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亭 주영숙, 정약용의 『목민심서』 12권 72조를 해부하다.
(가제) 『2% 생략한 완역 목민심서』의 정체성에 대하여
때 : 2021. 11. 20. 오후 3시
곳 : 수원시 화성박물관
주최 : 수원시 화성사랑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참말로 징글징글한 스토커, 코로나19를 무사히 따돌린, 그래서 두 번의 백신 접종을 마치고 세 번째 접종을 기다리고 있는 蘭亭 주영숙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부임‧율기‧봉공‧애민‧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진황‧해관>으로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12권의 책으로 집필 계획을 세웠던 것이며, 드디어 그 초고를 마쳤습니다.
다산 연구회에서 『역주본 목민심서』가 7권짜리로 나왔었다곤 하지만 아직 구경하지 못했고요, 『소설 목민심서』가 500만부 돌파했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건 다산 정약용을 주인공으로 삼고 <목민심서>라는 제목만 따다 붙인 소설일 뿐, 분명『목민심서』내용은 아니지요.
저는 명색이 소설가이긴 하지만 『목민심서』를 가지고서 소설을 쓸 만큼의 역량은 못 됩니다. 하지만 인문 교양도서로서의 『2% 생략하고 완역한 목민심서』만큼은 가장 잘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또 저인 것 같네요.
암튼 일단 제 소설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바로 작년, 5월 말엔 제 장편소설 『칼, 춤추어라!』상하권이 나왔고 6월 말엔 『내 이름 마고』가 나왔습니다. 2013년에 낸 소설 『황진이 돌아오다』이후 7년 만이었죠. 암튼 소설이 나오고 바로, 모 출판사에서 저에게 제의가 들어왔었는데요, 12권짜리『목민심서』를 해보라는 거였습니다.
“아니, 제가 그걸 어떻게 합니까?”
라고 의아한 눈초리를 했더니, 출판사 사장님은 막 저를 추켜세우며
“이건 그냥 소설가도 불가하고 그냥 학자도 불가한 일인데, 선생님은 소설가이고 학자시니 가능할 겁니다. 제가 많은 작가를 알고 있지만, 선생님처럼 조건이 갖춰진 분이 없어요. 2년 후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나면 그 『완역 목민심서』를 새 대통령께 올리겠습니다. 해보세요. 하실 수 있습니다. 열두 권 해내시면 따로 원고료 1,000만원 드리겠습니다.”
책 열두 권 원고료가 1,000만원이라니, 따지고 보면 정말 박한 원고료이긴 했는데요, 그나마 그게 출판을 보장한다는 약속이긴 했고, 무엇보다도 정약용의 정(丁)이 제 외가 쪽 성씨라 ‘예사 인연이 아니구나’ 하는 마음도 들어서, 가히 모험적인 그 일에 덤벼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구두계약이었을 뿐, 서면 계약서는 안 썼죠. 계약서를 쓰고 나면 꼼짝없이 붙들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제가 제대로 해낼지 그게 참 걱정이었거든요. 또 출판사 측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마 해내겠어?’ 하고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습니다. (사실 출판사에선 제가 현재 12권의 초고를 마쳤다는 사실도 믿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저 자신으로서도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닌 수정작업에 들어가 있으며, 끝내고 보니 첨삭하고 수정할 것투성이라서, 그것이 훤히 보여서,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이니까요.)
그런데 7월 어느 날, 아주 귀한 손님(빈객)이 난정뜨락을 방문하셨고, 저는 그분께 『목민심서』를 번역하게 되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분이 굉장히 반가워하시더군요. 그땐 참,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일단 참고서적을 구입하여 읽어야 하는 게 아닌지 전체적인 구도가 잘 잡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별로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서 “해낼지 모르겠다”했더니 그분은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제게 용기를 주셨지요. 그리고 며칠 후에 책(참고자료)을 한 보따리 가져오셨는데요, 『화성 성역 의궤』를 비롯하여 몇 권, 그중에『목민심서』의 요점만 발췌한 1권짜리『정선 목민심서』가 있었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그 책의 앞날개 사진인데 참조하시기 바라고요, 아무튼 준비는 완료된 셈이었죠. 그분이 누구냐고 질문하실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설계했지만, 그분은 수원시를 설계한 공학박사이신데요. 이쯤이면 그분이 누군지는 이미 알아차리셨으리라 여겨집니다만, 암튼 놀랍도록 선견지명이 뛰어나신 그분이 저의 역량을 제대로 보신 모양인지 참 좋은 참고자료를 가져오셨던 겁니다. 000 박사님,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몇몇 잘못 번역된 것을 바로잡는 수확도 있었으니까요.
대표적인 예로, 「병전」의 병기 중에서 활 소재를 말하는데 “아목 𣘨木”이라는, 컴퓨터의 한자 사전에선 도대체 찾을 수 없는 글자가 있었습니다. 이게 뭔가하고 대옥편을 뒤졌더니… ‘𣘨’는 사실 ‘나무 무성할 아’‘나뭇가지 휘청거릴 아’였죠. 그러므로 아목은 딱히 무슨 나무가 아니라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즉 회초리나 채찍 용도로 쓰일 만큼 낭창낭창한 나뭇가지였던 것입니다. 찾아보니 다른 자료, 특히 연구회에선 이 “아목”을“가목” 또는 “가사목”이라 해석했더군요.
해석의 오류를 다시 ‘정선 목민심서’에서 순서대로 보자면 [鑌鐵百鍊者 빈철백련자(백번쯤 갈아서 빛을 낸 강철)] ①100번 담금질한 빈철(鑌鐵) : 빈(鑌) 의 뜻을 찾아보면 ‘강철 ‧ 갈아 빛을 내다’입니다. ‘련鍊’은 ‘불리다 ‧ 단련하다’의 뜻이 들어있는데, ‘쇠’를 가지고 ‘불리다’라고 함은 안 맞습니다. 무슨 고사리나물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럼 여기에 가장 가까운 해석이‘단련하다’임을 알 수 있고, 그래서 ‘련(鍊)’은 ‘담금질(높은 온도에서 달군 금속재료를 물이나 기름에 넣어 급격하게 식히는 일)’로 표현되는 게 맞지요. 그런데 ‘갈아 빛을 내다’란 빈(鑌)의 뜻은 ‘담금질한’에 이미 나왔고, 그래서‘담금질한 빈철’이라 함은 중복의 표현입니다. [시]를 지을 때만 [중복] 표현이 금물인 게 아니라, 산문에서는 더더욱 [중복] 표현을 조심해야 하는데요. 그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맥락을 놓침으로써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간단히 ①‘100번 담금질한 빈철(鑌鐵)’이 아닌 ‘100번쯤 담금질한 검은 강철’이라 표현했습니다만.
②흑각(黑角) 300~400근 : 흑각을 직역해놓았군요. 이 흑각은 빛이 검은 무소의 뿔이라 하므로 ‘검은빛의 무소뿔’이라고, 그냥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해야만 더 쉽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③가사목(𣘨木 아목)은 가사목이 아니라 아목, 즉 휘청휘청한 회초리 종류라는 이야긴 먼저 했으니 넘어가고요, ④화피(樺皮), 이것을 보겠습니다. 화피는 벚나무 껍질이라 합니다. 그러면 ‘벚나무 껍질’이라 해야 알아먹지 않겠습니까? 그냥‘화피’라고 하면 누가 알아먹겠습니까? 알아먹거나 말거나 그냥 책만 내면 되는 걸까요? 목민심서는 어차피 ‘과시용이고 소장용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개념으로써 ‘화피’야 전공하는 사람이나 깊이 들여다볼 거라 상관없다 그 말일까요? 그건 그렇고, ⑤‘자분(磁粉)’은 또 뭘까요? ‘자(磁)’는 ‘자석, 사기그릇’을 뜻하고 분(粉)은 그야말로 ‘가루’ 그래서 ‘자석 가루’나 ‘사기 가루’를 뜻하겠는데, 그런데, ‘자분’이라는 말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질이나 태도가 부드럽고 자상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자분자분’은 있지만요^0^* 그럼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냥 “자석 가루” 또는 “사기 가루” 그렇게 번역해야 맞지요. 한자 음 그대로 “자분”해놓으면 어쩝니까? 아~ 옆에 한자로 ‘자분(磁粉)’을 썼으니 한자 좀 아는 독자는 아시겠군요. 그럼, 제가 생트집 잡았다 치고 넘어가고, ⑥그 옆에 ‘사기가루(硇砂)’를 좀 보겠습니다. 아니, 정작 ‘사기가루’라고 해석해야 마땅할 ‘자분(磁粉)’은 그냥 넘어가고, 이게(硇砂 : 노사) 사기가루라니, 무슨 이런 언어도단이 있을까요? 노사(硇砂). 사실 이 노(硇)자 역시 컴퓨터의 한자 사전엔 없는데요. 대 옥편을 찾아보면 ‘노사 노(硇)’라고 나옵니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았습니다. 한편씩 할 때마다 수상한 글자 찾기 하느라고 1년 반을 헤맸던 거죠. 노사는 “화산 폭발 때 분출되는 염화암모늄 가스가 승화하면서 만들어진 작은 돌멩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사기가루’하고는 무관하다는 거죠.
정말 꾸준히 저를 웃기는, 그 글자의 정체를 밝히고 나면 정말 희열감이 샘솟는, 그래서, 바로 그 맛에, 방대하고 지루한 이 작업을 멈추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이런 오류는, 다른 자료, 즉 공신력 있는 자료에서도 똑같이 표절되어 있어서 정말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곤 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엔도르핀을 생성시키곤 했던 거죠.
아래는 [주영숙의 완역 목민심서] ‘병전’ 일부입니다. 위의 사진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책을 가져오신 분도 있을 것 같군요. 271쪽과 아래의 글을 비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구리 1,000근, 100번쯤 담금질한 검은 강철 3,000~4,000근, 검은빛의 무소뿔 300~400근, 길고 흠이 없는 쇠뿔 300~400근, 부레풀 100근, 화살대 10,000개, 아목(𣘨木 : 원문에 <아목은 속칭 가사목이라 하는데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어 이름을 그대로 둔다(俗所云 加斜木不知何木今姑名之)> 라는 설명이 있는데, ‘𣘨’는 대옥편을 찾아보면 사실 ‘가사목(加斜木) 가’가 아니라‘나무 무성할 아(𣘨)’‘나뭇가지 휘청거릴 아(𣘨)’이다. 그러므로 아목은 딱히 무슨 나무가 아니라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즉 회초리나 채찍 용도로 쓰일 만큼 낭창낭창한 나뭇가지로 짐작된다) 3,000~4,000매(枚 : 나무줄기, 채찍), 벚나무 껍질, 꿩의 깃 등 50~60근, 정제하지 않은 염초 등 화약 재료 600~700근, 유황‧비소‧황‧철로 된 광물로 납을 캐는 광산에 섞여 있는 맹독성 광석인 비황(砒黃), 자석 가루(자분磁粉), 노사(硇砂 : 화산 폭발 때 분출되는 염화암모늄 가스가 승화하면서 만들어진 작은 돌멩이), 송진, 역청(瀝靑 : 유전에서 석유가 오랜 시간 휘발하면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데, 유전이 있는 지대에는 석기 시대부터 역청을 사용한 유물이 발굴된다) 등 신연독화(神煙毒火), 즉 연수정 빛깔 독을 내뿜는 신비한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재료 100~200근 등, 이러한 모든 물건을 창고에 간직함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사교(四郊 : 동쪽의 흥인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인 사대문을 뜻함)에 변란이 있게 되면 그 조짐이 먼저 나타나는 법이다. 이때를 당하여 한편으로는 두드려 만들고 한편으로는 섞어 제조하며, 칼날은 새로이 숫돌에 갈고, 활깍지는 새로이 아교에 붙게 하고, 신기롭고 독한 폭약은 새로이 가마에서 끓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진실로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 뜻을 알아야 한다. 힘자라는 데까지 대비하여 병기를 보수하지 못한 죄를 씻으면 그나마 마음에 부끄러움이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연구회에서 1권으로 압축하여 낸 이 책 『정선 목민심서』는 2020년 3월에 개정판이 나왔는데요, 이쯤이면 개정판이란 게 또 개정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이렇게 하나하나 틀린 해석 바로 잡아서 일일이 완벽하게 다듬어 12권 초고를 마쳤습니다. 진행할 때는 굉장히 오랜 시간으로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다 마친 건가?”하고 마치 꿈꾸는 거 같습니다. 하여튼 또다시 정신 무장하고서 지금 다시 1권부터 계속 첨삭 수정하는 중인데, 12월 말까지 완성할 계획입니다. 물론 출판사에도 그때 가서야 알릴 셈이고요. …… 그간 어디다 연재하자, 몇 권씩이라도 출간하자, 하고 제의하는 것을 계속 아직, 아직, 해왔답니다. 원고가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요. 이 원고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거라는 걸 차츰차츰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암튼 연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요렇게 한 거를 보면 아마도 기절초풍 난리가 날 것 같아요. 혹시나 제가 책을 내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할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완결되기 전엔 파일을 섣불리 넘기지도 못하는데, 다만, 특강이니 특별히 조금만 털어놓는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목민심서』엔 청렴결백만 들어있는 게 아닌데도, 대부분 그게 다라고 알고 있기가 십상이지요. 『목민심서』를 옮겨놓았다는 것이 독자야 알아보건 말건 직역해놓은 문장투성이이고, 읽는다 한들 뭔 말인지도 모르니 앞부분만 대략 읽고는 목민심서 다 읽었노라고 으스대면서 “당신은 목민심서를 읽어야 하오!”라고 하며 자기는 청렴결백한 척하는 ‘청문회’장면을 가끔 보는데, 연암 박지원의 말을 빌리면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고 밥알이 벌떼처럼 튀어나오게” 웃기는 일이지요. 뜬금없이 무슨 박지원 이야기냐고요? 사실 『목민심서』 안에는 당시 실학의 최고 좌장 연암 박지원 이야기가 심심찮게 언급되고 있어서 아주 자연스러운 비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혹자는 연암과 다산이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지만, 두 사람의 나이 차가 25년이나 되지만, 하지만 연암과 다산이 거의 같은 시기에 관리 직분을 가졌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연암은 50대 초반. 다산은 20대 후반에 첫 공무원 생활을 했으니까요. 목민심서를 해석하다 보니 다산이 하고 싶은 말을 엄청 억눌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객관성 유지’차원에서 그랬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마치 ‘다산’의 간지러운 데를 긁어주듯이, 역자 재량껏, 『2% 생략하고 완역한 목민심서』 안에다 그 제목에 해당하는 연암의 글을 넣기도 하고 다산의 다른 글을 넣기도 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서문에다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과 맨 끝의 「해관」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있는 것만 해도 60조다. 참으로 어진 수령이 나타나 제 직분을 다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아마도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라 믿는다.”
감히 대 선학의 명저 한문 서적을 몽땅 해부하여 순 한글로 바꿔버림으로써 문체반정을 저질러버린 저는, 그래도 ‘소설가 아니라고 할까 봐 아주 소설을 썼네!’라는 의심에서 벗어날 장치로서 ‘원문’도 곁들이고 있음을 정색하고 밝힙니다. 저는 이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장중한 책! 이 책의 정체에 대하여 이렇게 밝힙니다.
“이 책은 12편 모두를 열두 권으로 편성하여 전집 식으로 꾸몄고, 「부임」과 맨 끝의 「해관」을 빼지 않은 72조로 구성하였다. 원고 분량이 적은 「부임」과 「율기」를 한 권으로 묶고, 「봉공」과 「애민」도 한 권으로 묶었으며, 원고 분량이 많은「호전」과 「형전」은 각각 상하권으로 쪼개었고, 원고 분량이 가장 적은 맨 끄트머리의「해관」은 책 전체 페이지의 3분의 2를 점령하는 정약용 연보를 썼는데, 바로 「조선 후기의 천재들」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옮긴이의 말’이다.”
옮긴이의 말을 권마다 넣으려고 했었으나 변경하여 12권인 「해관」에만 총 집중, 정약용 연보를 아주 길게 쓴 것이지요.
다산 정약용의 전공 분야는?
흔히 교과서에서는 정약용을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표기하지만, 단순히 그를 실학자라는 좁은 틀에만 가둠은 ‘숲은 보면서 나무는 못 보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는 사실 학문이 매우 깊고 방대하였다고 평가됩니다.
다산 정약용은 지방행정관의 행동 지침을 정리한 『목민심서』를 펴낸 행정가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형법을 정리한 『흠흠심서』를 엮은 법학자이고, 천연두 치료법을 다룬 『마과회통』을 지은 의학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수원 화성’을 설계한 건축가가 아닙니까? 팔달문이고 장안문이고 화서문이고 창룡문이고 여러분도 그 설계도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 세상에, 그렇게 치밀하고 정밀한 설계도라니, 저는 이 사대문의 설계도를 목민심서 공전 부분에다 아주 자연스레 배치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집의 제목을 이렇게 바꿔야겠습니다.
『2% 생략하고 2% 추가하여 완역한 목민심서』
저는 감히, 생략한 부분은 별 영양가 없는 것들이고 추가한 부분은 알짜배기라는 부언을 달고 싶습니다.
『목민심서』12권 각각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조금씩 보여드립니다.
| 부임 | 수령이 고을에 부임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열거하였다. ①수령에 임명되면. ②부임할 때의 행장. ③조정에 하직하기. ④부임 행차. ⑤취임. ⑥업무를 시작함. (“가난한 선비가 처음으로 벼슬을 얻었다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타는 수레와 말이며 부리는 사내종이며, 먹는 음식과 입는 옷 따위들을 부귀한 집안사람들과 비등하도록 화려하게 차리겠다면, 그야말로 부정부패의 씨앗이 된다. 하나에서 열까지, 털끝만큼 작은 것일망정 모두 빚쟁이 손에서 나오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빚쟁이는 그가 공무원으로 발탁되자마자 따라다니기 시작하여 소관 부서를 찾아보고 임지로 가는 데까지도 뒤따르게 된다. 그러니, 국고를 도적질하거나 여염 백성들의 재물을 훑어내지 않으면 대체 무슨 수로 그 빚을 감당하겠는가? 당부하건대, 행장 차리는 데에다 빚을 내지 말라.”) (우리나라 풍속은 떠들썩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추종자들이 벼슬아치를 좌우로 부축하여 호위하고 마구 어지러운 잡소리를 해댄다. 그 결과 백성은 거기서 엄숙하고 장중한 기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게 되는데, 무릇 근엄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이런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 백성을 위해야 한다. 수령이 된 자는 말 위에 앉아 있는 순간에조차도 마땅히 지혜를 짜내고 정신을 가다듬어 백성에게 편리한 정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를 않고 늘 들뜨기만 한다면 어찌 침착하고 세밀한 생각이 나올 수 있겠는가?) (동한(후한의 별칭) 때에 왕돈이 미현 고을의 수령에 임명받고 부임하는 길에 ‘시정’이라는 정자에 이르렀다. 그때 도적의 체포와 문초를 담당한 정자의 장(長)이 썩 나섰다. “안 됩니다. 이 정자에는 귀신이 나타나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주 죽입니다. 그러니 잘 수가 없습니다.” “귀신이 나타난다고? 허허허, 인은 흉사를 이기고 덕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고 했느니라. 내 어찌 귀신을 피하겠느냐?” 왕돈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정자에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한밤중에 수상한 흐느낌 소리가 들려서 몸을 일으켰더니 과연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 귀신이었다. “네가 바로 사람을 죽인다는 귀신이더냐? 이제 나를 죽이려고 왔느냐?” “아니옵니다. 억울하옵니다. 살인자는 정장이옵니다. 바로 그가 소녀를 죽였사옵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이튿날 아침 왕돈은 향리를 순찰하며 도적 막는 일을 담당한 관리를 불러 정장을 잡아 오라 하였다. “네가 이 정자에 귀신이 나타나는 연유를 잘 알렸다? 어디, 네 입으로 낱낱이 토설해보아라!” 왕돈이 추상같이 힐문하자 드디어 정장이 엎드려 자백하였고, 왕돈은 곧 정장을 잡아 가두었다.) |
| 율기 | 수령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 베푸는 일까지 논하였다. ①올바른 몸가짐. ②청렴한 마음. ③집안을 다스림. ④청탁을 물리침. ⑤씀씀이를 절약함. ⑥베풀기를 좋아함. (“하늘은 한 사람을 사사로이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로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한 사람에게 부탁하고자 함이다. 하늘은 한 사람을 사사로이 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로 수많은 미천한 사람들을 한 사람에게 부탁하고자 함이다.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은 제힘으로 먹고살면서 제 일을 경영하여 제 피땀으로 얻은 것을 제가 쓰므로, 하늘이 오히려 너그러이 볼 것이요, 부귀한 사람은 벼슬을 가지고 녹을 먹되 만민의 피땀을 한 사람이 받아서 쓰므로, 하늘이 그 허물을 경계함이 더욱 엄중할 것이다.”) (“자신이 백성의 수령이 되면 몸은 곧 화살의 표적이 되는 것이므로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동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 한마디 말로 천지의 화목한 기운을 상하게 하는 수가 있고, 한 가지 일로 평생의 복을 끊어 버리는 수가 있으니 모름지기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
| 봉공 |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 봉행에 필요한 사항을 열거하였다. ①덕화를 펼침. ②법도를 지킴. ③예의 있는 교재. ④공적 보고서. ⑤공물 바치기. ⑥나아가서 일함. (일체 법만 지킨다면 때론 걸림돌이 된다. 다소 융통성을 두더라도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게 좋은데, 옛사람들도 변통하여 처리하는 수가 있었다. 요컨대, 자기 마음이 천하 이치의 공정에서 나왔다면 법이라고 해서 고집스럽게 지킬 필요는 없으며 자기 마음이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욕심이라면 조심하라. 법을 조금이라도 어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스스로 망령되이 교만하고 자중하지 못한다. 몸을 굽혀 윗사람 섬기기를 달갑게 여기질 않아 감영에 가서 다투어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인데 이는 순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다투어도 좋다.) (만약 수령 자신이 승정원 또는 홍문관 출신이거나, 아니면 본래 명문 세도가의 사람이라면 상관에게 성심으로 공경하기를 곱절은 더 해야 한다. 자기 집안이 귀하고 세력이 있다고 해서 상관에게 무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수령 자신이 쇠잔한 무관이나 한미한 음관으로 처지가 고달플 경우, 상관이 이 때문에 능멸하고 예에 어긋나는 일을 자행할 때는 과감한 용기로 벼슬을 헌신짝 벗어버리듯 해야 한다. 귀하고 세력 있는 자들과는 처신하는 방법이 달라야 하니, 이것이 다 치욕과 멀어지는 길이다.) (송나라 오패(吳沛)는 그의 자제들에게 항상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들이 벼슬살이하게 되면 관의 물건을 내 물건처럼 여기고 공적인 일을 내 일처럼 보아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백성들에게 죄를 짓느니보다 차라리 상관에게 죄를 짓는 편이 낫다.” 자하산인(정약용)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므로 감히 하지 못한다.” 하였다. “상관을 잘 섬겨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 (박환(1584~1671)이 금구 현령으로 있을 때,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인을 찾아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도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각 군과 고을에 지령을 내렸다. 그래서 모든 군과 고을에서는 중국인을 샅샅이 찾아내지 못하면 중한 견책을 당할까 두려워 수색하느라고 어수선하였다. 하지만 박환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관직을 그만두면 두었지, 이 일만은 할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현에는 찾아낼 중국인이 없다’라고 보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금구 고을에 사는 중국인들은 무사할 수가 있었고, 이 일을 보고 듣는 사람마다 그의 의리에 탄복하였다.) (자하산인(자하산은 다산초당이 있던 귤동 뒷산의 다른 이름으로, 정약용은 실제로 자하산인이라는 별호를 사용했다)이 말한다. “무릇 백성을 위해 은혜를 구하거나 백성을 위해 폐해를 없애달라고 부탁할 땐 모름지기 지극한 정성이 말에 나타나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천하에 호소할 곳 없이 천한 자가 백성이요, 천하에 태산처럼 높은 자도 백성이다. 요순시대 이래로 뭇 성현들이 서로 경계한 요지가 백성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라, 이 내용이 모든 책에 실려 있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다. 하므로 상사가 제아무리 높다 해도 백성을 앞세워 싸우면 굴하지 않을 자가 적다.) (내가 장기에서 귀양살이할 때 본 일이다. 한 아전이 살인죄를 저질렀는데, 동료 아전들이 짜고 간계를 부려 검시장을 죄다 고쳐버렸다. 감영으로부터 판결문이 오자 현감은 깜짝 놀라고 의심스럽고 괴이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끝내 그들의 간계를 들추어내지 못하고 살인자를 무죄 석방하고 말았다. 감영의 판결문이 내가 보고한 것과 다를 경우엔 급히 감영으로 가서 원장부를 찾아보도록 해야지, 의혹만 가진 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큰 도적은 그 일당이 널리 퍼져 있으며, 군교나 형리들이 그들의 눈과 귀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탐문과 수색에 관한 문서는 응당 비밀로 하고 거듭 봉해서 밖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 애민 | 수령칠사(뽕나무 농사가 진흥되며, 호구가 늘고, 학교가 일어나고, 군정이 잘 되고, 부역이 고르게 되고, 사사로운 송사가 간편하고, 간사하고 교활함이 없어지게 하는 것 등 일곱 가지) 이외에는 힘쓸 일이 없는 것처럼 여기던 당시 조정이나 수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백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일을 6조로 나누어 전개하였다. ①노인을 봉양함. ②어린이를 보살핌. ③가난한 자를 구제함. ④상 당한 자를 도움. ⑤병자를 돌봄. ⑥재난에서 구함. (송나라 이종(理宗) 때, 임안에 자유국을 설치하고 길에 버려진 갓난애들을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는데, 명나라 허호(許浩)가 말하였다. “아비와 자식 사이의 사랑만큼 지극한 것은 없다. 이별하고 버려지는 것만큼 지독한 고통도 없다.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떼어내어 지독히 비통한 곳에 두는 것은 엄청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라면 행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진실로 어진 사람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이다. 송 이종이 자유국을 설치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게 하면서, 어째서 이 아이들의 부모가 ‘지극한 사랑을 떼어내어 지독한 비통에 빠트렸던가’에 대하여는 생각지 못했더란 말이냐?”) (“흉년에 유기된 어린애를 다른 사람이 거두어 길러 살려내어 자식으로 삼거나 종으로 삼는 것은 허락하되, 어린애의 나이 한도는 그때그때에 따른 처리의 규정을 따른다.”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를 경우, 아이의 나이 3세 이전을 한도로 정한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 이어지는 경우엔 8~9세를 한도로 하고 혹 15세를 한도로 하되, 그 양쪽 정상을 참작하여 청원을 들어주도록 한다. 혹 그 뒤에 낳는 애까지도 영원히 노비로 만들거나, 자식만의 사역(事役)에 그치게 하는 것 등은, 흉년의 정도와 거두어 기른 햇수에 따라 그때그때의 규정에 따르도록 한다.”) (가경 무오년(1798, 정조 22) 겨울에 갑자기 독감이 기승을 부렸다. 당시 황해도 곡산에 있던 나는 곧장 거두어 매장하는 일을 시행했다. 그러자 아전이 염려하는 기색으로 “조정의 명이 없으니 실행해도 공적이 없을 텐데요?”라고 넌지시 말하기에 그를 다잡고 명령했다. “실행하라. 곧 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5일에 한 차례씩 사망자의 장부 정리를 하고서 친척이 없는 자는 관에서 비용을 지급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 지 한 달 남짓 되자 비로소 조정의 명령이 내려왔는데, 감사의 장부 독촉이 성화같았다. 다른 고을에서는 모두 갑자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창졸간에 장부 정리를 하느라 여러 차례 문책을 받았지만, 나는 이미 정리해 놓은 것을 바쳐서 일이 조용히 지나갔으니 아전들 또한 크게 기뻐하였다.) |
| 이전 | 지방관아의 인사관리를 주로 한 내용이다. 특히 감사가 수령의 성적을 고시하는 방법과 임금이 수령들을 접견하는 절차를 부록으로 다루고 있다. ①아전 단속. ②부하들을 통솔함. ③사람 쓰기. ④인재 천거. ⑤물정을 살핌. ⑥평가제도. (백성은 흙을 논밭으로 삼는데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고 있다. 백성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농사짓는 일로 여기며, 머릿수만 헤아려 마구 거둬들이기를 수확으로 삼는다. 그 버릇 습성이 되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로 알고 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허물이 없어야 비로소 남의 잘못을 책망할 수 있음은 천하에 공통된 이치이다. 수령 자신의 행동이 남을 감복시키지 못하면서 오직 아전만 단속한다면, 아무리 명령해봤자 필시 행해지지 않고 아무리 금지해도 필시 그치지 않아서, 위엄이고 기강이고 서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함부로 탐욕을 부리며 음탕한 짓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늘, “아전들 버릇이 아주 고약하다.”라고 함은 통하지 않는 논법이다.) (아전들이 자벌레처럼 허리를 굽히고 개미처럼 걸으며 마치 물 흐르듯 고분고분 응대하면, 수령은 그들을 벌레처럼 얕보고 때로는 잔재주와 잔꾀를 휘둘러 쥐락펴락하면서, ‘저것들은 내 마음대로 쥐었다 놓았다 하는 거야.’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들은 마치 여관집 주인과 같아서 나그네를 상대하는 데는 가히 달인이다. 그러므로 진실과 거짓, 허와 실을 눈치 빠르게 아는지라, 수령의 눈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뜰에 엎드려서는 시시덕거리며 몰래몰래 비아냥거리며 문밖에 나가서는 대놓고 비웃기를 한다. 도대체 수령은 미처 그걸 모르니 매사에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고려 시대 전원균(1144~1218)이 합천군을 맡아 다스릴 때였다. 그는 청렴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뇌물을 받지 않았는데, 영세민을 위무할 때는 언제나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교활한 아전을 처벌할 때는 마치 호미로 풀을 매듯 샅샅이 다스렸으며, 간악한 자를 발견하고 숨은 일을 귀신같이 찾아내었다. 그러자 온 고을이 경탄하였고, 옥사를 처결할 때는 더욱 상세하게 심리하였기 때문에 곤장 맞는 자들까지도 모두 이렇게 입을 모았다. “전(田) 사또가 판결한 것이라 억울하지 않다.”) (포증(包拯)은 경조윤으로 있을 때 사정이나 사태를 밝게 살피기로 유명했다. 어떤 백성이 법을 어겨 등에 곤장을 맞게 되었는데, 아전이 그 백성에게서 뇌물을 받고는 “사또께서 필시 곤장 치는 일을 내게 맡길 것이니 너는 그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변명하라.” 하고 약속했다. 이윽고 죄수를 끌어내어 심문을 시작했는데, 죄수가 아전이 시킨 그대로 했더니 아전이 “곤장이나 맞을 일이지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아?”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포증은 아전이 권세를 부린다고 생각하여 아전을 곤장치고 그 죄수는 특별히 관대하게 처분하였다. 포증 같은 이도 아전에게 매수된 줄을 까맣게 몰랐으니, 소인의 간계는 참으로 막기 어려운 것이다.) |
| 호전 | 당시 사회현실의 비판과 함께 논밭에 관한 제도ㆍ조세에 관한 제도 등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어 환곡 관리 방법과 호적 정리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끝으로 조세 부과의 공평성과 중농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①논밭에 관한 행정. ②조세의 부과 및 징수에 관한 법. ③곡물 장부. ④호적의 중요성. ⑤부역을 공평하게 함. ⑥농사를 장려함. (숙종 중년에 처음으로 감사가 임지에 가족을 데리고 가는 법을 세웠다. 이때부터 여러 가지 폐단이 분분히 일어났는데 호남 지방이 더욱 심했다. 일상생활품과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물건을 혹은 친척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혹은 권문세가에 바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여러 고을의 아전에게서 징수함으로써 값을 싸게 치른 것들이다. 가령 예를 들어 큰 전복 1접의 본값은 1천 전인데 쌀 4두로 대가를 치르니 값은 겨우 1백 전을 친 것이고, 유자 1접은 본값이 5백 전인데 쌀 2두로 대가를 치르니 값은 겨우 50전을 친 것이다. 모든 물건을 다 이런 식으로 하여 마구잡이로 요구한다. 그 제도는 국가가 공물을 거두는 것과 같으나 감사는 출납을 맡아보는 선혜청(宣惠廳)이 없어서 공물 바치는 사람을 보유할 수가 없으므로, 이에 오직 품삯을 올리는 한 가지로서만 아전의 환심을 사려 한다. 게다가 수령은 그의 비위를 맞추어 감사에게 아첨하니, 이것이 또한 품삯이 불어나게 되는 원인이다. 또 감사가 고을을 염탐할 때는 모두 감영에 속한 관리들을 끌어 심복으로 삼는데, 유력한 자는 모두 아전이다. 수령이 그들을 억제코자 하여 다소 공손히 대하지 않으면 그들은 곧 모여서 의논하여 이 수령을 제거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단결된 저주로 똘똘 뭉쳐서 비방과 참소로 날뛴다. 혹은 고과(考課) 때 깎아내리기를 일삼아서 하고(下考)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혹은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망신을 주어 수령 자리에서 쫓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강진 현감 이(李) 아무개는 남당(南塘)의 돈을 독촉하지 않았기에 아전에게 밉보여 기어이 하고에 떨어졌고, 해남 현감 장(張) 아무개는 죽은 자의 빚을 독촉하지 않았기에 아전에게 밉보여 쫓겨났다. 한 사람을 징벌하여 여러 사람에게 겁주니 여러 고을이 겁내어 아전을 감사보다 더 두려워한다. 아전이 말하는 일을 율령(律令)같이 받드니, 이것 또한 품삯이 불어나게 하는 원인이다.) (민고의 폐단은 그 원인이 두 가지가 있는데, 아전들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나는 감사가 함부로 위엄을 부림이요, 다른 하나는 수령이 마음대로 탐욕을 부림이다. 이 두 가지 원인이 없으면 본래 민고가 없을 터이요, 아전들도 그 농간을 용납할 곳이 없을 터이다. 감사가 가족들을 거느리고 부임하게 된 이후로 갑자기 각 도(道)에 각기 큰 총회를 일으키는데, 궁궐의 내실 같이 휘장이 쳐지고 시중드는 사람에 음식에 수레와 말, 그리고 의복 등 위엄 있고 엄숙하고 성대함이 임금에 견줄 만하고 체모의 존귀함이 대신(大臣)보다도 더하다. 속이 텅 비고 식견이 적은 사람이 한번 이 감사의 직에 앉으면 함부로 잘난척한다. 자기가 본래부터 귀한 사람이었다는 듯이 여긴다. 각 고을 수령들이 달려가 떠받들고 봉양하는 것이 염치없이 아첨하는 부류들보다 약간 못할 것 같으면 감사는 발끈 성을 내어 그 수령을 파면시키므로 각 고을 수령들은 벌벌 떨며 감히 비용을 아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일이 지나고 나면 쓴 비용이 아까워 그 피해를 잔약한 백성들에게 돌리니, 이것이 바로 민고(民庫)가 생기게 된 동기이다.) |
| 예전 | 수령들이 지내야 할 제사, 접대, 백성 가르치는 일, 학교 세우는 일, 신분의 등급 구별을 밝히는 일을 권면하여 학문을 성취하게 하는 방법 등을 기술하고 있다. ①제사를 지냄. ②손님 접대. ③백성을 가르침. ④교육을 진흥함. ⑤등급을 가림. ⑥과거 공부에 힘쓰도록 함. (정선(鄭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어떤 현령이 있었는데, 그 사람됨이 지극히 청렴하였다. 하루는 성문에서 관찰사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아전이 ‘유시(오후 5시~7시) ~’라고 아뢰자 수령은 빨리 성문을 닫게 하였고 조금 뒤 관찰사가 도착하였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수령은 문틈에다 얼굴을 갖다 대고서 ‘법에 유시이면 성문을 닫게 되어 있으니, 내일 아침에나 맞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박문부(1563∼1605)가 영해(寧海) 부사가 되었을 때 역마를 타고 온 사람이면 아무리 낮은 벼슬아치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가 머무는 곳에 가서 위로하고 접대하니, 어떤 자가 “공께서는 높고 저 사람은 낮은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문부는 “저 사람은 손님이고 나는 주인이니 손님과 주인 사이에 어찌 계급을 따지겠는가? 저 사람이 혹시라도 공무를 빙자하여 함부로 위세를 부려 아전과 백성을 괴롭힌다면 내가 어찌 차마 그 꼴을 볼 수 있겠는가? 내가 저 사람에게 후하게 하면 저 사람도 반드시 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오는 사람마다 감동하고 기뻐하여 아전들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
| 병전 | 주로 당시 군사제도의 모순점과 지방 수령들의 불찰로 인해 생기는 이속ㆍ군관들의 부정행위를 소상히 거론하고, 역대 제현들이 시행한 실례를 들어 후세 목민관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그 시정 방안을 곁들여 말하였다.①장정을 군적에 올림. ②군사 훈련. ③병기 관리. ④무예 권장. ⑤사변에 관한 대책. ⑥외적 방어하기. (명나라 형천(荊川)의 『무편(武編)』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쇠뇌는 가장 예리한 병기이다. 단단한 것을 뚫고 멀리 쏘며 험한 지형에서도 단출하게 공격하고 좁은 장소를 수비하고 충돌을 막아내는 데는 쇠뇌가 아니면 안 된다. 혹은 쇠뇌를 쓰는 것이 전쟁에 불편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쇠뇌가 전쟁에 불편한 게 아니라 장수가 쇠뇌에 익숙하지 못해서이다. 쇠뇌를 잘 쓰는 자는 5층으로 벌여 놓고 쏜다. 층마다 세 개 혹은 다섯 개씩 화살을 모아 잡아서 쏘고, 쏘기를 마치면 빙그르르 둘러서 벌여 놓고, 다 놓은 다음엔 다시 차례대로 쏘되 서로 돌려가면서 계속하는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대적하기에 더욱 좋다. 그리고 쇠뇌의 기수들에게 각각 칼 한 자루씩을 채워선 적이 가까이 다가오면 쇠뇌에 걸터앉아 칼을 사용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활과 칼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다. 쇠뇌 사용법에 대한 한 가르침을 보면, ‘쇠뇌를 벌여 놓을 때는 정(丁)자형으로 서고, 쇠뇌를 쏠 때는 팔(八)자형으로 선다. 소매를 높이 걷어 올리고 옷깃을 제쳐 꽂으며, 왼쪽 손으로 버티고 오른쪽 손으로 당겨서 당기는 손을 가슴에 밀착시킨다. 당기는 것에는 넓고 좁음의 차이가 있으니 왼쪽 옆구리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배에서 가슴으로 하여 화살을 조준한 다음 손을 높이 든다. 적이 멀리 있으면 머리를 들어 발사하고, 적이 가까이 있으면 몸을 낮추어 쏜다. 적이 오른편에 있으면 따라서 오른편으로 몸을 돌리고, 적이 왼편에 있으면 따라서 왼편으로 몸을 돌린다. 적이 높은 곳에 있으면 손을 높이 들고, 적이 낮은 곳에 있으면 손을 낮게 내린다. 쏜 뒤에는 죽어! 라 소리치고 그렇게 소리친 뒤에 거둔다.’ 하였다.”) |
| 형전 | 모든 소송과 형벌과 감옥 등의 처리에 관한 내용이다. 형(刑)이란 결국 백성을 다스리는 마지막 수단이기에 거기에는 자칫 가리지 않고 함부로 가하는 형벌이 시행될 수 있고 또 농간이 개입되기 쉽다. 그러므로 수령으로서는 널리 살펴 원만히 처리할 수 있는 지략이 있어야 함을 들어 강조하면서 역대 제현들이 시행했던 여러 실례와 법전 등을 인용하여 거울삼게 하였다. ①재판을 위해 송사를 듣다. ②형사 사건의 판결. ③형벌을 신중하게 씀. ④죄수를 불쌍히 여김. ⑤폭력을 금함. ⑥피해를 없앰. (한나라 병길(丙吉)이 진유(陳留) 지사로 있을 때였다. 어떤 부잣집 늙은이가 나이 90까지도 아들이 없었는데, 이웃 여자에게 장가들어 하룻밤을 자고 죽은 뒤에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장성하자 그 딸이 “우리 아버지가 장가들어 꼭 하룻밤만 자고 돌아가셨으니, 필시 이 아이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하고 주장하면서 재산 다투기를 했는데, 수년이 넘도록 판결을 보지 못하였다. “내 일찍이 들으니 늙은이의 아이는 그림자가 없고 추위를 참지 못한다고 하더라.” 드디어 병길이 판결을 시작한 것이었다. 때마침 늦은 가을, 같은 나이의 아이를 데려와서 둘 다 옷을 벗겨서 시험하니 늙은이의 아이만이 춥다고 소리쳤다. 그뿐 아니라 정오인데도 과연 그림자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길은 아이가 진정 90 노인의 아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살피건대, 그림자는 형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즉, 형상 있는 물건에 어찌 그림자가 없을 것인가? 단지 정오가 되어 해가 하늘 가운데에 있어서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었고, 병길이 그 점을 이용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만일 이것을 참으로 믿고 법으로 삼아 송사를 판결하려 한다면, 반드시 남의 부자간의 윤리를 그르치게 될 것이다.) (명나라 남창의 수령 축한(祝瀚)은 청렴하고 유능하기로 이름났다. 관청에 학(鶴)이 있었는데 민가의 개에게 물려 죽었다. 관의 하인이 와서 송사하는데, 학의 금패(金牌)가 있어 내어 보였으니 그것은 임금이 하사하신 거였다. 드디어 축한이 판결하여 일렀다. “학이 금패를 찼으나 개는 글자를 모르고, 새와 짐승이 서로 싸우다 살상하였는데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리고 피소된 민가의 사람을 놓아주었다. 또 한번은 두 집의 소가 싸우다가 한 집의 소가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 송사는 이렇게 판결하였다. “두 소가 서로 다투다가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았으니, 죽은 소는 함께 삶아 먹고 산 소는 공동으로 밭을 갈게 하라.”) |
| 공전 | 여기의 주제는 ‘이용후생’이며, 직접 국가가 쓰는 재물에 대한 이해가 달려 있다. 그러므로 특히 지방의 수령이 된 자는 이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여 유실이나 훼손이 없어야 함은 물론, 모든 영역에 있어 흥왕을 기할 것을 강조하면서 역대 제현들이 실지 시행했던 여러 가지 실례와 법전 등을 인용하여 거울로 삼아 본받을만한 모범으로 삼게 하였다. ①산과 숲. ②수리 사업. ③관아 건물 보수. ④성을 쌓고 보수함. ⑤도로. ⑥공산품 제작. (검토하건대, 성 위에 나지막한 담장을 치는 제도는 다만 산의 형세에 따라 굴곡을 두어가며 쌓기를 하면 된다. 그러나 비록 화살 하나만큼의 작은 성일지라도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구조물로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인 치성(수원 화성엔 치성이 여덟이 있다. →①북동치 : 바깥 둘레 20보. ②서1치 : 바깥 둘레 16보 1척. ③서2치 : 바깥 둘레 14보 5척. ④서3치 : 바깥 둘레 14보 4척. ⑤남치 : 바깥 둘레 14보 2척. ⑥동3치 : 바깥 둘레 17보. ⑦동2치 : 바깥 둘레 16보. ⑧동1치 : 바깥 둘레 17보.)이 없으면 성이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은 도대체 치성이 없다. 다만 성 위의 성가퀴에 약간의 발포 구멍만을 뚫었을 뿐이니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적이 성에 착 달라붙어서 성곽의 돌을 후벼 파낸다면, 비록 굴러내리는 돌이 폭포수 같더라도 다 적의 등 위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화살이겠는가? 문의 좌우에는 반드시 성문을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아 성문 밖에 작은 성인 옹성을 대신하게 하고, 문이 없는 쪽에도 또한 굽은 치성을 설치하고 양쪽의 치성 사이는 50~60보에 지나지 않게 하여 화살과 탄환이 서로 미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한 뒤라야 성에 붙은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돌 채취하는 방법은 반드시 돌 전체가 표면에 노출된 뒤라야 비로소 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까닭에 모든 축성 공사, 축대 공사를 하는 사람은 10리 밖에서 돌을 채취하는 일이 많다. 돌이란 것은 산의 골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산엔들 돌이 없을 것이며, 어느 돌인들 성을 쌓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제자리에서 산을 벗겨 돌을 채취할 것이요, 반드시 험난한 길을 수고스럽게 멀리 찾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조 임금 때 화성(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 화성)에 성을 쌓는 공사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다른 지역의 산에서 돌을 찾았다. 그러다 주상의 지혜와 예감이 밝아 마침내 앵봉을 벗기니 온 산이 다 돌이었다. 그래서 성을 쌓고도 많은 여유가 있었다. 이것으로써 증험할 수 있다. 그중에 혹 먼 곳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마땅히 기중소가(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의 작은 것. 기중기)를 만들어 돌을 쉽게 들어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 유형소거(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기구의 작은 것)를 만들어 돌의 수송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 진황 | 수령으로서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호할 때 필요한 정책을 적은 내용이다. 수령이 흉년의 대책으로 양곡 등 모든 자료를 예비하는 일에서부터 실제로 구호를 시행하는 일, 진휼 행사를 마친 후의 사무 처리에 이르기까지의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①구호물자 준비. ②재해 의연의 권장. ③세부 계획. ④계획하여 베풂. ⑤흉년의 인력 보조. ⑥진휼을 완료함. (이런 흉년을 당하면 우리 백성들은 애타게 먹을 것을 기다린다. 혹 누구한테는 먹을 게 있나 싶어 서로 원망스레 흘겨보기 마련이다. 갈고 닦은 기술이나 재주를 생업으로 하는 자는 그 재주를 쓸 곳이 없고 생업을 경영하는 자는 물건을 팔 곳이 없으며, 전당을 잡히려 해도 부잣집에 돈이 없고 꾸어 주려 해도 부잣집조차 재력이 없다. 새우ㆍ소라ㆍ조개 등도 다 잡아먹어서 씨가 말랐고, 나무껍질과 풀뿌리도 다 깎아 먹고 캐어 먹었다. 부황난 얼굴에 귀신같은 몰골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서 이리저리 헤매면서 부르짖고, 병든 몸을 억지로 참고 쇠약한 몸을 이끌고 굶주려 텅 빈 배로 신음만 하니, 숨이 끊어지게 되어 아침에 저녁까지 살아있을지를 기약하지 못한다. 그렇게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한 사경에 이르렀는데, 그 어찌 남의 윗사람이 된 이로써 차마 그 봉양을 홀로 누리겠는가. 비록 누리고자 해도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수령이 관에 있음이 마치 여관살이와 같다. 그래서 어떤 수령은 그 녹봉에서 남는 돈을 반드시 급급히 서울로 실어 보내려고 집에 드나드는 손님에게 맡기는데, 돌아가서 이것을 찾아보면 십중팔구 온전히 있는 것이 드물다. 차라리 관에 있을 때 곡식을 사들여서 흉년에 대비했더라면 좋은 소리나 듣지. 풍년이 들면 이웃 고을에 팔아서 백성의 부역을 돕고 흉년이 들면 주린 백성에게 싼값으로 팔아서 기민 구제의 밑천으로 도와주었더라면, 그 본전은 반드시 없어질 리가 없다. 공과 사가 고루 편리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으랴?) (『맹자』에 이런 대목이 있다. “풍년엔 쌀이 함부로 흐트러져 개돼지가 사람 먹을 양식을 먹어도 단속할 줄을 모르고, 흉년엔 길에 굶어 죽은 자가 널브러져 있어도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할 줄 모른다.”라고 했다. 이는 풍년에 예비하지 않고 흉년에 진휼하지 않으면 그 죄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임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예비란 나라에서 항상 힘써야 할 임무요, 예비가 없음은 정치가 없는 나라이다.)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는 식구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골고루 나누어야 할 것이지, 민가 등급의 높고 낮음을 가지고 차별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권분’이란 모두 거저 주는 것이다. 권하여 나누어준다며 거저 주게는 하는데, 그게 백성에게는 주지도 않고 관에다 거저 바치게 한다. 그래서 명령이 있어도 행해지지 않고, 용도 또한 분명하지 않기 마련이다. 중국의 법에서 부자에게 권분하는 법은 조미(糶米)와 사미(賖米) 두 가지에 불과하다. ‘조미’란 그 값을 헐하게 정하여 굶주린 백성에게 팔도록 하는 것이요, ‘사미’란 이자를 받기로 약속하고 굶주린 백성에게 빌려주도록 하는 것이다. 관장이 이렇게 권하는데도 따르지 않는 백성이 있다면 비록 독려하고 위협한대도 잘못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법은 매우 부조리하다. 부자에게 거저 바치게 하고선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한 형벌과 세찬 매로 마치 도둑을 다스리듯 한다. 한번 흉년을 만나면 부자들이 먼저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러므로 남쪽 지방 백성들 사이에 이런 말이 나돈다.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고 부자가 가난뱅이만 못하다.” 이는 포학한 정치 중에서도 큰 것이니, 수령된 자는 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 |
| 해관 | 수령이 관직에서 해임될 때 필요한 사항을 적은 내용이다. 수령이 임지에서 해임ㆍ전직 되었을 때 처해야 할 자세와 임지에서 죽거나 임지를 떠나 온 뒤에 백성이 그 덕을 사모하는 일 등을 논하고 있다. ①수령 교체. ②돌아갈 차비. ③수령의 유임을 청원함, ④수령을 용서해달라는 청원. ⑤수령의 죽음을 슬퍼함. ⑥좋은 수령은 사후에도 사랑을 남김. (대개 미미한 한 관원의 자리인데도 체임되거나 파면되는 일이 너무나 많으니, 어떻게 관직을 믿을 수 있겠는가?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벼슬살이는 머슴살이다.” 아침에 승진하였다가 저녁에 파면될 수 있을 만큼 믿을 수 없는 자리가 벼슬살이라는 거다.) (『다산필담』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영암 군수가 되었는데, 부엌 담당 아전의 돈 수백 냥을 빚지고는 갚지 않은 채 갔다. 그 아전이 나주까지 따라가서 호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아전이 이에 앞질러 수레 허리 앞에 가 엎드려서 신주(神主)에 고하기를, ‘신주 대감 잡수신 것을 관장님께서 갚지 않고 가십니다. 빌건대 명령을 내리시어 곧 갚아주게 하소서.’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따라서 장성(長城)까지 가니, 그 수령이 할 수 없이 갚아주고 갔다.”) (『다산필담』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해남현 북쪽 30리에 바위벽이 관리의 길이다. 늘 탐욕스러운 관리가 돌아갈 때는 아전과 백성이 바위벽 위에서 몸을 숨기고 내려다보며 그 죄를 들추어내어 꾸짖는다. 관리의 길을 호위하는 자는 혹 그 소리를 들으면 일이 날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이곳쯤에 이르러서는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이 바위의 이름을 ‘괴로워서 달리는 바위’ 즉 질치암(疾馳巖)이라고 한다.”) (고려 문신 하윤원(河允源)이 원주 목사로 있으면서 인자한 정사를 펼쳤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는데, 치악산의 승려 운감(云鑑)이 시를 지어 보내왔다. 아이가 어미 곁에 있을 땐 / 사랑받는 줄을 모르더니/ 어미가 가니 아이는 우는구나/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파서일걸// |
아무튼,
내년 3월엔 나오기를 희망하는 이 책은, 현대의 정치인은 물론이고 일반 공무원, 또는 공무원 지망생 모두에게 지침서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세계에 이름난 ‘수원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 그의 불후의 명작이 아닐 수 없는 거죠. 소설 목민심서가 아니라, 진정한 목민심서, 이 전집은 아마도 100년 200년, 아니 대한민국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우리의 긍지로 살아있을 거라 믿습니다. 소장용 도서가 아니라, 애독하는 일반교양 도서로서 말이지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거라고, 정말 그래야 한다고, 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자기 위안을 하며 사는 이 세상의 현대인으로선 자꾸만 어깃장을 놓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 ‘선비, 농민, 공인, 상인 순으로 직업에 귀천이 있다.’라는 원칙과‘양반은 하늘이 내렸고, 노비는 대대손손 종으로 살게 되어있다’는 신분 차별의 엄격한 노선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낮은 신분 일반 백성의 비참하고 억울한 생활상을 낱낱이 파헤쳐 고발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있어야만 나라가 돌아가는데, 백성을 개돼지 취급하면 안 되지 않으냐고. 그러면 결국 나라가 망하지 않느냐”라고.