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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슬픔이라는 흰 종이 / 이기철

작성자문근영|작성시간26.06.23|조회수10 목록 댓글 0

 

 

 

슬픔이라는 흰 종이 / 이기철

 

맑은 것은 슬프다

슬픔은 숨겨 둔 눈부심 같아서

찬란을 색칠하려 해도 색깔이 묻지 않는다

이슬은 깨어질지언정 더러워지지 않는다

누구의 발자국도 찍힌 적 없는

깨끗하고 흰 종이인 슬픔

내 오래 사숙해 온 스승이여

너에 엎드려 구걸한 내 미분(微分)의 시간은 아직 어리다

동풍으로 다가와 삭풍이 되는

파리하고 차가운 손

때로는 상한 사과 냄새를 풍기고

때로는 줄 끊어진 악기 소리를 내는 너는

이름할 수 없는 애인

어떤 글자로도 쓸 수 없는

무문(無文)의 흰 글씨

내 오늘 다시 너를 맞아 이 글을 베끼노니

애걸 비탄 비애보다 깨끗한 몸이여

슬픔이라는 창백한 종이여

너 아니면 내 무엇으로 삶의 깊이는 재느냐

 

<시집,> [ 나무, 나의 모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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