로 인근 화산의 마그마를 식히는 지하수가 빠져나가는 라디에이터 효과로 인해 연쇄적 화산 폭발이 일어나고 일본열도가 침몰할 것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세계의 많은 영능력자들이 일본열도의 침몰을 경고한 바 있다.

 

 

 

 

道典 5:291) 나의 운수는 더러운 병 속에


7월에 제비창골 삼밭에서 공사를 보신 뒤에 성도들을 거느리고 서전재 꼭대기 십자로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 손사풍(巽巳風)을 불리시며 장질부사 열병을 잠깐 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만하면 사람을 고쳐 쓸 만하도다.” 하시고, 손사풍을 더 강하게 불리신 후에 “손사풍은 봄에 부는 것이나 나는 동지섣달에도 손사풍을 일으켜 병을 내놓느니라. 병겁이 처음에는 약하다가 나중에는 강하게 몰아쳐서 살아남기가 어려우리라. 나의 운수는 더러운 병(病) 속에 들어 있노라.” 하시니라.

 


병목이 너희들 운수목


이에 갑칠이 여쭈기를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치병(治病)을 하시면서 병 속에 운수가 있다 하심은 무슨 연고입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속담에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을 못 들었느냐. 병목이 없으면 너희들에게 운수가 돌아올 수가 없느니라. 병목이 너희들 운수목이니 장차 병으로 사람을 솎는다.” 하시고,

 

“내가 이곳에 무명악질(無名惡疾)을 가진 괴질신장(怪疾神將)들을 주둔시켰나니, 신장(神將)들이 움직이면 전 세계에 병이 일어나리라. 이 뒤에 이름 모를 괴질이 침입할 때는 주검이 논 물꼬에 새비떼 밀리듯 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세상이 한바탕 크게 시끄러워지는데 병겁이 돌 때 서신사명 깃대 흔들고 들어가면 세계가 너희를 안다. 그 때 사람들이 ‘아, 저 도인들이 진짜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하시니라.

 

 

 

道典 7:38) 한 성도가 “세상에 백조일손(百祖一孫)이라는 말이 있고, 또 병란(兵亂)도 아니고 기근(饑饉)도 아닌데 시체가 길에 쌓인다는 말이 있사오니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선천의 모든 악업(惡業)과 신명들의 원한과 보복이 천하의 병을 빚어내어 괴질이 되느니라. 선천(先天) 봄과 여름에는 큰 병이 없다가 후천(後天) 가을에 접어드는 환절기(換節期)가 되면 봄여름의 죄업에 대한 인과응보가 큰 병세(病勢)를 불러일으키느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천지대운이 이제서야 큰 가을의 때를 맞이하였느니라. 천지의 만물 농사가 가을 운수를 맞이하여, 선천의 모든 악업이 추운(秋運) 아래에서 큰 병을 일으키고 천하의 큰 난리를 빚어내는 것이니, 큰 난리가 있은 뒤에 큰 병이 일어나서 전 세계를 휩쓸게 되면 피할 방도가 없고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병겁이 휩쓸면 자리를 말아 치우는 줄초상을 치른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병겁으로 사람을 솎아야 사(私)가 없다.” 하시니라.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신지비사(神誌秘詞)」소각 사건이다.


命史官金尙直(명사관김상직) 取忠州史庫書冊以進(취충주사고서책이진) ​且命曰(차명왈) 神秘集(신비집) 毋得披閱(무득피열) 而別封以進(이별봉이진)

 

1412년(명 영락永樂 10년)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신비집神秘集」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上覽其集曰(상람기집왈) 此書所載(차서소재) 皆怪誕不經之說(개괴탄불경지설) ​命代言柳思訥焚之(명대언유사눌분지) 其餘下春秋館藏之(기여하춘추관장지)


임금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이다.” 하고,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이를 불사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간직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8월 7일(기미) 둘째 기사)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다섯째 아들로 1400년부터 18년간 재위했지만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의 뜻을 저버려 정통성이 약했던 이방원은「신지비사(神誌秘詞)」를 ‘차서소재此書所載 개괴탄불경지설皆怪誕不經之說’이라 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해 자신의 대권 장악을 용인해 준 중국에 불경한 내용이자, 기이하게 현혹시키는 글이라는 것이다. 

 

 

동방 문명의 장자국인 단군조선은 독특한 문화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로 통치했다. 단군조선은 한민족 원형정신인 삼신관에 따라서 삼한관경제로 통치했다. 만주의 중앙은 진한의 대단군이 통치하고, 요서와 북경 주변의 번한과 한반도의 마한은 부단군이 통치한 것이다. 이것이 고유한 한민족의 국가 통치제도였다.

 


「신지비사」는 단군조선의 삼경三京제도가 균형을 이룰 때 임금의 덕에 힘입어 영원히 단군조선이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이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삼경제도가 굳건했던 단군조선은 70여개 나라의 조공을 받은 대제국이었다.

윤내현 교수는『고조선연구』에서 ‘단군조선은 강역이 넓었기에 신하의 여러 나라들을 거수국渠帥國(제후국)으로 삼아 다스렸다’고 했고, 이덕일 교수는『이덕일의 한국통사』에서 ‘고조선(단군조선)은 제후국과 같은 거수국을 거느린 황제국가였다’라고 하였다.

 

 

 

 

 

 

 

 

 

 

 

 

 

 

 

 

 

 

 

 

 

 

 

 

 

 

 

 

 

 

 

불교문화의 뿌리 대한민국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이미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사실도 여러 곳에서 밝혀졌다.

 

[화엄경]에서 “해중(海中)에 금강산이 있는데 옛적부터 모든 보살이 그 산중에 살고 있다. 현재도 법기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 상주하며 불법을 강설하고 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종주국이 바다 건너 금강산에 있는 나라’ 라는 말이다.

 

 

[삼국유사] [아도기라] 등 여러 서적에 전불(前佛)시대 절터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석가모니가 탄생하기 3000여 년 전에 이미 한국에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말이다.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인간과 신명이 소통하였고, 수행을 통해 인간을 완성시키는 가르침을 역사상 처음 열었던 것이다. 제사는 유교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행해왔던 신교 문화의 예식인 것이다.

 

 

한민족의 시원 역사의 핵심은 제천문화다. 하느님을 받드는 문화다. 이문화의 일반적 정의는 하늘 땅, 천지부모와 인간이 하나되는 의식이다. 제천문화는 동서양의 종교와 하나님 문화의 원형, 원조가 한민족의 제천행사다.

 

제천문화의 유적지가 마리산에 있다. 고대 한민족은 1년에 두 번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3월 16일 대영절은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린 민족 대축제의 날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 잃어 버렸다. 문화의 근원이 말살되었다.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고대(古代)에 태산(泰山)과 양보산(梁父山)에서 하늘에 제사지낸 왕은 72명이었다. 제왕이 창업을 하고 상제님께 신고식을 올리는 것이 인생 일대에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했다. 소위 봉선제(封禪祭)이다.

 

 

배달국의 건국일인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서 천제를 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개천절로 왜곡이 되었다. 해마다 대영절이 되면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이것이 왜곡되고 뿌리 문화가 단절되어 전혀 모르는 것이다.

 

 

 

 

 

 

 

도교문화의 뿌리 대한민국

 

 

일반적으로 중국 도교의 시조를 황제헌원과 노자[黃老]라 한다. 중국 한漢족의 시조인 4,700년 전 황제헌원은 신농씨의 아버지인 소전少典에서 갈라져 나온 유웅씨(웅족) 계열의 동방족이다.[삼한관경본기]

 

 

 

 

번한(番韓)의 역대 부단군 이름과 통치 기간이 기록되어 있는 [번한세가番韓世家] 하편을 보면 노자에 관한 놀랄 만한 내용이 한 구절 보인다.

 

■ (번한의 60대 왕인) 도을(道乙)이 즉위하였다. 계미癸未(BCE 518)년에 노나라 사람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이고 이름이 건乾인데, 선조는 풍이족 사람(風人, 태호복희씨와 같은 풍이족)이다. (道乙立. 癸未, 魯人孔丘適周, 問禮於老子李耳. 耳父姓韓, 名乾, 其先風人)

 

 

 

 

 

 

 

 

 

 

 

노자는 단군조선 말기의 인물로 본래 성은 한韓씨이고, 동이(東夷) 구족(九族) 중 풍이족(風夷族)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자의 사상적 근원은 배달의 동방사상(신교神敎 삼신문화)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노자는 왜 자신의 성과 이름을 이이李耳로 바꾸었을까?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이은 자하선인紫霞仙人은 [신교총화(神敎叢話)]에서, 노자는 비록 서쪽 땅에 살고 있지만 자신은 본래 동방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후세에 남기려고 성을 '동방[木]의 아들[子]' 이라는 뜻으로 이李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황제 헌원과 노자는 배달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동방족 출신이며 동방의 신교神敎를 서방에 전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와 춘추시대 중국 고전인 [관자管子]에는 황제헌원이 배달국에서 선도仙道를 전수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 때 서적인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서는 "황제가 홀로 동북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아래에서 도를 닦아 날이 오랜 뒤에 성공했다” 라고 하였다.

 

고대부터 신선 사상의 중심지로 숭앙되었던 삼신산三神山은 바로 동방의 백두산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인들조차 신교神敎 삼신 사상에 따라 이름 붙여진 삼신산(三神山,삼신상제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신선 사상이나 신선의 성지로 인식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보면 제齊의 위왕威王·선왕宣王과 연燕의 소왕昭王을 비롯하여 진시황, 한 무제 등이 모두 장생불사를 갈망하여 동방[海東]에 사람을 보내 삼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신선 사상이 만주 ·한반도와 근접한 연燕·제齊나라 지역(하북 · 산동성)에서 비롯되고 널리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시선을 끈다. 이들 지역은 배달 · 조선에 속한 강역이고, 중국 내에서도 신교의 삼신 사상이 가장 먼저 보급되고 뿌리 내린 곳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도교문화는 동방 한민족 신교神敎의 삼신상제) 사상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으며, 신교神敎가 점점 쇠퇴하면서 다른 3대 종교와 더불어 역수입된 것이라 해도 결코 빈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4대 종교를 탄생시킨 뿌리가 바로 인류 문화의 시원인 신교神敎이며, 이 4대 종교는 모두 환국과 환국의 정통 장자족인 한민족의 신교에서 흘러 갔다가 다시 한민족의 현 근거지인 이땅으로 흘러들어 왔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1만 년 전부터 꽃핀 동방 문화는 5천여 년 전에 서방으로 전파되었다. 송호수 교수의 다음 지적과 같이, 지구를 두루두루 돌고 돌아 제 뿌리를 향해 찾아든 모습은 다양하다.

 

 

■ 불교는 삭발 · 장삼에 불경을 끼고 되돌아 왔고, 유교는 유건儒巾·도포道袍에 사서삼경을 싸서 되돌아 왔다. 도교는 오두미五斗米를 갖고 무위자연하면서 구름을 타고 들어 왔고, 기독교는 노란 곱슬머리와 파란 눈에 붉은 신·구약을 끼고 들어왔다.

 

 

이러한 모습을 과연 과거급제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위풍威風으로 보아 주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이 가문家門[조국]에 대한 공과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세대는 최인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다음 유훈遺訓을 깊이깊이 새겨 보아야 하리라.

 

 

■ 오늘의 한국은 새 역사를 창조할 때이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면 새 역사를 알아야 한다. 한국의 재발견은 본래의 한국을 발견하는 일이다. ([한국의 재발견])

 

 

 

국수주의?? 다 니들꺼냐?? 다 해먹어라!! 알고보면 대한민국이 유,불,선,기독 문화의 뿌리다. 사실이 그런데 어쩌라고??

 

 

 

 

 

 

 

 

 

 

기독교 문화의 뿌리 대한민국

 

 

 

 

 

 

 

 

 


수메르 문명의 연구학자인 S.N 크래머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에서 서양의 문명은 뿌리는 수메르라고 한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동방에서 왔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정덕본」의 "고조선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고려 초기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三聖記) 하下"에는 12환국桓國이 있었는데, 그 중 바이칼호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수밀이(須密爾, Sumer)와 우루(虞婁, Ur)국이라고 한다. 당시 수메르 민족이 사용하던 설형문자는 태호복희씨가 사용했던 8괘와 흡사하며, 언어도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이다.

 

 

 

 

 

 

 

 

 

 

 

 

서양 유대 문화의 뿌리 아브라함의 고향이 바로 수메르 문명이 자리잡고 있던 갈대아 우르(Ur)이다. 그가 아버지 데라를 따라 BCE 1950년경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의 줄기를 타고 북쪽으로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주하는 과정에서, '강을 넘어온 사람'의 뜻으로 헤브루인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또 유대족은 몽골인과 근접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서양의 문명의 모체가 바로 환국桓國문명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수메르의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산' 혹은 '하늘 언덕'이라 불린 지구랏(Ziggurat)이라는 제천단 유적들은, 신교(神敎)의 삼신신앙과 제천문화가 환국桓國의 후예인 수메르인들의 삶과 신앙의식 속에서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수메르의 지구랏이다. 이처럼 서양의 종교도 그 원뿌리를 신교(神敎)에 두고 있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의 모세 5경,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쓰여진 제사문화와 性문화, 그리고 율법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법조문(法條文)의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함무라비法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함무라비法의 기원은 바로 인류최초의 법전인 수메르법전이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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