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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전장

작성자난정주영숙|작성시간14.03.06|조회수14 목록 댓글 0

 

도전장

 

 

천마산 중턱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릴 즈음, 다정하게 빛나는 햇볕 아래서 바람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논에서는 거름냄새가 풍기고, 저 건너 화전에서는 두더지가 흙 속을 누벼댔다.

 

금새(金鳥)야 옥토끼(玉兎)들아 뉘가 너흴 쫓아온다고

구만리장공을 허위허위 다니느냐

이후란 천리에 한 번씩 쉬엄쉬엄 다니려마.

 

진이 즉흥 시조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을 때, 세 갈래 길 중 오른편에서 스님이 오고 있었다.

여승이었다.

스님, 숭덕사는 어느 쪽인가요?”

여승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 소승을 따르십시오.”

진은 호젓한 산속에서 여승을 만난 것이 더 없이 반가워 또 물었다.

스님도 숭덕사엘 가시나요?”

, 숭덕사에 가십니까?”

여승이 고깔을 젖히며 돌아보자, 진은 화들짝 놀랐다.

달달달 가슴이 떨리고 후들들 다리도 떨려왔다.

소승을 알아보셨군요?”

여승이 허리를 굽히더니 숭덕사엔 무슨 볼일이냐며 더욱 다정하게 묻는 거였다.

진은 겨우 마음을 고르잡고서 침착하게 되물었다.

언제 스님이 되셨나요?”

그 후 뛰쳐나와서 바로 입산했답니다.”

여승은 전임 유수 송순의 애첩이던 제월이었다.

사또께서 이조판서로 승진되어 가신 건 알고 계시나요?”

막연히 소문은 들었답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투가 아닌가. 진은 그 초월이 부러웠다.

저는 전혀 몰랐어요. 멀지 않은 곳에 계신데……

왜 멀지가 않습니까?”

숭덕사에 계시지 않으세요?”

거기 있습지요.”

그럼 먼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멀지요. 속세에서 가늠하는 거리로서야 시오리쯤 되지만, 속세와 불가의 사이는 구만리랍니다.

관세음보살……

멀다. 아니 많다. 숫자 열은 끝이 있지만 아홉은 끝이 없는 수이다. 그래서 열보다 많은 수가 아홉이다.

아홉은 가장, , 제일 같은 무한량 무한대 무진장인 것들을 가리킬 때 써먹는,

수가 없는 수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가장 높은 데는 구민이고, 땅에서 가장 높은 데는 구인이고, 땅에서 가장 깊으면 구천이고,

넓디넓은 하늘은 구만리장천이다. 그렇다. 진은 가슴이 벅차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많은 수도를 하셨군요?”

잘 되지가 않습니다.”

스님을 뵈니 저는 마치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소승은 진랑을 은인으로 알고 있는 걸요.”

아니 왜요?”

소승, 자만심에 빠져 있었어요. 세상 여자가 모두 나만 못하다고 여겼으니까요.

콧대 높기가 하늘에 닿아 있을 때에 불현 듯 나타난 인물이 황진, 당신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었죠. 얼마나 자만심이 강했기에 단박에 미쳐버렸겠어요?

나무관세음보살……

어느덧 여자의 속성마저도 초월해버린 사람이다.

불가에 귀의하고서야 저 자신의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행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조용히 웃으시며 이 죄 많고 어리석은 중생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관세음보살……

 

아르르 어디에선가 꽃향기 풍겨왔다.

 

 

암자는 저 뒤에 있지요. 지족선사가 계신 곳입니다.”

숭덕사의 넘실한 처마 끝을 바라본 진이 뒤로 젖혔던 쓰개치마를 다시 썼다.

저는 곧장 지족암으로 가 보렵니다.”

제월 스님이 주춤 멈췄다.

불공드리러 가는 건 아니시겠고?”

지금은……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운명?”

그 분은 제가 뛰어넘어야 할 운명입니다.”

하오면……?”

두세 번 고깔머리를 끄덕이며 제월이 엷게 웃었다.

 

 

숭덕사의 경내라 하지만 지족암은 청량봉 깊숙이 들어앉아 있었다.

앞쪽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이끼 낀 바위를 툭툭 치며 에워 도는 깊은 계곡이고,

뒤편은 청량봉의 준험한 봉우리를 업은 산같이 높다란 바위 밑을 우묵하게 파고들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깔린 돌들도 서슬이 퍼렇다.

이따금 노루도 드나들 만큼 적막한 곳이다. 높다.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듯하다.

바람은 산허리를 감고 돌며, 안개는 구름처럼 피어 굼실거린다.

진은 절벽을 돌면서 막 망울진 철쭉꽃 가지를 휘어잡았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불현듯 수로에게 바쳐졌다는 그 철쭉꽃이 떠올랐다.

 

 

암자 앞에 이르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족암. 현판이 붙어있어서 지족암이 아니라 지족선사가 있는 곳이라서 지족암이라 불리는,

사실은 이름도 뭣도 없는 지족암이다. 하기야 이름,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진은 암자의 초라한 출입문을 향하여 다가갔다.

참싸리대로 엮어 만든 암자의 문은 닫혔는지 열렸는지 모를 정도로 비틀려 있다.

솨솨사아…… 암자 옆으로 계곡물소리가 정겹다.

옥색 쓰개치마를 청솔가지에 걸어놓고는 물가로 갔다.

물은 뼈가 시리게 차가웠지만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얼굴과 목, 손발도 깨끗이 닦았다.

하지만 산속이다. 오소소 떨리는 몸을 다독이며 얼른 물에서 빠져나왔다.

을씨년스러웠다. 다시 암자로 가서 안을 살폈다. 순간, 흠칫하였다.

돌부처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꼼짝을 않는 물체.

30년 기약으로 면벽단좌하고서 관세음보살만 연호한다는 만석이라는 중의 소문을 익히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허깨비라고 단정 지을 뻔했다.

다시 안을 살폈다. 분명히 스님일 텐데 멋대로 자란 머리를 상투처럼 머리 꼭대기에다 올려 묶었다.

그 머리가 또 치렁치렁 어깨 밑으로 늘어져 있다. 아마도 머리 자른 지가 석삼년은 된 것 같다.

죽었나 싶지만 죽음의 음기가 없다. 한 줄기 밝게 쏟아지는 빛을 보면 안다.

우연일망정 주검에 저런 밝은 빛이 쏟아질 리 없다. 빛은 덕이다. 덕 없는 곳에 빛이 있을 리 없다.

주검은 물질인데, 물질에는 덕이 깃들일 수 없는데, 저토록 찬연한 빛이 주검에 감응할 까닭이 없다.

해탈의 화신이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진은 합장했다. 그리고 살짝 불렀다.

대사님!”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였으나 무반응이다.

합장한 그대로 상반신을 조금 굽히며 대사님!” 하고 좀 더 크게 불렀다.

그래도 묵묵부답. 차츰차츰 목소리를 더 높여가며 연달아 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이번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바로 옆에서 또 불렀다.

그래도 깜깜 무소식.

무섭다. 마음을 다잡아먹고는 목을 길게 뽑았다.

스리슬쩍 얼굴을 들여다보니 기절초풍할 지경이다.

입술은 움직이는 듯 마는 듯 움직이고, 목소리, 목소리는 그야말로 들리는 둥 마는 둥

나무관세음보살뿐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정화된 우주가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중심으로 응결되어 있을 법도 하다.

무릎에 놓인 오른손에서는 백팔염주가 살살 돌아가고 있는데,

꼭 기계장치를 해놓은 것처럼 규칙적이고 단조롭다.

동그란, 반들반들한 염주는 그대로 원망이며 득오이며 인생이며 우주이며 색()이고 공()이다.

별안간 화담 선생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지함형님은 공이고, 나는 색이렷다…… 그래, 나는 색이다.’

진의 머릿속에선 포기진행이란 두 갈래 길이 한참동안 교차하였다.

선생님, 드디어 지족선사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만날 수 있을까요?

지족이 면벽송경을 하는 겁니까? 소녀가 면벽하고 있는 겁니까?

어찌된 일인지요?…… 하지만,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처음서부터 아니 감만 못하겠죠?’

그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대사님, 여기 죄 많은 중생이 왔습니다.”

옥이 구르며 내는 소리가 맑다고들 하지만 물체와 물체가 부딪쳐서 내는 소리에 불과하다.

물체의 소리가 아무리 곱기로 어찌 사람만큼 오묘한 소리를 내겠는가.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황진이다.

대사님, 미련한 중생이 부처님 빛을 따라 왔습니다.

먼발치로 황금색 자비의 빛을 보고, 가까이 와서 엎디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슬며시 요기스러워진 눈동자에 짜증 섞인 초조감이 버무려졌다.

스님……, 자비로운 손길로 이 중생의 죄업을 어루만져 주소서.”

그의 가슴에다 손을 얹고 살살 쓸어보았지만 돌문을 해 달았는지 딱딱하기 그지없다.

무릎 위에 얹힌 손을 흔들어댔지만, 흔들리긴 하는데 바위처럼 무겁다.

이를 앙다물었다가 풀었다. 통통한 젖무덤으로 그의 이마를 파들파들 스쳤다.

그래도 꿈쩍 않는다. ‘도전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위대한 인간 지족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위선의 탈을 벗겨보겠다는 집념이 작용했다.

그 본성, 믿음의 정체를 알아낸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그렇다면 내가 바로 관음보살이다.’

 

드디어 본격적인 행동으로 옮겼다.

손으로는 그의 목덜미를 살살 쓸어주면서, 귀에다는 보들보들한 소리를 불어넣었다.

지족, 염불만 왼다고 불심이 되는 건 아니요. 눈을 똑 바로 뜨시오.”

그래도 눈을 뜨지 않은 채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만 연호하고 있다.

그의 목을 팔로 가볍게 감고 그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눈이란 마음의 창. 똑 바로 뜨고 온갖 사물을 꿰뚫어보아야 하오.

탐스러운 욕망이라는, 바보스럽고 수치스럽다는 그런 번뇌에서 벗어나시오.

그대를 가리던 무명의 장막을 걷고 맑은 지혜를 얻기 원한다면

먼저 삼라만상 모든 색을 제대로 보시오. 똑바로 눈을 떠서 나를 보시오.

나와 더불어 빛을 구합시다.……

아리땁고도 위엄 있게, 스스로도 착각될 천상의 목소리로 도란도란 줄기차게 속삭여댔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그의 염불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줄줄이 강물줄기인양 흐르고 있다.

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에다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특유의 몸내를 솔솔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볼을 그의 볼에다 살살 비볐다.

아아, 그대의 시련은 이미 끝난 줄을 왜 모르시오?

이제 그대는 사람의 몸이로되 부처의 마음,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대는 이미 사바세계 속인이 아닌 것을.”

그제야 지족이 아주 조금 반응을 보였다. 염불 외는 목소리를 조금 높인 거였다.

한 가닥 가능성에 용기를 얻은 진은 다시 유혹을 감행했다.

그런데, 아니올시다.

쓰러뜨리면 쓰러지고 주무르면 주물리면서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한낱 물체다.

지독한 인간!’

못 이겨 파리소리만큼이라도 내던 염불소리조차 다시 가라앉았다.

 

 

기진맥진해있는 판인데 느닷없이 솔향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여승 제월이었다. 진은 연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웠다.

그러나 제월은 진에게 눈길 한 번 주질 않는 거였다.

황초 두 개와 잘게 썬 향나무를 놓은 작은 향로를 들고서 불단엘 다가서더니 가만히 합장하였다.

촛불도 밝히고 향불도 피운다. 그 뿐이었다.

다시금 지족에게도 합장하고, 그대로 암자 밖으로 사라져 간다.

뒤미처 쫓아 나온 진이 제월을 불러 세웠다.

, 승복 한 벌만 빌려주세요. 스님이 입으시던 것으로요.

고깔하고 염주하고, 목탁도 있어야겠네요.”

그러면서 싱겁게 웃었다. 제월의 얼굴에서도 엷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가까운 데서 솔새가 울며 달아났고, 산 너머에선 뻐꾸기가 뻐꾹 뻑 뻐꾹, 울어댔다.

지금 갖다 드릴까요?”

, 지금요.”

잠시 후, 진은 승복을 입었다.

목탁과 염주는 손에 들고 고깔은 머리에 쓰고서 다시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화엄경 속의 착한 벗이 너를 고쳐 주리라.”

신문왕 때 고승 경흥이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에 통달하니 명망이 한 시대에 높았다.

문무왕이 세상 떠날 때 신문왕에게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당부하였고

그래서 신문왕이 즉위하자마자 국로가 된 경흥법사.

왕이 내려준 삼랑사에 살던 그는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앓아눕게 되었다.

그런 법사에게 하루는 여승 하나가 와서 문안하고

화엄경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면서

합장하였다. ‘스님의 지금 이 병은 근심으로 인한 것이니,

기쁘게, 아주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그러고서 지팡이로 열한 가지 모습을 지어

저마다 각각 기기묘묘한 춤을 추게 하니,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형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모두들 턱이 빠질 지경으로 웃었다. 물론 경흥법사의 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그래, 나는 이제부터 11면 보살을 창출했다는 그 여승이다.’

그녀는 합장하였다. 잠시 후, 지족을 내려다보며 한쪽 팔을 번쩍 들었다.

앞으로 내밀었다.

또 한쪽 팔을 뒤로 뻗었다. 발 한쪽도 들었다.

다른 다리의 무릎이 꺾였다. , 따그락 딱딱. 목탁이 울었다.

다그르륵 염주들이 연한 소리를 냈다.

솨솨솨아 바람이 일었다.

아라리, 몸에서 몰려나온 향기가 촛불을 춤추게 했다.

 

사진/펌

 

승복에 고깔, 한 손엔 목탁, 한 손엔 염주를 들고, 팔을 벌리고 무릎을 꺾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저 단순한 육신의 움직임이 아니다.

마음이 깃들고 정이 솟구친다. 삶의 율동이며 여자의 열정이며 감히 부처님과의 대결이다.

진은 지족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서 추었다.

두 바퀴 돌면서 장단을 쳤다. 이 춤에다 제목을 붙인다면? 승무. 승무가 제격이다.

사전은 말하고 있다.

승무는 고려 말 이후에 발전되어온 춤이며,

장삼을 입고, 고깔을 쓰고, 부채를 들고 풍류에 맞게 추는 춤이라고.

춤이 아주 고조되었을 때에 법고를 치는데,

파계승의 고뇌, 곧 수행의 어려움과,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고통을

법고를 두드리면서 이겨보자 하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이다.

부채 대신 염주를 들고 법고 대신 목탁을 들었지만,

그녀의 춤에다 이름을 붙이자면 승무, 그것 외는 없다.

황진이 승무의 창시자라는 일설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다.

남자 앞에 앉을락 말락 몸을 구부린 채, 여자의 두 팔이 사해창궁을 안을 듯 둥근 원을 그린다.

눈같이 흰 고깔이 손짓인양 까딱거리고,

둥그스름한 이마가 우주인양 태양인양 땅에 닿았다가 멀어졌다가,

참으로, 제비처럼 날렵하고 바람처럼 가벼운 몸놀림이다.

이윽고 여자의 이마와 콧등에 잘디잔 땀방울들이 송송 맺혔다.

어느덧 남자가 나무관세음 보살, 나무……, 나 무……하다가 박자를 놓쳤고,

때마침 눈꺼풀이 움직였다.

태초부터 덮여있었다는 듯 편안히 감겨 있던 그것이 은밀히 꼬물거렸다.

그 순간을 놓칠 여자가 아니다.

지족!”

진은 사뭇 위협적인 어조로 불렀다.

그대의 가슴에는 지금 이 몸이 들어앉았소.

눈을 감아서 보지 않는다고, 그런다고 세속이 맑아지나.”

파르르 떨어대는 저 눈꺼풀 봐라. 은근슬쩍 높아지는 저 염불소리 들어봐라.

따라서 드높아지는 별같이 동글동글한 이 목소리도 들어봐라.

진은 이마에 흐트러져 내린 지족의 머리칼을 살살 걷어 올려주었다.

길 아닌 곳에서 길을 찾음은 어리석다. 광명 아닌 곳에서 광명을 찾음은 더욱 어리석다.

그대 만약 도를 위하여 여체를 멀리 하려거든 눈앞에 있는 여체를 가까이 하라.

그대 굳은 심지를 더욱 단단히 굳혀보라.”

저 마음 굽이치는가. 염불소리가 잠깐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그러나 다시금 높아지는 염불소리.

나무관세음 보살, 나무관세음, 나 무……

지족! 이 몸은 그대가 눈을 떴을 때 더욱 뚜렷하리라.

그대가 오래도록 찾던 환영이 여기 그대 눈앞에 있느니라. 눈을 떠라!”

황진은 보았다.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고는 소를 잃었구나.’하고 탄식하며 사라졌을 견우노인의 그 표정이

지족의 얼굴에서 일렁임을 보았다.

한동안 춤에만 열중하였다. 진은 이제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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